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성 토마스 사도 축일) 지복직관(至福直觀)
토마스 사도는 강직하고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거 같다. 예수님이 당신을 해치려고 하였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말리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다. 사도가 그렇게 강직한 건 그가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인 거 같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다 기뻐하는데 사도 혼자만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난단 말인가. 스승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는 능력이 가지셨지만 그분의 죽음과 함께 그 능력도 없어졌는데 누가 스승을 살려낸단 말인가. 세상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고 기뻐해도 그는 믿지 않았을 거다.
마지막 만찬이 된 자리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한목소리로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마태 26,35) 바로 그날 밤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다. 토마스와 다른 제자들은 그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스승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스승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허언이었을까. 예수님이 반대 세력에 맞서 싸우시거나 식민 지배에서 독립운동하셨다면 그도 그분을 따랐을 거다. 스승과 함께 고난을 받고 전쟁터에서 영예롭게 죽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과 그 엄청난 능력을 버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하느님도 그러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세 차례나 예고하셨다. 그 충격적인 말씀을 제자들이 잊어버렸을 리 없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못했거나 다른 뜻으로 알아들었을 거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기뻐했는데 토마스 사도는 아니었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라는 말은 의심이라기보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들린다. ‘나도 믿고 싶고 나도 너희처럼 기뻐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믿지 못해 그렇게 고통받는 그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그런데 그가 동료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하셨다. 자신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그 자리에 보이지 않게 그들 가운데 계셨나 보다. 주님이 투명 인간처럼 그 옆에서 그를 감시하셨단 말인가? 그건 너무 무서운 말이다. 우리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만일 그분이 감시자였다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그 위대한 고백은 불신하고 의심한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간청이 될 거다. 그것은 그의 간절한 바람을 아신다는 뜻이다. 나도 믿고 싶고 나도 기뻐하고 싶다는 그 바람이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니 믿는 거다. 체념이 아니라 신뢰다. 하느님을 직접 봬서 지극히 행복한 상태를 지복직관이라고 한다. 그것이 천국의 행복한 상태이다. 하느님을 지금처럼 눈으로 뵙는다는 뜻은 아닐 거다. 내 믿음이 완성되고 또는 더 이상 믿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이르는 게 아닐까. 눈에서는 멀어져도 마음은 여전하고, 아니 더 간절해지는 그런 거 말이다. 확인할 필요 없는 마음 같은 거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이라고 하는 걸 거다. 사랑은 변하면 안 되니까. 변하지 않는 분은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 설령 제가 바란다고 해도 제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놀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제 믿음이 작아지고 없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에서 배경이 되는 황금색 다음으로 강렬한 색이 어머니 겉옷 색, 모든 햇빛을 흡수해서 어두운 깊은 바다색입니다. 그래서 그 안은 녹색, 하느님 은총의 색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을 저에게 전해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