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전 10시 30분에 '청량리역'에서 대학교 과 친구들을 만났다.
'모닝커피'를 마신 다음 11시 발 KTX를 타고 원주로 갔다.
원래는 9명이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긴급한 용무가 생겨 3명이 출발하지 못했다.
일부 은퇴한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바쁜 나이다.
몹시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주에서 승합차를 렌트했다.
맨 먼저 한 일은 '원주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일이었다.
우리들 M.T의 전통이었다.
부모님께 드릴 용돈은 깨끗한 봉투에 넣어 미리 준비한 상태였지만 연로하신 분들께서 대체적으로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빵과 케익을 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파바에 잠시 들렀다.
친구의 고향집에 도착했다.
'구순'을 목전에 두고 계신 연세, 두 분은 고령이셨다.
그래도 부모님은 연세에 비해 건강한 편이셨다.
안방에서 우리는 설날에 어르신들께 세배하듯이 큰절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큰절을 드리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릿해 왔다.
대학에서 만난 과 친구들.
출신 지역도, 생김새도, 성격도, 기호도 달랐다.
현역으로 입학한 자, 재수나 삼수를 한 자, 군필하고 입학한 자 등등 나이도 모두 달랐다.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지원하여 '해병대'에 다녀왔다.
그리고 2학년부터 졸업시까지 내리 6학기 동안 '과대표'를 역임했다.
졸업 후에도 현재까지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어느새 40여 년이 훌쩍 흘렀다.
내가 회장으로서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는 적극적인 '동참'과 '화합'이었다.
그리고 3살 이내는 친구처럼 지내자고 하여 모두가 격의 없이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
친구 사이에 나이와 호칭이 대수일 순 없었다.
매년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한 번 친구들의 고향으로 M.T를 갔다.
그 횟수도 꽤 많았다.
각 고향에 가면 첫번째로 하는 일은 '부모님께 인사 드리기'였다.
의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자식된 도리일 테니까.
금년 상반기에도 내 고향 '군산'으로 M.T를 다녀왔지만 내 부모님이 안 계셔서 큰절을 드리지 못했다.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우리 친구들 중에 어디 나 뿐이겠는가?
이미 많은 친구들이 양친을 보내드렸고 고아로 남았다.
나이 육십에 고아란 단어를 들먹이자니 웃프지만 그래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부모님은 유달리 체구가 작으셨다.
나뭇잎이 무성했던 과거엔 풍채도 좋으셨단다.
허나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채로 계절의 끝자락을 지나고 계신 듯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점점 자연을 닮아 가고 계셨다.
조용히 어머님의 손을 잡았다.
까실까실한 작은 손이었지만 여전히 따뜻했고 정겨웠다.
주말에 서울에서 아들 친구들이 온다는 기별을 진작에 받았노라고 하셨다.
그래서 간식을 준비하고 계셨다.
밥상에 과일과 전병 그리고 손수 쑤신 '도토리묵'을 내오셨다.
우리는 인사만 드리고 갈 요량이었으나 부모님은 한사코 "그러면 못쓴다"고 하셨다.
우리가 생각해도 그건 예의가 아닌 듯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
친구들의 젓가락이 대부분 '도토리묵'에 집중되었다.
연속 세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정말로 기막힌 맛이었다.
약 40여 분간 부모님을 뵙고 떠나려 할 때 아버지께서 "줄 것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창고문을 여시고 모든 아들들에게 '햅쌀'을 선물로 주셨다.
이미 두꺼운 종이 박스로 포장까지 해두신 상태였다.
"아이고 이를 어찌할꼬?"
작은 선물을 드리러 왔다가 되레 큰 선물을 받아가는 꼴이었다.
한 박스에 4킬로그램의 햅쌀이 들어 있었다.
묵직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손수 농사를 지으셨는데 그 첫 소출을 자식들에게 나눠주셨던 거였다.
그 깊은 정과 사랑을 필설로 세세하게 표현할 길은 없으나 헤어질 때까지 연방 저릿한 뭔가가 내 등줄기를 타고 하염없이 흘렀다.
그건 사실이었다.
이제는 작아질 대로 작아져 버린 부모님의 육신.
작고 앙상한 노구였지만 여전히 푸근했다.
승합차에 오르기 전에 단체사진을 한 장 남겼다.
꼭 그리 하고 싶었다.
앞으로 언제 쯤이나 다시 뵐 수 있을까?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
렌터카를 운전했던 나도, 햅쌀 박스를 만지작거렸던 친구들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량 내엔 잠시나마 정적이 흘렀다.
'이심전심'이었다.
'생자필멸'이라 이 땅의 수많은 부모님들이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가시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까지는 모두 평안하시고 행복하시길 다시 한번 기도드렸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햅쌀로 밥을 지었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꼬들꼬들 맛이 좋았다.
이것이 바로 햅쌀의 힘이었고 부모님의 땀이었다.
그리고 정성어린 농심 덕분이라 생각했다.
진심어린 감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첫댓글 너무도 멋진 발걸음이시네요.
정말 아름다운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