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엔 형님들도 많고, 아우들도 많다.
어느 가문이나 다 그럴 것이다.
오늘은, 금년에 '팔순'이 되신 형님 얘기를 하고자 펜을 들었다.
'팔순'은 '여든 살'이며 또 다른 한자어로는 '산수'라고 한다.
아무튼 그 형님은 거의 50년 이상을 '무사고'로 운전하셨다.
안전운행의 표상이셨다.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운전의 '베테랑'이셨다.
그런데 유달리 최근 들어 두 번의 접촉사고를 내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70대 후반부터 딱지도 숱하게 날아왔다.
대부분 '스쿨존'에서 적발된 '과태료'였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탓이었다.
금년의 접촉사고는 주행 중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넣거나 빼다가 상대차와 가볍게 부딪힌 것이었다.
큰 사고도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전화번호를 잘못 고지하고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경찰서까지 출두해 조서를 작성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순간 순간 정신이 깜박 깜박한 탔이었다.
예컨대 형님의 휴대폰 번호가 010-1234-5678이고 집 번호가 02-123-4321이라고 치자.
그런데 피해자에게 알려주기를 010-123-4321이라고 하셨단다.
자신도 "왜 그리 얘기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가끔씩 머리가 띵하며 어지럽고 어느 땐 세상이 하얗게 보인다"고 고백하셨다.
웃으며 넘길 일이 아니었다.
40대 중,후반인 형님의 자식들이 "이젠 연로하셨으니 제발 면허를 반납하시라"고 권유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의 강권이었다.
"그러다 재수 없으면 인사사고를 비롯해 큰 일이 날 수도 있어요. 아버지"
지속적으로 간청에 간청을 거듭했으나 형님은 아직도 자신 있다며 자식들의 간곡한 당부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급기야 나까지 조카들의 연락을 받았다.
저간의 사정을 소상하게 들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형님을 설득하기로 했다.
전화를 드리니 처음엔 펄쩍 뛰셨다.
하지만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몇 날 며칠 지속적으로 설득을 이어가자 끝내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하셨다.
정말로 어려운 결단이었다.
그 결단이 있자마자 형님의 애마는 곧장 폐차장으로 들어갔다.
조카들과 상의해 그렇게 결정했다.
형님은 무척 아쉬워하셨다.
인지상정일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형님도 조금씩 인정하고 수용하셨다.
'반응속도'와 '집중력'이 현저하게 느려져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적지 않았다고 하셨다.
위험했던 순간들도 많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형님의 그 결정에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게 인생이다.
그런 인생길을 가다보면 누구나 깨닫는다.
기쁨은 잠간 머물다 떠나지만 슬픔과 고통은 오래 오래 우리들 곁에 머문다는 것을.
그랬다.
힘들고 슬플 때야말로 인간이 서로 연대할 수 있고, 연대해야만 하는 유일한 기회이자 가교다.
서로를 보듬으며 삶이란 다리를 함께 건널 때 우리는 슬퍼도 위로가 되고, 패배해도 승리하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혼식'엔 안 가도 '빈소'엔 꼭 가야 한다고 믿는다.
오래된 나의 원칙이다.
기쁨과 슬픔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다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형님의 좌절 아닌 좌절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곧 형님과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가 뵈려 한다.
낙심이 컸던 모양이었다.
연세를 드시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지만 당사자에겐 적잖은 절망이자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았다.
그것은 형님의 가슴에 새겨진 커다란 '크레바스'였다.
100세를 넘긴 어느 '철학자'가 그랬다.
인생의 황금기는 대략 60세에서 75세까지라고.
그러면서 노 학자는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60세인 나는 아직 그런 장구한 세월을 경험해 보지 못해 100% 공감할 순 없지만 팔할 이상은 긍정했고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 나이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자"
"노년일지라도 왕성한 호기심과 적극적인 지적활동, 다이나믹한 액티비티를 통해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래 전부터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내용 중 하나다.
우리 사회엔 성장을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린 늙은 청춘들이 많아 다소 걱정스럽긴 하지만 경각심을 가지고 우리가 '일로매진'했으면 좋겠다.
"성장하는 동안엔 늙지 않는다"는 그 의미심장한 표현에 나는 적극 동의하고 있다.
늙어서 세 가지가 없으면 비참한 '하류노인'이 된다고 한다.
그건 건강, 돈,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사람은 소통하며 서로 의지할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노인들이 겸비해야 할 세 가지 조건이다.
중, 장년 시절에 잘 나갔다고 교만해선 안 된다.
인생 2막이 어떻게 전개될 지 그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미래를 예비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인은 외롭다.
그것도 지독하게 외롭다.
그리고 누구나 세월이 흐르면 늙고 병든다.
속절없다.
그래서 상호간에 '부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지만 유기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요청이자 시대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부조 시스템'의 구축과 유기적인 '커뮤니티'의 형성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매주 주말이 바쁘다.
몰염치, 무책임, 이기심을 버리자.
그리고 상호간의 긴밀한 소통, 동참, 헌신을 통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또한 미래 세대를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가슴 따뜻한 사람들임을 증명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는 생각에서 머물지 말고 진중하게 그리 행동할 시간이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진리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하루 하루 꽉꽉 눌러서 살자.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개똥철학 중 하나는 '여한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네 장미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나는 지금 소중한 인연들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가?
또한 내 인생을 얼마나 공을 들여 경작하고 있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는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어느새 '2023의 시월'이 막을 내리고 있다.
한 달 동안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편안한 밤시간 보내시길.
모두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싶은 밤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11월 더욱 상큼한 발걸음 하세요.
운전면허 반납하신 형님과 소중한 시간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