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일원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위치한 옥류천 일원이다. 이곳은 옥류천 물길을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를 흐르게 만든 어정(御井)을 중심으로 작은 정자들인 소요정, 취한정, 태극정, 청의정, 농산정이 모여 있다. 이들 정자들은 농산정을 제외하고는 국왕이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1∼3칸규모의 작은 정자이다. 옥류천 일대 정자들은 대부분 인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며, 옥류천(玉流川)일 적힌 선조의 글씨가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옥류천 일대를 국왕이 찾은 것으로 보인다. 옥류천 뒷편 청의정 주변에는 국왕이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였던 작은 논이 있다. 원래 국왕은 창경궁 춘당지에 있었던 논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는데, 이곳에소도 간략하게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청의정의 초가 지붕은 이곳에서 재배한 볏집으로 엮었다고 한다.
농산정은 국왕이 옥류천 일대를 찾았을 때 다과상을 마련하거나 신하들과 강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이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을 이곳 옥류천으로 초대하여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으며, 순조와 효명세자 또한 정조을 본받고자 이곳에서 학문이 높은 신하들이나 유생들을 초정하여 강연을 열었다고 하다. 또한 어정에는 홈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여 그 위에 술잔을 돌리면서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동궐 후원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오류천 주변은 국왕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지만, 국왕이 신하들을 초청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던 사교의 장소로 사용된 공간이다.
옥류천(玉流川) 일원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이라 한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 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연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線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내 유일한 초가집이다.
취규정이 있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옥류천 일대. 소요암을 흐르는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 청의정(淸線亭) 같은 작은 정자들이 모요 있다. 원래는 창덕궁 후원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조용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교정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 시끄러운 편이다.
옥류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취한정이다. 옥류천 언저리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들고 되돌아올 때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건축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詩)가 전하고 있다. 취한정의 아래쪽에는 옥류천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소요정(逍遙亭)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정에서는 옥류천과 소요암, 폭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심산 계곡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옥류천 어정(御井)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한다 인조 14년(1636),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에 U자형의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여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한다 인조 14년(1636),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에 U자형의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여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청의정(清漪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농산정(籠山亭)
옥류천 공간의 제일 안쪽에는 청의정(清漪亭)이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초가 지붕을 한 특이한 정자이다.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임금이 정자 앞쪽의 논에서 손수 수확한 볏집으로 이엉을 잇게 하였다. 태극정의 아래쪽에는 농산정(籠山亭)이 있는데,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의 맞배 지붕 집이다. 1636년 인조 14년에 창건되어 임금이 옥류천 주변으로 거동하였을 때 다과상 등을 마련하던 집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이유로 집 모양도 일반 행랑채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1636년 인조 14년에 세운 정자로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라고 했다. 건물은 굴도리를 엮은 1칸짜리 네모 정자로 지붕 중앙에 절병통을 놓았고 바닥 기둥 밖으로 아(亞)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