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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챙피하고 쑥스럽다고 올리지말라하고,
저는 또한 제 얘기라서 그냥 지나칠까도 했었습니다만...
그냥 한번 읽어보셔요...^^
꿈의 씨앗, 이 땅에 싹을 틔우다. 조은주
집근처 도서관이다. 책을 고르다 습관처럼 Quiet room을 넘겨다 본다. 룸의 맨 안쪽 구석자리에 눈길이 가 머문다.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치렁대는 아가씨가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다. 남편의 자리. 지난 이 년 반동안 남편의 자리였던 그 자리. 남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극적인 사연은 아니지만, 이 낯선 땅에 꿈의 씨앗을 뿌리고 건강한 싹을 틔우기 위해 노력했던 지천명을 코앞에 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부모 자식이 한지붕 아래서 한솥밥 먹을 수 있는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남편이 치과의사라는 자신의 일을 접고 이민길에 동행한 이유다. 물론, 그 결심의 발목을 잡는 아쉬움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젊음을 담보로 적잖은 은행빚을 얻어 시작한 병원이 몇 년 간의 고생 끝에 그제야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토요일도 없이 일하던 남편이 근무시간을 줄 일 여유도 생겼다. 무엇보다 남편은 이제 겨우 마흔 고개를 넘어선 자기 일에서 성취감을 맛보기 시작할 시기에 있는 남자였다.
막연하게 믿어지는 마음도 있었다. 남편도 나도 성실성으론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니까 설사 우리 전공을 살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뭐든 새로운 일을 찾게 되겠지 생각했다. 물설고 낯설은 남의 땅에 왔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건 당연지사라는 각오도 했다. 꿈도 야무지게 꿨다.
‘처음 한두 해는 영어를 배우자. 한두 해 살다보면 이 사회에 대한 감도 오겠지. 영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할 수 있는 일이 보이기 시작하겠지…”
2007년 8월에 이민가방을 풀고, 그해 10월부터 남편도 나도 Invergarry School이라 불리는 Adult Learning Centre에서 Full time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이 사회를 이해하고, 실전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사회봉사도 시작했다. 남편은 노인보호 센터에서, 나는 나대로 장애인 센터와 아이들 학교 도서관에서 봉사자로 일했다. 비정기적으로 있는 동네 산책로 청소와 나무심기 봉사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했다. 하루종일 수업 듣고 집에 와 애들 둘 챙기고 오밤중까지 숙제하느라 끙끙거렸다. 열심히 하다보면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리라 기대하면서. 그런데 웬걸,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이 커지긴 커녕 오히려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면된다라는 세상의 진리가 과연 영어를 배우는 일에도 해당되는 걸까?’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뭐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특히, 말하기 실력은 도무지 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어 어휘를 외운다고 문법을 공부한다고 말이 되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영어로 말해야 할 상황이 생길 때 마다 암기했던 어휘나 문장들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입에서 더듬더듬 튀어나오는 말은 초급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Broken English 였다.
‘나이 마흔이 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몽롱하게 꿈속을 헤매다 물벼락 맞고 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일 이년 쯤 살다보면 사회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겠지 했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언어를 배우는 일도 어렵지만 낯선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일은 더 힘들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큰 땅덩어리에 산다고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소통의 한계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하는 이민자의 눈에 들어오는 세상은 그 한계선 안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 뼈 아팠다. 오리무중으로 감이 잡히지 않는 세상에서 새로운 분야의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지 남편도 나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Invergarry School에서 English12 과정을 공부하던 남편이 학교 중단을 선언한 건 그 즈음이었다. 영어공부 대신 남편은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캐나다에서 면허를 재취득하고 치과의사로서 일하는 건 여러 여건상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 일에 연관된 일을 찾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Dental Assistant 일을 해 보겠다고 했다. 한국에선 주로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하는 일이고, 시간당 급여도 많지 않았지만, 나이도 많고 언어도 안 되는 이민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11개월 간의 코스를 밟기 위해 King George 선상에 있는 한 College에 입학절차를 마치고 학교 정문을 나서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문을 나서자 우리 머리 위로 9월의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주차해 놓은 곳으로 걸어가며 말없이 남편을 올려다 보았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남편의 귀밑 머릿카락이 처연했다. 내가 말했다.
“집에 가서 머리 염색하자. 내가 해줄게.”
그날 처음으로 남편은 까맣게 머리를 염색했다.
흔히들 말하길 한국은 대학 들어가기가 어렵고 캐나다는 졸업하기가 힘들단다. 불과 11개월 짜리 단기 코스였지만 공부양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공부를 따라가는 일보다 남편이 버거워했던 건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남자들도 지원한다는 입학 상담자의 말과는 달리 남편이 공부하는 교실에 남자는 달랑 남편 혼자였다. 남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므살 안팎의 어린 아가씨들이었다. 비록 한 교실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관심사도 다른 그네들과의 시간이 쉽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남편에겐 언어적 어려움이 늘 따라다녔다. 젊은 그녀들이 유명 연예인을 화제 삼아 깔깔거릴 때, 인기있는 TV쇼 프로그램에 대해 떠들 때, 하키게임 이야기를 할 때도 남편은 ‘왕따’가 되는 모양이었다. 화제에 대한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우선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으니 섣불리 대화에 낄 수도 없다고 했다. 남편은 “마치 내가 무인도 같아.” 하며 껄껄 웃었다.
한 달간의 현장 실습도 마치고 졸업을 불과 두어달 남짓 남겨 둔 때였다. 최고 성적을 놓치지 않던 남편이 갑자기 코스를 중단하고 싶다고 했다. 치과의사 자격시험에 도전하겠단다. 캐나다 정부에서 외국 치과의사 면허를 가진 이민자에게 캐나다 면허를 재취득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고 했다. 실습을 포함한 다섯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면 치과의사로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에 부풀기는 커녕 더럭 겁이 났다. 해가 바뀌면 마흔보다 쉰에 더 가까워지는 남편의 나이가 먼저 떠올랐다. 한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 씩이나 큰 시험을 치뤄야 한다는 것도 까마득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감당해야 하는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적게 벌고, 적게 먹고, 스트레스 적게 받으며 살자고, 욕심부리지 말고 살자고 매달렸다. 그런 나를 곰곰 바라보던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그것도 좋지… 그런데…실습하면서 알겠더라고. Dental Assistant로서 취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한국처럼 여기도 나같이 나이든 남자는 원하질 않더라고…. 당신도 알잖아. 실습할 치과를 찾는 일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나…할 수만 있다면, 내 일을 다시 찾고 싶어.”
이십년 전에 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남편은 다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새로하는 공부라고 말하곤 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많은 학문적 이론을 새로 쓰게 했단다. 예전엔 밝힐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들이 그 베일을 벗었고, 학교다닐 때 정답이라고 배웠던 이론이 오류로 판정된 것도 많다고 했다. 약 처방도 달라지고, 심지어 어떤 약은 사용금지가 되기도 했단다. 남편은 다시 대학 초년생이 된 자세로 열심히 공부했고, 2011년 2월에 첫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더 높은 산은 6월에 있는 실습시험이었다. 이민 후 4년 간이나 진료를 쉬었으니 진료 감각을 많이 잃었을 건 당연했고, 무엇보다 시험 요건에 맞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실습할 장소를 구하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야 하는 일처럼 막막했다. 수소문 끝에 미국 LA에 이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설 실습 기관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엄청난 비용이 들기도 했고, 한 달간이나 집을 비워야 했지만 이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4년간 본업을 떠나 있던 스스로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하루 12시간 씩 연습했단다. 덕분에 한 달간의 수련을 마칠 즈음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실습에 필요한 치과용 기구들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것들을 차고에다 설치했다. 시험 전까지 혼자서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컴컴한 차고 안 붉으스름한 백열등 불빛 아래서 연습용 치아를 깎고, 다듬고, 다시 또 깎고, 그걸 또 다듬고…..하루종일 그 일을 했다. 제대로 갖춰진 치과용 걸상에 앉아 일하는 것이 아니니 바른 자세가 나올 리가 없었다. 허리와 다리에 무리가 되는 자세로 하루종일 꾸부정하게 앉아 있다 보니 허리통증과 다리에 쥐가 나는 증상이 생겼다. 이렇게 누워도 저렇게 누워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했다. 진통제를 먹고서야 겨우 잠이 든 남편을 바라보며 난 늦도록 잠들지 못 했다.
그해 6월에 2차와 3차 시험을 보았다. 2차 시험은 통과했지만 3차 시험에서 2% 부족한 점수로 실패했다. 본인의 실망도 컸겠지만, 나 또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 보다 재시험을 치루기 위해 일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더 끔찍했다. 남편은 실전 진료를 통한 필름 판독 실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 또한 캐나다 땅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석 달간의 한국행을 결심했다. 선배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시험준비를 하기로 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낸 그 겨울은 춥고 길었다. 9학년 10학년이던 두 아들녀석들이 곁에 있었지만, 남편의 빈자리를 볼 때 마다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갔다. 남의 나라에 와 자기 일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편칠 않았었다. 식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남편 혼자 너무 큰 희생을 치루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기러기 생활’을 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후회하는 마음도 생겼었다. 그런데 남편의 빈자리를 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옳았다고. 할 수만 있다면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2012년 3월, 봄바람을 타고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다시 도서관맨이 되었다. 도서관 문 여는 시간이 그의 출근시간이고 문 닫는 시간이 퇴근시간이었다. 허름한 남색 츄리닝을 유니폼처럼 입고, 컴퓨터, 책, 두꺼운 노트 그리고 물 한병과 도시락이 담긴 오래된 가방을 메고 햇살 좋은 날은 물론, 비오는 날에도, 바람부는 날에도, 눈발이 흩날리는 날에도 도서관에 갔다. 눈도 침침해 지고, 운동부족으로 지방간과 당뇨주의보도 발효되고, 허리통증과 다리결림 증상도 여전했지만 참고 견디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2012년 6월, 남편은 지난해 낙방의 고배를 마셨던 3차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지난 11월에 치룬 4차, 5차 시험에도 모두 합격했다.
한국인 부모님 중 많은 이들이 자식들을 위해 이민을 왔다고 말한다. 우리 부부도 한국의 교육환경이 싫어서 이 나라에 왔다. 아이들이라고 적응 과정이 쉬울 수는 없겠지만, 한국보다는 훨씬 자율적인 교육환경 속에서 어른보다는 수월하게 언어를 습득하고 타문화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이민 1세대가 된 부모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는 게 현실이다. 특히, 이곳에서 뭔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 가장들이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결코 작지 않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캐나다로 이민 온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순위로 매기면 1위가 아이들, 2위가 여자, 3위가 강아지, 4위가 남자라고.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한국에서의 번듯한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고급 인력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산 넘어 산’이란 말이 있다. 남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캐나다 면허를 취득했다고 뭔가가 금방 이루어지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어쩌면 이건 더 큰 고난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걸. 여전히 남편에겐 언어적 어려움이 존재하고, 그런 그가 일할 수 있는 자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남편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그는 생명의 탄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척박한 땅에 꿈의 씨앗을 뿌렸고, 햇살을 모으고, 맑은 물을 주고, 바람으로부터 돌보며 꿋꿋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씨앗은 싱그런 싹을 틔웠다. 물론 앞으로도 그 여린 잎은 때론 거센 비바람에, 때론 찬서리에 수없이 많은 위기를 맞겠지만, 어쩐지 나는 이제 그 모든 위기의 순간까지도 감사해 하며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 결과에 상관없이 인생의 여정에서 흘리는 땀방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치를 지닌다는 걸,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이 온전히 성숙해 간다는 걸 남편을 통해 배우고 있기 때문일 거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한숨에 끝까지 읽었네요. 시험 합격도 축하드리구요.. 이제 고생은 거의 끝이 보이는것 같네요.. 저는 지금 고생이 절정에 달한것 같은데... ㅎㅎ 언젠가 저에게도 좋은 날도 오겠죠.. :)
정말 글 잘 읽었습니다. 남편분에 대한 사랑의 눈길이 느껴집니다. 부럽네요~~ㅎ
한국의 치과의사에서 캐나다 치과의사로의 멋진 변신에 경의를 표합니다..40대 중반에 수많은 난관을 뚫고 우뚝 섯군요..많은것을 내려노코..다시 시작할수 잇는 그 용기가 부럽군요..제가 아는 한국 치과의사분들 다들 한국으로 발걸음을 돌리셧는데..ㅎㅎ...요즘.임플란트 하고 잇어요..ㅋ..개업하셔서 싼가격으로 한국 이민자를 진료해 주셧으면 하는바램이 큽니다..벤쿠버의 치과는 너무 가격이 쎕니다..ㅎㅎ..
축하드리고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그 놈의 영어가 문제네요.
치과의사로서 환자들과 정확한 의사전달이 될려면 더 노력 하셔야 겠지만 큰 고비 넘기셨으니 잘되리랴 확신합니다.
본인도 고생 하셨지만 사모님에게도 큰 박수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가족의 사랑과 성원이 큰 힘이 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민와서 얻게되는 귀한 깨달음중 하나이지요.
글 감사합니다.
축하드려요!
이민 하시는 분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셨네요,,,.
낯선땅에 와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 쉽게 정착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신 반면에,,,,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고,,,,
어려울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마음속으로 수십번 수백번을 되새기다 보면,,,,
어느새 지난 세월이되고,,,
지난 세월을 도리켜 보며 할 이야기가 많은 삶은 그래도 가치 있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rainman님 축하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고요,,,
까페 회원님들,,, 다 같이 힘냅시다,,,
좋은 본보기 이십니다.
Rainman님처럼 노력하신다면 다른 방면에서도 가능할것 같습니다.
화이팅 이십니다.
축하드리며 앞으로 비지니스의 세계로 입문하시겟네요. 행운을 빌겟습니다. ^^*
축하합니다. 도전하고, 도전을 통해서 배우고 너무나 본받아야할 모습입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유사 직종에 있지만, 감히 도전할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지내고 있습니다.
훌륭한 귀감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노력하신 결과를 기대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귀중한 수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