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로생활을 회상하며 죄를 자복하다
느 9:30-38
30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33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34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35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36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37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38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느 9:30-38 / 그렇더라도 주께서는 여러 해 동안 더 참으시면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직접 부어 주어 가르치시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보내 깨우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을 강대국들의 포학한 손에 넘기셨습니다. 31) 그러나 주님은 사랑이 크셔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완전히 멸절시키거나 영영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토록 용서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32)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주님은 그토록 위대하시고 그토록 권능이 많으시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의 후손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변함없이 그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당한 고난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주소서. 우리의 왕들과 대신들, 우리의 제사장들과 우리의 예언자들, 우리의 조상들과 주님의 온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온갖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33)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고난을 당하였어도 주님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께 반항하고 죄를 지을 때에도 오히려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34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왕들과 대신들도 죄인이요, 우리의 제사장들과 조상들도 주님의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가르치심을 기쁘게 듣지 않았고, 우리를 책망하는 주님의 경고를 언제나 헛듣고 살았습니다. 35) 주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좋은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넓고 비옥한 땅을 주시고 온갖 복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섬기지 않았고 악행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지도 아니하였습니다. 36)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세를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노예 신세가 아닙니까! 우리 조상들에게 주시며 그 좋은 열매와 소산을 먹으며 살게 하셨던 바로 그 땅에서 지금 우리들이 노예 신세가 되어 있습니다! 37) 이 땅의 많은 산물도 강대국의 왕들이 거두어 갑니다. 주께서 우리를 강대국의 왕들에게 넘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몸도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의 가축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강대국의 왕들이 마음대로 우리를 부리고 처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토록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38) [율법을 지키기로 서명하다]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지어 온 죄악을 깨달아 고백한 다음, 새로운 생활 규칙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그 조항을 모두 문서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그 문서에 서명하여 확정하였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되는 범죄와 불순종으로 징계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30-3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와 불순종을 반복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백성을 향하여 열방을 들어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의 완악함을 꺾으시고 죄를 깨닫게 하여 주님 안에 있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조치였습니다. 이처럼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랑의 도구입니다.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열왕 시대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보여줍니다(30).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 동안에도 여전히 그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33-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이라고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징계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주의 명령과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도 징계의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신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형벌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에서 종으로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36).
징계하시는 하나님(37-38)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징계,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반복되는 가운데 그들은 모두 모여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여러 해 동안 용서와 벌을 반복하면서도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반복되어지는 하나님의 징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방 왕들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 요시야 왕 때 말씀에 대한 언약을 세웠던 것을 기억하고(왕하 23:3),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여’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다짐합니다.
적용: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만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공의로우심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실수를 부끄러워하면 그것이 죄가 된다. -공자. 과정의 실패는 결과의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에 맞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실패는 또 다른 실패가 되기도 하고 성공이 되기도 합니다. 과정의 실패에서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면 결국 결과의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과정의 실패를 감당할 용기를 가지고 당당히 맞선다면 성공의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문제가 사라지고 평안을 찾았을 때, 하나님을 잊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지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신이 되기를 결단해 봅니다.
< 설 교 >
긍휼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느 9:31 / 강성찬목사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다합니다. 신발을 훔쳐 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합니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다 합니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다합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선생님은 신발을 훔친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발을 훔친 것은 나쁜 일이요 돌려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요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품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특별히 신뢰하던 신복 중 하나인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사람은 당시 제2차 대전을 치를 때, 독일 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독일의 모든 공장을 100% 가동시키는데 천재적인 지혜를 발휘했던 공학자였다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범 24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슈페르도 있었다 합니다. 다른 전범들은 모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죄를 부인했는데 유일하게 슈페르만이 자신의 죄를 법정에서 인정하여 20년 형을 언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형을 살고 나오자마자 여러 권을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유명 인사가 되었다합니다. 그런데 또 한 권의 책을 쓴 직후, 미국 ABC 방송 기자가 그와 함께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다합니다. 기자가 질문했다합니다. 슈페르 씨, 당신이 초창기에 쓴 책을 보면, 나의 죄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 있던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까? 슈페르가 아주 슬픈 기색을 띠며 대답했다합니다. 나는 내 죄 값을 치르느라고 20년 형무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값을 다 치르고 석방이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범한 죄는 절대 용서 받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2차 대전 때, 희생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가 형무소에서 나오고 나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범죄를 철저하게 책임지려고 노력했고 처절하게 참회의 길을 찾고 있었지만, 죄책감에서 자유 할 수는 없었다합니다. 자신 힘으로는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결국 무섭고 잔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인터뷰를 끝내고 몇 일 지나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죄를 범한 후 양심에 남아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죄 문제를 내 스스로 처리하고 그것이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도 자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나에게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이웃에게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께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죄 문제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열방 사람을 통하여 심판을 내리시면서도 긍휼을 베푸시어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광대하시고 능하심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중에도 완전히 멸하지 아니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그들과 맺으신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복 주시어 구원과 복을 베푸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고백하는데 많은 사실들을 순서대로 하나님께 아뢰며 부르시고 더 나은 나라에 대한 모형으로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긍휼을 말합니다.(느 9:7-8)
하이든의 96번 교향곡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그의 연주회의 청중들은 하이든이 연주를 끝냈을 때 홀린 듯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천정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떨어져 박살이 났으나 객석은 비어 있어 다친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기적이다"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하이든의 피아노소리보다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오늘도 구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생은 저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르심의 은총을 거역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인간을 유혹하여 멸망에 떨어뜨리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또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하나님의 선하신 복을 잃지 않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아도 그때 그 당장에는 견디기 힘들어 불평도 하고, 너무 억울하여 좌절하고 낙심도 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고, 감사할 일로 바뀌어진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생활은 언제나 만사형통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임을 이 시간 확신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며 언약의 성취를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조지의 할머니는 조지에게 우표 책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주시지 않았다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와서 조지의 물건을 볼 때마다 조지는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책을 주셨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어머니는 이상해서 그에게 물었다합니다. "조지야, 넌 할머니에게 우표 책을 받지도 않았는데 왜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니?" 그는 대답했다합니다. "엄마, 할머니가 이미 약속하셨는걸요. 그건 제가 이미 받은 거나 같다고요."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우표 책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합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합니다. "조지야, 할머니가 이미 그 약속을 잊어버리신 것 같구나." 조지는 즉시 대답했다합니다. "아니에요 엄마. 잊어버리실 리 없어요. 그리고 엄마, 나 지금 할머니께 감사의 편지를 쓰면 어떨까요?" 오래지 않아 답장이 왔다합니다. "사랑하는 조지야, 나는 네게 주기로 약속했던 우표 책을 잊지 않았단다. 네가 원하는 모양의 우표 책을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뉴욕에 우편 주문을 했단다. 그러나 보내온 것이 너무 오래돼서 다시 시카고에 우편 주문을 했다. 너를 사랑하는 할머니." 조지는 편지를 다 읽고 승리에 찬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합니다. "엄마, 제가 말했죠? 할머니가 약속한 것은 제가 이미 받은 것과 같다고요."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의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우표 책을 받으리라고 깊이 믿은 것은 할머니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고 오래지 않아 믿음은 사실이 된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욱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긍휼을 말합니다.
1788년 메사추세스에서 출생한 아도니람 저드슨은 목사님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명석하였습니다. 미국의 명문 브라운 대학에 다닐 때 회의론자 친구 제이콥 에임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훨씬 이성적이고 지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졸업한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아도니람은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집을 떠나 뉴욕으로 갑니다. 뉴욕에 가서 연극 각본을 쓰면 명예와 돈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뉴욕에서 행운은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후 집만 빼고 어디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서쪽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자 한 모텔에 들게 되었습니다. 방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텔 주인이 대답합니다. “방이 하나 있지만 옆방 손님이 너무 아파서 죽을지 모릅니다.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다면 그 방을 쓰세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 방에서 잠을 청하였는데 옆방의 신음 소리가 무척 처절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카운터에 갔을 때 그 옆방 사람이 밤새 고통하다가 운명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자기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제이콥 에임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으로 말을 잃었습니다. 아도니람은 인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던 제이콥의 영혼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쓸쓸히 죽어 떠난 친구의 영혼은 과연 없어지고 마는 것인가? 집으로 돌아온 아도니람은 깊은 묵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연구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큰 평안을 느끼면서 그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하였습니다. 큰 교회의 초청을 마다하고 결혼한 지 12일 만에 신부와 함께 지금의 미얀마인 버마로 떠났습니다.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던 버마에서 그는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1년, 2년이 지나 5년이 지나도록 열심히 전도하였지만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6년 만에 첫 결신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영국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파이로 오인되어 21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람은 끝까지 미얀마를 사랑하며 헌신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점점 커져 갔고, 62세의 나이로 죽던 해 아도니람은 미얀마어로 된 성경과 미야마-영어 사전을 남겼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사망 100주년 기념일에 미얀마에서 선교대회가 열렸을 때 그 불교의 땅에 그리스도인이 21만 명이 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미얀마 전인구의 2%에 가까운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건지시고 구원하시어 인도하심이 함께하신 줄믿습니다.
연단을 통한 긍휼을 허락하십니다.
영국의 조지 왕은 형인 앨버트 빅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급히 왕위를 이어받은 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막중한 책임감과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긴장된 생활에서 오는 불안으로 몹시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작은 소도시의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도자기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는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도자기 공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도자기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방으로 안내된 그는 잘 만들어진 도자기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두 개의 꽃병이 특별히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두 개의 꽃병은 같은 원료와 같은 타일을 사용하였고, 무늬까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는 예술품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비해, 다른 하나는 투박하고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공장장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여기에 저렇듯 서로 다른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두는 것이오?” 왕의 물음에 공장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합니다. 저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이곳에 전시해 둔 것은 그런 뜻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연단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줄 믿습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가르치시고 구원하신 긍휼을 말합니다.(느 9:13 느 9:20 느 9:27-29)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살란터 랍비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유월절 무교병을 굽는 법칙에 따라 무교병을 구워야 합니다. 생수로 반죽해야 하고 이방인들이 보면 부정 타기 때문에 몰래 구워야 합니다. 또 다른 것이 섞이면 안됩니다. 불은 반드시 나무로 피워야 합니다. 살란터 랍비의 임무는 제대로 무교병을 굽는지 감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그는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감독관을 세워야 했습니다. 감독으로 선정된 제자들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랍비님, 감독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살란터 랍비가 병석에서 말했습니다. “제자들아, 무교병을 굽는 여인들에게 보수가 제대로 지급되는지 감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질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여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감독이었습니다. 사랑이 율법입니다. 십계명도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에 대하여 말슴 합니다. /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
친히 내려오셔서 저희와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신 4: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신 4: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이 반역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들 위에 쌓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이해 구속 역사를 하실 준비를 하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오래 전 선교사 한분이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하다 어느 곳에 가보니 어떤 부인이 맨 손으로 10년 동안 우물을 파서 깊이 25자 넓이 10자의 큰 우물을 만들고 있었다합니다. 선교사 "왜 맨손으로 우물을 파느냐?" 고 묻자 부인은 "저는 명예도 돈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맨손으로 우물이라도 파야 어떤 덕을 쌓고, 자손들에게도 이 공적을 통해서 축복의 유산을 넘겨주려고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합니다. 선교사는 "맨손으로 아무리 수백자 우물을 파도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말씀에 뿌리 내리는 삶이 복 받고 구원받는 길이요 자손들에게 축복을 계승하는 길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어 그 부인을 구원으로 인도했다합니다. 이 부인이 가장 잘 부르는 찬송이 [빈손 들고 앞에 나가 십자가를 지고]라는 찬송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훈계와, 때에 따른 경고를 주시고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건져내실 때, 구원을 은혜로 이루셨습니다.
복음 전도자 무디 선생이 한 번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공동묘지”라는 별명을 가진 교도소를 방문하였습니다. 설교를 끝낸 후 무디는 여러 죄수들과 함께 그들의 감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형을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기에 들어왔습니까?”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은 똑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음모에 말려 들었습니다.” “부당하게 기소당했습니다.”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디 선생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보고서 “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복역수는 대답했습니다. “내 죄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을 만난 것에 위안을 느낀 무디 선생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무디선생은 곧 즐거운 마음으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는 지식, 즉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으로 인도했다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은혜로 구원 받은 줄 믿습니다.
크신 긍휼로 함께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합시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는 사람들'의 자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느 9:30-31)
차머즈는 그의 책 " 정오의 강풍 "에서 유명한 건축 기사 피어흠의 긍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합니다. 기사 피어흠은 세계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들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뒤에 질병과 실패로 인해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였다합니다 . 그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험하므로 피어흠은 자꾸 경고를 했지만 오히려 번번히 모욕만 당하고 말았다합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는데 그 개가 하필이면 피어흠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이고 말았다 합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개의 주인을 비난하고 파종기가 되어도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도 나누어 주거나 팔지 않았다합니다. 노인이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냉소했다합니다.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는 노인의 모습을 피어흠은 보았다합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광에 가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꺼냈다합니다. 피어흠은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다합니다. 며칠이 지난 후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해진 반면, 피어흠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다합니다.
성령은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진다 하더라도 .... 우리들이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한 장로님이 평소에 자신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성도와 함께 이웃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성만찬의 순서가 있었습니다. 장로님과 그 성도는 주님의 몸과 피를 서로 나누면서 각각 떨어져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에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왜 같이 오신 성도님과 함께 성만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와 돈 거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정직하지 않았고 약속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상대하기도 싫기 때문에 떨어져 앉았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장로님은 자신이 우리 주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주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팔아넘길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앉아서 만찬을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장로님은 다시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돈 거래에서 그가 딱 한 번 실수를 했던 것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자신과 차별을 두는 것은 자신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장로님은 그 성도와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가까이 앉아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용서받은 심령은 용서하며 함께해야 할 줄 믿습니다.
「롱펠의 꿈」이란 이야기라 합니다. 그는 중세시대에 어느 성의 군주이며 말 타기와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위해서 뜻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작별의 저녁 식사를 하실 때에 포도주를 부어 마시게 한 은잔이 세상 어디인가에 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듣건데 그 은잔은 후에 미술가의 손에 넘어가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얼굴이 밑바닥에 그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명한 은잔을 찾아 후대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보여 준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긴 여행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물통에는 물이 가득하고 자루에는 빵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짐을 말 잔등에 싣고 돈도 넉넉히 가지고 말을 탔습니다. 성문을 지나 먼 여행길을 달려 어느 벌판을 지나가다가 나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지치고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구걸을 했습니다. "형제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를 도와 주세요.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물을 좀 주세요." "나의 가는 길을 방해 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구주 예수님의 은잔을 찾기 위해 떠나가는 몸이다. 더러운 나환자가 어찌 나의 가는 길을 막는가?" "나를 살려 주세요. 이대로 두면 굶어 죽습니다." 나병자는 더욱 애걸을 하면서 말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금돈 한 개를 던져 주고 말을 달렸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은잔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로 구라파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제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꿈은 사라지고 떨어진 옷을 입은 그는 힘없이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벌판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기진하여 간신히 몸을 가누며 걸어 가다가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으로는 이 빵이 있을 뿐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으세요." 롱펠은 걸인을 일으켜서 차고 있던 표주박으로 물을 따라 걸인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걸인은 홀연히 빛이 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라! 나로다 두려워 말라. 너는 은잔을 얻으려 이 나라 저 나라로 여행하였으나 너 얻은 것이 무엇이냐? 보라! 너의 손에 들려있는 쪽박을... 나에게 물을 떠준 그 쪽박이 네가 찾아 헤매던 은잔이니라. 네가 준 그 빵이 찢기운 나의 몸이요, 나에게 마시운 그 물이 십자가의 피로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식이 성찬이로다." 롱펠이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되 3월은 긍휼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달입니다. 긍휼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견고한 언약
느 9:32-38 / 김형준목사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대략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어진 상황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 적응하며 살다 보니 농부가 되었다는 식입니다. 또 살다 보니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태어난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 몸에는 질병이 찾아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돌아볼 겨를 없이 당장 앞에 주어지는 일 처리하기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노라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정을 버리기도 하고 다른 것들을 희생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 가서는 정작 목표하는 바는 이루었는데, 그 보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이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출발을 위해 분주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의 두 방법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위대한 사람, 그렇다고 잘 알려진 사람, 남들이 볼 때 칭찬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삶의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고 살아가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인생을 검토 없이 무턱대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능한 선장이라면 배의 속도보다는 진행 방향에 신경 쓰듯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지난 52일 동안 오백여명의 성도들이 새벽제단을 쌓으며 마땅히 가져야 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환경에 따라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목표를 성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온 공허함 때문에 인생의 의문점을 안고 있던 사람들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52일간 우리를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질문하며 기도했습니다.
52일간은 공교롭게도 ‘목적이 이끄는 삶’ 이전에 나누었던 말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을 쌓았던 52일과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힘들었던 만큼, 느헤미야가 성을 쌓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숙원 사업이던 예루살렘성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치를 벌일 만도 한데 곧바로 또 다른 일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을 건축한 데서 멈추지 않고, 성 건축을 통해 공동체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면에 주께서 주신 감격과 기도의 응답을 안고 이 자리에 나와계신 분들이 많은데, 바로 여기서 우리 또한 52일간의 놀라운 체험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로 인해 잔치를 벌일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할 이유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많은 일을 성취해 보았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축복으로 남는 성취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경험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취가 또 다른 상실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이 우리 가운데 계속 축복이 되게 하고, 외형적인 축복이 내면적으로도 진정한 생명력을 갖게 하고 공동체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52일간의 새벽제단을 통해 단지 내 삶의 목적을 찾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민족의 체질을 바꾸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완공하고 나서 행했던 일들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더듬어 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9장 1,2절, “그 달 이십사 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백성들은 자신과 열조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회개란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범한 죄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샅샅이 찾아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아파하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조상이나 이웃 등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탓과 책임으로 돌리며 다시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하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두 가지 기준에서 합당한 회개였습니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지거나, 자기 양심에 찔릴 때 회개 합니다. 이런 회개는 세상에 너무나 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율법을 따라 회개했습니다. 9장 16절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에서 알 수 있듯이 주께서 주신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아주 차원 높은 회개였습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를 수없이 주셨음에도 그 기회를 짓밟아버리고 무시했던 자신들의 무지한 행동까지도 회개했습니다. 9장 29절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 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들의 죄와 허물과 교만한 태도를 감추지않고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긍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하고 거역한 자신들의 완악함을 뚜렷하게 대비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죄 된 백성인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말씀의 기준에 따라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권고를 거절한 것까지 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타락하고, 사회가 왜 이렇게 타락했을까요? 회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기독교가 타락하고 병들게 된 시점을 A.D.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시작한 때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박해 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릴 때는 진리가 살아서 생명력이 있지만, 국교화되고 공인되어 제도화 되었을 때는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 부류의 학자들은 교회 타락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지적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교인들이 죄를 범하면 공동체 앞에 나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그 사람의 죄 사함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었고,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적합한 징계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몇 주 동안 성찬을 받지 않도록 하거나, 몇 주 동안 서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죄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공동체가 나서서 감시해주고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책임져 주었습니다.
원래 교회 권징이라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회복의 통로였는데, 현대 교회는 징계하고 교회로부터 축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부폐한 속성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죄를 짓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지켜볼 때는 죄를 잘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훨씬 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속성을 고려하여 공동체는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었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고백하던 이 행위를 신부에게만 하도록 바꾸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지적에 동의합니다. 회개할 수 없고, 회개를 받아 줄 수 없고, 함께 책임져주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는 곧 병듭니다. 이것은 교회 부흥의 역사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교회 부흥은 공동체가 죄를 회개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회개는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백성들 마음 속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남이 자기 잘못을 지적할 때 누가 그 지적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올 때 죄가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인생의 기준이 될 때에야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을 두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합니다. 포스터모더니즘이란 한마디로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 문학 등 우리가 접하는 매체 속에 숨어있는 공통적인 사상으로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꼭 남자와 여자가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요즘 동성연애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성끼리 부부관계를 이룹니다. 십 수년 전만하더라도, 꼭 신앙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윤리와 도덕이 가정을 지켜주었습니다. 이제는 그것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깨져가고, 집단적 이기주의에 마약, 성인 포르노, 도박, 스와핑, 자살, 사교집단 등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살고, 그러한 생활 방식을 합리화시키고 체계화시켜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파괴문화가 예술과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를 실험이나 하듯 세상과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라는 기준을 잃어버린 이 세대는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자기 쾌락과 지식, 경험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있으니 회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진정한 회개를 하나님 앞에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전부다 의로운 사람밖에 없습니다. 정치를 보더라도 모두 다 의로운 사람 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자도, 386세대도 국민들이 보면 다 보이는데 스스로 의롭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 아닙니까?
진정한 회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기준을 따라 어디서부터 우리가 잘못되었는지, 변질되기 시작했는지,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하나하나 더듬어보며 회개하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를 통과하지 않고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회개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다듬었기에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오늘 우리도 각자 살아온 삶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야 할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기준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 가정과 교회와 민족 그리고 우리 교회사를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회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합리화 시키기 위해 되돌아보지는 마십시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회개하여 깨달은 역사를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문서로 작성하여 늘 반복해서 읽고, 후대에게도 알려주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9장 38절,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새 출발을 이야기할 때 크게 세가지, 즉 교회와 가정 그리고 내면의 변화를 많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습관과 관계의 변화로 이어지고, 실제적인 적용은 교회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알려면 직장보다는 외적인 제약이 없는 가정이나 교회와 같이 순수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곳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출발을 결심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과 약속이라는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굳은 결심이라 할지라도 현실 앞에서 얼마나 쉽게 깨지고 타협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물러설 때도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기회를 놓친다면 이제는 영영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백성들은 문서로 남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당대 백성들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후대에게도 전하고 그들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공감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0장에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0장 1절에는 총독인 느헤미야와 당시 부총독이었던 시드기야가 나옵니다. 2~8절까지는 21명의 제사장 명단이, 9~13절에는 17명의 레위지파 사람들이, 14~27절까지는 44명의 각계각층의 두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10장 29절에는 하나님의 율법, 즉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겠다는 맹세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는 우리와 우리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에 따라 자기 삶의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면서 두 가지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있는데, 우선 하나님 말씀을 잃어버림으로써 말씀보다 세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무엇인가를 세세하게 살피겠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말씀 외에 받는 영향은 무엇이든 차단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본문의 뒷부분을 보면,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모습이 나오고, 심지어는 이방족속과 결혼한 사람들까지 이혼하도록 합니다. 바른 가치관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로를 다 끊습니다. 스스로 작성한 문서에 따라 백성들이 다시금 새롭게 결단하는 장면입니다.
어느 잡지사 기자가 의문을 가지고 두 가문을 조사한 결과에 대해 여러분도 한번쯤은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미국의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와 친구 맥스쥬크의 이야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12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부부는 자녀들을 세속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앙의 5가지 원칙을 세우고 믿음으로 길렀습니다. 그 결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11명(1명은 사망)의 자녀와 873명의 후손들 중에서 대학 총장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성직자 100명, 군 장교 75명, 저술가 80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원 1명, 부통령 1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 후손 중에는 미국 사회에 재정적으로 폐를 끼치거나 손해를 입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같은 때 뉴 잉글랜드 지방에서 자란 친구 맥스 쥬크는 아무런 의식 없이 주어진 대로 살다가, 방탕한 여인과 결합하여 자신도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 1292명 중에는 유아로 사망한 사람 309명, 직업적 거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 60명, 살인자 80명, 그저 그렇게 산 사람 53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교로 하나님의 섭리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가치관의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목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백성들이 문서로 작성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여호와의 단을 중요하게 여기겠다라는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과 물질사용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 사용, 그 중심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예배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물질사용, 그 기준은 십일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편리와 유익을 따라 살기시작하면서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성전 중심의 생활은 너무나 쉽게 깨지고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문서로까지 남기며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52일 동안 새벽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구체적으로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결단했습니다. 이제는 말과 느낌 그리고 생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도전합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가족들을 다 불러모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다 불러모으십시오. 그리고 함께 기도하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칙, 우리 삶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신 다섯 가지 원칙을 온 가족의 동의 하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 사인하십시오. 한 자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떠날 때 마다 복사해 주면서 원칙을 계속 지켜 나가도록 하는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혈육으로 인한 가족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영적 자녀로 양육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영적인 예루살렘성, 그 속에서 자라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들로 양육해 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살기 어렵고 또 어두운 시대에 있습니다. 무턱대고 환경 속에 그리고 주어진 상황 속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중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제껏 품어왔던 꿈과 인생의 목적이 많은 경우 미처 알지 못했던 상처와 아픔 속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음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십시오. 진정한 가치와 영원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 그 속에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삶의 희망, 가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걸음 걸음 위에 하나님 나라가 활짝 열리는 복이 계속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