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친교
하느님은 자비와 연민의 임금이시다. 이는 자비와 연민이라면 그분을 따라올 존재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세리와 죄인들을 실제로도 좋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과 어울리신 것은 분명하다. 거룩하고 의롭다고 자처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들을 자기들과 분리했다. 그들에게 오염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로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 하느님이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하나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줄 아셨다.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인 거처럼 그들도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그래서 그들도 당신처럼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셨으면 죽음도 피하지 않으셨다. 그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 마음을 알고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하셨다. 죄인이 벌받고 보속을 다 해서 비로소 용서받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예수님을 믿어 용서받고 다시 예수님과 우정, 그리고 하느님과 친교를 회복한다. 죄는 분리하고, 사랑은 모은다.
아들 이사악의 아내를 찾는 늙은 아브라함 마음이 참 인상적이다. 그는 며느리 될 사람은 반드시 자기 동족이어야 하고, 아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가면 절대 안 되고 그를 데려와야 한다고 한다.(창세 24,4.6) 하느님이 자기를 고향에서 불러내셔서 지금 그 땅, 가나안에서 자기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살게 한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좋아하신 이유를 알겠다. 그는 하느님을 끝까지 믿었고 그 계약에 충실했다. 시쳇말로 아브라함은 의리의 사나이다. 그러나 지금 그 가나안 땅은 전쟁 중이라 여행 금지 구역이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고수했던 그 땅이 거기가 아니라 예수님, 특히 그분의 마음이란 걸 안다. 모두를 하나로 모으려고 하셨고, 그들이 아버지 하느님 안에 있게 하시려는 간절한 바람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동체 신앙이다. 나 홀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말 어렵다. 죽을 만큼 힘들다. 오죽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희생되기까지 하셨겠나. 저 사람만 없으면 우리 공동체가 참 좋을 거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분리하고 덜어 내다보면 끝에는 혼자만 남게 될 거다. 우리 삶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이고, 분리가 아니라 모으기다. 맘에 안 들어도 봐주고, 힘들어도 견디는 거다. 그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다. 그게 하느님이 나를 그렇게 봐주시고 참아주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성실하게 성사를 받아서 얻고자 하는 게 서로 친교를 이루는 거다. 하느님 안에 함께 있는 거다. 내가 그를 덜어낸다고 하느님이 나도 그렇게 덜어내시는 건 아니겠지만 하느님은 마음 아파하신다. 그리고 나도 하느님 마음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하느님 마음은 자비고 연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님이 원하시는 건 제사가 아니라 자비고 사랑이라는 걸 잊지 않습니다. 죽도록 기도하고 수련해서 얻고자 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이 가신 길, 사랑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