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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에 인봉한 자들
느 10:1-27
1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2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
3 바스훌, 아마랴, 말기야,
4 핫두스, 스바냐, 말룩,
5 하림, 므레못, 오바댜,
6 다니엘, 긴느돈, 바룩,
7 므술람, 아비야, 미야민,
8 마아시야, 빌개, 스마야이니 이는 제사장들이요
9 또 레위 사람 곧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갓미엘과
10 그의 형제 스바냐, 호디야, 그리다, 블라야, 하난,
11 미가, 르홉, 하사뱌,
12 삭굴, 세레뱌, 스바냐,
13 호디야, 바니, 브니누요
14 또 백성의 우두머리들 곧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
15 분니, 아스갓, 베배,
16 아도니야, 비그왜, 아딘,
17 아델, 히스기야, 앗술,
18 호디야, 하숨, 베새,
19 하립, 아나돗, 노배,
20 막비아스, 므술람, 헤실,
21 므세사벨, 사독, 얏두아,
22 블라댜, 하난, 아나야,
23 호세아, 하나냐, 핫숩,
24 할르헤스, 빌하, 소벡,
25 르훔, 하삽나, 마아세야,
26 아히야, 하난, 아난,
27 말룩, 하림, 바아나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 등 지도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서약서를 쓰고 서명을 하였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혜미야와 시드기야(1-8) 첫 번째로 서명한 사람은 느헤미야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등이 서명을 했습니다(1). 많은 학자들은 시드기야가 총독 느헤미야의 서기관이었던 사독과 동일인물로 봅니다(느 13:13). 이는 두 이름이 “의롭다”(צךקה)라는 어근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고위급 인사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서명은 최고 지도자의 결심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특히 2-8절의 서명자들은 모두 제사장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많은 주의 종들도 정치, 경제, 사회 등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을 섬기며 인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레위 사람 곧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9-13)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갓미엘과 그의 형제 스바냐, 호디야, 그리다, 블라야, 하난 등, 레위 사람들도 서명을 했습니다(9). 레위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준비와 내부청소 그리고 외곽을 경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이 상부조직이라면 이들은 하부조직으로 온갖 궂은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명에 솔선수범을 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과 성전을 관리하는 지파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할 때 모세를 도아 그들을 처단했기 때문입니다(출 32).하나님께서 이런 충정을 보시고 제사장과 성전관리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신 33). 그 후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 일에 항상 앞장섰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백성의 우두머리는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라(14-27)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로 느헤미야를 따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겠다고 서명을 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많은 인물들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용기 있게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과 중심을 아시고 성경에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서울 양화진에 순교한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자세히 모르지만 하나님은 복음전파를 위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다 아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나이다”(시 139:1-2)
적용: 본문에 인봉된 이름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충성된 삶을 삽시다. 무엇보다도 천국의 생명록에 내 이름이 인봉(기록)되는 삶을 삽시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나 현재를 조망해야 한다.<이민규-자기긍정의 힘 중에서> 결단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무너진 성벽을 세우고 믿음도 다시 회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구체적인 결단과 실천이 있는 오늘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
느 10 : 1, 27-39 / 김인환목사(광교지구촌교회)
■ 생각해 볼 이야기
최근구약설교 : [ ] 등록일 : 2017년11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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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
>성경본문|
느10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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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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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인환목사
>비 고|
광교지구촌교회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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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
(느 10 : 1 / 27 ~ 39절)
■ 생각해 볼 이야기
어느 날, 젊은 화가에게 한 유명한 정치인이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초상화를 찾으려 하니 갑자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어차피 자신의 초상화이기 때문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살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정치인은 초상화가 자신을 닮지 않았다는 억지를 부려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는 알았다고 하더니 그림이 그 사람과 닮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서명을 요구했습니다. 정치인은 흔쾌히 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정치인은 그 젊은 화가의 전시회에 갔다가 기절해 넘어질 뻔했습니다. 전시회에 걸린 자신의 초상화에 이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도둑놈의 초상^^’ 정치인은 원래 계약했던 가격의 수십 배를 주고 그 그림을 사야만 했습니다.^^
- 살아가면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처럼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입니다.
- 하지만 살다보면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 약속을 너무 쉽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 성경 속의 진리 찾기
■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약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명단입니다. 누구와 약속을 했다고요? 하나님과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요? 지킬 수 없을 거예요. 아니 왜 그렇게 단정하냐고요? 단정할 수밖에 없지요? 느헤미야 9장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회고했던 것처럼 약속을 지켜본 적이 없었거든요.
- 그래요. 그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또 약속을 어길 수 있다.’
- 그런데 그들은 이번 약속에 자신들의 목숨을 겁니다. 본문 29절 보세요.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 뭐라고요? 저주로 맹세한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아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 아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 좋지요. 그런데 우리도 해봤지만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수없이 말씀 따라 사는 것에 실패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이 목숨까지 걸고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말씀 따라 살겠다는 약속에 목숨을 건 것일까요? 그것은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 아니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처럼 저주스러운 인생이 없다는 것을 바벨론의 포로로 살면서 70년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들처럼 다시 하나님 앞에서 다시 목숨 걸고 약속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키자 했던 약속의 내용들이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아니 반드시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저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에 소개된 이 약속들을 지킴으로 가장 축복된 인생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Ⅰ.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은 무엇일까요?
■ 진리 찾기 /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 왜요? 구별된 삶,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간다 할지라도 구별된 삶, 성도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 인생처럼 불쌍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뿐인 자신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 그런데 그들은 이상한 약속을 해요. 본문 30절 보세요.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 자, 29절에서 저주로 목숨을 내놓는 맹세를 하고 나서 이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자식들을 이방인들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목숨 걸고 지켜야할 약속입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 뭐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습니다. 뭐 이런 지켜야할 더 중요한 약속들이 있잖아요.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결혼시키지 않으면 저 같이 딸만 둘이 있는 사람은 결혼시키기가 매우 어려울 거예요. 교회에 형제들이 별로 없잖아요.
- 지구촌교회 있을 때 청년부에 괜찮은 청년 하나 오면 자매들의 눈에 불이 켜져요.^^ 교회에 같이 다니던 형제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늘 새로운 청년을 구해요. 그래서 제가 이미 교회 잘 다니고 있는 ‘저 형제 괜찮지 않니?’ 그러면 아니래요. 그래서 ‘왜 별로인데’라고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냥 교회 오빠에요.
- 자매들에게 아는 오빠, 교회 오빠, 동네 오빠는 다 별로예요. 그 중에서 구해야 하는 것인데 어디서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백마탄 왕자는 안 나타납니다. 제가 알아보니까 백마탄 왕자는 말 타고 오다가 낙상해 죽었어요. 그런데도 자매들은 믿지 않는 형제가 나타나면 백마탄 왕자인 줄 알고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는 깨닫지요. 백마탄 웬수였다는 것을. 백마도 빌린 거예요^^
그래서 전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세은이와 세진이가 교회 오빠가 교회 오빠가 아니라 이성으로 느껴지게 하옵소서! 그리고는 저도 우리 아이들과 나이가 맞을 법한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없어요^^
- 믿는 사람과 결혼하기 정말 쉽지 않아요. 게다가 요즘 농촌에 있는 형제들은 이방인이 아니면 결혼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포로에서 돌아와 아무런 기반이 없는 그들이 다시 정착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이방인들에게 자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0절 다시 잘 읽어 보세요.
…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
- 그래요. 이방인과의 결혼은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이 가장 쉽고 빠르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식들을 이방인들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제일 먼저 약속했을까요? 그것은 이방인들과 결혼이 당장에는 유익한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었거든요.
- 그래요. 그들은 지금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무리 막대한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를 포로에서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 은혜와 사랑을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익과 바꾸지 않고 거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포로에서 돌아와 가장 편리하고 빠르게 정착할 수 방법, 이방인들과의 결혼,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겠다는 이 약속이야말로, 오늘 세상이 주는 눈앞의 이익에 멀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별된 삶 살지 못하는 우리가 제일 먼저 회복해야 하는 약속이 아닐까요? 그 약속, 목숨 걸고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은 무엇일까요?
■ 진리 찾기Ⅰ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약속입니다.
- 이방인과 섞여 구별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구별된 삶,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세상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이죠.
- 그런데 그런 그들이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하고나서 제일 먼저 꺼낸 것이 바로 안식일 준수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것이죠. 본문 31절 보시죠.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 무슨 말이에요? 장사나 거래를 하지 않고 철저하게 안식일과 땅의 안식년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안식일에 장사나 거래, 아니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 7년째에는 수확없이 지내라는 것입니까?
- 이것 역시 오늘날 문자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주일에 일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거든요. 아니 주일에 일을 해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님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목사라서 주일을 지켜야만 하는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신 분들, 주일에 장사를 해야 해서 이른 예배를 드리고 교회 봉사도 제대로 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도 신실한 믿음으로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 중에 한 분이 이른 예배를 드리고 나가다 말고 제게 기도 제목을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저 소원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주일, 주일만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할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그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 사실 그들도 그랬을 거예요. 백성들에는 안식일에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포로에서 돌아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쉴 수 있었겠어요? 쉬지 않고 일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 기억하시나요? 느헤미야 5장 1-5절입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 그래요. 그들은 안식일에도 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포로기를 경험했던 지도자들도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일을 포기하고 안식일을 지키기로 합니다. 왜요? 안식일은 힘들지만 손해 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할 율법이니까요?
- 아니요. 안식일은, 분주히 살아가는 그들, 쉬지 않고 일해도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지시는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 무슨 말이에요?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쉼 없이 일했는데 지치는 거예요.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자식새끼 먹이고 내일을 준비하려고 얘쓰면 애쓸수록 더 큰 불안과 낙심이 찾아오는 거예요.
‘왜 그럴까? 왜 열심히 일하는 데 쉼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누구보다도 부모에게 물려 받은 것 아무 것도 없이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는 다른 사람 다 가는 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쉬지 못하는 것일까?’
- 그런데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니 깨달아졌어요. 아, 여행 못가서 쉬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돈을 벌지 못해서 쉬지 못하는 게 아니었구나. 쉬지 못한 것, 그것은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었구나!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주일을 지켜야 할까요? 주일이니까 율법이니까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요. 하나님을,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께 가지 않는 한 그 어디에도 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쉬지 않고 일하다 지친 우리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허락하신 주일, 이 날, 적어도 이 날만큼은 주님만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안식하십시오. 그래야 살아갈 힘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세상이 알 수 없는 힘과 기쁨이 차오를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은 무엇일까요?
■ 진리 찾기 Ⅰ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며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것, 그리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것, 이 두 약속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두 약속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축복된 삶을 위한 약속이라는 것이죠.
-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어린 자녀들과 약속을 합니다. 우리 땡땡이 일찍 일어나고, 양치 꼭 하고, 밥은 반찬 투정하지 않고 골고루 잘 먹기다. 약속? 이게 엄마를 위한 약속이에요. 아이를 위한 약속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생각합니다. 엄마를 위해서 힘들지만 해 줘야지 뭐.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직도 애기입니다. 애기.
- 무슨 말을 제가 하고 싶은 것입니까?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한 약속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별된 삶을 살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산다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되거든요.
-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위해 지켜 드리는 것이란 생각을 벗어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수준은 애기입니다. 애기. 자, 옆 사람과 인사해 볼까요? 애기에요? 아니에요?^^
- 그래요. 지금까지의 약속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예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지켜드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지키기 힘들었겠지요.
- 그런데 깨달은 거예요.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살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어 안식일을 지키며 사는 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살 것을 목숨 걸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지만 지금부터 나오는 본문의 약속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 같지 않아요.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본문 32절 보시죠.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 뭐라고요? 스스로 규례를 정하여 성전세를 내겠다는 거예요. 아니 뭐에 쓰려고요? 33절 보세요.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 무엇을 위해 쓴다고요?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 즉 예배가 잘 드려질 수 있도록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 소제는 번제는 매일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며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할 것을 다짐하는 제사입니다. 게다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는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 예배인데 그 때 필요한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 그뿐입니까? 번제단의 화목을 드려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해마다 햇곡식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맏아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을 제사장들에게 주고,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이야기가 37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38절에서 그 십일조를 떼어 먹지 않기 위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줄 때 제사장을 동석하겠다는 것입니다.
- 아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지킬 수 없는 약속 아니에요? 그런데 이들은 왜 그렇게 철저히 성전을 위하여 헌신하고 첫 열매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랜디 알콘은 “내 돈인가 하나님의 돈인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돈과 소유를 어떻게 보고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천국과 지옥을 합친 것보다 기도와 믿음을 합친 것보다, 그 어떤 주제보다 더 많이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영적 상태와 돈과 소유에 대한 태도와 행동 사이에는 밀접하고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물질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축복된 삶 살기 위해 무엇보다도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늘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삶의 결단으로 십일조는 물론 첫 열매, 아니 성전의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게 하기 위해 성전을 위한 물질을 아낌없이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며 살 때만이 주인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으로 늘 새 힘 얻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말씀따라 생활속으로
- 정말 열심히 일해 누구 못지않게 부유했던 한 형제집사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기와 도난을 당해 사채를 얻어 마련한 조그만 개인 매장에 집을 얻을 수 없어 사랑하는 외동딸과 매장 의자를 나란히 놓고 잠을 청해야 했지요. 사랑하는 딸이 의자에서 잠을 자다 떨어져 아빠 우리 집에 가자라는 말을 들으며 가슴 아픈 밤을 지냈던 집사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 그런데 그 집사님에게 누구도 힘이 되어 주지 못할 때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쉬게 하셨습니다. 이후 그 집사님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 지, 집도, 가정도 없는 있는 거라고는 사채만 가득한 그 형제 집사님이 아침에 큐티를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져 눈물범벅이 되어 그 은혜 나누려고 전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 그런데 어느 날, 표정이 너무 슬픈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하나님과 약속한 개척비전헌금 이번 달에 내지 못해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과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이번 달 받으신 집사님의 비전헌금은 바로 집사님의 눈물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성전을 잘 짓고 예배 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무조건 지키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그것은 십일조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것은 그것을 온 맘 다해 지킬 때 주어지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 그 평안과 기쁨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만이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킵니다. 아니 그 약속을 지키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그 약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느헤미야 10:1-31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송지훈 목사
전에 살펴보았던 느헤미야 9장은 유다 공동체가 죄로 인한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언약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들은 결심한 내용을 글로 적고 그 위에 서명합니다. 원래 그들 마음에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었지만, 이제 돌이키고 다시금 말씀을 마음의 중심으로 세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는 율법 선포가 등장합니다. 9장에서는 신앙 고백이 등장합니다. 10장에서는 언약을 갱신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보통 이러한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교통이나 지식적인 공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말씀을 통해 알고, 그 뜻 안에 사는 것이 복된 길이라는 것을 우리 신앙으로 고백하며, 그것으로 내 삶을 실제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그 과정을 정당하게 보여줍니다. 느헤미야서는 훼파된 성읍을 보고 아파하는 장면과 그 성벽을 재건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하드웨어가 완성되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채울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이 선포되고, 신앙을 고백하며, 언약을 갱신합니다. 이러한 10장의 내용은 느헤미야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언약에 인봉한 사람들(1-27)
(1)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1-27절에는 느헤미야서 9장 28절에 말한 언약 위에 인을 친 사람들의 명단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세우기로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의 기초로 삼아 살겠다는 결단을 서명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이 이름 중 1절부터 8절까지는 제사장 그룹의 여러 성씨가 등장합니다. 9절부터 13절까지는 레위인들의 명단, 14절부터 27절까지는 백성의 지도자들의 명단이 등장합니다. 제사장, 레위인, 백성의 지도자들이 인봉했다는 것은 그 공동체 대표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음을 보여줍니다.
인봉한 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언약에는 우리의 인격이 담겨야 함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중요하고 그것이 신앙고백으로 표현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 되고, 그 고백이 우리 인격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교회들의 아픔이나 어려움, 회복되어야 할 부족한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때로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하곤 합니다.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교회들의 부족한 점을 말하며 나의 인격은 제외해두고, 공동체를 타자화하여 비난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회복은 ‘나 자신’이라는 인격을 제외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돌이켜야 하며 내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명 한명이 공동체의 대표라는 인식을 가지고 우리 이름을 언약에 인봉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한 개인의 부정함이 공동체에 전염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그 반대로 예수님의 정함이 부정한 사람에게 옮겨가 그를 정케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둘 중 어떤 방향이든 우리가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악이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우리의 예수 안에 거하고자 하는 노력이 공동체를 회복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크리스천은 인류의 대표들이며,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대표들입니다. 귀환한 유다 공동체의 대표가 자신들의 이름을 언약 위에 인봉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로부터 회복이 시작될 것을 꿈꾸며, 내 인격과 이름을 언약 위에 인봉하길 원합니다. 28-29절을 보겠습니다.
지키기로 한 계명과 규례와 율례(28-31)
(28-29)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28절부터는 유다 공동체가 무엇을 다짐했는지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28절에 등장하는 ‘그 남은 백성’이라는 표현은 느헤미야 7장 27절에도 등장하는 표현으로 성벽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한 대표자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28-29절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기로 다짐한 자들은 대표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제사장에서 종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그 다짐에 동참했습니다.
한 인격들의 고백과 노력은 개인의 다짐에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의 다짐이 공동체의 다짐이 되고, 공동체의 소망이 개인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개인의 다짐과 결단이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 대표자들은 이기적인 소망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나 개인의 영적 유익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결단하고 세워져가는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이제 다른 표현도 살펴보겠습니다. 이 모든 공동체 구성원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은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 중 ‘총명’이라는 단어는 느헤미야 8장 2절에도 등장합니다. 느헤미야 8장 2절에서는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율법책 앞에 모인 남녀노소의 모든 백성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이 총명이라는 단어는, 식별하다, 분별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번 주 설교를 통해서도 들었듯,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 행하심을 분별하는 능력이며, “총명”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뜻과 말씀과 행함을 분별하고 해석하며, 주신 구원의 은총을 깨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깨달을 때, 그 은총에 감사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유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9장에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으며 하나님께 범죄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회개함도 잃어버린 채 오랜 기간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랜 기간 인내하시며 그들이 돌아오를 기다리셨으며, 성실과 인내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모두 다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키기로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지혜와 총명을 주사, 자격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이제 우리 인격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아, 평생을 바치리라 다짐하는 것입니다. 유다 공동체는 그렇게 회복을 향해 걸어갔고,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이제 30-31절을 보겠습니다.
(30-31)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유다 공동체가 처음으로 맹세한 항목은 자녀들을 “이 땅 백성들” 즉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7장 3-4절에 기반합니다. 신명기에서 그러한 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택한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고, 그 땅의 관습과 문화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며 살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이미 압도적이고 편만한 이방의 문화 속에서 거룩함을 지켜나가는 것 말입니다.
즉, 우리의 다짐은 나의 정서적인 결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세상 모든 것들이 내 다짐을 도와주진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먹는 순간 이제 마음 외부에서 환경과 다툼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관습을 뚫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파동을 만들어가며, 세상을 전염시켜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혼 금지로 시작된 다짐은 안식일 준수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미 그 땅에는 오랫동안 이방인들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안식일에도 온갖 곡물을 사고팔았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고 윤택하게 살아가려면 이미 자리 잡은 문화와 관습을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윤택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버린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소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닌 세상의 법을 따를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으며,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안식일 준수에 대한 다짐은 안식년 준수의 다짐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다짐합니다. 여기서 확장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다짐과 인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았던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이제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은 그 공동체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공동체가 온전히 규례와 율례 안에 거하기로 다짐할 때, 그 공동체는 고립되고 분리돼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문화와 관습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분투하게 됩니다. 즉 개인이 공동체로, 공동체가 이웃과 사회에게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법이 온 세상에 편만하게 적용될 때, 결국 이웃과 세상 속에 선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빚은 탕감되고, 노예였던 자들이 자유하게 되며, 그 땅은 쉼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은 결코 협소하거나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우리 주변 사람들, 가족과, 이웃과, 동료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사회와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분의 선하심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삶의 방식이 사람을 살리고 자유케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소망하며 오늘도 창문을 열고 하나님의 향해 나아가십시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신비를 깨달아,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올려드리십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인생은 개인의 영락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며, 이웃과 세상에 자유를 선포하는 인생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앞에 나아가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언약을 갱신하며 회복을 꿈꾸었던 유다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못난 자신의 모습, 어렵고 힘든 상황 앞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회복을 소망하게 하옵소서. 나의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며, 개인의 유익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시작된 회복의 공동체를 통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시고, 오늘 하루도 그러한 회복을 경험하는 하루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느헤미야 10장 1-39절
김신년목사
서약한 이름
느헤미야 10장에서는 주님 앞에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여 서약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9장 마지막 절과 10장 1절에 “인봉 하다" 라는 단어는 중요한 문서에 도장을 찍거나 이름을 적고 밀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내용의 언약 갱신문서에 자신의 이름이나 도장을 찍어 맹세하고 인봉 하여 보관했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언약한 사람들의 이름이 본문에 언급됩니다. 1-8절입니다.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 바스훌, 아마랴, 말기야, 핫두스, 스바냐, 말룩, 하림, 므레못, 오바댜, 다니엘, 긴느돈, 바룩, 므술람, 아비야, 미야민, 마아시야, 빌개, 스마야이니 이는 제사장들이요”
1-8절은 총독 느헤미야를 필두로 제사장의 명단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서명한 명단 맨 앞에 총독 느헤미야의 이름이 그리고 영적 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와 제사장들이 솔선수범하여 서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13절은 서명한 레위인들의 명단이고 14-27절은 서명한 지도자들의 이름입니다. 28절에 보면 봉인된 문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어도 그 외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성전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영적 개혁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뿐만 아니라, 무너져내린 자신들의 죄악 된 삶을 돌이키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영적 쇄신을 이루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어 있는 여러 이름은 우리에게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당시 예루살렘 땅을 밟고 살아가던 많은 사람 중 하나님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존재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시 영적개혁과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용기있게 일어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 하나하나, 그 이름 하나하나를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여기 기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 직장, 학교,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지키며 살아가겠다고 분연히 일어나는 주님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름을 비록 이 시대가 기억해 주지 않더라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주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100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 잊혔던 양화진 묘역에 계신 선교사님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조명 아래 다시 주목받고 기억되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 분연히 일어선 주님의 사람들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기록해 놓으십니다. 그 이름 하나하나가 주님의 나라에 각인될 것입니다.
솔선수범
그 인봉된 문서에 서명된 이름 중 그 맨 앞에 총독인 느헤미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으로 시작된 회개와 영적 개혁의 변화는 그 선두에 앞장선 느헤미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앞장서 개혁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자신의 봉급도 포기하고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포기하며 선두에서 솔선수범하는 느헤미야가 있었기에 성벽재건과 영적 개혁은 이스라엘 전반에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영적 개혁에 가장 앞장서서 이스라엘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가도록 돕고 있는 지도자 느헤미야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를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려야 할 권리를 하나도 취하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시면서 헌신과 희생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앞장서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느헤미야가 자신의 봉급도 포기하고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포기하며 선두에서 솔선수범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고 그 분이 우리에게 예수의 영,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인생 대오에 앞장서십니다. 솔선수범하여 인도하시는 그분을 따라 우리도 오늘 하루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 예수를 따르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맹세한 언약의 내용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이 지키기로 맹세한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1) 29절-30절, 자녀들을 이방 백성과 혼인하게 않겠다.
2) 31절, 안식일과 안식년을 구별하여 지키겠다.
3) 32-34절, 성전과 제사를 위한 일에 헌금과 헌물을 드리겠다.
4) 35-38절, 첫 열매, 첫 소산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겠다.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위의 네 가지 실천을 구체적으로 행하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39절 후반 절에 한 문장으로 집약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포로 생활하던 바벨론에서 돌아온 초창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초토화된 예루살렘과 무너진 성전뿐이었습니다. 이때 자기 살 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아가는데 몰두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은 이렇게 황폐해져 있는데 어찌 너희 집 꾸미는 데에만 그렇게 관심이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학1:4),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서운함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어 있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은 다시 세워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 재건되었던 그대로 성전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회복되니, 그 첫 번째 반응이 하나님의 전을 이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회복되고 그들에게 영적 쇄신이 내면에서 일어나니 방치되어 있던 성전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방치할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 가운데서 건지신 예수님으로 인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결코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코 죽음의 권세 아래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영역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이라면 결코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 시대 예수님의 몸으로 남겨놓으신 교회요, 그 교회의 본질을 경험하는 소그룹 공동체- 구역이요, 가장 작은 교회- 가정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더 이상 구역, 가정을 그대로 방치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해 몸과 마음, 그리고 물질과 재산까지도 기꺼이 사용하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우리도 이 아침, 다짐하십시다. “우리 하나님의 교회를, 우리 하나님의 구역을, 우리 하나님의 가정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로 서명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의 이름도 주님앞에 기록되는 참된 헌신자와 사명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하고 완전한 지도자이신 예수를 본받아 오늘 이 세상속에서 앞장서 솔선수범의 일상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이 몸된 교회와 구역, 가정을 바로 세워가는 일에 주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물질과 재산도 기꺼이 사용할 줄 아는 바른 신앙인 되게 하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느헤미야와 제사장들,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약하였듯이 하나님이 나에게 서약을 요구하신다면 나의 서약서에 담길 내용은 무엇일까요?
2. 지금 나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이 솔선수범하여 행하실 일은 무엇일까요?
3.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머무시는 곳, 하나님의 관심이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지금 소홀히 하거나 방치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언약에 인을 친 지도자들
느 10:1-27 / 최영백목사
전장인 느헤미야 9장은 온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회고와 민족 대 각성운동을 보도한 내용이었다. 이어진 10장 본 장은 전장의 민족 대 각성운동의 결과에서 비롯된 언약 갱신과 관련한 보도이다. 백성의 대표자들이 새로이 제정된 언약에 인을 침으로서 율법 준수를 맹세한 사실을 밝힌 부분이다. 이러한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전반부 1-27절은 율법 준수에 대한 맹세의 증거로서 인을 친 백성의 대표자들의 명단이다. 후반부 28-39절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걸친 규례와 성전 제사와 관련된 전반적인 규례 준수를 맹세한 내용이다. 따라서 10장은 그 주제가 크게 둘로 구분된다.
그중 율법 준수를 맹세하고 언약에 인을 친 지도자들의 명인 1-27절까지는 직제(職制) 상 네 그룹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본 단락은 구속사적 교훈까지 다섯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1) 정치 지도자들(1절)
언약 갱신에 맹세하고 인을 친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된 직제는 정치 지도자들이다. 이에 대해 1절에서 두 인물을 소개하였다.
(느 10:1)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여기서 인을 쳤다는 것은 기록된 문서에 법적으로 동의하고 서명 날인 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장 먼저 인을 친 인물을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라고 하였다. 이중 느헤미야는 본서의 저자이며 전체 역사의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저를 방백이라 하였는데 바사의 관직명에 의하면 총독으로 이해함이 보다 바람직하다. 공동번역 성경이나 표준 새번역 성경은 모두 총독으로 번역하였다. 본서의 저자인 느헤미야에 대해서는 본서 개론과 1:1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시드기야’는 그 이름의 의미가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이다. 그런데 이 시드기야에 대해서는 본문 외에 별도로 소개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저가 정확히 어떤 직책을 가진 인물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저가 느헤미야의 수석 비서관이나 서기관일 것이란 견해를 말하기도 한다.
한편 정치 지도자 느헤미야는 이처럼 소개된 반면 종교지도자로서 당시 민족 대 각성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에스라는 그 이름이 누락 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에스라가 언약에 서명을 받은 사람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에스라가 2절에 기록된 대제사장 스라야 가문에 속한 인물(7:1)이었기에 대제사장 엘리아십(느 3:1)과 같이 그 이름이 빠졌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스 7:1). 그것은 본문에 기록된 이름들이 단순한 개인의 차원이 아닌 각 가문을 대표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인가는 확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서의 언약 갱신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 에스라임은 명백하다.
2) 제사장 그룹(2-8절)
앞선 1절은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소개였다. 이어지는 2-8절까지는 언약 문서에 인을 친 제사장 가문의 대표자들 이름이다. 그럼에도 그 명단이 모두 개인의 이름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이름과 가문의 이름이 혼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소개된 21명의 이름 중 15명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1차 포로귀환 자들이기 때문이다.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1차 포로귀환 자들이라면 그들이 이때까지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때와 지금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이들은 가문의 대표자들로 나이가 꽤나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10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본서 12:12-21절에서 이들 중에 다수가 각각 제사장 가문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도 그러하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개인의 이름과 가문의 이름을 혼재하여 기록한 것은 기록상의 오류나 정보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이름을 드러내기 보다는 가문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언약에 인을 친 행동이 가문에 속한 구성원들 전체의 결단이었음을 밝혀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 개인의 이름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도 역시 개인의 자격이 아닌 백성들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날인 하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튼 가문이나 백성들의 대표로서 인을 친 제사장은 모두 21명이다.
2절에서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세 사람이 소개되었다. 제사장 가문에서 맨 먼저 소개된 ‘스라야’는 ‘여호와께서 권세를 잡으셨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란 뜻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가문의 이름이다. 저는 에스라 2:2에서 스룹바벨과 함께 제1차 포로귀환에 동참한 자로 소개되었다. 그러기에 본서 12장에서 1차 포로귀환자들 가운데도 저의 이름이 등장한다. 스라야는 학사 에스라의 부친이다. 따라서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로 추정된다(스 7:1-5). 본서 11:11에서는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로 역시 스라야가 소개되는데 이는 같은 인물은 아니다.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란 뜻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란 뜻이다. 저 역시 스룹바벨과 함께 제1차 포로귀환 때 귀환한 인물이다(스 2:2).
3절에서는 ‘바스훌, 아마랴, 말기야’가 소개되었다. 이중 ‘바스훌’은 ‘찢어짐’이란 뜻으로 보기도 하고, ‘평화’나 ‘해방’이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저는 스 2:38절에서도 소개되었다. 저의 자손 1247명이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에 동참을 하였다. 바스훌은 과거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에 채워 구덩이에 가두는 등 가혹한 핍박을 가했던 인물이다(렘 20:1-3). 때문에 예레미야는 저에 대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게 될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렘 20:4-6). 그럼에도 저의 자손들이 1차 포로귀환에 많은 수가 동참하였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언약 갱신에 동참을 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들의 진정성 있는 회개와 신앙의 회복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아마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란 뜻이다. 이들 가문도 제1차 포로귀환에 동참한 가문으로 본서 12:2에서 소개하고 있다. ‘말기야’는 ‘여호와에 임명된 왕’, 혹은 ‘나의 왕은 여호와시다’란 뜻이다. 이는 1차 포로귀환 때는 그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8:4에서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강해 할 때 강단에 함께 올랐던 인물이다.
4절에서는 ‘핫두스, 스바냐, 말룩’이 소개되었다. ‘핫두스’도 스룹바벨과 함께 제1차 포로귀환자로 본서 12:2에서 밝혀주고 있다. 스 8:2에서는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인물로 소개되는데 거기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는 같은 인물이 아닌 동명이인이다.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번영케 하셨다’란 뜻이다. ‘말룩’은 ‘통치하다’, ‘다스린다’란 뜻으로 이 가문 역시 1차 포로귀환 때 귀환한 것으로 본서 12:2에서 밝히고 있다.
5절에서는 ‘하림, 므레못, 오바댜’를 소개하였다. ‘하림’도 제1차 포로귀환 때 귀환한 가문이다. 스 2:39에 보면 그의 자손 1017명이 귀환하였다고 하였다. 이름의 뜻은 ‘봉헌 된’, ‘바쳐진’이다. 저는 다윗이 세운 제사장 24반열 중에 세 번째 반차에 속한 제사장이다(대상 24:8). ‘므레못’은 ‘높은 곳들’이란 뜻이다. 본서 12:15에서는 ‘므라욧’으로 소개되었다. ‘오바댜’는 ‘여호와를 섬김’이란 뜻이다. 제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인 12:1-7절이나 12:12-21절 단락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는 새롭게 생긴 가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6절에서는 ‘다니엘, 긴느돈, 바룩’이 소개되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재판 하신다’란 뜻이다. 역시 1차 포로귀환자를 밝힌 12장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다. ‘긴느돈’은 ‘정원사’란 의미이다. 12:4에서는 ‘긴느도이’로 소개되었다. 이들은 제1차 포로귀환 때 귀환한 가문이다. ‘바룩’은 ‘복된’이란 의미의 이름이다. 1차 바벨론 포로 명단을 소개한 12장에서는 그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다.
7절에서는 ‘므술람, 아비야, 미야민’이 소개되었다. ‘므술람’은 ‘동맹’ 혹은 ‘친구’란 뜻이다. 역시 12장에서는 그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아비야’는 ‘여호와께서는 나의 아버지시다’란 뜻이다. 12:17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1차 포로귀환자 가문임을 알 수 있다. ‘미야민’은 ‘운이 좋은’이란 뜻이다. 에스라서 10:25에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제사장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서 12:17에서는 ‘미냐민’으로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이들도 1차 포로귀환자 가문임이 분명하다.
8절에서는 ‘마아시야, 빌개, 스마야’가 소개되었다. ‘마아시야’는 ‘여호와는 피난처이다’란 뜻이다. 12:5에서는 ‘마아댜’로, 12:17에서는 ‘모아댜’로 소개되었다. ‘빌개’는 ‘나의 즐거움’이란 뜻이다. 12:5과 12:18에서는 ‘빌가’로 소개되었다. ‘스마야’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란 뜻이다.
8절 하반절에서 ‘이는 다 제사장이요’라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소개된 21명이 모두 제사장 가문임을 밝혀준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의 21가문이 언약에 인을 쳤다는 것은 레위인이나 족장 그룹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많은 수가 동참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이 신앙의 개혁에 보다 열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3) 레위인 그룹(9-13절)
언약 문서에 인을 친 제사장 가문에 이어 9-13절까지는 레위인들의 명단이다. 그러기에 9절 서두에서 ‘레위 사람’이라고 적시하였다. 여기서는 총 17명의 명단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레위인들은 제사장들과 달리 가문의 명단이 아니고, 가문이나 부족을 대표하는 개인의 이름으로 보인다. 그것은 8:7이나 9:4, 5 등에서 이들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데 모두 개인의 이름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스 2:40과 3:9절, 또 제2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본서 7:43 등에도 이들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들 역시 가문의 이름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시 이스라엘은 동명이인이 많았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9절에서는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갓미엘’ 세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예수아’는 ‘아사냐’의 아들로 소개되었는데, ‘아사냐’는 오직 본문에서만 소개된 인물이다. ‘예수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란 뜻이다. 저는 민족 대 각성 운동 때 강단에 올라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한 사람이다(9:4). ‘빈누이’와 ‘갓미엘’의 부친으로 소개된 ‘헤나닷’ 역시 오직 본문에서만 소개되어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빈누이’는 ‘세워진’이란 뜻이다. 그리고 ‘갓미엘’은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자’란 뜻이다. 이들은 앞서 소개된 예수아와 함께 강단에 올라 기도한 인물들이다(9:4).
10절에서는 ‘그 형제 스바냐, 호디야, 그리다, 블라야, 하난’ 다섯 사람이 소개되었다. 여기서 ‘그 형제’란 표현은 육신적인 가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같은 레위인이란 의미의 표현이다.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번영케 하셨다’란 뜻이다. 이는 앞의 4절에 나오는 제사장 지파에 속한 ‘스바냐’와는 동명이인이다. ‘호디야’는 ‘여호와의 영광’이란 뜻이다. 나팔절에 에스라가 율법을 강해할 때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었고(8:7), 민족 대 각성 운동 시 높은 강단에 올라 크게 기도한 인물이기도 하다(9:5). ‘그리다’는 ‘왜소한’, ‘불구’란 뜻으로 이 역시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닫도록 해석해준 인물이다(8:7). ‘블라야’는 ‘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란 뜻이다. 저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역하고 깨닫도록 해석해준 인물이다(8:7). ‘하난’ 역시도 마찬가지다(8:7). 그 이름의 뜻은 ‘은혜가 넘쳐흐르다’이다.
11절에서는 ‘미가, 르홉, 하사뱌’ 세 인물이 소개되었다. ‘미가’는 본 절에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다.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란 뜻의 ‘마가엘’의 단축형이다. ‘르훕’은 ‘넓은 곳’이란 뜻의 이름이다. ‘하사뱌’는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란 뜻이다. 저는 제2차 포로귀환 때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인물이다(스 8:19). 또 느헤미야가 주도한 성벽 건축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3:17).
12절에서는 ‘삭굴, 세레뱌, 스바냐’가 소개되었다. 이중 ‘삭굴’은 ‘마음에 두는’이란 뜻이다. ‘세례바’는 제2차 포로귀환 때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인물로서 에스라의 강해를 통역하고 해석해준 인물이다(8:7; 스 8:18). 또 민족 대 각성 운동 시 강단에 올라 기도한 인물로도 소개 되었다(9:4).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번영케 하셨다’란 뜻이다. 앞의 4절에서 제사장 가문으로 소개되었는데 동명이인이다.
13절에서는 ‘호디야, 바니, 브니누’ 세 사람이 소개되었다. ‘호디야’는 ‘여호와께서 나의 영광이 되신다’란 뜻이다. 저는 에스라의 율법 강해시 통역과 해석으로 에스라를 도운 인물이다(8:7). ‘바니’는 ‘세워진’이란 뜻이다. 저 역시 에스라를 도와 통역과 해석으로 백성들을 가르쳤고(8:7), 민족 대 각성 운동 때 강단에 올라 부르짖어 기도한 인물이다(9:4). 레위인 그룹 중 맨 끝에 소개된 인물은 ‘브니누’이다. 저는 오직 본문에서만 소개된 인물이다. 이름의 뜻은 ‘우리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4) 족장 그룹(14-27절)
레위인들의 명단에 이어 14-27까지는 언약에 인을 친 족장 44명의 명단을 기술한 부분이다. 그러기에 14절 서두에서 ‘백성의 두목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로쉐 하암’(ראשׁי העם)이다. 이중 ‘로쉐’는 ‘족장’, ‘두령’이란 의미를 가진 ‘로쉬’(ראשׁ)의 복수 연계형이다. 그리고 ‘하암’은 ‘백성’이란 뜻의 명사 ‘암’(עם)에 정관사 ‘하’(ה)가 접두된 단어이다. 문자적으로 ‘그 백성의 지도자들’이란 뜻이다. 백성들의 지도자들로 소개된 44명의 명단에 대해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느 10:14-27) 또 백성의 두목들 곧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 분니, 아스갓, 베배, 아도니야, 비그왜, 아딘, 아델, 히스기야, 앗술, 호디야, 하숨, 베새, 하립, 아나돗, 노배, 막비아스, 므술람, 헤실, 므세사벨, 사독, 얏두아, 블라댜, 하난, 아나야, 호세아, 하나냐, 핫숩, 할르헤스, 빌하, 소벡, 르훔, 하삽나, 마아세야, 아히야, 하난, 아난, 말룩, 하림, 바아나이었느니라
여기서도 보면 개인의 이름처럼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의 기술들을 보면 지도자 개인의 아니라 가문의 이름들임이 드러난다. 우선 그 증거로 14절에서 첫 인물로 소개된 ‘바로스’로부터 20절의 ‘막비아스’까지의 이름들을 보면 그렇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스룹바벨과 더불어 바벨론 1차 포로귀환자들 중 일반 백성들의 가문의 이름과 일치한다. 그것은 에스라 2:3-30절의 내용과 대조해 보면 그렇다. 그런데 그 1차 포로귀환 때와 본문 사이에는 100여 년이란 세월의 간격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는 당시 실존한 족장의 이름이 아니고 가문의 이름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된다.
또한 이 명단에는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제2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과도 일치한다(7:8-38).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본서 3장에서 성벽을 짓는데 참여한 가문들의 이름도 있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이 이름들이 현존하는 족장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일 가능성을 더해준다.
그리고 다른 곳과 중첩되지 않는 나머지 인물들은 본 장에 처음 등장하는 이름들이다. 본 장에 처음 등장하는 이들은 바벨론으로부터 비교적 후대에 귀환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먼저 있었던 가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가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또 과거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유다에 머물러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그와 달리 바벨론 침략이 있었을 때 은신해 있다가 후에 나타난 무리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말 그대로 견해일 뿐이지 실제 그렇다는 근거는 없다.
5) 구속사적인 교훈
우리는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해서 2가지 구속사적인 의의를 생각해 본다.
(1) 성도들의 선한 결심은 누구나 있어야 하는 신앙의 한 과정이란 교훈
그것은 이 당시 이스라엘 전 민족이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맹세하며 언약 문서에 인을 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생각해 보는 교훈이다. 이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맹세를 한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한 결과였다. 역사를 회고해 본 결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것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역사였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가 바벨론 포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귀환한 저들로서 이러한 맹세와 언약은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또 다시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악 된 삶은 이스라엘만의 경우는 아니다. 어느 시대 누구나 그럴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체가 이미 죄에 오염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보면 실제 믿음의 승리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시대 시대마다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산 사람들은 지극히 적었던 것이다.
엘리야 시대는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오직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음을 말씀하고 있다(눅 4:26). 이스라엘에는 그만한 믿음의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또 엘리사 시대는 이스라엘에도 문둥병자가 많았지만 오직 아람의 나아만 장군만이 은혜를 받았음을 말씀하기도 하셨다(눅 4:27). 그것은 그 시대도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이사야 선지자는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징막 같이, 에워 쌓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라고 한탄한바 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 예루살렘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렘 5:1). 그래서 그런지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4)’고 말씀하셨다. 왜 시대마다 믿음의 사람들이 적은 것인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인간들의 본성이 이미 죄악에 뿌리 깊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 뜻을 순종하겠다는 선한 결심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각오는 성도들에게 날마다 있어야만 하는 일상이어야 한다. 가능하면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각오하고 결단하고 다짐을 해야만 한다. 본문의 내용처럼 문서를 작성하고 인을 치는 비상한 방법이라도 해야 한다. 믿음의 승리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두 실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섬김은 반드시 승리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2) 성도의 선한 역사에의 동참은 영원히 명예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란 교훈
그것은 언약 갱신에 맹세하고 인을 친 인물들의 명단이 이처럼 성경에 낱낱이 소개되었음에 함유된 교훈이다. 이 당시 인을 친 가문들이 이스라엘 전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제사장들 중에서도 여기에 동참하지 않은 가문이 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 대표적 인물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다. 저의 손자이며 요야다의 아들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였다(13:28). 또 유다인 스가냐는 사마리아의 관료 도비야를 사위로 삼기도 하였다. 또 도비야의 아들과 유다인 므술람의 딸과도 통혼한 사이였음을 앞의 6:18절에서 살핀바 있다. 그러니까 당시 귀환민 귀족들 가운데는 사마리아의 산발랏이나 도비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다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여선지자 노아다와 그 외의 다수의 선지자들도 사마리아의 산발랏의 편이었다(6:14). 이들은 틀림없이 이 언약 갱신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들의 이름이 인을 친 명단에도 없다는 것이 그것을 보증한다. 이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기에게 유익 된 결과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 심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잠시 잠깐의 유익이 영원한 부끄러움이며 참담한 결과일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영생의 결과는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 제사장 21가문, 레위인 17인, 족장 44가문, 토탈 82인의 이름은 당시 언약 갱신에 동참을 하고 인을 친 가문들이다. 그러기에 그 이름들을 본문에 적시하였고, 이들의 이름들은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며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저들 이름이 성경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저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란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이는 누구보다도 저들 스스로에게 영원히 명예스러움으로 기억되고 남을 것이란 의미가 내재 되어 있다.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 자체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최후 최종 심판에 해당하는 백보좌 심판은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다(계 20:12).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따라 영광의 상급이 주어질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 이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맹세하고, 그 맹세 언약에 인을 쳐 동참하였다는 것도 최종 심판을 가늠하는 그 생명책에 저들 이름들과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었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명예스러운 일이며 영원히 기억될 영광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분명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보상이 차고 넘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 다섯 번 맞고 태장에 세 번 맞았다고 하였다. 그 매를 맞는 순간에는 참아내기 힘든 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고전 4:9에서는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느라’라고 하였다. 고전 4:13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만일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복음 전함을 멈추고 하나님은 없다고 믿음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에게 영원토록 빛나는 찬란한 명예이며 영광이었을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하늘의 상이 클 것임을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 일에 마음과 뜻을 같이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님의 역사라면 어떤 모양으로든 함께하고 동참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 경우 기꺼이 자신을 드려 헌신해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는 무궁한 하늘의 상급일 뿐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억될 찬란한 명예이며 무한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인봉한 사람들 명단
느 10:1-27 / 생명의 삶
지도자는 매사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언약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방백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사람은 지도자의 대표인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며(1절), 그다음은 스라야부터 스마야까지 제사장들입니다(2~8절). 이어서 레위 사람을 대표하는 명단(9~13절)과 백성의 지도자를 대표하는 명단(14~27절)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두 돌판에 직접 계명을 쓰신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만 서명하신 언약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회복된 유다 공동체가 언약을 갱신할 때는 백성을 대표해 지도자들이 서명합니다. 이는 스스로 언약을 지킬 뿐 아니라 백성이 언약을 지키도록 지도하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언약 문서에 서명한 이들은 누구인가요?
– 하나님 말씀대로 살겟다는 다짐을 내가 날마다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언약 내용(느헤미야 10장 28~31절)
28.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29.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한절 묵상_느헤미야 10장 29절)
유다 공동체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엄숙하게 언약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결단을 다짐한 백성의 이름을 기록해 후대에 기념하게 합니다(1~27절). 하나님은 그분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사람들, 어려운 여건에서도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남긴 거룩한 발걸음과 경건의 흔적과 믿음의 삶은 다음 세대에게 영적 교본이 됩니다. 오늘 내가 흘려 보낸 그리스도의 향기는 썰물이 되어 열방으로 퍼집니다
30.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백성도 언약 갱신 의식에 참여합니다.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28절)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만이 언약 의식에 참여했음을 보여 줍니다.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28절)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남녀노소 모두 언약에 참여했음을 보여 줍니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고(29절),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으며(30절), 안식일과 안식년 규례를 지킨다는 것입니다(31절). 안식일에 장사하지 않고, 안식년에 땅을 쉬고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결심입니다.
– 언약 갱신의 세부 내용은 무엇인가요?
– 나는 하나님 자녀 답게 살기 위해 어떤 손해까지 감수할 수 있나요?
(오늘의 말씀 요약)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인봉합니다. 남은 백성과 제사장, 레위 사람 등을 비롯해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따라 자녀를 이방인들과 결혼시키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또 안식일, 성일, 안식년을 지키고 모든 빚을 탕감하기로 맹세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말씀을 더 가까이하며 말씀대로 살기를 다짐합니다. 손해를 감수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말씀과 기도로 경건의 벽을 높이 세우고 죄를 멀리하게 하소서.(아멘)
유다 백성들의 맹세
느헤미야 10:1-39 / 한마음교회
흔히 성경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다루는 책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벽 재건에 관한 이야기는 6장에서 끝이 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성벽 재건 이후에도 상당히 긴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벽 재건 이후의 이야기는 성벽 재건 과정처럼 다이나믹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벽 재건 이후의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여기에도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9장 마지막 절, 3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나이다.”
1-27절까지 언약에 인봉한 자들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독 느헤미야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사장들, 레위인들,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인봉에 참여했습니다.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새로운 언약식을 통해서 조상들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하여 반성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들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새로운 마음으로 언약식에 임했습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적어, 역사에 남김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28-39절까지는 맹세한 사람들의 맹세의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언약에 인봉하지는 않았지만 그 언약에 맹세한 사람들은 남은 백성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한 사람과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저주로 맹세하기를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지켜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두리뭉실하게 맹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맹세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주목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맹세의 내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우리 딸을 이방인에게 주지 않으며, 이방인의 딸을 데리고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이방인과 혼인을 금지하는 것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그 무엇보다 큰 문제거리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범죄와 실패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이방인들과의 통혼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여인 이세벨과 혼인함으로 이방인들의 악한 행실이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 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의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유다에까지 악한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이 이방인과 혼인하니 백성들은 당연히 따라하게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는 영적으로 혼탁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안식일에는 물건을 사지도 않고 팔지도 않겠다,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물론이고 안식년과 희년까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기본 정신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기도 하지만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본문 32-34절을 보면 성전의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 세 번째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규례를 정하여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해 쓰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제사를 위해 사용되는 나무를 하나님의 전에 바쳐 제단에 사르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성전세의 납부와 번제용 화목의 조달, 이것 역시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의 부패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를 일으킨 것이지만, 이 당시에는 신실한 자들이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였습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해마다 토지 소산의 맏물과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맏아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전에 가져가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본문 37-38절을 보면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겠다고 했고, 레위 사람들은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곳간에 넣어 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39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5절부터 39절까지는 유다 백성들이 갱신한 언약의 핵심이 성전 제사 제도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제사 제도의 회복에 많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언약의 파기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제사 제도의 상실(왕하 25:8-17)을 초래한 바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픔을 경험했던 유다 백성들은 이제 다시 성전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자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다 백성들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맹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도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내적으로 개인적으로만 결심하는 것으로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형식을 통해서 나의 결정이 가볍지 않도록, 무게를 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말하고,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어떤 효과를 가져 올까요? 그것은 나의 결심에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절망 말한대로 하는지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의 눈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언한 것들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기자 회견을 하고, 정치인들이 정견 발표를 하고,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여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견해를 분명하게 함으로 자신의 의지와 입장을 강화하고, 오해를 불식시키고 또 자기 자신도 그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또한 공개적으로 행한 것이기에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채찍질하는 제어장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맹세로 언약을 맺은 이후 어떻게 했을까요? 이것이 관전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맹세하고 정말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그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꾸준히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대로 행했다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행한 그들에게 어떤 복을 허락하셨는지 지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렇지 못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남은 느헤미야서를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한 내용들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구경하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세한 내용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다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부분은 지키고 어떤 부분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주제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고, 또 하나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두 가지를 주목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를 특별히 다루셨기 때문입니다(막 2:27, 눅 11:42).
먼저 안식일 문제입니다. 주님이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율법의 규례들을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모이는 우리가 문자 그대로 지켜야만 할까요?
안식일의 핵심은 이름 그대로 모든 일을 중단하고 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5장 3절을 보면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17장 21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은 안식일에 물건 사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서 저들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점점 더 까다로운 규정, 세법들을 첨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안식일은 이렇게 지켜야 한다’는 법을 주일을 지키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면 주일에 집에 불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어깨에 가방도 메어서도 안 됩니다. 돈을 절대로 쓸 수 없습니다. 곡물, 즉 음식을 사서 먹어서도 안 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토끼나 돼지고기,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고기,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 다니는 곤충,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부정해서 먹을 수 없습니다(레 11장).
그런데 우리는 다 먹습니다. 분명 이 성경,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이 모든 율법 조항들을 가지고 골고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우리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롬 8:1-4).
초대교회에 성령 충만한 역사가 나타났을 때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였습니다(행 2:46).
교회 다니면서 십일조 내는 것도 아까워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극한 환란과 가난에서도 넘치는 연보, 풍성한 예물을 주께 드렸습니다(고후 8:2).
성령님께서 힘을 주시니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내 의지와 노력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유다 백성들이 맹세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말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가슴 아파하고 의지적으로 돌아서는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작가의 글을 읽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매우 문란했습니다. 작품을 쓰는 시간 외에는 방종과 주벽으로 소일했습니다. 가족들은 그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면 가족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작가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이 서툴렀습니다.1841년 여름, 이 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딸 레오폰디느가 센 강에 빠져 죽었습니다. 작가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딸의 얼굴을 하얀 천으로 덮으면서 “내 죄악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다. 죽은 것은 레오폰디느가 아니다. 천하의 죄인인 나의 죽음이다”라고 오열했습니다. 작가는 그날부터 방탕한 삶을 청산했습니다. 사색을 통해 경건 훈련을 쌓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랑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희생을 통해 사랑과 용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며 집필을 했습니다. 그 작품명은 ‘레미제라블’이었고, 그 작가의 이름은 빅토르 위고였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생활 속에 변화의 열매가 있는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살펴본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실천 여부를 점검하고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남은 2015년 후반기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며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고 행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붙들어 주시고,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