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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호모 사피엔스의 바다
출처 국제신문 :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40502.22019007272
놀이 의미, 관계 속 성장
우리 종착점은 결국 바다…생물들 경쟁하면서 공존, 불편한 진실 외면땐 공멸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다. 높은 것은 하늘, 하늘은 푸르다. 푸른 것은 바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어린 날의 놀이다. 호모 루덴스. 놀이의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놀이는 단지 놀이라는 행위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놀이의 즐거움은 관계의 발견에 있다. 흩어져 아무렇게나 발부리에 채는 사금파리도 놀이 속으로 들어오면 귀한 물건이 됐다. 가질 수 없었던 저것이 내게로 와 이것이 되며, 버려진 돌이 사용가치 높은 그릇이 되는 것이다. 저것이 이것이 되는 것은 소유라는 개념을 안고 있으며, 그릇이 된 돌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견하는 일이다. 놀이는 대상으로 있던 것이 의미로 바뀌는 순간을 숱하게 경험케 했다.
원숭이 엉덩이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상황은 동물에서 식물로, 육지에서 바다로, 자연에서 과학 기술로 확장됐다. 원숭이는 인간과 같은 영장류 유인원이다. 그러나 영화 ‘혹성탈출’에서 만나는 원숭이는 인간의 세계를 지배한다. 세상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진화한 유인원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 신적인 존재처럼 인식한 인류의 시대가 끝나고 말았다.
말 잇기 놀이의 전개는 연상을 통해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지평을 확장한다. 놀이에 담긴 의미는 관계 속의 성장이다. 아울러 우리의 종착점은 높은 하늘이 아니라 결국 바다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은 강바닥보다 바다의 바닥이 낮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모인 지구의 물은 바다가 되는 순간 강물로 불렸던 과거의 이름을 내려놓는다. 바닷물이 되는 순간 이전의 ‘나 때’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다는 또한 성찰의 거울이다.
지구는 땅의 영역보다 물의 영역이 더 크다. 그러고 보면 지구는 땅의 별이 아니라 물의 별이다. 육지에서 살아가는 생물체들의 기원이 거기 물의 세계에서 나왔다. 태초의 생물로부터 사피엔스로 진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바다의 의미는 경험과 상상, 발견과 생존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진화론에 근거한 바다는 시원이며, 놀이에 근거한 바다는 종착점이지 않은가.
바다는 낭만의 대상이기도 하고 예술 창작의 원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바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예측 불가한 바다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여타의 생물들과 서바이벌을 통해 살아간다. 먹이 사슬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존해 나간다. 알에서 부화한 멸치는 다른 것의 먹이가 돼야 하고 해류를 따라 이동하면서 사피엔스의 촘촘한 그물에 걸린다. 사피엔스의 식탁에서 친숙한 멸치는 알에서 2㎜로 깨어나 15㎝까지 성장하며 10만 개의 알을 낳고 한 생을 마감한다. 15㎝ 성어로 자라는 동안 해류를 따라 흐르며 보고 들었을 멸치의 바다 이야기는 땅의 사피엔스가 상상할 수 있을까.
사피엔스의 세계와 멸치의 세계는 다른 듯 비슷하다. 깊고 넓은 바다, 극한의 세계를 헤쳐 나아가지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숙명의 존재이다. 생자필멸의 고해, 멸치와 사피엔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데 있다. 다양성이란 생의 다채로움이다. 다채로움을 지지하고 끌어가는 힘은 건강한 관계이다. 설령,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우선멈춤은 있을지라도 곧 회복하는 탄력성이 그 속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균형 감각이다. 균형감각은 공존의 힘이다.
총선이 끝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후죽순 쏟아진 많은 말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이들이 지금도, 전에도, 또 그전에도 혜성처럼 들고나온 그 많던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권력자들의 싸움에 등이 터진 사피엔스의 상처는 언제까지나 사피엔스의 몫이다. 권력을 얻은 자, 놓친 자들이 흩어놓은 말에 대한 책임은 애당초 없었다. 그냥 그때만 채우고, 그때를 끌고 가는 ‘그 따위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따위 말’의 옆구리에조차 끼지 못하는 처지의 언어도 있다. 심각하게 다가온 생태환경 위기, 기후 위기가 그렇다. 세계가 기후재앙을 외치고 있는데도 이 땅의 정치언어는 여전히 개발을 통한 성장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지기 위한 위정자의 언어 바탕에는 공존 대신 개발만 있을 뿐이다. 추측건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정치는 미래를 복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늘은 바다를 반영하고, 바다는 하늘을 담는다. 높은 것은 높지 않고, 낮은 것은 낮지 않다. 멸치가 사라진 세상은 사피엔스도 살 수 없다. 정치도 생태도 균형이 깨지면 공멸한다. 멸치가 사라진 호모 사피엔스 바다에는 두 손을 담글 수 없다. 잊힌 놀이의 세계가 새삼 애틋한 지금이다.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빛명상
일본 기(氣)도사와의 대결(1990/05/03)
어느 날 호텔에서 회의를 마치고 막 점심시간이 시작될 때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우리나라 굴지의 모기업 총수이자 대단한 재력가인 C 회장이었다. 그는 첨단의학으로도 낫지 않는 희귀병에 걸리자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신침(神針)도 맞고, 일본의 도인에게 기(氣)치료를 받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차도가 없자 아는 스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그 후 그는 나에게 몇 번에 걸쳐 초광력超光力을 받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정 선생,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요? 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데는 다 가봤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정성 부족이니 시간이 더 걸린다느니 하면서 큰돈만 챙겼는데 단 몇 번 빛VIIT을 받았을 뿐인데 이렇게 거뜬하게 낫다니요! 빛VIIT을 받을 때마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이 날아와 마치 내가 천상에 다녀온 기분이었는데, 이제부터 이 빛VIIT을 '향기 나는 빛VIIT' 이라 부르겠소!"
그는 흥분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일본 기도인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아니, 정 선생한테 빛VIIT을 받고 살아난 거 다 아는데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요!"
"허허, 누구의 힘으로 나았으면 어떻습니까? 어려운 병마에서 헤어난 것만도 좋은 일 아닙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오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지금 당장 올라오셨으면 합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서울로 오라는 것이었다.
"글쎄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급한 일입니까?"
"예, 몹시 급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오셨으면 합니다. 정 선생님 이름으로 3시에 떠나는 비행기 표를 예약해 두었으니 이름만 대시면 될 겁니다. 도착 후에도 편히 모실 테니 무조건 와주십시오. 급히 모셔야 할 상황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간절하게 청했다.
'지병이 도진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누가 아픈 걸까?‘
나는 그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을 하자 거절할 수 없어 승낙을 하고 말았다. 서둘러 대구공항으로 가자 그가 말한 대로 VIP 티켓을 내주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이번에도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정광호' 라는 피켓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C 회장의 운전기사였다. 운전기사는 청바지에 티셔츠, 밑창이 납작한 운동화를 신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아래위를 흘깃거렸다. 나처럼 초라하게 생긴 사람을 회장이 이렇듯 깍듯하게 전용차로 모셔오라니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호텔 총지배인이라면 보통의 경우는 깔끔한 양복에다 검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객실이며 주방, 창고, 정원 등 호텔 안팎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려면 자유롭고 간편한 차림이 제일이었다.
운전기사는 나를 청와대 뒷문 근처의 한 한정식집으로 데려갔다. 가끔 유명 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가본 적이 있는 요정 스타일의 한옥이었다.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 자리에는 C 회장 뿐 아니라 뜻밖에도 기모노 차림의 일본 노인 세 사람과 통역관이 앉아 있었다.
"정 선생, 어서 오시오!"
C 회장이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리곤 세 노인들과 마주 보이는 한 자리 남은 상석에 앉도록 하였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눈매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모두 다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가운데 앉은 노인은 배꼽까지 늘어진 흰 수염에 백발, 위풍당당하게 딱 벌어진 어깨에다 번뜩이는 호안(虎眼)같은 두 눈동자는 추상(秋霜)같은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두 노인들은 그를 보좌하는 듯 위엄이 가득한 모습으로 양 옆으로 앉아 있었다.
"자, 먼저 음식을 좀 드시지요!"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산해진미가 가득한 음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 틈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들어와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다. 맛난 음식을 열심히 먹던 나는 가운데 앉은 일본 노인이 나를 보며 빙긋 웃는 게 보였다.
'대체 나를 왜 부른 거지? C 회장이 저 노인들에게 어떤 신세를 졌기에 나를 불렀을까? 저렇게 혈기 왕성하고 음식을 잘 먹는 걸 보면 C 회장의 병이 도진 건 아닐 테고.'
밥숟가락을 뜨던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하였다.
마침내 거대한 수라상을 물리고 몇 순배의 술이 돌 때쯤 C 회장의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저는 정말 기쁩니다. 정 선생과 저기 앉아 계시는 도인들을 한 자리에 모셨으니 말입니다. 저······그런데, 정 선생, 사실 이분들은 그저 평범한 분들이 아니라 일본에서 유명한 ***기(氣) 단체를 이끌고 있는 기(氣) 도인들이십니다."
"네, 그러세요."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C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분이 좋은지 잔뜩 들떠서 말했다.
"정 선생, 제가 일전에 일본에서 기 도인에게 오랜 기간 기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 들으셨지요? 중국에서도 한동안 신침(神針)을 맞았다는 것도요?"
"네, 그런데요."
사실 C 회장은 희귀병 외에도 여러 가지 합병증이 있었다. 재력가인 그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슨 일인들 하지 않았으랴.
"정 선생, 뭐, 선생님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걸 병원에서도 기적이라고 합니다. 당뇨 수치가 400~500하던 게 100으로 떨어지고 혈압도 정상으로 돌아오며 그 외에도 편두통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잡다한 병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주치의도 놀랄 수밖에요. 아······그런데 말이요, 오늘 이 만남의 결과에 따라서 제 치료를 담당한 중국의 신침 도사와도 이런 자리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제가 선생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으니 보은을 해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C 회장은 처음 흥분하던 모습과는 달리 점점 말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어갔다.
"그런데요?"
나는 횡설수설하는 그의 다음 말이 자못 궁금해서 다그쳐 물었다.
"제가 오랫동안 앞에 계신 저분들을 찾아보지 않자 저분들이 내 병세가 어떤가 하고 한국에 나왔지 뭡니까? 그래 제가 한국에서 '빛VIIT'을 주는 분이 있어서 그분에게 빛VIIT 향기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고 하자 펄펄 뛰면서 선생님과의 만남을 부탁한 겁니다. 신침 도사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덕이라며 내일이라도 당장 달려온다고 하고요. 한국의 정신세계로는 결코 제가 병을 고칠 수 없었을 거라면서 말이오."
C 회장은 멋쩍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 사건의 전말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오라, C 회장은 나를 호의 어린 밥상에 초대한 게 아니로구나. 지금 저들은 나를 시험하려는 게야.‘
나는 새삼 그의 야비한 모습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랬다. 유명인사들 중에는 병을 고쳐주거나 힘든 일을 해결해주면 평생 은인으로 여기겠다며 굽실거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연락을 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C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광력超光力을 받을 때마다 온몸이 샤워를 한 듯 개운하다며 좋아하고, 솟아나는 장미향에 취하여 코를 벌름거리며 기뻐 날뛰더니 이제 와서 나를 시험하겠다는 게 아닌가.
"정 선생, 내 입장 좀 이해해주구려. 나는 아직도 정 선생이 나를 고쳐 주었다고 생각하니 오해는 말아줘요. 어쨌든 저 도인들은 정 선생의 힘이 정말 자신들의 힘보다 강하다면 물러서겠다고 해요.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만약 아니라면요?"
내가 되받아서 쏘아붙였다. 그가 나에게 예의를 져버린 이상 나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아니라면 나보고 자기들에게 치유의 대가를 줘야 한다고 야단하면서 만약 사례금을 주지 않으면 도로 나빠질 거라고 해요. 음, 그러니 정 선생이 불쾌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날 좀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기분 좀 푸시구려."
그는 비굴할 만큼 간절하게 자신의 입장을 내비쳤다.
'그래, 재벌이니 분명 낫기만 하면 엄청난 사례금을 주겠다고 큰소리쳤겠지. 한밑천 잡으려는 도인들은 바짝 달라붙었을 테고.'
그가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몸이 완쾌된 걸 빌미로 돈을 얻어내려는 일본 기도사들과 까짓것 깨질 때 깨지더라도 일단 맞서보자는 장사꾼다운 C 회장의 속셈이 맞물려 마련한 자리였다.
'음, 싸우느냐 마느냐. 만약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이젠 꼼짝없이 신침 도사까지 만나봐야 할지도 모른다.'
엉뚱하게 그들의 계략에 말려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식사 중에 나를 보며 미소 짓던 우두머리 도인이 다시 그 능글맞고도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비웃음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의 힘은 저들과 다른 힘이 아니던가. 나도 모르게 저절로 스민 우주의 힘. 일전에 태백도사도 내 힘은 지상에도 없었던 생명 원천과 창조의 힘이라면서 무릎 꿇고 조아리지 않았던가. 무엇이 두렵고 무엇 때문에 망설이랴. 회장이 화술을 부리든, 싸움을 붙이든 그건 모른척 하자. 그런 얄팍한 계산은 일단 뒤로 하자.'
그 순간 나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내재된 빛VIIT의 힘이 온몸에 감도는 걸 느꼈다. 그러자 결정은 순식간에 내려졌다.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저분들도 저 때문에 먼 길을 오셨는데 회장님 체면도 있잖습니까. 그러니 말씀대로 한번 시작해 봅시다, 하하!"
나는 이왕 결심한 이상 호탕하게 웃어댔다.
"아, 그래요? 좋소이다!"
회장은 그 대답과 동시에 통역관에게 눈짓을 하였다. 통역관이 통역을 하자 도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보며 바삐 손짓을 해댔다. 자기네끼리 나와 맞설 순서를 정하는 거였다.
마침내 좌측에 앉은 노인이 나를 위아래로 애처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정 선생님이라고 했죠? 내 힘에는 1번 2번 3번의 힘이 있소이다. 어떤 걸로 하시겠소?"
나는 1번과 2번과 3번이 뭘 뜻하는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그는 더욱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물을 것도 없이 내 생각엔 당신에겐 3번이 가장 맞을 듯하오. 그것도 아주 부드럽고 약하게 힘을 보낼 테니 받아보시게."
그는 가소롭다는 듯 이젠 아예 반말지거리를 하였다.
"하하, 그럼, 1번과 2번은 무엇이오?"
나는 오기가 발동하여 물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1번은 당신의 오장육부가 다 터져 나오는 힘이오. 2번은 머리가 박살나서 고꾸라지는 힘이고, 마지막으로 3번은 이것들보다는 약한 힘이오. 그래도 당신에게 위험할 수 있으니 특별히 내가 아주 부드럽게 보내겠소. 그것도 힘들면 받는 도중에 중단시키던지 알아서 하구려."
그는 짜증어린 목소리로 부연설명을 하였다.
'무슨 무협지를 쓰는 건가, 오장육부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니.'
하지만 그들의 강철같이 단단한 체구, 훤한 인물로 보나 눈빛과 하는 모양을 보니 과장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저들은 일본의 기를 이끌고 있는 ***단체의 수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최고의 도인 한 사람이 저들에게 깨져 나갔다는 풍문도 있었는데 나같이 깡마른 외모, 초라한 차림새를 본 자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린 시절 도경은 내게 물었다.
"광호야, 조그만 백두 호랑이 한 마리와 아프리카의 뿔 달린 황소 무리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
"글쎄요, 덩치로는 황소 떼가 이길 테지만 제 생각에는 호랑이가 힘이 세니 호랑이가 이기겠지요."
나는 제법 친해진 도경 할아버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대답했다.
"어떻게 이기는지 아느냐? 똑똑히 들어둬라. 힘으로 하면 오히려 호랑이가 한 번에 황소 뿔을 받고 넘어진다. 하지만 호랑이가 이기는 건 힘이 아니라 눈으로 싸우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어떤 큰 짐승을 만나도 상대의 눈을 보고 정기(精氣)로 싸우는 법, 그 정기에 눌린 황소는 그만 못 이겨 펄썩 주저앉는 것이지. 호랑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의 급소를 물어 일격을 가하는 것이고, 단 한 순간으로 승부가 나는 게다. 알겠느냐?"
문득 도경의 선문답 같은 이야기는 바로 오늘을 위한 이야기였다. 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한 번 부딪혀 보기로 했다. 더 나아가 서열 3위의 도인과 대결을 하는 건 내겐 의미가 없었다. 일격을 가하는 호랑이처럼 단 한 판에 승자가 결정되어야만 했다.
나는 세 도인과 시계를 번갈아 보며 마침내 준비된 말을 받아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군요. 저는 오늘 저녁에 또 영업을 준비해야 하는 바쁜 몸이오. 늦기 전에 가봐야 하는데 언제 1번, 2번, 3번의 힘을 받겠습니까? 게다가 남은 두 도인의 힘까지 합하면 도합 9번의 힘을 받고 오장육부가 터지고 머리가 박살나고 고꾸라지고, 심지어는 저승 문턱까지 건너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다간 날이 샐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1번이고 2번이고 3번이고 할 거 없이 아예 세 분이 아홉 개의 힘을 한꺼번에 제게 보내 주십시오."
통역관이 입을 떼자 그들은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다 못해 까맣게 질려서는 대체 내가 뭘 믿고 그리 큰 소리를 치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귀를 쫑긋 세워 통역관의 말을 들었다.
"으음······."
그들의 얼굴은 점차 험악하다 못해 살기가 가득하였다. 그들의 눈에 볼품없이 보이는 내가 그리 세게 나오자 굴욕감에 몸을 떨었다.
"아이고, 정 선생, 그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저들의 말대로 정말로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슬며서 떠나십시오.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말이오."
"보십시오, 회장님! 이게 아이들 장난인지 아십니까? 저는 오늘 회장님이 초대한 밥값이라도 해야겠습니다. 터져 죽든 깨져 죽든 그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은근히 싸움을 부추기더니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발뺌하는 C 회장의 태도에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좋소! 그렇다면 당신, 이제 우리는 책임 안 진다. 눈을 감고서 받는 자세로 손을 내밀고 앉아!"
그들은 갑자기 명령조로 얼음을 깨듯 차갑게 말을 던졌다. 나는 곧 그의 말대로 손을 내밀고 힘을 받을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정 참기 어려우면 소리를 질러라. 그러면 우리가 중단하겠으니."
그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내게 말했다.
나는 들은 척도 않고 눈을 감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연 그들 말대로 오장육부가 터지고 머리가 깨질 것인가. 그들이 말한 기(氣)의 힘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눈을 감은 채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5분이 지났을까, 손에 온기가 스며들면서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조금 지나자 마치 따뜻한 욕조에 누워있는 듯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것이 기로구나. 은은히 기운이 주변에서 도는 듯한 느낌.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나는 세 사람이 뭉쳐 보내는 힘의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라면 저들의 기운이 내 뱃속에 들어와 꿈틀거리겠지. 그래, 조금만 더 있으면 귀가 먹먹해질 것이고 그리고는 마침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겠지.'
나는 더욱 강해질 힘의 단계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다리며 계속 앉아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배가 꿈틀거리기는 커녕 아프지도 않았다. 나는 10여 분이 지나도록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러다간 줄곧 눈을 감고 있자니 지루하고 심심해서 살며서 실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세 도인은 마치 비를 맞은 듯 엄청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값비싸고 멋있는 기모노는 이미 땀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그들의 윤기 흐르던 수염마저 처마 그늘에서 말린 옥수수 수염처럼 힘없이 처져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나에게 힘을 보내느라 두 눈을 감고 마치 개구리가 헤엄치듯 두 손을 계속 내뻗으면서 휘젓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나를 박살내고야 말겠다는 필사적인 몸짓뿐이었다. 그 휘몰아치는 팔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내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그동안 내가 만났던 기공사(氣功士)를 비롯하여 초염력자, 마인드 콘트롤사, 심지어 UFO를 부린다는 사람, 최고의 무속인들이 했던 익숙한 모습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안간힘을 쓰며 나를 내치려 했지만 오히려 나에게 힘을 받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자못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나이 많은 분들이 손을 뻗고 몇십 분간 땀을 흘리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나보다 저들이 먼저 쓰러질 것만 같았다. 대체로 기(氣)란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우주로부터 오는 좋은 에너지의 한 종류이다. 따라서 나의 기를 준다, 보낸다 하는 말은 자신이 모은 에너지를 남에게 소모 시킨다는 뜻이다. 물론 우주에서 무한정 나오는 힘을 비축했다가 상대에게 줌으로 체력 소모는 없다지만 사실 그 힘을 주는 과정 자체만으로 체내에서 힘이 빠져나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기를 내보낸 후에는 축기(畜氣)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다시 힘을 비축할 수 있는데, 이건 마치 다 써버린 배터리를 충전해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도 도인들은 이제 젖 먹던 힘까지 내게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몸짓은 더욱 격렬해져 갔고 그러면 그럴수록 지치는지 숨을 헐떡대며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이미 내게는 세 도인의 필사적인 팔놀림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을 것만 같았다.
"아직도 멀었나요?"
내가 소리치자 그들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곤 주춤거리며 하던 동작을 멈췄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땀부터 좀 닦으시지요."
윗사람에 대한 예의로 공손하게 건넨 손수건, 하지만 그 손수건의 의미는 이제 게임은 끝났다는 나의 암시였다. 내가 멀쩡한 모습으로 손수건까지 건네자 그들의 표정은 침통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노려보던 그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C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줄곧 힘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놀란 토끼처럼 앉아있더니 내가 힘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자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그제야 그동안 내가 보인 배짱들이 무모한 용기와 오기로 무책임하게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는 듯이.
나는 어색하고 껄끄러운 분위기를 빨리 피하고 싶은 나머지 말했다.
"자, 이제 제가 시작할 차례입니다. 받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도인들은 내 말에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차례를 정하려는 눈치였다.
"도인님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세 분에게 제힘을 동시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참 그리고 이 힘은 동시에 10명에게 보내나 100명에게 보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또 저는 당신네들처럼 1, 2, 3번으로 나누어 드리지 않으니 그리 아십시오."
"어떻게 받으면 되겠소?"
여전히 눈빛이 살아있는 가운데 앉은 우두머리 도인이 물었다.
"그저 당신들이 내게 힘을 줄 때처럼 손을 내미십시오."
말을 마친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 순간 그들의 움찔거리는 작은 몸짓이 보였다. 좌우 도인들은 무서운 호기로 노려 볼 때와는 달리 도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정면을 주시하는 것으로 눈을 피했다. 가운데 왕초 도인만이 끝까지 나를 보고 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저는 딱 원 미닛트(One minute), 단 1분 동안만 보내겠소."
그 순간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나는 초광력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자마자 가운데 앉은 도인을 향해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양옆의 도인들은 볼 것도 없는 법, 제일 우두머리 도인만 사로잡으면 게임은 끝나는 거였다.
마침내 나는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곧추세운 채 초광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C 회장과 통역관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때까지의 부드러운 표정과는 달리 날카로운 표정으로 우두머리 도인을 향해 손가락을 세워들자 겁에 질려서였다.
하지만 우두머리 도인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는 더 이상 나를 쏘아보지 못한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걸 놓치지 않고 나는 마치 권총을 쏘듯 한 손을 움켜쥐고 손가락을 꽂아 초광력超光力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미처 초광력을 보내기도 전에 우두머리 도인이 혼비백산하여 내 팔을 잡고는 소리쳤다.
"됐습니다! 됐습니다, 정 선생님!"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연이어 외쳤다.
"센세이, 고멘구다사이, 고멘구다사이, 고멘구다사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우두머리 도인은 분명 머리를 조아리며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라며 고멘구다사이를 세 번씩이나 외쳤다.
어느새 좌우 도인들도 덩달아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내게 똑같이 소리쳤다. 세 도인 모두 완벽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됐습니다, 도인님들, 어서 일어들 나시지요. 저는 처음부터 회장님의 몸이 불편하신가 해서 왔을 뿐, 대결을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만들 일어나시지요. 덕분에 저도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우두머리 도인은 천천히 일어난 후 첫 대면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 힘은 내 평생 살아오면서 처음 만나보는 힘입니다. 제가 선생님의 힘을 채 받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미 힘을 받기도 전에 강한 느낌이 뚜렷이 왔기 때문입니다. 탁탁 튀는 듯한 느낌이 오면서 온몸이 전율 되더군요. 그 빛인지 뭔지 하는 힘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선생님의 팔을 붙잡았던 겁니다. 제가 그동안 한국의 최고 도인이라는 분도 만나 보았고, 단전에 금빛이 난다는 중국의 대사도 만나 보았지만 이렇게 강력한 힘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벼락을 맞은 느낌이라 할까요? 선생님, 대체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부디 알려주십시오."
우두머리 도인은 거듭 예의를 갖추어 공손하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난감할 뿐이었다. 나는 이 힘을 얻기 위해 무엇을 배우고 노력한 적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대충 얼버무렸다.
"제 스승은 ······음, 호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각양각색인 그들의 삶이 아마 제 스승이겠지요.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가봐야겠습니다."
"잠깐만요, 정 선생님!"
내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급히 빠져나오려 하는데 우두머리 도인이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정 선생님, 바쁘신데 정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말씀을?"
"다음에 일본으로 모시겠으니 꼭 와주십시오. 연말에 초청장을 보내면 꼭 응해주셔야만 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아, 그러세요."
나는 우두머리 도인이 하도 공손하게 청하는 바람에 혼잣말처럼 승낙하고 말았다. 바삐 방을 빠져나오자 C 회장이 다급하게 뒤쫓아 나왔다.
"정 선생, 잠깐 나 좀 봐요."
귀하신 몸이 몸소 문밖까지 따라 나와 나를 불렀다. 그의 눈빛은 이제 사뭇 달라져 있었다. 나를 이상한 힘을 발휘하여 병을 치유하는 사람이 아닌 마치 다른 초인을 보는 듯 공손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 눈빛을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저, 정 선생, 오늘 바쁘신데 수고가 많았어요. 고생하셨을 텐데 이건 차비니 받으시구려."
그는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흰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내 손에 찔러주었다.
'대체 이 흰 봉투는 뭐란 말인가? 사람을 불러다 어쭙잖은 대결이나 시키고 이제 와서 돈 몇 푼으로 그걸 무마하려 하다니.'
나는 목구멍까지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장사꾼인 그는 대결 내내 일본 도인들이 이기면 대체 얼마를 줘야 하나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을 게 뻔했다. 뜻밖에도 내가 이기자 저런 얄팍한 봉투로 나를 또다시 우롱하고 있었다.
"회장님, 이 봉투를 대결 전에 주셨더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을 겁니다. 허나 지금으로써는 받고 싶지 않네요. 받으면 오히려 제 기분이 상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참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로써 저와 회장님이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럼, 건강하시기 바라며 이만!"
나는 C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왔다. 일개 호텔 지배인에게 수모를 당한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벌게진 얼굴로 돌아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와 나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골목을 돌아 나왔다.
출처 : 나도 기적이 필요해
2017년 5월 3일 초판 3쇄 P. 263~280
센세이, 고멘구다사이
"징글벨~ 징글벨~"
거리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고 캐럴이 울려 퍼지는 12월이 되었다. 연말연시 대목을 누리기 위해 호텔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할 때였다.
우리 호텔만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연하장 중에서 일본에서 날아온 흰 봉투 하나를 발견하였다.
초청장, 일본본주(日本本主)라고 쓴 여행 티켓이었다. 그것도 10원 하나 들 것 없는 VIP투어 티켓이었다. 나를 초청한 쪽은 바로 6개월 전 나에게 '센세이, 고멘구다사이, 고멘구다사이, 고멘구다사이! 를 외친 바로 그 우두머리 도인이었다.
그 날 내게 연말쯤 일본으로 초청하겠다고 하기에 그냥 지나가는 인사치레라 생각하고 그러라고 헤어졌는데 그 해가 가기 전에 정말로 약속을 지킨 거였다.
'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답장을 보내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우선은 바쁜 호텔의 업무가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결례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일본 도인들의 본거지를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좋아, 가자!'
나는 시간을 내어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마침내 나는 일등석에서 특급대우를 받으며 일본 ***공항에 내리자 마치 유명인이라도 되는 듯 큰 환영을 받았다.
"곤니찌와, 센세이!"
수많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박수를 치고 환영 피켓을 들고 흔들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급 승용차에 오르자 앞뒤로 몇 대의 검은 승용차가 나를 호위하며 달렸다. 내 옆자리에는 어느 틈에 기모노 차림의 마사코라는 여성이 앉아서는 연방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도쿄 거리를 안내해주었다. 하지만 창밖은 어느 틈에 아슴아슴 어둠이 내려앉는데 차는 도쿄 시내를 빠져나와 외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거 어디로 납치를 당하는 건가?'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무서운 생각이 스쳤다.
"저희 기단체가 있는 총본부로 가는 중입니다. 오늘은 관례상 총본부에서 모시고 내일부터는 도쿄에서 쉬게 되실 겁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정성껏 모실 테니 안심하세요."
나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마사코가 내게 살짝 기대듯 하며 말했다.
마침내 차가 도착하자 나를 맞이하는 일행들이 잘 가꿔진 정원수 사이사이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문득 일본으로 오기 전 뽑아본 산목의 괘가 떠올랐다.
1번-당당하게 맞서라, 큰 수확이 있다.
2번-포기하라, 결정적인 함정이 있다.
3번-재고하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한 후 결정하라.
그중에서 답을 구하고자 할 때 1, 2번 중에서 결정해야만 했다. 그때 왼손에 잡힌 산목 중 하나가 1번 괘(卦)였다.
'그래,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당하게 맞서보자.'
나는 심호흡을 한 채 두 개의 일본풍 건물을 지나 객실로 들어갔다. 방에서 볼 때와는 달리 일본풍 다다미에다 서양풍 고급 가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방이었다. 그러면서도 벽 곳곳에 칼을 쥔 무사도 그림이 그려져 있어 왠지 무서운 무협영화를 보는 듯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잠시 방에 앉아 빛명상에 젖어 있는데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두 여인이 들어와 차를 대접하였다. 신기하게도 한 여인이 일본어로 말하면 다른 여인이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센세이, 식당으로 가시지요."
그녀들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들어가자 이미 식탁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도복 차림의 그곳 사람들이 주욱 앉아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크셨습니다. 오셔서 영광입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와 그들은 축배를 들며 만찬을 즐겼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서울에서 만났던 세 도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와 세면을 마악 끝냈을 때였다. 마사코가 들어와 나를 다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였다.
"예? 어디로 또 갑니까?"
"걱정일랑 마시고 저를 따르시지요. 우리 본부의 최고 어른에게 모시려 합니다."
마사코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음, 이제부터 예견된 만남의 시작이구나.'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곤 그녀가 이끄는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간 곳은 바로 일본 도인들의 힘이 모인 '천지정기도장(天地精氣道場)이었다. 그곳은 이때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리 정신을 아찔하게 할 만큼 장엄함과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방안에는 이미 검은 도복을 차려입은 70여 명의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 마치 명령을 기다리듯 양쪽으로 주욱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내가 만났던 세 도인이 온갖 위엄을 갖춘 채 상좌에 앉아 있었다. 그들 양옆으로는 아리따운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큰 부채를 들고 서 있었다. 세 도인 모두 나에게 '센세이, 고멘구다사이!' 를 외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명령만 내리면 나를 사로잡을 듯한 근엄한 황제의 모습이었다. 내가 만났던 우두머리 도인이 바로 이 단체의 본주(本主)였던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위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놓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잠시 정신이 아득한 사이 명이 내려졌다.
"모셔라!"
그러자 마사코가 이때까지와는 딴판인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가서 앉으시오!"
마사코는 나를 맨 끝자리에 있는 방석 하나 쪽으로 안내하더니 화살처럼 사라져버렸다.
'저 뒤에 앉으라고? 그것도 끝머리에? 적어도 저들을 단단히 혼내주고 승복케 했던 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푸대접하다니! 이거 공짜 여행 좋아하다가 큰코다치게 생겼구나!'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그 자리에 앉았다.
"가져오너라!"
내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는 듯 본주가 명령을 내렸다. 그의 음성은 천하를 뒤흔들 만큼 당당함과 우렁참으로 온 도장을 휘어 감고 단원들의 머리로 쩌렁쩌렁 내려앉았다.
곧이어 기모노 차림의 아리따운 여인이 물이 담긴 백자 사발을 든 채 조용히 걸어 나와 메인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왼쪽에 앉아있던 도인이 잔뜩 위엄 어린 모습으로 단상을 내려와 그 물 사발 앞에 섰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나는 호기심과 함께 잔뜩 긴장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도인은 마치 경건한 의식을 하듯 품 안에서 조그만 시약병을 꺼내더니 소리 없이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코를 쥐어짜는 듯 독한 냄새가 진동하면서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였다.
'도대체 저 시약은 무엇이며 저 독한 약품을 무엇에 쓰려는 걸까?'
나는 그들의 괴상한 행동에 한 치의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도인은 나를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그 시약을 물 사발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트린 후 동작을 멈췄다. 온 도장이 정적에 휩싸이고 칼날처럼 얼어붙었다. 잠시 후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차가운 목소리가 또 한 번 장내를 흔들었다.
"시작하라!"
본주의 명령이 떨어졌다.
세 도인의 동작에 따라 70여 명 전체가 한 동작이 되어 마치 받들어 총을 하듯 물 사발이 있는 쪽을 향했다. 마침내 본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옴, 오~~~~음~~~~."
"오옴, 오~~~음~~~~, 옴~~~."
본주의 선창에 따라 70여 명의 도인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주문을 읊기 시작하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전신의 힘을 모아 물 사발을 향해 읊는 주문 소리는 도장을 집어삼키더니 마침내는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간 다시 온 도장을 통째로 뒤흔드는 태풍으로 바뀌어졌다. 무시무시한 그 진동 옴 소리에 귀신조차 새파랗게 질려 내쫓길 듯 보였다.
그들은 거의 240초가량을 숨도 쉬지 않고 소리를 내뿜었다. 240초라면 4분, 그 4분 단위로 5회 정도를 반복하니 약 20분 이상 엄청난 힘을 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어떤 수련도 초월한 이교도 의식에서 보이는 성스러움과 함께 음산함이 베어져 나왔다.
그렇게 20여 분이 지나자 그들은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췄다. 또다시 태풍의 격랑이 한바탕 지난 후 정적이 흘렀다. 그때 처음 백자 사발을 가지고 나왔던 아가씨가 나와 탁자 위에 놓인 사발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물 사발을 받아들자 도장에 있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 물을 나보고 어쩌라는 게요?'
나는 눈을 들어 본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 섰던 여인이 말 대신 손을 코에 대는 시늉을 하여 냄새를 맡아보라 하였다. 비로소 그들의 뜻을 알아차린 나는 물 사발을 코 밑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놀랍게도 물 사발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방안을 가득 메우던 그 독한 약품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아, 바로 이거였구나!'
나는 그때서야 그들의 주문의 힘으로 약품 냄새를 없앴다는 걸 알았다. 힘을 가하지 않고 정신의 힘만으로 냄새의 독성을 날렸다는 사실에 나는 자못 경탄하였다. 이 일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춤 놀라는 표정을 보이자 그때까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던 세 도인은 물론 70여 명의 도인들은 입가에 만족과 희열의 미소를 지었다.
"정 선생, 한국에서는 이런 힘을 내 이제껏 보지 못했다. 정 선생 또한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하오, 어떤가? 당신도 한 번 해보겠소?"
본주는 엄숙하면서도 우월감에 넘친 얼굴로 내게 정곡을 찌르듯 물었다.
'그렇다면 물맛은 어떨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본주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한 모금 마셔볼 요량으로 물 사발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안 돼! 마시는 건 아니 되오! 그저 냄새만 맡아 보라!"
본주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오라, 이들은 냄새만 날렸을 뿐 물의 성분은 바꾸지 못했구나.'
나는 무언가 실망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본주의 말대로 내 차례였다. 저들은 내가 처음 당해보는 이 일을 내가 어떻게 하나 견주어 보고 싶은 거였다.
'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한 번 해보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결심하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본주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정 선생, 오늘은 날이 늦었구려. 먼 길 오시느라 고단했을 테니 오늘은 이만 푹 쉬도록 하시오."
잔뜩 긴장을 하며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데 내일 하자니 나는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그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벌써 도장을 가득 메웠던 도인들이 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행렬을 하듯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도장은 순식간에 삭막함과 적막함이 찾아들었다.
그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사코가 내 앞에 나와 나를 숙소로 안내하였다.
"선생님, 여기가 바로 선생님께서 주무실 최상의 귀빈실입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프레지던트 룸(President Room)이라고 쓰인 숙소로 들어가자 특급호텔의 최상급 스위트 룸보다 더 으리으리하게 꾸민 룸이 보였다.
'참으로 호화롭구나. 피곤한데 잠이나 자두자.'
나는 서둘러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 틈에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둘러 가운을 걸친 채 문을 열었다.
"정 선생님, 저희들이에요."
문이 열리자 기모노 차림의 아리따운 아가씨 둘이 진한 향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한 아가씨는 술이 담긴 호리병을, 다른 아가씨는 과일과 안주가 담긴 작은 소반을 들고 있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그들은 미쳐 말릴 겨를도 없이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그러고는 잰 손놀림으로 이미 호리병과 주안상을 곱게 차려 내놓았다. 잠결에 보는 그녀들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천하절색 가인이었다. 옷차림 또한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한 아가씨가 과감히 다가와 기모노의 가슴과 허리를 매는 오비(おび)를 위에 갖다놓았다.
"선생님, 저희는 먼 곳에서 오신 선생님의 여독을 풀어드리라는 명을 받잡고 이렇게 왔습니다. 부디 저희를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교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여인들에게 빠지는 순간 내일은 없다.'
나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의 손을 내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가씨들의 정성과 호의는 이미 받은 걸로 하겠소. 그만 돌아들 가시지요. 이젠 자야겠소."
"선생님, 그러시다면 제발 이 술 한 모금 머금고 자리에 누우십시오, 네?"
"아니면 저희가 가벼운 안마라도 해드리겠습니다."
그녀들은 아예 대놓고 치근덕거렸다.
"어허, 쉬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만 물러들 가게."
이미 마음을 다잡은 나는 어떤 달콤한 말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선생님,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제발······선생님, 으흐흑······."
"선생님을 뫼시지 못하고 이대로 나간다면 저희들은 명을 거역한 죄로 그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그녀들은 흐느껴 울며 사정사정하였다.
'음, 오늘 밤의 일은 모두 계획된 거로구나. 저들은 마치 삼국지 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는 미인계를 내게 쓰려 한 게야.'
나는 사정을 듣고 보니 두 아가씨의 뒷일이 걱정이었다.
나는 침실 곁에 놓인 병풍을 중간으로 옮겨놓았다.
'자, 그럼, 이쪽에서 편히들 자요. 나도 두 분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받고 잘 잤다고 할 터이니."
나는 아가씨들을 안심시키곤 내 자리에 돌아와 잠을 이뤘다.
아침이 되어 두 아가씨를 내보내고 산책을 나가니 마침 나와 있던 도인이 내게 물었다.
"밤새 잘 지냈소?"
그 말투는 마치 아가씨들의 보고를 받았다는 의미로 들렸다.
"네, 아주 즐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마침내 아침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되었다.
"정 선생, 준비되었소?
본주가 나를 보며 나지막하면서도 비수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가 뭐 있나요? 그저 한 번 해보는 거지요."
나는 애써 맥이 다 빠진 척,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척 말했다. 그 순간 냉랭하기만 하던 그들의 얼굴에서 '넌 이제 죽었다!' 라는 듯 조소와 조롱의 웃음이 번져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장 한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뜻밖의 내 행동에 어제처럼 그 자리에 모인 70여 명의 기도사들이 비웃음을 그친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면으로 본주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도 나를 무섭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긴장감으로 장내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때 기모노의 여성이 나와 내 앞에다 재빨리 물이 담긴 백자 사발과 시약을 놓아주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마치 사약사발이라도 되는 듯 잔뜩 겁에 질린 채였다. 무거운 침묵을 깬 건 내가 먼저였다.
"자, 보십시오!"
나는 약병 뚜껑을 열고는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을 떨어뜨렸다. 약품의 엄청난 독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자 사람들이 경악하며 웅성웅성거렸다.
"탁!"
내 손에서 탁자 위로 백자 사발이 내리쳐졌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모두 놀라 낯빛이 파래져 가고 있을 즈음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맑아져라!"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구절이었다. 물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오직 우주마음이 함께 하는 이 말뿐이었다. 전날 70여 명의 기도사들이 20분간 '옴' 진동과 '기'를 쏟아부은 에너지의 총량이 두 방울에 1,400분, 한 방울에 700분이라면 나는 단 수 초 만에 모든 걸 끝내자 도장은 놀라움으로 술렁거렸다.
그 순간 본주와 나는 서로 맹수처럼 이글이글 거리는 눈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음, 일산부장이호(一山不藏二虎),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함께 있을 수 없는 법!'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약을 탄 물 사발은 이미 장내를 한 바퀴 돌아 본주에게 전달되었다. 조심스레 물 사발을 들고 냄새를 맡던 본주의 당당하던 눈빛은 이미 땅으로 꺼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그 앞으로 가서는 본주가 들고 있던 물 사발을 빼앗아 그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셨다.
"으윽, 저, 저럴수가!"
여기저기서 저절로 놀라움의 탄성이 터졌다. 물이 목구멍을 타고 꿀꺽꿀꺽 내려가자 그들의 얼굴은 아예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때 본주가 이미 침통해질 대로 침통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그릇을 이리 가져오너라."
기모노 아가씨가 망설이며 다가와 내가 든 물 사발을 받아서는 본주에게 내밀었다. 본주는 조심스레 사발에 든 물을 마셨다.
"으음······."
본주는 낮게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긴 수염마저 파르르 떨리고 형형하던 눈빛은 어느 틈에 그 빛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지난 6개월 전 한정식집에서의 모습과 똑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임금님의 용상처럼 높은 곳에 앉아 있던 그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도사들도 일제히 본주를 따라 일어섰다.
비장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온 본주는 내가 앉은 맨 끝자리까지 와서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 선생님, 일어나시지오."
조금 전까지의 표독스럽고 날카로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따뜻하고 정다운 목소리였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6개월 전에도 들었던 그 소리가 내 귓전에 울려 퍼졌다.
"센세이, 고멘구다사이!"
그 어떤 권위의식도 체면도 다 내던진 애달픈 그 말이 도장 가득 울려 퍼졌다.
"고멘구다사이, 고멘구다사이, 고멘구다사이, 정 센세이!"
본주를 따라 기도사들도 입을 모아 외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사실 6개월 전에도 저희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혹시 그때의 일이 우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도저히 패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선생님을 다시 모셨습니다만 역시 이번에도 저희가 깨끗하게 졌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진인(眞人)이시자 초인(超人)이시자 미륵이십니다!"
본주는 최상의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나는 거저 진인도 초인도 미륵도 아닌 한국 사람 '정광호' 일 뿐입니다. 다만 우주 근원의 빛, 초광력이 내게 함께 할 따름이지요. 이 초광력超光力은 근원에 대한 감사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청하기만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해주는 고귀한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함께한 이 시간 이후 한일 두 나라가 진정한 이웃으로서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기를 소원해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출처 : 나도 기적이 필요해
2017년 5월 3일 초판 3쇄 P. 281~295
첫댓글 일본 기도인과의 대결,
귀한 빛역사의 의미를 잘 담습니다 .
감사합니다 .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일본 기도인들과의 대결 빛역사, 감사합니다.
어린시절 즐겨부르던 노래를 기억하는 글,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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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글,감사합니다
우주 근원의 빛VIIT 초광력~*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빛역사의 날 빛글의 의미 감사히 잘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기도사와의 대결 빛역사 감사합니다.
귀한 빛역사 감사 합니다..
무한의 우주근원 우주생명원천의 기쁨과 행복우주빛마음 학회장님의 특은의 무궁한 공경과 감사마음드립니다...
일본 기도사와의 대결 빛역사
빛역사의 날 감사합니다.
일본 기도사와의 대결.
귀한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
귀한 빛역사 감사합니다
소중한 글 마음에 잘 담습니다.
늘 근원에 대한 감사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빛과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빛역사의날에 일본 기도사와의 대결...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에너지의 바다 빛명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여사 이야기.. 일본 기도인과의 대결 감사합니다
귀한 빛역사 이야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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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도인과의 대결...귀한 빛viit역사의날 함께 축하드리며 감사드립니다 ^^
초광력超光力은 근원에 대한
감사와 겸손한 마음이 맑아지고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해주는
고귀한 에너지입니다
마음에 새겨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역사 이야기 감사합니다
귀한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일본 기도인과의 대결이야기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빛의 힘은 언제나 놀랍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일본 기도인과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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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빵~ 뚫리는 < 일본 기(氣)도사와의 대결 > 뿌듯한 빛역사이야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적을 이루시는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 가득 담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