대구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동료 기자는 일곱 살 때
아버지 손잡고 처음 구경 간 서문시장을 '내 유년기 로망'이라고 했다.
1960년대 시골소년 눈에 비친 서문시장은 눈이 핑 돌 만큼 왁자였다.
없는 게 없는 요지경이었다.
싸우듯 흥정하는 포목상은 난생 처음 본 큰 세상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사서 입혀준 바지와 스웨터, 점퍼는 색깔과 모양까지도 지금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마산서 시작한 첫 사업이 실패하자 스물여덜 이병철은 만주와 중국을 여행한 뒤 작심하고 대구로 갔다.
1938년 3월 1일 서문시장 골목 한쪽 목조 건물에 '주식회사 삼성상회' 간판을 걸었다.
대구 근교 청과물과 포항 일대 건어물을 사들여 중국과 만주에 팔았다.
지본금 3만원으로 시작한 그곳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 삼성그룹 모체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됐다.
감영 서쪽 문밖으로 시장이 옮겨가면서 서문시장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 평양장, 강경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포목과 생필품, 농축수산물이 사통팔달 뚫린 길로 오갔다.
대구, 경북 지역 3.1독립운동도 군중 많은 서문시장 장날에 시장 입구에서 시작됐다.
1919년 3월 8일 이만집과 김태련이 장터 모인 군중을 향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학교, 교남학교 학생들과 상인들이 행진했다.
혼수 장만하는 대구 사람은 한복이며, 예단 이불 맞추러 서문시장에 들른다.
섬유 도시 대구답게 전국적으로 유명한 원단 시장이다.
대구 사람들한테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일상의 일부다.
정치인들이 대구 민심 잡자고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도 서문시장이다.
작년에 부산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 '국제시장'이 히트하자 우등기 대구교육감이 '국제시장에서 아버지가 가정과
나라를 바꿨는데 서문 시장에서 어머니가 가정과 세상을 바꾸는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2만 상인의 생활 터전인 서문시장은 한때 위상이 예전만 못했다.
주차장 만들고 건물도 단장해 재래시장 정비하니 전국 각지에서 젊은이들까지 몰려와 주말이면 10만명이 북적인다.
누른국수며, 납작만두며 서문시정 야시장 먹거리 탐방은 대구 관광 필수 코스가 됐다.
제2의 전성기가 왔나 싶었는데 11년전 큰불 났던 그곳에 다시 火魔가 덮쳤다.
정국까지 뒤숭숭해 무너진 잿더미를 바라보는 시장 상인들과 대구시민들 가슴속도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 심정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강경희 논설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