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율사(栢栗寺)를 찾아가다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백율사를 찾은 일이 있지만 절을 찾아갔다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때는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는 기억이 희미하다.
이번에 내가 백율사를 찾기로 한 것은 1930년에 이 절에 있었던 금동약사여래 입상을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두었고, 박물관에서 그 청동여래상을 보고 백율사를 마음에 두었다. 그 불상은 청동 여래상으로는 신라 불상 중에 최대이고, 국보 27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것들이 백율사를 찾아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했다.
이차돈이 순교하였을 때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금강산 산록에 떨어졌다. 법흥왕은 그 자리에 자추사라는 절을 세웠다. 자추사를 오늘의 백율사로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절에는 이차돈과 관련된 유물들이 있다. 신라 헌덕왕은 이 절에 이차돈 순교비를 세웠다.
8월 1일이다. 장마철이 끝이 났는지, 아닌지 모를 날씨이다. 햇볕이 짱짱하다가도 이내 천둥과 벼락이 요란스레 울리면서 소나기가 쏟아진다. 오늘은 아침부터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를만큼 무덥다. 바깥으로 나서면 간간이나마 바람도 불어서 시원하다. ‘이런 날은 늘어져 있으면 더 더워, 산에 있는 절집을 찾으면 시원하겠다.’라고 하자 집사람은 그러자면서 ‘어느 절?’ 한다. 나는 전에부터 백율사를 점찍어 두었다. 경주까지는 직행버스로, 경주에서 백율사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예전에 찾았을 때는 한적한 시골이었지만, 지금은 절이 있는 산의 바로 아래까지 집들이 들어섰고, 큰 길도 닦여있어 차들이 끊이지 않고 달린다.
절을 오르는 계단이 시작하는 곳에 바위의 4면에 부처를 조각한 사면불상이 있다. 전설이나 주춧돌이 흩어져 있는 유구로 보아서는 백율사와는 독립된 사찰이 있었다. 확실한 내막은 모르지만 지금의 모양새는 백율사가 관리하는 듯이 보였다. 마애불이야 많지만 사면불은 많지 않다. 배례를 하면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사면의 한쪽 켠에 장판을 깔아두었다. 천막도 있고, 관리하는 보살님도 계셨다. 사면불을 돌면서 경배를 올리는 대중들도 끊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여러 절집을 찾아다녔는데 인기가 아주 좋은 부처님임이 틀림없다. 나도, 집사람도 사면불을 한 바퀴 돌면서 합장하고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백율사로 올라갔다. 그리 높은 곳은 아니었는데 경사가 심해서 숨이 찼다. 대웅전 앞의 마당은 너무 좁아서 탑이며, 석등이며 절집의 부속물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선지 절의 경내에 있는 자연암벽에 3.2m 높이 마애탑이 새겨져 있다.
사면불의 전설도 있다. 경덕왕이 백율사를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자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 그곳을 파보니 사면불이 나왔다. 왕은 이곳에 절을 짓고 굴불사라고 했다. 고려 때는 (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굴석사라고 불렀다. 이차돈의 순교 전설과, 염불의 전설이 있는 이곳은, 백율사와 굴불사가 같은 불교이면서도 다른 뷸교 신앙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대에 따라서 믿음의 형태도 다를 것이다. 불교를 받아들일 때와, 이미 신라의 백성들 대부분이 신앙하여 거의 토속화 되었을 때의 불교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면불과 염불낭송은 대중화된 불교의 신앙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염불과 관련된 전설을 지닌 곳이 여러 곳이다. 경주 남산 아래의 서출지 부근에도 전설이 있고, 팔공산의 염불암도 같은 형태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천둥과 벼락이 요란스레 소리를 지르면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를 피하러 천막 밑으로 들어가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로 점심을 떼웠다. 이곳을 관리하는 보살님이 쑥떡과 음료수를 주었다. 쑥떡이 무척 맛있었다. 점심의 요기로는 느끈했다. 그래도 비가 계속 내려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사면불의 바로 아래에 있는 주차장을 나서니까 비로 옆에 사찰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굴불사라는 간판이 있고,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도 있어 사찰이 분명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목줄을 맨 개가 우리를 보고 컹컹 짓는다. 집사람은 법당으로 들어가고, 나는 절집을 돌아보았다. 절의 냄새가 도무지 나지 않는다. 사람이 일상을 사는 가정집 모습이다. 집사람과 나는 대문을 열고 나오면서 ‘절 집이 맞아?’ 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야 기록에는 사면불의 자리에 굴불사가 있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사면불은 이 절에서 관리해야 하는건데,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신라 사람들이 신앙하는 종교가 있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산악신앙이고, 하천신앙이고, 바위신앙이고, 나무신앙 들이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들어오면서 토속 신앙지에 절을 세웠다. 그렇다면 백율사도, 사면불도 불교 이전의 우리 토속 신앙지 였으리라. 신라 사람들이 소원을 빌던 바위에 부처님을 새겼을 것이다. 천신이 내려온 산에 절을 지었을 것이다.
신라 육촌 중의 하나인 알천 양산촌장 알평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 여기 금강산의 표암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금강산은 알천 양산촌 부족들이 신성시하였던 신앙지였으리라. 이와 같은 육촌장의 전설에는 명활산에는 설씨의 시조가 내려왔다 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경주의 북쪽인 금강산은 불교 이전의 신라민들의 신앙지였을 것이다. 토속신앙이 불교로 습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차돈 순교이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백율사가 아닐까.
*참고 —신라 육부촌
알천 양산촌(급량부) --- 경주 이씨(경주 북쪽 금강산)
돌산 고허촌(사량부) -- 경주 최씨(내남면, 울주 두서, 두동면 일대)
취산 진지촌(본피부) -- 정씨(외동면 일대)
무산 대수촌(점량부) 손씨(모량, 현곡 일대)
금산 가리촌(한기부) -- 배씨(감포, 양남, 양북 일대)
명활산 고야촌(습비부) -- 설씨(천북면, 안강)
신라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前佛時代의 사찰터로 7가람 터가 있다.
금교 동쪽의 천경림(지금의 오릉터)
삼천기(三川岐) -- 지금의 영흥사
용궁의 남쪽 -- 황룡사
용궁의 북쪽 — 분황사
사천(沙川)의 끝 — 영묘사
신유림(낭산) - 지금의 사천왕사 터
서청전(婿請田) - 지금의 담암사(경주 탑동)
과거 七佛의 절터라고 한다. 그러나 토속 신앙지로 본다.
첫댓글 백율사에서 산자락을 돌아 보문단지로 올라가면, 절의 바로 이웃하여 석탈해왕릉이 있다. 탈해왕릉 바로 위에 경주 이씨의 발원지라하여 비석이 있고, 탈해왕 옆에 제사지내는 재실도 있다. 박씨는 오릉에, 경주 김씨는 천마총이 있는 곳에(그곳에 미추왕릉이 있어 재실도 그곳에 있다.) 있다. 경주를 답사하면서 이런 곳을 찾아다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경주는 삼국유사나 기타 기록에 남아 있는 절이 많다. 그러나 폐사가 되어서 폐사지로 있는 곳도 있고, 절터가 어딘지도 모르는 절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흥미를 끄는 곳이 많으므로 폐사도 찾아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