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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남자의 딜레마
글쓴이: 우주가람
난 정열적이지 않다. 지금까지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목숨을 걸만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모든 걸 감수할 초인적인 의리 또한 가소롭다.
세상에 영원이란 없으며 겉껍데기뿐인, 곧 바스러질 영원을 창조해내기엔 그것에 쓰여질 나의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구두는 검은색이 편하다. 가장 무난하고 튀지 않으면서도 그 나름의 세련됨을 놓치지 않으니까.
물론 조금 칙칙한 건 감수해야만 한다. 극과 극, 어쩌면 그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지도 모르지만
옷을 고를때엔 꼭 그렇게 고르게된다.
비둘기빛 스프라이트 정장에는 짙은 은빛의 구두를 신거나 크림화이트색의 넥타이로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없다.
난 정열적이지 않다.
무채색 남자
<1>
그는 항상 같은 곳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해량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고있다.
12시 10분, 그는 점심을 먹으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일때 아무도 없는 회사 커피포트에서 그를 닮은 블랙커피를 뽑는다.
12시 15분, 그는 커피의 향을 음미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씩 홀짝거릴뿐이다. 그래야 하는것을 그렇게 하는 것처럼.
12시 20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로 삼삼오오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점심시간이 4시간정도는 되는 듯 여유를 부리며 기계적으로 커피를 마신다.
아, 다 마셨다. 그를 지켜보던 해량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해량에게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분명 그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귀까지 붉어진 해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쓸데없이 서류정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소리가 거슬렸는지 그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진다. 그가 돌아보았다.
“...” 그리고 정지.
해량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해량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눈인사를 하자 그 또한 짜증 섞인 표정을 풀고
건성으로 목례를 해 보인다. 곧 자신이 있으면 저 남자가 하던 일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켓을 한 손에 걸치며
해량에게 인사했다.
“먼저 간다.”
“아, 예예. 잘 드시고 오시길 바랍니다! 아, 아니. 드시고 오세요.”
기합이 바짝 들어가 버렸다. 젠장, 군대 말투를 써버렸어. 절망하며 해량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전역한지 반년이 다되어가는데 자란 머리가 무색할 만큼 머릿속은 아직도 군대식으로 정렬되어있다.
비웃음 한번 흘리지 않고 쌩하니 뒤돌아 선 그가 야속할 뿐이다.
차라리 비웃어주기라도 하면 어색한 듯 말이라도 몇 마디 더 붙여볼 수도 있었을 텐데. 잘하면 밥도 같이 먹으러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아깝잖아! 결국 입맛을 다시며 해량은 제 짙은 고동빛 머리카락을 탈탈 털었다.
파견되어 나온 날 인사과 차장이 직속이라며 소개시켜준 남자가 저 남자였다.
처음엔 겉모습만 보고 잘생긴 선배님이라며 싱글벙글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다보니 해량
자신이 묻는 말 이외의 말은 가르쳐준 적도, 여러 회사 돌아다니다보니 매번 끈적이며 붙어오던 여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연락처라거나 사적인 것을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아예 먼저 말을 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럴 바엔 차라리 말 많은 여자 상사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 적 있다.
처음엔 자신을 싫어하는 건가 싶어서 팀원들에게 물어보자 그 사람들은 이젠 다 적응되었다는 듯 손 사래질을 치며 알려주었었다.
‘그런 걸로 상처받을 필요 없어. 차대리, 그 남자 일은 잘해도 사람관계는 꽝이거든. 쑥스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소심한 것도 아닌데 좀처럼 어울리려하질 않아. 그래도 꼭 같이 해야 한다고 우겨대면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긴 해.
나쁜 사람은 아냐.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그런 거야.’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었던가.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있어.
팔다리 멀쩡하고 이목구비 시원하게 뻗은 남자주제에 그렇게 냉한 성격은 적응안된다고. 해량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땐 그렇게도 이해 가지 않던 그 말들이 한 달쯤 지난 지금, 몸으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 남자가 먼저 내게 말을 걸고
다정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일보다는 나를 과거로 보내 중국의 만리장성을 혼자 쌓으라고 하는 게 더 가능성 있어 보인다고.
나이는 서른, 슬슬 꺾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을 가졌다.
하지만 요즘 머리는 비고 성질은 더러운 히스테릭 노총각들과는 다르게 적어도 나잇값은 하는 남자인 것 같았다.
직급은 대리.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성과 내는 건 타 부서 과장이나 차장급 정도라고. 왜 승진을 못했냐고 묻자
다들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입을 닫곤 했다. 이름은 차은광. 생긴것과 딱 맞게 깔끔한, 그러나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는 정장을 좋아하고 잘 입고 다닌다. 언제나 매치하는 깔끔한 검은색 구두가 그를 더욱 도도하게 만들어준다.
집에서 싸온 김밥 한 줄을 가방에서 꺼내며 해량은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천장으로 돌리며 그가 입고 다니는 옷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검정, 은색, 검정, 갈색, 검정, 그리고 회색...
또 한번 검정.
‘이정도면 블랙 마니아라고 칭해도 되겠는데?’
혼자 생각하며 슬며시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확실히 그는 검은색이 잘 어울린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혹은 그저 그 스타일이 좋은 것 뿐인지 그는 검은색으로 도배를 하고 다녔다.
그는 좀처럼 화내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칭찬 비슷한 것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
그, 은광은 다른 사람을 지적하기 보다는 말없이 그것을 자신이 가져가 제 방식대로 고쳐놓고 넘겨버리는 타입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모습을 그의 작은 배려라고했고 배알이 뒤틀릴대로 뒤틀린 어떤 사람은 그 모습을 재수없다했다.
무슨 자기가 고친 건 무조건적으로 정답이 되는줄 아냐며. 이 회사가 답안지 따위가 있을 리 없잖냐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수정을 거친 기획안들은 모두 일사천리로 사장실의 도장 앞 까지 올라가곤했다.
그는 웃지 않는다. 오죽하면 그를 웃게만들면 돌아오는 상금이 오십만원을 훅 넘는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 내기에는 사장까지 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했다.
그는 그런존재였다. 그곳에 절대적으로 존재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끌어내리려하거나
추앙하려하지 않는 배재된 존재. 한마디로, 더럽게 성능좋은 아웃사이더.
그를 알리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재수없는 존재로 비춰지곤했다. 처음 그를 본 해량 자신 또한 그를 재수없다
생각한 적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가 재수없다는 눈 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되었다.
어째서 그는 타인에게서 자신을 분리시켜놓는걸까. 어째서 빈틈하나 주지 않고 그렇게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걸까.
승진만을 노리는 거머리같은 인간도 아니고 부하직원이 써온 서류를 빠꾸시키면서 희를 느끼는 변태 욕구불만자도 아니면서.
어째서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외형을 가지고서도 사랑받으려 하지 않는가.
해량은 김밥을 우물거리며 그가 앉았던 자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 곳은 그처럼 차가울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은 단 하나. 그가 밝은 색의 옷을 입는다면 어떨까? 그것 또한 어울릴까?
언제한번 밥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그럼 그 포커페이스가 조금은 풀리려나. 아아, 김밥이나 먹어야지.
김밥을 우걱우걱 입에 쑤셔넣던 해량은 결국 한 마디 신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누..가 물 좀...”
목이 막혀 주먹으로 가슴을 콱콱 쳐댔지만 이놈의 김밥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가슴께에서 꽉 막혀 있었다.
정말 나 김밥먹다가 죽는거 아냐? 그런건 싫다고.
해량은 이런 죽음은 용납할 수 없다는 신념아래 주먹으로 가슴을 무식하다 할 정도로 두드려댔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불투명하게 차가운 막이 생긴 유리잔을 눈 앞에 내려놓았다.
“김밥을 왜 그렇게 열심히 먹어.”
은혜롭게 내린 그 손의 주인의 얼굴을 보려 얼굴을 든 순간, 해량은 입속에 담고있던 밥알들을 분출해버리고 말았다.
-투두두두두
발사된 하얀 밥알들은 허공을 가로지를때엔 아름답게 빛났지만 바닥으로 추락할때는 그 처럼 추하게 떨어질 수 없는거였다.
결국 제 입에 있는 밥알들을 쏟아내놓고 나서야 해량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 상황의 수습을 걱정해야만 했다.
“...차...차대리님.”
“...”
넘을 수 없는 벽이 두 사람 사이에 세워지고 은광, 그러니까 차대리는 굳은 얼굴 표정으로 제 얼굴에
타닥타닥 붙은 밥알을 손으로 닦아내 버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건 아니잖아. 해량은 중얼거렸다. 이런식으로 밥을 같이 먹고싶었던게 아니라고!!
하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가버렸다.
“...”
“...”
“...”
“...하.”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였다.
“...하. 괜찮아?”
귀싸대기라도 감수하려던 해량은 의외의 말에 제 입술에 남아있는 밥풀조차 뗄 생각을 못하고 어리벙벙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바보같았던지 은광은 차라리 정색하고 화를 낼걸 그랬나, 라는 생각까지 했다.
잠시 벙하니 앉아있던 해량이 실례인 것을 깨달았는지 귀까지 빨개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저기 절대 고의로 그런게 아니구요. 아 그러니까, 차대리님이 물을 주실거라곤 상상도 못해서...”
“흐음, 그러니까 물을 주지 말았어야 하는건가?”
“아뇨! 절대 그런게 아니구요!”
당황하는 해량의 모습이 꽤나 재미있었는지 은광의 입술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뜻하지 않았던 은광의 웃음에
해량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라, 방금 웃은건가? 아니겠지, 이렇게 쉽게 웃어버릴 사람이면 50만원이 넘는다는 상금은 뭐가 되는거야.
해량은 아니야, 아닐거야 라며 자기최면을 걸며 넘어갔다.
“김밥 맛있나?”
“예, 예! 에, 그러니까 여기가 제 학생때부터 학교 가까이에 있던 곳인데 아주머니가 김밥하는 예술로 싸거든요. 에, 그러니까 말을 늘어놓으려고 늘어놓는게 아니구요. 이게 이상하게 긴장하면 말이 줄줄새요.”
“그런것 같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해량의 말에 동감을 표하곤 해량의 김밥 하나를 주워 입속에 넣었다.
그의 말투는 딱딱하지 않다. 위엄을 뽐내고 싶어하는 상사의 말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동네 아는 형의 말투도 아니었다.
그의 말투는 사람이 최소한으로 다정함을 느끼는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조금만 그 말투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딱딱함에 견디지 못할것이다.
“...아무튼 죄송해요.”
은광은 어느새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물 하나를 마셔도 폼나게 마실까.
저 남자는 혹시 인간이란 종이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해량은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그 생각에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명색이 남잔데 남자한테 넋을 놓으면 어쩌자는거냐.
그렇게 또 혼자 속으로 삽질을 해대고 있을때 은광과 눈이 마주쳤다. 해량은 저도모르게 죄인처럼 고개를 팍 숙였다.
“미안하면 내일 내 것도 한줄 사다줘.”
“넵! 알겠습...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만약 여기가 군대였다면 이미 군홧발에 까이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량은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 맞는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해량이 시끄럽게 되물었지만 은광은 그것에 별 신경쓰지 않는지 다시 한 번 물을 마시며 말했다.
“내일 내 것도 한줄 사다달라고. 어려운 부탁인가?”
아, 먹은 김밥이 얹힐 것 같다. 사실 사온거란 건 거짓말이고 그냥 오늘 아침에 집에서 있는 재료가지고 대충 싼 건데.
진짜 사온거라고 생각하는건가? 해량은 짧은 시간동안 상당히 많이 고민했다. 그냥 내가 싼거라고 말해버릴까.
아씨, 이게 아니면 이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말을 많이 걸 기회도 없는데 그냥 눈 딱 감고 내일 한 줄 더 쌀까.
해량이 말이 없자 고개를 살짝 갸웃한 은광이 덧붙여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맛있는데?”
“네?”
“나 오이대신 시금치 들어간 걸 더 좋아하거든.”
무심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해량은 감격해버렸다. 드디어 하나 알아냈다.
이 사람이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김밥에 들어간 오이보다 시금치를 더 좋아하다니!
젠장,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어쩔 수가 없잖아. 해량이 손을 뻗어 은광의 두 손을 그러잡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꼭! 사다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차대리님.”
“어? 어어. 그렇게까지 비장해져야 되는 거였어?”
자신의 손을 꽉 잡은 해량의 손이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웠는지 은광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량은 목이 빠져라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퇴근길에 이번엔 제대로 된 재료 좀 사가야겠다.
그런데 방금 한 말, 나랑 같이 점심 먹겠다는 말로 들린 것 같은데. 맞나?
해량은 어느새 자신에게 짧게 인사말을 남기며 자리로 돌아가는 차대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나? 아닌가? 에이, 설마 김밥도 싸다줬는데 매정하게 따로 먹자 할까.
“해량씨는 퇴근안해요?”
점심시간부터 해량이 조금 이상하다. 팀원들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마치 정신을 어디론가 쑥 빼놓은 것처럼 얼굴엔 화사한 미소를 피우고는 앉아있었으니,
걔중엔 ‘해량씨 혹시 약했어?’라며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정도로 해량의 상태는 이상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지 사람들이 장난으로 그렇게 물을 때마다 아무일도 아니라며 뭐가 어떤데요? 라고 되물어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물론 해량이 밝은 편이긴 했지만 이정도로 웃음을 흘리며 다니는 녀석은 아니었다.
여 사원들은 한 얼굴하는 해량이 웃고 다니니 보기 좋다고 서로들 소곤거리긴 했지만 그들의 눈에도 해량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어보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퇴근시간까지 되었다. 전부 뿔뿔이 흩어져 내일보자는 인사와 함께 문을 나서는데
해량만은 자리에서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다못한 여 사원하나가 말을 거니 해량은 잠에서 깨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야죠, 가야죠를 연발했다.
정신을 차린 해량은 자신앞에 놓여진 A4용지 한 장을 보고 식겁했다.
흰 종이 가득히 쓰여진 몇 가지 문장에 얼굴을 살짝 붉히고 말았다. 그래, 오늘 하루종일 이 생각 뿐이었던가.
‘오이보다 시금치’
‘맛있는데?’
‘어려운 부탁이 절대 아닙니다.’
‘시금치, 시금치, 시금치’
‘집에 시금치 없다.’
‘시금치 급구’
‘사실 김밥 그거 내가 싼거지롱, 내가 싼거지롱.’
...
“푸흡.”
이거 원, 온통 시금치 얘기뿐이잖아. 그 종이를 눈앞에 보이는 파일 아무 곳에나 꽂으며 해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량은 자신을 비웃었다. 설마 설마했는데 그 남자 한마디에 반나절을 훌쩍 보내버린건가. 한심하기도 해라.
하지만 동시에 해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그와의 대화는 이렇게 곱씹을 만한 가치가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지니 그런거다. 원래 학생일때부터 뭔가 하나에 꽂혀버리면 앞뒤 안가리고 그거 하나에만 매달리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땐 요리가 그렇게 좋아서,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점심때만 되면 애들 열댓명 데리고 가사실에 가서 점심을 해먹이기도 했었다.
그정도로 하나에 빠지게 되면 주위 상황 재고 가릴 틈이 없다 이거다.
‘어라, 그럼 나 지금 그 차대리한테 빠졌다는거?’
그 자리에서 10초간 생각하던 해량은 실실 웃으며 결론 지었다.
“알게뭐야. 시금치나 사러가야지.”
시금치, 시금치, 시금치. 지금 해량의 머릿속엔 그 단어가 전부였다.
“이거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하고 점심이요!”
정확히 12시 25분, 그가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을 다 마셨을때 해량은 총알과도 같은 속도로 그에게 달려가 김밥을 대령했다.
김밥 한줄 손에 꼭 쥐어주면서 세상을 다 네게 주노라, 이런 표정을 지어대는 해량이 조금 이상해보였지만
은광은 그냥 그러려니하며 받았다. 해량은 계속 눈을 반짝이며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제서야 은광은 오늘 점심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해량은 은광의 입술에서 ‘같이 먹지?’라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실제로도 눈으로 계속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다.
‘빨리 같이 먹자고 말해, 빨리, 빨리, 빨리.’
해량이 눈을 번뜩이며 텔레파시를 보내자 그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은광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밥 같이 안 먹을건가?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그렇게 보는거면 가도 돼.”
“아뇨! 밥 같이 먹을겁니다!”
“그렇게 박력있게 말하지 않아도 귀는 아직 멀쩡해.”
해량은 그 말에 바보같이 헤헤 웃으며 밥 가져올게요,라고 또 소리치며 제 김밥을 가지러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은광은 알게모르게 살며시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
해량이 돌아오려는 듯 하자 은광은 웃음을 지우고 천천히 김밥을 감싼 호일을 열었다.
‘?!’
...왠지 힘이 들어간 듯한 김밥이었다. 모든 재료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중앙에 가득 차있고
재료들의 색깔도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것이 꼭 이 김밥 하나를 위해 새 재료들을 뜯은 듯 해보였다.
김밥 집에서 이럴 리가 없잖아. 은광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잔뜩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며 젓가락을 뜯고 있는 해량이 있었다.
“어서 드세요. 제가 아주머니한테 오늘 직속상사분 드린다고 했더니 신경써서 싸주셨어요.”
은광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젓가락을 김밥 중앙에 있는 한 알을 집어 올렸다. 습관이다.
중간 허리부터 빼먹는 습관은. 해량도 그걸 보았는지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중간부터 드시네요?”
“응.”
“보통 사람들은 꼬다리부터 먹거나 그게 아니면 꼬다리 앞부분부터 먹지 않아요? 습관이예요?”
습관이라. 습관이냐고 묻는 해량의 말에 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생각을 하느라 일그러지는거지 기분이 나빠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해량은 은광의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한건가 싶어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해댄다.
“습관인것 같네.”
쓸데없이 진지한 은광의 대답에 해량은 한편으로 기분 나빠졌던게 아니었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왜 이렇게 진지한거야. 라고
칭얼거렸다. 해량은 소리내어 웃으며 저도 김밥하나를 입에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세요. 화나신 줄 알았어요.”
“응? 질문을 했으니 제대로 대답을 해야하지 않겠나.”
“네? 푸핫, 차대리님 의외로 무지...”
“무지?”
“풉, 아녜요. 일단 드세요. 드세요.”
아, 실수할뻔했다.
저렇게 사지멀쩡하고 냉하게 생긴 미중년에게 ‘귀엽다’라는 치욕일수도 있는 말을 해버릴뻔 했으니.
하지만 진심이다. 당연한걸 왜 묻느냐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오히려 되묻는 은광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귀여워서 김밥 하나를 입에 넣어주며 ‘아구, 우리 애기 그랬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해량은 김밥을 씹으며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얘야, 아무리 이분이 어제오늘 좀 잘해준다해도 벌써부터 이렇게 기어오르면 안되잖니.
이래뵈도 우리 팀의 카리스마 차은광님이신데 그런 분께 귀엽다는 말을 할뻔하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김밥을 먹던 은광이 젓가락을 호일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맛있다.”
“그쵸? 누가 만든건데요~”
“아주머니가 만들었다 하지 않았나?”
...앗차. 순간 뻐기고 싶은 마음에 일을 다 그르칠 뻔 했다. 해량이 사람좋은 그 웃음을 띄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요. 우리 아주머니가 만든건데 맛없을 리가 없죠. 그런 뜻이었어요.”
“친한 것 같아보이는데 맛있었다고 전해줘.”
해량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작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저런 말을 하면서 조금 억양도 섞어넣고 얼굴 표정도 조금 밝게 하면서, 그러니까 좀 웃으면서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미중년, 아니 미청년으로 보이는 이 남자의 웃음이라면 마다할 여자도 없을텐데.
“덕분에 맛있는 점심 먹었다고.”
아...
이 남자 웃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해량은 그 순간이 돼서야 인정하고 말았다.
‘나, 이 남자에게 빠졌구나.’
그 남자가 웃은 순간을 찍어 힘빠질때마다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 말 다한거다.
사나이 나이 스물 여섯, 웃음이 드문 무뚝뚝한 남자 상사에게 꽂혀버리다.
...미치겠네.
박해량이 점심시간에 제출한 포트폴리오와 리서치 조사 폴더를 열자 종이 한 장이 스윽 빠져 내려왔다.
무심한 표정으로 종이를 주워올린 은광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있는 ‘그것’들을 읽더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이보다 시금치’
‘맛있는데?’
‘어려운 부탁이 절대 아닙니다.’
‘시금치, 시금치, 시금치’
‘집에 시금치 없다.’
‘시금치 급구’
‘사실 김밥 그거 내가 싼거지롱, 내가 싼거지롱.’
이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그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채색 남자 차은광을 딜레마로 밀어넣은 것이었다.
은광은 웃으며 종이에 짧은 코멘트를 달곤 폴더 안에 다시 껴넣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이건 무슨 애도 아니고.
‘내가 싼거지롱~’이라니. 게다가 그 최악인 그림낙서들은 뭐야. 은광은 킥킥거리며 폴더를 덮었다.
역시 박해량, 저 녀석은 처음 들어올때부터 보통 놈은 아니었다.
해량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자신과 해량의 첫 만남은 인사과 차장, 조한권 녀석이 소개시켜준것이 아니었다.
그 녀석을 처음 본 것은 회사에 올 파견 몇 명을 고르러 갔을때였다. 그때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삭막한 파견 본부 중앙에서 카레를 퍼 담아주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파견 회사 같은 경우는 다 같은 동료라는 느낌이 별로 없는지라 파견직원들끼리도 모르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이쪽 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 녀석을 아는 듯 장난을 치고 냄새가 온 층에 퍼지는 카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받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머리카락을 중앙으로 세워 언뜻 보면 굉장히 기가 세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는 녀석도
사람좋은 웃음과 앞치마로 사람들에게 웃어대고 있었다.
그때 함께 갔던 조한권 녀석에게 한 마디 했었다.
‘쟤는 꼭 데려와.’
그래, 처음부터 저 녀석은 내가 고른 녀석이었다. 박해량, 그 이름을 들었을때 그동안 한번도 받지 않았던 직속을 받기로 했다.
자진해서 녀석을 직속으로 넣기로 한 것이었다. 그 말을 조한권에게 했을때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짓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곤한다. 은광은 이번에 웃음대신 한숨을 후욱 내쉬며 두 팔을 뻗어 올렸다.
기지개를 펴며 뼈가 뚝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아, 요즘 조금 무리했나. 일들이 갑자기 쌓여 야근을 밥먹듯이 하다보니 몸이 버티지를 못하나보다.
그래도 아직 꺾일나이는 아닌데. 은광이 헛웃음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저쪽 칸막이에 앉아있는 해량의 눈 또한 자신을 따라 올라온다.
그 시선을 알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느끼지 못하는 척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다.
지금 와서 그 시선을 느끼고있다 말해봤자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보단 차라리 이정도의 난간이 좋다.
바람을 쐬러 옥상계단을 올라가며 은광은 중얼거렸다.
“게다가 엄연한 남자란 말이지.”
입맛이 쓰다. 평생 남하고 엮이는게 싫어 자기 좋다고 꺅꺅거리던 여자도 밀쳐냈던 은광이었는데,
그랬는데 하필이면 지금과 같이 눈길이 가는 한 녀석이 남자란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그 때문에 잠시동안 성 정체성을 의심해본적이 있기도 하지만 자신은 확실히 여자가 좋은 보통 남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짧은 머리 녀석에게는 눈이 가는걸 어쩌란 말이더냐. 은광은 짜증스럽게 옥상 난간을 짚었다.
되는 일이 없구나, 세상은. 무채색 남자의 딜레마는 오늘도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후로 12시 25분이 되면 어김없이 해량이 은광의 자리로 김밥 두 줄을 싸들고 찾아왔다.
무슨 궁금한게 그리도 많은지 해량은 자꾸만 은광에 대해 물어댔다.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공부 잘했나봐요.
학교 재껴본적 한번도 없죠? 그쵸? 은광은 적당히 거짓 보태 듣기 좋은 대답만 건성으로 해댔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은광은 가까이 두던 친구는 없었지만 제 혼자 알아서 하지 말란 것들은 다 한번씩 해본 개척자였다.
담배도 누구의 권유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호기심으로 태워봤다가 때려쳤고 술도 누구의 가르침없이 혼자 알아서 배웠었다.
학교야 재끼고 싶은 날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집에 와 잠을 늘어져라 잔 적도 있다.
무엇인가 옛 기억을 생각할 때 은광은 그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기분 좋은 ‘으음’, 소리를 낸다.
그 작은 변화가 기분 좋아 해량은 또 실실거리며 제 김밥 하나를 은광의 호일에 올려놓았다.
“전 꼬다리를 제일 좋아해요. 그런데 이거 차대리님 드릴게요.”
“난 끝부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에잇, 몰라요. 내 성의니까 그냥 드세요!”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들린다니까.”
해량이 샐샐 웃으며 은광에게 말했다.
“많이 드세요, 대리님. 내일은 뭐 싸다드릴까요?”
제가 제 밑천을 까발려버렸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해량이었다.
은광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이번만은 넘어가주마, 라고 중얼거렸다. 바보 박해량. 그냥 아주 ‘내가 싸온 거지롱~’하고 자랑을 하지 그러냐.
하지만 그 서투른 모습이 보기 좋아 은광은 저도 모르게 또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웃음이 헤퍼져서 걱정이다.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별로.”
“그럼 싫어하는 음식은요?”
짜장 떡볶이를 사온(실은 해왔을) 해량이 은광에게 포크를 내밀며 물었다.
싫어하는 음식이라, 은광은 해량이 묻는 질문들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당최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껏 은광은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그런 걸 딱히 생각해본 적도, 그렇게 느낀적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살아오면서 단 하나 싫었던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 그 가는길에 입고계시던 노란 옷, 그 옷 색이 너무 싫었다. 노란색이 싫었다.
그래, 확실하게 싫은건 그 하나뿐이다.
노란색.
하지만 음식을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뭐 보다 뭐가 좋다던가,
그런 간단한 질문이라면 조금 생각해보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포괄적인 질문에선 약해지는 은광이었다.
뭐 딱 좋아하는 게 있어야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하지.
“별로 없는데.”
“에, 사람이 뭐 그래요.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은광은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제 이 녀석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게 되어버렸다.
처음 몇 번은 은광이 웃으면 의외다, 라는 시선을 감추지 않던 해량도 이제는 그 웃음에 따라 웃기는 해도 의외라는 눈빛은 보내지 않았다.
그게 좋아서 은광은 웃음을 참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해량이 따라 웃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고 있던 해량은 얼굴에 억지 웃음을 띄며 말했다.
“이젠 좀 있으면 점심도 같이 못 먹어요. 저 계약기간 끝나가거든요.”
해량의 말에 은광은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얼마나 남았는데.”
“일주일이요.” 해량이 쓰게 웃어보였다.
“그래.”
그리고 두 남자 모두 그 뒤에 이어진 침묵을 깨지 못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 점심시간 이후 두 남자의 머릿속에는 일주일이라는 단어만이 맴돌았다. 일주일, 젠장 너무 짧잖아.
결국 은광은 짧게 욕을 지껄여버렸다.
<2>
일주일은 훅 지나갔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둘만의 점심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입맛이 씁쓸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복사한 서류뭉치를 차곡차곡 정리해 끌어 안고있던 은광은
층 수가 하나하나 올라갈때마다 바싹바싹 말라오는 입술에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애타는건지.
파견나온 녀석들 갈린게 손으로 세보아도 족히 열은 넘었다. 그런데 이 놈은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이렇게 호들갑인거지.
“...미치겠군.”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은광은 제 자신에게 쯧쯧 혀를 차며 내릴 준비를 했다.
5층 회의실에 자료를 가져다놓고 다시 로비로 가서 안내 직원에게 맡겨놓은 다른 자료를 픽업해와야했다.
젠장, 그 자식 얼굴 한번 볼 새도 없군.
그래도 나름대로 마지막인데. 점점 입속이 더 씁쓸해지는 것 같다. 아아, 짜증나. 5층에서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은광은 다른 곳에 시선하나 주지 않고 깔끔한 회색 회의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대리님!”
그리고 그 안엔 그 녀석이 있었다. 빌어먹을 딜레마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 여기서 나갈 수도 그렇다고 아무런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 아, 이자식 곤란해.
그리고 은광이 어정쩡하게 취한 태도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해량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뭐하냐.”
그렇지만 해량은 그 찡그림에 개의치 않고 웃어보였다. 웃는 모습이 순수한 아이같은 해량의 미소가 기분좋다.
하지만 은광은 구지 그걸 말로 티내지 않았다.
“안내원 누나가 주더라구요. 차대리님께 좀 가져다달라고.”
그 녀석의 손에는 자신이 다시 가지러 내려가야 할 자료가 들려있었다. 은광은 결국 인상을 풀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미치겠다. 저 녀석때문에.
<3>
자리마다 자료를 다 돌리고 앉은 두 남자의 사이에는 미묘한 침묵만이 흘렀다.
말이 그렇게도 많던 해량이 오늘은 왠일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그저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찾아온 사람같았다.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싫어 은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많아서.”
문으로 걸어나가려 하는 순간 열리지 않던 해량의 입술이 열리며 말을 뱉어냈다.
“점심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올것이 왔구나. 은광은 자리에 멈춰서 눈을 감았다. 왜 전혀 당황되지 않지.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은 기분이다. 전혀 당황스럽다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저 녀석은 그동안 자신에게 충실한 솔직함을 보였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생각은 이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한가. 은광이 쓴 웃음을 흘려보낸다.
나는? 나 또한 그러지 않았던가. 점심때까지는 아직도 2시간이나 남았는데 자신은 방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 녀석 생각에 입술을 베어물었지 않은가. 아아, 입맛이 쓰다. 저런 달콤한 말을 듣는다 해도 뭐라 답할말 없는 입술이 쓰다.
“차대리님, 점심 먹고나면 꼭 한번씩 웃어주거든요. 언제부턴가 그 웃음 못 보면 그날 하루가 영 안풀리는겁니다. 이상하죠?”
해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또 한번의 딜레마다.
어떻게 해야할까. 도망칠까. 아니면 돌아서 이 녀석을 마주할까. 은광은 아직도 고민중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쩔수가 없는거예요. 계속 보고싶은데. 나한테만 웃어보였으면 좋겠는데.”
해량이 바로 등뒤에서 멈춰선다. 자신과 키가 비슷하지만 조금 더 큰 녀석이 숨쉬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차분한 그 숨소리에 은광은 달아날 구멍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돌아섰다. 더 이상의 딜레마는 없을것 같다.
“박해량.”
“예. 말씀하세요.”
“김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해량의 쓴 웃음이 보인다. 그것을 보면서도 은광은 말을 이었다.
“넌 내가 내 손으로 처음 고른 직속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은 직속이었지.”
해량의 떨어졌던 고개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희망이라기보다 은광이 내리는 처벌은 달게 받겠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은 없을거라 생각했던 딜레마가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치고 들어왔다.
저 흔들리는 눈동자에 입맞추고 싶다. 언제나 자신만을 향해있던 저 눈동자를 어루만지고 싶다.
매일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오던 그 손에 입맞추고 싶고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풀이 죽고 살아나던 그 어깨를 어루만지고 싶다.
갑자기 올라오는 감정에 힘입어 은광이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
“네가 내 마지막 직속이었으면 한다.”
<4>
“네가 내 마지막 직속이었으면 한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은광이 해량의 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겨 그의 숙여진 머리에 살짝 입맞췄다.
그리곤 휑하니 회의실에서 나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에 얼굴 붉어진 채 꼼짝못하고 있던 해량은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달렸다. 저 엘리베이터를 잡아야 한다.
달려간 해량의 손에 엘리베이터 끄트머리가 잡혔다. 쿵하고 찍어오는 문에 해량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좋다고 해량은
그 엘리베이터에 탔다. 뭐냐,고 묻는 듯한 은광의 눈에 해량이 숨을 조금 헉헉대며 물었다.
“방금 무슨 뜻이셨어요.”
“말 그대로다.”
은광은 아무렇지도 않게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딜레마가 사라진 은광은 무섭도록 냉정했다.
그런 은광에게 해량이 다시 한번 말을 붙였다.
“그런식으로 뒤흔들어 놓고 가면 못 쫓아올 것 같았어요?”
“실제로도 그럴뻔 했잖냐.”
“난 진심이예요.”
그 말에 은광은 별말 다한다는 듯 해량을 노려보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럼 난 거짓말 같은가.”
은광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은광과 해량의 입술이 맞부딪쳤다. 이 남자의 입술은 생각보다 뜨겁다.
이 녀석의 입술은 생각만큼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생각이 확 날아가버릴정도로 뜨겁다.
결국 은광은 엘리베이터의 목적지를 누르지 못했다.
해량이 은광을 구석으로 몰아붙이자 잠시 동안 해량의 뜨거운 키스를 받아주던 은광이 다리를 해량의 다리 사이로 끼워넣어 자리를 바꿨다.
순식간에 몰아붙여지는 쪽과 몰아붙여짐 당하는 쪽이 바뀌자 해량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결국 좋은 게 좋은거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5분이란 시간동안 4번이나 자리를 바꿔댄 그 남자들은 결국 커다랗게 웃으며 서로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차대리님, 좋아하긴 하는데 내가 밑은 안해요.”
“유감이지만 이쪽도 동감이다.”
딱딱하게 서로 말하던 두 남자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치곤 웃어버렸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부서로 박스 하나 들고 찾아온 인물의 모습에 차은광은 인상을 있는대로 찡그렸다.
“차대리님! 저 정직이예요!”
은광은 어이없는 웃음만 뱉을 수 밖에 없었다. 저 자식한테 말린건가.
한번 찔렀다고 바로 욱하며 다 까발려버린 자신도 웃겼고 찔러놓고
저렇게 미워할 수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돌아온 녀석도 웃겼다.
결국 어찌됐건 은광은 웃음을 수 밖에 없었다. 은광의 옆자리에 당당하게 박스를 내려놓은 해량이 은광에게 속삭였다.
“우리 사내 커플이네요.”
“...시끄러 이자식아.”
장난스럽게 웃으며 해량의 머리를 쓰다듬은 무채색 남자의 목덜미엔 어젯밤 누군가가 짙게 남겨놓았을 붉은 색
입술자욱이 남자에게 색을 더하고 있었다. 더이상은 무채색이 아니다.
에필로그.
“차장님 오늘 컨디션 많이 안좋으신가봐요.”
대리 중 하나가 물어오자 은광이 커피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좋지. 많이 안좋다.
모닝커피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마셔야겠다. 카페인의 도움을 좀 받아야지.
커피를 마시면서도 은광의 눈은 사무실 안에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문에 고정되어있었다.
누구 하나 죽이기라도 할 듯한 그 눈에 은광에게 커피를 건네준 대리도 함께 그 문을 보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땡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한명이 기지개를 쫙 펴며 사무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원스러운 해량의 웃음과 인사에 와있던 직원들 몇몇이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하지만 은광만은 뭐가 그리 짜증났는지 들고 있던 커피를 확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저새끼가.”
“어! 차장님 뜨겁지 않으세요? 그거 무지 뜨거울텐데.”
커피 조금 뜨거운게 문제냐. 지금 속이 타 죽겠는데. 은광이 확 도끼눈을 뜨며 째려보자 대리는 내밀었던 손이 뻘쭘한지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웃어댔다.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은광 또한 싸해지는 혀를 느꼈다. 아아, 젠장. 다 데어버렸나보다.
“괜찮아.”
“와~ 우리 차장님 또 아침 댓바람부터 바람피고 있으셨네요.”
해량이 능청스럽게 은광의 옆자리에 다가와 어색해하고 있는 이대리를 밀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세상을 다 가졌다는 표정으로 쌕쌕 웃어대고 있는 해량이 은광에게 배시시 웃어보이자 은광은 조용히 대답했다.
“닥쳐라.”
“아유, 어떻게 이 입에서 어제...”
그 말까지 나왔을때 은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침없이 해량의 입을 틀어막곤 아직까지 자리에 멀뚱하니 서 있던 이대리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이대리가 사라지고 나자 해량의 입에서 손을 뗀 은광이 나즈막한 소리로 어금니를 깨물고 말하기 시작했다.
“...넌 내일 병가쓸 준비나 해라.”
“...병가는 심했잖아요. 내가 어제 얼마나 했다고, 아니 물론 좀 세게 하긴 했지만. 그치만 그건 그쪽이 내는 소리가 너무 좋....”
다시 한번 해량의 입이 틀여막혔다.
“닥쳐.”
하루걸러 하루 희비가 교차되는 남성들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해량은 침대에서 병가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무채색 남자의 딜레마 Fin.
*
정렬바꾸느라 죽는줄 알았습니다. 허허허허허
수위 키스까지입니다. 물론 이해하신 분들은 조금 다르게 느껴지시겠지만
묘사는 키스까지예요. 문제가 된다면 얘기해주세요.
리버스물이었습니다. 허허허허허
첫댓글 꺄~!너무 재밌어요! 단편이라 아쉽긴 하지만..ㅜㅜ잘보구 갑니다~★
긔여웠어욥.ㅋㅋ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