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광야에 있는가? 아니면 가나안에 있는가?)
영적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포인터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존재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의 상태와 관련된 것입니다.
존재는; 나의 영원한 정체성과 관련된 것인데, 자신의 신분이 아들이며,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입니다.
실존의 상태는; 자신의 삶의 노정 가운데서, 지금 나의 상태를 바르게 인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착각 가운데 있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준이 되며, 말씀을 따라 나의 현 위치가 광야인지, 아니면 가나안에 있는지 스스로 검정해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광야 상태와 가나안에서 사는 것의 몇 가지 뚜렷한 차이점을 성경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라암셋→모압 평지(광야) vs 요단 이후(가나안)의 영적 의미 차이
A. 광야: “구원받은 백성의 훈련장”
광야는 “애굽에서 건져냈지만(구원) 아직 애굽이 마음에서 다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를 드러내고 다루는 장으로 특징됩니다. 인도자는 모세이며, 먹는 것은 ‘만나’이며, 건넌 곳은 ‘홍해’이며, 출발점은 ‘유월절’입니다.
- 정체성 재형성: 노예 정체성 → 언약 백성 정체성(시내산: 율법/성막/예배)
- 의존 훈련: 만나, 물, 구름 기둥과 불기둥 → “오늘의 은혜로 살도록” 훈련
- 내면의 노출: 불평, 불만, 두려움, 탐욕과 우상숭배(금송아지) 같은 “옛사람”이 표면화되어 나타나고, 그것으로 인해 징계를 받고, 우리의 옛 본성을 상징하는 1세대가 믿음을 보인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전부 죽음
광야는 우리의 육에 속한 본성을 다루고 제거하는 시험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관점에서는 율법의 시기이며, 몽학 선생 아래에서 이끌림을 받아야 하는 자유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며, 영적 성숙의 정도로 보면 아직 장성하지 못하여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광야는 “구원의 시작 이후, 자아/육의 패턴이 해체되고 마음이 새 질서로 재배치되는 구간”에 있으며, 정죄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훈련과 치유를 받는 단계로 영적 싸움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뒤 광야 생활의 과정을 보면:
- 홍해의 경우 백성들이 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풍을 불어 홍해를 갈라놓은 땅을 지나갔을 뿐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침례라고 합니다. 비록, 사망의 물을 통과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은혜로 누린 것일 뿐입니다.
- 홍해를 건너자, 감격에 겨워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춥니다. 그러나 금방 마라에 이르자 마시는 물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다스릴 줄 모릅니다. 반응이 즉각적입니다.
- 또 먹는 것을 가지고 불평 불만하며 오히려 애굽의 때를 그리워합니다. 그러자 만나(이것이 무엇이냐? What is it)를 주고,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십니다.
-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합니다.
- 고라 일당이 배역합니다.
-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을 때 지도자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손에 잡히고, 주머니가 두둑하고, 눈에 보여야 만족하는 본성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 광야 생활 동안 싸움이라 해봐야 ‘아말렉’(육신을 상징)과의 싸움이 있는데, 그것도 직접 싸운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는 그런 싸움이었고, 민수기 21장에 아랏 왕과 아모리 시혼 왕,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의 길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으나, 여호와의 은혜로 가볍게 물리칩니다. 광야 생활 동안은 각자의 본격적 영적 싸움이라고는 없습니다.
-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더위를 막아주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막아주며, 부족함 없이 먹게 하고, 신발이 닳지 않도록 했음에도 식물로 인하여 불평불만을 하여, 불 뱀들에게 물립니다.
-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정탐을 간 자들은 믿음이 없는 보고를 하여 40년간을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 모압에서는 그 땅 여자들에게 미혹되어 음행하고 이방 신에게 절하여 염병으로 인해 이만 사천 명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이 광야의 상태에 있는 특성은 먹고, 마시는 것에 관심하고, 모든 상황에 대해 핑계를 대고 불평불만 하며, 시기 질투하고, 비방하고, 배역하며, 음행하는 차원의 삶 전형적인 육신의 삶을 사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B. 가나안: “성취의 땅이자 전쟁의 현장”
인도자가 모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여호수아로 바뀌어, 구원의 방향인 동편에서 서편으로 요단을 건넌 뒤에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광야가 “결핍 속 신뢰 훈련”이라면, 가나안은 “약속을 실제로 누리되, 그 누림을 방해하는 것들과 맞서는 삶”입니다.
- 상속(기업의 분배; 땅)과 정착: 약속이 ‘개념’에서 ‘삶의 영역’으로 들어옴
- 거룩한 전쟁: 외부의 적만이 아니라, “땅 안에 남아 있는 것들”(여리고 성, 아이성 그리고 가나안 일곱 족속과 이방 족속들; 일곱은 꼭 일곱 족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모든 적 그리스도적인 요소와의 지속적 충돌
- 분배와 경계 설정: 지파별 기업 분배는 영적으로 삶의 영역들(예를 들면, 관계, 돈, 시간, 몸, 말과 같은 것들)의 성별(聖別)”을 의미합니다.
- 성전과 왕국으로의 진행: 광야-성막에서, 땅-성전(솔로몬)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한 단계 확장된 형태로 나타나며, 사울 왕을 넘어, 참 왕의 모형인 다윗 왕국으로 나아가서야 어느 정도 일단락됩니다.
- 내면적으로 보면,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정체성과 은혜를 실제 삶의 영토로 확장해 ‘살아내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 확장은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2) 요단을 건넘은 홍해를 건너는 것과 영적 의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물의 경계”를 통과하지만, 홍해는 해방/구출(출애굽)에 초점이 있으며, 광야로의 영적 과정의 진입을 의미하지만, 요단은 ‘벗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약속 안으로 ‘진입하는’ 사건이며, 스스로 요단에 발을 디디는 믿음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즉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12절) 싸움이 진행되는 곳입니다. 혈과 육에 대한 씨름은 광야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상태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날마다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이것이 뭐지’ 했다면, 이제 가나안에서는 땅(그리스도)에서 경작한 소출 곧 ‘테부아’를 먹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소출 곧 양식(알토스)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광야에서는 남이 먹여주는 것을 받아먹었다면, 이제 가나안에서는 각자의 분깃을 따라 경작한 말씀을 가져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즉 함께 하나님이 주신 빛을 따라 얻은 말씀을 지체들과 나누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광야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종의 삶이라면, 가나안은 자유자의 삶입니다. 진리가 열리는 것만큼 더 큰 자유를 누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열리는 만큼, 사단의 공격은 더 많고 치밀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이길 때, 한 걸음 더 영역과 누림이 확장됩니다. 계시록은 그 영적 싸움을 그림처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싸움을 통과해 갈수록 우리의 혼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결국(테로스; 종결)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서로 나누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나안에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애굽(세상) → 광야의 방황(육신의 소욕과의 싸움) → 가나안(영적 전쟁/에베소서, 계시록) → 다윗 왕국(승리와 통치; 계시록의 이기는 자) → 새 하늘과 새 땅
죽어서 요단강 건너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요단강을 건너야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