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2일(목)
* 시작 기도
(삼하 7: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주님...
다윗이 주님께 놀라운 기도를 합니다.
종의 집에 복을 달라는 것은 단순히 오늘 우리 사람들이 구하는 그런 복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네 몸에서 날 네 씨가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인데 그는 역사적으로는 솔로몬을 구속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습니다.
다윗의 씨로 오신 예수가 오늘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는 다윗이 기도한 “제가 누구관대 저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까?”(삼하 7:18)라는 말처럼, 죽기에만 합당한 저를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는지요?
면목없이 그저 죄송스러움을 가지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주님께 나아갈 뿐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아침에 주의 현현이신 말씀으로 나아가오니 나의 심령을 장악하사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7:5-60
제목 :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6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7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8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9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10 아라 자손이 육백오십이 명이요
11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팔 명이요
12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13 삿두 자손이 팔백사십오 명이요
14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5 빈누이 자손이 육백사십팔 명이요
16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팔 명이요
17 아스갓 자손이 이천삼백이십이 명이요
18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칠 명이요
19 비그왜 자손이 이천육십칠 명이요
20 아딘 자손이 육백오십오 명이요
21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22 하숨 자손이 삼백이십팔 명이요
23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사 명이요
24 하립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25 기브온 사람이 구십오 명이요
26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백팔십팔 명이요
27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8 벧아스마웻 사람이 사십이 명이요
29 기럇여아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30 라마와 게바 사람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31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32 벧엘과 아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33 기타 느보 사람이 오십이 명이요
34 기타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5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6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7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일 명이요
38 스나아 자손이 삼천 구백삼십 명이었느니라
39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40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41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42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느니라
43 레위 사람들은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4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사십팔 명이요
45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팔 명이었느니라
46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7 게로스 자손과 시아 자손과 바돈 자손과
48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살매 자손과
49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50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51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52 베새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비스심 자손과
53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54 바슬릿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5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6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느니라
57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소베렛 자손과 브리다 자손과
58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9 스바댜 자손과 핫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몬 자손이니
60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느니라.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이미 제1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에 의해 조사된 것이다.
이것을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그 기록된 것을 발견하여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 있다.
당시의 인구는 제1차 귀환 이후에 2차와 3차 귀환으로 다소 차이는 있었겠지만 그렇게 큰 변화는 없었다.
왜냐하면 2, 3차 귀환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 대부분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였으므로 굳이 그들을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1차로 귀환하여 유다 땅 곳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조사된 제1차 포로 귀환자들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귀환자들은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모두 얼마인지 정확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 유다 왕이던 여호사밧 시대에 그의 군대 숫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사실을 역대하 17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대하 17:14-19) 군사의 수효가 그들의 족속대로 이러하니라. 유다에 속한 천부장 중에는 아드나가 으뜸이 되어 큰 용사 30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지휘관 여호하난이니 28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시그리의 아들 아마시야니 그는 자기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자라. 큰 용사 20만 명을 거느렸고, 베냐민에 속한 자 중에 큰 용사 엘리아다는 활과 방패를 잡은 자 20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여호사밧이라. 싸움을 준비한 자 18만 명을 거느렸으니 이는 다 왕을 모시는 자요 이 외에 또 온 유다 견고한 성읍들에 왕이 군사를 두었더라.
남 유다가 멸망할 때 극빈 계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었던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남 유다의 멸망 당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몇 십만 명은 포로로 끌려갔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1-3차 포로 귀환자의 숫자를 다 더한다 해도 겨우 5만 명 선이라는 것은 전체 숫자에 비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귀환한 사람들의 수가 이렇게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이 고레스의 귀환 명령을 듣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포로 중 일부만 귀환하도록 했던 것일까?
그러나 역대하 36장에 보면 고레스의 포로 귀환 명령이 나오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선포되었고, 또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귀환할 수 있었다.
따라서 포로되었던 자들이 고레스의 칙령을 듣지 못해서 귀환하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하 36:22-23)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렇다면 결국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환하지 않은 것은 그들 스스로 귀환을 포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포로되었던 사람들은 비록 이방 땅이기는 하였지만 그곳에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안정된 삶을 버리고 황무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귀환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고레스의 귀환 명령은 포로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었다.
포로들에게 해방과 귀환을 허락하는 명령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지 못하여 복음의 축복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보다는 현실의 만족을 더 구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주님이 오신 이후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과 천국을 약속하는 복음은 온 세계에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통신이나 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더욱 복음이 활발하게 증거되며, 또한 쉽게 복음을 접할 수 있다.
어쩌면 이제 마지막 때가 되어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편만하게 증거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그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그 복음의 축복에 다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곧 이 세상이 주는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복음은 인간에게 세상적 육신적 물질적 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을 듣고 종말을 현재로 살아가는 자에게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넉넉히 기쁨으로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복음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고난도 함께 따른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자기의 육신을 위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순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사람들은 다수가 가는 길을 선호하며, 그 길이 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다수가 善인 시대이다.
그러나 진리는 다수가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는 자가 바로 진리 안에 거하는 자이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나는 복음을 전하고 진리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그것도 복음주의요 개혁주의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후예로써 장로교 고신교단의 목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이 곧 복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로교 고신 신학 안에 있으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신학은 정말 중요하다.
신학은 신앙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고, 안전하게 목회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이 곧 복음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교단의 신학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잘라내 버리곤 하였다.
그러니까 점점 내 영성은 메마르고 목이 말라갔다.
그러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나는 그 복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복음은 신학이 아니라 신학을 뛰어넘는 참 진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복음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요, 게다가 생명을 주는 복음은 성령의 역사로만 증거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살, 말씀 그 자체)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전에도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안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그러나 나는 실상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제 참 복음을 듣고 알게 되었으며, 그 복음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나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내가 속해 있는 복음생명선교회에 참석하여 복음을 듣고 간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들 중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어 이 땅에서 종말을 현재로 누리는 영생의 삶을 사는 자는 극히 적다.
그 이유는 세상 만물이 주는 유익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얻고 누리는 유익은 참으로 많다.
돈과 명예, 삶의 안락함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음 등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결국 쇠락의 법칙에 의하여 사리지고 말 것들이다.
이것은 무상성에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종말을 현재로 살면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은 무상성이 아니라 항상성으로 늘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상황도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고난의 상황이 그들을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과 은혜를 오늘도 다시 한 번 누리며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죄 많고 허물 많은 죄인을 속량하시고 주의 자녀 삼아 주셨는지요.
복음을 듣고 청함 받은 자로 살아가면서도 나는 복음을 모르고 주님과 멀리 떨어져 살아왔나이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주의 자녀 삼아주셨사오니 이제는 넓은 길, 다수가 가는 길이 아니라 오직 주님 가신 그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 길만이 복된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에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나이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은 나의 길, 복음의 길, 생명의 길임을 아오니 그 길에서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하소서.
복음을 들은 자는 많으나 복음의 축복, 즉 생명으로 나아가는 자는 적은 이 시대에 주의 긍휼하심이 필요하오니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