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 시해 사건과 그 딸 박근혜 대통령(이하 박근혜)의 탄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 박정희 시해는 김재규와 그를 추종했던 세력들의 배신과 역모였다. 박근혜 탄핵 역시 마찬가지다.
1979년 10.26 김재규가 단행한 박정희 시해 역모와 가담자 연관성의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다보니, 박근혜 탄핵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역설이다.
인간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다. 유다의 예수 배신, ‘시저’에 칼을 겨눈 ‘브루투스’, 일본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오다 노부나가도 결국 부하의 배신에 의해 그 대업이 좌절됐다.
박근혜와 박정희 배신에서 보듯, 배신자들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역사적 사건의 배신자도 최측근이었다.
그런데도 배신자들을 알아차리 못했던 것은 이들의 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살면서 ‘배신자’라는 글귀를 얼굴에 새기며 사는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박정희가 김재규 속을, 박근혜가 사탄파 속을 진작 알았다면 시해도 탄핵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역모자를 바로 극형으로 죽였지만 지금의 역모자는 사법적 절차를 걸쳐 단죄한다. 김재규가 그 케이스다. 그러나 지금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는 그 다음해 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는 7개월 만에 사형당했다.
왜 그렇게 빨리 죽였을까.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더 시간을 끌지 말고 죽일 수밖에 없었든가. 아님 더 이상 시해 사건에 대해 조사 할 게 없어서 그랬는지 수사도 재판도 사형도 속전속결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김재규 빠른 사형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역모’를 뿌리 뽑지 못했던 패착이었고, 이 패착이 불의와 거짓을 잉태했다.
김영삼, 김대중은 ‘반 박정희’와 ‘반 전두환’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었고, 좌파 종북 세력들이 대한민국에 더욱 기생토록 한 토대가 된 셈이다.
김재규 한 명이 박정희 시해에 가담했을까. 전두환 회고록에 따르면 김재규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계원 비서실장, 장태완 수방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의 연루설이다.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군 하극상을 일으켜 이들을 연행하려 했다는 것이 1979년 12.12 사태의 핵심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전두환 회고록에 따르면 이는 전혀 다르다. 당시 박정희 시해 사건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시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정승화 수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정승화는 합수부 연행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정승화 부하가 합수부 수사국장에게 총을 쏘았다. 총에 맞은 수사국장은 중태였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날, 궁정동 옆에 머물렀다. 김재규가 박정희 시해 후 정승화 차를 타고 육본 지하벙커로 향했다.
박정희 시해 날, 정승화가 왜 궁정동 부근에 머물렀고, 김재규가 피범벅이 된 채 정승화 차를 타고 육본으로 향했을까. 육본에 전 내각이 소집돼 있는 상태에서 정승화는 박정희 시해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정승화는 도리어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
게엄사령관 정승화는 전두환 직속상관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시해 진실 규명 차원에서 이런 정승화를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는 이에 대해 격렬히 저항을 했고, 이 과정에서 연행됐다. 이 소식을 접한 장태완과 정병주가 군을 일으켰다. 전두환 합수부를 공격하려고 했었다. 이 과정에서 교전으로 인한 사망자도 발생했다.
당시 이를 두고 좌파 세력들과 아직도 이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전두환의 군사반란’이라고 명명했다. 또 현재의 역사는 이를 신군부 쿠데타로 기록했다. 박정희 시해사건과 관련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도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수사에 비협조적이고 불응하고 저항했다는 것이 연루성을 연상시키게 한다.
문제는 좌파와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이 12.12를 전두환이 일으킨 신군부 쿠데타로 규정함으로써 그 후 박정희 시행사건의 진실 규명이 멈춰버렸다.
정통성을 잃었던 전두환이 10.26 수사 전모의 진실을 밝힌들, 국민들은 그것은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변명과 합리화에 불과했다.
박정희 시해의 정범은 김재규 말고도 더 단죄해야 할 대상이 많았지만 세상은 바뀌어 이젠 이들이 박정희 시해의 피해자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되기 까지는 전두환 역시 한 몫했다.
전두환 5공은 출범하자 마자 '벅정희 단절'을 단행했다. 박정희 역사를 잇는 전두환 5공이 되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정통 보수 우파의 역사로 기록됐을 것이다.
군인의 운명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이다. 군인도 정치를 할 수 있다. 군인이 정당을 선택할 때 꼭 여당을 선택하라는 법은 없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80년대 왜 정승화는 김영삼(통일민주당), 장태완은 김대중(새천녀민주당)과 노무현(군 특별보좌역) 밑으로 들어갔을까.
전두환 신군부 피해자에 저항하기 위한 측면으로 이해도 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이들은 좌파정당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 그 후 민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는 가짜가 진실이 되고, 정의가 불의가 되고, 역사의 왜곡과 거짓이 이어져왔다.
대한민국에서 김재규 역모에 대한 연관성 단죄가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이 독버섯이 자라서 박근혜 탄핵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역설이다.
왜 조선에선 역모와 반란자로 잡히면 9족까지 멸하는가. 역모의 씨앗을 뿌리뽑기 위함이다.
박근혜는 왜 탄핵되었는가. 좀 억지 주장같지만 박정희 시해 역모의 진실과 그 가담자를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되물음인데, 박정희 시절 반 박정희 시위 주동자가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저항과 투쟁으로 성장한 정치인이다. 이것이 박정희 시해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김무성은 김영삼이 잉태했던 자이고, 유승민 부친 유수호는 비록 보수 우파의 길을 갔지만 여기 저기 기웃거렸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 였다. 이들과 함께 박근혜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탄파 60여 명의 피를 조사하면 대부분 기회주의, 위장보수 우파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2 정승화에 가까운 셈이다.
이들이 좌파들이 공모한 탄핵에 동조함으로써 박근혜를 정치적 사망에 이르게했다면, 정승화와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과 재야의 보이지 않은 든든한 배경이 없었다면 김재규가 박정희 시해를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역적 김재규가 영웅화되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김재규, 정승화, 장태완과 그 비서시장 김계원은 유신과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던 민주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앞장섰던 사탄파들이 국정을 바로 잡은 구국의 애국자로 추켜 세워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다. 정신 나간 국민들은 이들의 행위를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 미화시키고 있다.
한 때 태극기를 들고 탄핵의 부당성을 외쳤던 세력들은 “이제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역적 유승민 주장과 “탄핵을 역사에 묻고가자”는 기회주의 황교안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김무성은 여전히 보수대통합을 부르짖고 있다.
여기에 자칭, 보수 우파란 세력들이 함께 하고 있다. 위장 기회주의 보수 우파 배신자와 민족주의로 무장한 대한민국 역사와 체제를 부정하는 좌파들이 각자의 기득권 시각에서 교묘히 왜곡시킨 역사가 박정희 시해 진실이요, 박근혜 탄핵 진실이라고 주장하면 무리인가.
역사는 되풀이된다. 박정희 시해 사건은 이런 유사 식으로 묻혔고, 이젠 박근혜 탄핵의 진실마저 이렇게 묻힐 판이다. 진실과 정의가 묻히고 거짓과 불의가 정당화되는 나라가 됐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역모와 박근혜 탄핵은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왜냐, 비로소 자유 우파 민초들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진실과 정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http://www.jbcka.com/news/articleView.html?idxno=1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