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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3월 10일 주일오후설교
도르트 신조 강해
렉시오나리 : 시91:1-2,9-16; 롬10:8b-13
본문 : 롬10:13-21
제목 : “전령을 보내시다”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22편 1,2,3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99편 1,2,3,5
폐회찬송 - 시91편 1,5
도르트 신조 : 첫째 교리 -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 3조 : 복음 설교
사람이 믿음에 이르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이 가장 기쁜 소식의 전령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리고 원하시는 때에 보내십니다. 그들의 사역으로 사람들은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전령을 보내시다
종교심은 보편적으로 육과 영을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에서 “영적 세계”는 “육적 세계”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매우 차별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고대 종교들을 보면 보통 물질세계는 신들의 시체나 찌꺼기들로부터 만들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세계에서 가장 타락한 이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물질세계입니다. 보통의 종교들은 태생적으로 육을 천시하고 영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고 성경의 처음부터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정말 놀라운 이야기이고,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었던 고대 세계에서 주변의 종교들과 대단히 다른 특이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면,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다르게 기독교는 물질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파생점이 생기는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영의 운반 도구가 되는 물질이나 육체도 동시에 귀한 것으로 여기고, 따라서 신자의 삶이란 영적 세계뿐 아니라 물질세계, 우리가 몸을 입고 있는 이것 역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생활 중 몇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저는 특별히 “방편”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전반적으로 우리가 살아왔던 한국 기독교 정서 속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이 본질적이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미국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기독교가 출발했기 때문이고, 부흥 운동의 배후에는 “경건주의”가 있었습니다.
경건주의는 기본적으로 “외형”을 싫어합니다. “예배”는 사랑하지만 “예전”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기도”는 사랑하지만 “기도문”은 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교”는 영적인 것이라 대우받지만, 눈에 보이는 “성찬”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기념 행위 정도로 격하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찬양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것이지만, 가장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 예배 드리는 것은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이런 정서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정리는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방편을 사용하신다.” 예배와 예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기도문 없는 기도는 자유분방하여 기도를 해칠 수 있습니다. 설교가 중요한 만큼 눈에 보이는 성찬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마음을 다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이는 태도가 구태의연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용”과 “형식”이 결부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마 한국 교회 성도들 중 누구에게 물어도 “당신이 구원받은 시점과 세례받은 시점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 보십시오”라고 하면, 거의 구원은 어떤 영적 체험을 한 시점으로 잡고, 세례는 그것과는 별반 관계없는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세례 그 자체가 구원의 은덕을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물질을 영적인 것 자체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했지만, 우리는 거꾸로의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정말 세례식이 나의 구원과 실제적으로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세례 행위는 왜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실제로 죄 사함 받는 것이 주일 예배의 사죄 선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라면 예배 때의 사죄 선언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방편을 사용하시고, 따라서 이 방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그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지으셨을 때 그 아담은 영만 중요하고 육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 아담은 영과 육을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죄 때문에 비로소 분리된) 그런 “영육합일체” 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
바로 이 점이 오늘 제 3조의 첫 부분에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문구입니다. “사람이 믿음에 이르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이 가장 기쁜 소식의 전령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리고 원하시는 때에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복음을 “전령을 통해”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방편을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순서대로 차근차근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1.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과 때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제 2조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죄에 빠졌으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음”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모두 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 죄의 문제를 청산하실 때, 이것을 “모든 사람이 다”, “자동적으로” 혜택을 받도록,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일은 “보내셨다고 해서 모든 인류가 다” 그 혜택에 참여하도록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오셨지만 심판을 받을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도,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구원의 은덕에 참여하게 됩니까?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이 지점에서 펠라기우스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완전히 베푸셨고, 이제 이 구원은 마치 백화점 진열대에 놓여진 상품처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전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이 구원은, 누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으로, 이미 행해졌고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문제, 즉 어떤 사람이 “실제 구원을 받느냐의 문제”는 어디에서 결정이 되느냐? 그 사람이 이 진열된 구원을 “집어드느냐 마느냐”에 달렸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결국 구원이 실제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임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이야기는 앞부분의 일부만 맞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충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베푸신 속죄의 제사는 능히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믿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는 “능히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바로 여기까지만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모두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백화점 진열장에 전시해 두신 후에 “너희가 고른다면 너희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는 구원은 전적으로 사람의 능력, 사람의 의지, 사람의 결단에 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롬9:18)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16절)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고”(11절) 어떤 이는 택하시고 어떤 이는 택하시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된 것”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른 것”(엡1:11)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속죄를 이루신 후에, 그 속죄가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실 때에도 “우리의 자율에” 그것을 맡기시지 않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은 전적으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지, 우리의 선택 때문이 아닙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셔서 속죄를 이루신 것”도 하나님의 일이지만, 이것의 적용, 즉 어떤 사람이 그 혜택에 참여하게 되느냐의 문제도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3조의 첫 부분에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라는 구절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후에, 그 구원의 은덕이 누구에게 적용될까를 정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것을 진열해 놓으신 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을”,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하신다는 것입니다. 원하시는 분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원하시는 때에 부르십니다.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인 강조는 하나님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어떤 방식으로도 여기에 우리가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2. 전파하는 이를 보내시는 분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어지고 있는 구절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원하시는 때에 부르실 때 “전령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3조의 앞부분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믿음에 이르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이 가장 기쁜 소식의 전령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리고 원하시는 때에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원하시는 때에 부르시기 위하여 전령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오늘 신조의 본문 안에 나오는 성경 말씀인 로마서 10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조 본문에 인용된 내용은 로마서 10장 14절과 15절입니다. 함께 다시 한 번 이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아멘!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그 앞절, 곧 13절의 내용을 설명하며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즉 14절과 15절은 13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13절을 함께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로마서 10장 13절 말씀은 유명하기도 한 말씀이지만,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방금 13절에서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 “누구든지”는 당시 로마서의 정황에서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앞 절인 12절을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든지”가 누구인지는 명확해집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입니다. 유대인이 되었건, 헬라인이 되었건, 주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므로, 따라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누구도 차별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고, 우리 주님께서는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질문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누가 되었건 간에” 주의 이름이라는 것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까? 질문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한 번 더 풀어서 물어보겠습니다. 13절 말씀의 뜻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거기에 초점이 있어서, 누가 되었건 간에 이 방편,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이 방식만 붙들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다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이런 뜻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까?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괜찮습니다! 누가 되었건 간에 괜찮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한다면!”,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이 방식만 붙든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질 것입니다! 과연 13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때문에 14절과 15절을 13절에 붙여서 써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14절과 15절을 보도록 합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한다면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 성경은,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부른단 말이냐?”
13절은 분명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어서 말합니다. “하지만 너희가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를 수가 있었겠느냐?”
여기에서 성경의 강조점은 분명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수가 없다”
그렇지요?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겠”습니까? 이어서 계속 보십시다. 이제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로 질문은 거슬러 올라갑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들었기 때문에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듣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겠습니까?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렇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듣게 된 것입니다. 듣게 되었으니 믿음이 있게 된 것이고, 믿음이 있으니 “주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15절을 보십시오. 전파하는 자는 어디서 왔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아멘! 아시겠습니까? 모든 귀결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정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것은 맞지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습니까? 믿어야 부를 수 있습니다.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들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전파하는 이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전파하는 이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보내는 이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전파하는 이를 보내신 하나님께” 그 주권이 달려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말처럼 백화점에 진열된 구원을 “내 손으로” 집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1조에서 들었던 것처럼 죄를 지은 후에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납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를 향하여 이 복음을 말할 이를 보내신 주권자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의해 시행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읽을 때, 거기에서 “인간의 자유”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내가 주를 부르기만 하면!”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나의 자유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들을 불러 주셨다는 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고, 이어지는 14절과 15절까지 함께 읽으면, 바로 여기에 설계자가! 우리의 구원 전체를 주관하시고 방편을 내려주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령
그리고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주제로서 “전령”이 있습니다(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첫째 주제에서 우리가 살핀 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스스로의 주권을 강조하십니다. “원하시는 이가, 원하시는 때에”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여기에 덧붙여 두 번째로 관심을 기울이려 하는 것은, 우리가 설교의 서론에서 잠깐 들은 대로, 하나님께서 바로 이 때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 이 일을 하지 않으시고, “방편을 사용하셔서”, 곧 “전령을 보내셔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잠깐 : 도르트 신조 전체의 강조점
이 사실을 중요성을 위해 잠깐 오늘 설교의 주제 밖으로 벗어나 보겠습니다.
다들 신조 본문 책자를 갖고 계시니 잠깐 한 번 도르트 신조 전체를 훑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전체를 훑기 위해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도르트 신조는 매 장마다 반복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가 ‘죄’에 대한 강조와 ‘방편이 되는 말씀/설교’에 대한 강조이다.”
1)
“죄”를 한 번 살펴볼까요? 첫째 교리의 시작 부분이 “죄”로 시작하는 것은 다들 배우셨으니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 교리의 시작 부분을 한 번 보십시오. 2장의 제 1조는 제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 ....... 내용을 읽어보시면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벌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셋째, 넷째 교리로 한 번 가 보십시오. 우리 교재 149쪽입니다. 역시 여기서도 제 1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목은 “타락의 영향”이고, 본문의 내용을 훑어보시면 이런 내용입니다. “사람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반역하여 모든 선물을 상실했다.” 그렇죠?
다섯째 교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섯째 교리의 제 1조 제목은 “중생한 사람이라도 자기 안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입니다.
우리는 도르트 신조가 매우 일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르트 교리의 모든 장은 전부 “죄”로 시작합니다.
2)
동시에 또 다른 강조점은 모든 장에서 그 가르침의 내용들이 “말씀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 교리에서는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이 3조가 “복음 설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둘째 교리에서는 어떨까요? 둘째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구속”이 주제인데, 제 5조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함”입니다. 이 구속의 교리가 복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넷째 교리, 곧 사람의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한 가르침에서 4조, 5조, 6조는 각각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4조-본성의 빛으로는 불충분함, 5조-율법으로도 불충분함, 6조-복음의 필요성. 이 교리 역시 복음 전파, 설교를 통하여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교리는 “성도의 견인”, 곧 “참음”에 관한 가르침인데, 앞부분 전체에서 신자도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 후에 14조에서 “견인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하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설교로 우리 안에서 이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기를 기뻐하셨듯이, 마찬가지로 그 사역을 보존하고 계속되게 하며 완성하시는 일에서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과 묵상하는 것, 그리고 말씀의 권면과 위협과 약속들과 또한 성례의 시행을 사용하십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방편을 사용하신다
긴 시간을 들여서 이 내용들을 다 살핀 이유는 “도르트 신조가 참 구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것을 살핀 이유는, “이 사실이 모든 장에 다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학자들 중에 칼 바르트라는 사람은 자유주의 신학이 횡행하던 때에 “오직 그리스도만”을 외쳐 수많은 그릇된 신학으로부터 정통 신학의 핵심, 그리스도 중심을 사수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 중 가장 잘못된 문제 중 하나가, 이 “그리스도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마치 그 그리스도는 공중에 홀로 계시고, 아무런 방편을 통해서도 나타나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만”을 너무 철저히 말한 나머지, 말씀조차 그리스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말씀이 찰나에 깃들 때에만 말씀은 말씀이고” 그렇지 않으면 말씀은 말씀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냐? 제가 설교의 초두에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편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 방편이 본질이 되는 내용과 뗄레야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14절에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이 말씀은 그 앞부분에 보면 6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라는 말씀 뒤에 나옵니다.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이라는 말씀 뒤에 나옵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 있었는데, 성령님께서 마게도냐 사람을 보이셔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되었고, 마게도냐 지역의 첫 성이 빌립보였으며, 그 빌립보 성에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의 마음이 제 스스로 변하게 하실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에 어느 날 갑자기 빛을 비춰 주셔서 성령님으로 인해 환하게 만드실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러 전도여행을 하고 있던 바울의 여행 스케줄을 조정하시고, 바울의 꿈에 나타나 마게도냐인을 보여주셔서, 그가 빌립보로 들어가 루디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십니까?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 눈에 보이는 직분자, 눈에 보이는 예배, 눈에 보이는 성도들을 통해서 신앙생활합니다. 하나님은 물질 세계 속에 영의 세계를 투영하셨습니다. 성찬은 말씀의 현현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은 몸을 입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물질 세계 속에 오신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
- 눈에 보이는 교회를 경시하고 하늘에 있는 추상적 교회를 마음속에 두는 일을 버리십시오.
- 시간 속에 있는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만나게 되는, 특정한 어떤 날에 예배로 나아와서 육체를 입고 나무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 예배의 시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예배와 뗄 수 없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 사람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 말씀의 주체가 주님이시며, 따라서 우리의 영혼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성경의 말씀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 주에 두 번씩 예배될 때 선포되는 여러분의 목사의 말씀을 통해서 먹고 자라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방편을 사용하시고, 방편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원하시는 때에” 부르시되, 그 사람의 마음에 신내림하듯이 말씀하셔서 그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공적인, 눈에 보이는 회중의 집합체인, 이 교회 속에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구체적 직분의 사역자를 통해서, 이상하고 기이한 신비의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이성을 사용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된 말들을 통해서, 그렇게 부르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믿을 때에만, 우리의 신앙이 사변화되고 추상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눈에 보이는 교회를 경시하지 않게 되고, 말씀 사역자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깨닫게 되며, 예배의 구체적 시간 속에서 바르게 앉아 집중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약점을 노리기 때문에, 이런 점에 있어서도 우리를 공격해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구체적 예배보다는 예배의 본질이 중요하다고 우리를 꼬드겨서,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인품이나 그와의 관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교회라는 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성도들에게 치중하는 것보다는 더 영적인 일에 시간을 소비하라고 유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둘째 주제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방편을 사용하시고, 우리는 영육합일체입니다. 주께서 이 사실에 우리에게 빛을 비춰 주셔서,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믿음이, 허공에 쌓여진 성처럼 되지 않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는 성곽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