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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운동의 선 자리와 갈 길
장 성 익/ <환경과생명> 주간
1. 환경 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판은 언제나 두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 비판의 과녁이 ‘운동’을 향한 것이라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운동이란 것이 본디 사적인 이해 관계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공적인 가치를 위해 ― 그것의 목적이 근본적인 변혁이든 부분적인 개량이든 ―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집합적이고도 지속적으로 벌이는 행동인 탓에, 운동에 대한 비판은 비판의 논리적 근거뿐만 아니라 사회적․시대적 타당성과 현실 정세와의 정합성 등을 두루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의 주제인 환경 운동이 최근 여러 모로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환경 운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본의와는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환경 운동에 누를 끼칠 수도 있고, 힘든 조건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환경 운동가들에게 미안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 초반 이래 본격적인 대중 운동․시민 운동으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온 우리 사회의 환경 운동이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안팎의 위기적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듯하고, 또 이 정도의 연륜이 쌓였다면 우리 사회 환경 운동의 현주소와 앞으로 갈 길을 비판적 관점에서 엄정하게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너무 때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아무쪼록 오늘의 토론이 환경 운동의 새로운 전진과 질적인 성숙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얘기를 시작해 보자.
먼저, 오늘의 환경 운동이 과연 위기인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사실 상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경제 위기에 대한 논의를 한다면, 객관적인 지표나 계량화된 통계 수치 등과 같은 구체적인 근거를 판단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환경 운동이 과연 위기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객관화된 검증 자료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으므로 사람에 따라 그리고 관점에 따라 판단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경제 위기에 대한 논란의 경우 이런 자료들이 풍성하게 있어도 위기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하는 것을 보면, 환경 운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본질적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엄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환경 운동의 위기를 지적하고 환경 운동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며, 그만큼 지금의 환경 운동에 대해 안팎에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들이 들끓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의 이러한 흐름은 크게 볼 때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과 개발․성장주의 세력들이 가하는 공격과 질타, 그리고 환경 운동 내부 혹은 환경 운동에 우호적인 쪽에서 터져 나오는 비판과 자성의 촉구 등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이 둘 중에서 보수 언론이나 개발․성장주의자들의 경우는 환경 운동뿐만 아니라 시민 운동 전반의 도덕성․위상․영향력 등을 훼손하고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치더라도, 환경 운동 내부나 우호 세력으로부터 제기되는 다양한 ‘쓴 소리’들은 환경 운동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향후 환경 운동의 더욱 건강하고도 성숙한 발전을 그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좀 더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환경 운동이 과연 위기냐 아니냐에 대한 왈가왈부가 아니라, 최근 제기되는 환경 운동을 둘러싼 다양한 비판적 논의들을 환경 운동의 겸허한 반성과 점검과 성찰, 나아가 새로운 변화와 성숙과 쇄신을 도모하는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계기로 삼는 일이다. 환경 운동의 내부에서 지금처럼 비판의 목소리가 분출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일일 수도 있고 전례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분명히 있다면 쉬쉬하며 덮어둘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며, 또 환부가 있다면 눈가림 식으로 얼렁뚱땅 ‘땜질’할 것이 아니라 고통이 따르더라도 깔끔하게 도려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만 최근 환경 운동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논란들을 잘 갈무리하여 환경 운동의 ‘새로운 거듭남’을 위한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2.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1: 직접적 요인
위기의 원인은 그야말로 복합적이고 다양할 터인데, 대체로 운동의 위기를 논할 때에는 객관적 측면과 주체적 측면을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우선 객관적인 요인으로서, 운동의 전개에 불리한 조건과 정세들이 계속 조성되고 운동이 수행하는 여러 싸움들에서 패배가 연속될 경우 위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체적 요인으로서, 운동 내부에 자기 비판과 자기 성찰과 자기 교정 메커니즘, 곧 내부 민주주의와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위한 노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때에도 위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운동에서 이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중첩되어 발생할 경우 그 운동이 위기로 직결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지금 환경 운동의 위기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측면의 요인들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를 논의의 편의상 직접적인 요인과 근본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최근 진행된 일련의 흐름들과 관련한 직접적인 요인부터 검토해 보자. 주지하다시피 최근 정부는 경제 살리기, 건설 경기 부양, 국민소득 2만 달러, 국토 균형 발전 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개발과 성장 위주의 각종 반환경적인 정책과 법제와 사업들을 끝도 없이 쏟아내고 있다. 기업 도시 건설, 골프장 230개 건설과 골프장 건설 관련 규제 완화, 공장 설립 규제 완화와 토지 관련 규제 완화, 국립공원 관통 도로 등 전국 각지의 환경 파괴 고속도로 건설, ‘경자유전’의 원칙을 파괴하는 농지법 개정,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따른 수도권 발전 정책 추진 등이 그 주요 목록일 것이다. 이에 더해 새만금 사업, 천성산 관통 고속철도 사업, 핵폐기장 건설 사업 등 격렬한 갈등을 겪어온 대형 국책 사업들도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최근 환경 운동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대응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연말 환경 운동 역사상 초유로 전국의 수많은 시민 환경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환경비상시국회의’를 결성하고 엄동설한에 단식 농성을 벌이는 한편으로 ‘초록행동단’을 구성해 전국 방방곡곡의 환경 파괴 현장을 순례하며 캠페인과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민 여론의 반향은 냉랭했고 대중적 파급력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최근 ‘환경비상시국회의’가 해체되고 ‘한국환경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이에 대해 어느 신문사의 환경 담당 기자는 관련 기사에서 “환경 단체들이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모처럼 단합해 악을 써댔지만 결국 제풀에 꺾인 꼴이 되었다”면서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한편으로, “비상시국회의는 사실상 동력이 고갈돼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분석했다).
환경 운동의 문제는 ‘천성산 싸움’에서도 드러났다.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장기간 단식으로 이 사안은 전국적 관심사로 부각되었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의 전개과정에서 ― 설사 언론이 지율이라는 가냘픈 여승의 100일에 걸친 초인적 단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등 선정적인 보도 태도를 취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 지율 스님의 고독한 단식 수행이 두드러졌을 뿐 환경 단체들이 실질적으로 수행한 역할은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이 사안을 정부의 국토 개발 정책 및 교통 정책 전반에 대한 광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공론화로 환경 운동의 수준과 범주를 높일 수 있는 호기를 놓쳐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 에코 생협의 환경 파괴 기업에 대한 물품 판매 사건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자 최 열 이사장이 사퇴한 일, 천성산 싸움의 초기 과정에서 일부 환경 단체가 정부에 타협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혼선과 상호 불신을 초래한 일 등과 같이 환경 운동에 악재로 작용할 일들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결국, 뚜렷한 환경 철학도 없고 환경 문제에 대한 정리된 입장을 한 번도 천명한 적이 없는 현 참여정부가 국정 운영의 근본 방침을 ‘경제’ 쪽으로 ‘올인’하면서 온갖 환경 파괴 정책과 법제들을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객관적 조건이라면, 이에 대한 환경 운동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무기력했고, 이에 더해 당사자들의 본래 입장과 사건의 실체적 내막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환경 운동에 상처가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주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최근 전개된 이러한 흐름들 속에서 환경 운동의 위기를 거론하게 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국면이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2: 근본적 요인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환경 운동이 시대의 변화와 시민 대중의 변화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과거의 관성과 관행에 안주해온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발주의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다. 국토 환경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개발 사업과 정책들은 비단 지금만 심각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도 끊임없이 있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더욱 문제적인 것은, 199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추세가 갈수록 본격화․가속화됨에 따라 시장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로의 재편이 급속하게 진행돼 왔고, 그 결과 이전에 비해 한층 더 전면적이고 유기적이며 고도로 질적인 환경 파괴가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대체로 국가(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환경을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은 더욱 고도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환경이 시장과 자본의 메커니즘으로 깊숙이 포섭됨으로써 이전보다 더 질적으로 교활하고도 치명적인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때에 따라 환경과 보전을 내세우기도 하고 ‘선계획/후개발’의 원칙을 강조하기도 하고 개발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함으로써, 다시 말해 무차별적인 개발 열풍을 환경 운동의 ‘적’이라고 표현하기로 한다면 이전에는 ‘적’의 모습이 가시적 실체로 잘 드러난 데 비해 이제는 그 ‘적’이 아주 교묘하고도 세련된 형태와 방식으로 변신함으로써, 환경 운동의 대응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적잖은 논자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개발 동맹’ 혹은 ‘성장 연합’이 더욱 강화되고 있고 갈수록 ‘개발 국가’, ‘토건 국가’의 성격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추세를 일러 ‘신개발주의’라 규정하기도 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환경이 처한 벼랑 끝 위기가 단순히 현 참여정부의 개발과 성장 드라이브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사회경제 시스템 전체의 근본적인 재편에 따른 구조적이고도 총체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환경 운동의 대응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객관적 조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대 변화의 흐름이 시민 개개인들의 가치관과 의식과 욕망과 생활양식으로 급속히 내면화․고착화됨으로써 사회 전체 분위기가 경제제일주의(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갈수록 경도되고 있다는 점도 환경 운동의 위기를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이다. 예컨대 최근의 ‘웰빙’ 열풍이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지극히 소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이러한 현실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1997년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식의 생존에 대한 강박관념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생존이나 행복만을 최우선시하는 풍조가 전면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물질’과 ‘개인’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고 집단적으로 내면화되면서 공공선과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 운동 전반, 특히 환경 운동에 대한 시민 대중들의 관심과 애정이 빠르게 사그라져 왔다는 점이다. 익히 알듯이 지난 1990년대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 운동이 개화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는데, 90년대 후반을 지나고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시민 운동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와 성원, 그리고 거의 무조건적이었던 신뢰와 갈채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시민 운동을 한다 하면 ‘좋은 일 하느라 정말 고생 많다’, ‘시민 운동이야말로 가장 도덕적이고 희생적인 일이다’라는 식의 분위기가 강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여기에는
어쨌건 세상은 이처럼 환경 운동에 불리한 쪽으로 빠르게 변해 왔음에도 우리 환경 운동은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과거 ‘잘 나가던 시절’의 영광과 명성과 도덕적 우월의식 등에 관성적으로 안주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환경 운동이 짧은 기간에 이룩한 빛나는 양적 성취에 도취해 치열한 자기 반성과 성찰, 그리고 변화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쇄신과 질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고, 이런 문제에 대한 냉철한 자각과 그에 따른 실천을 추동할 만한 운동 내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환경 운동의 제도화․권력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환경 운동의 제도화 문제와 권력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기실 환경 운동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먼저, 환경 운동의 제도화 문제는 지금의 환경 운동이 지나치게 체제와 밀착하여 제도권에 의해 포섭․순치되고 있다는 비판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전제해야 할 것은, 환경 운동이 정부와 파트너십을 유지하거나 이런저런 정책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 단체나 지역 주민과 같은 시민 사회 세력이 정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고 사안에 따라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것은 권력의 주인인 시민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하나의 통로이자 방식이고, 이는 많은 선진국들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시민 사회가 성숙해 가는 하나의 징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환경 운동의 갈래와 환경 단체의 성격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환경 운동과 단체들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 문제를 잣대로 일률적이고 기계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환경 운동의 원칙과 기준이 훼손될 때 발생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환경 파괴의 주요 주체가 각종 대규모 국책 개발 사업, 경제와 산업 정책, 에너지 정책, 교통 정책 등을 추진하는 정부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인데, 이런 정부가 환경 운동의 힘과 영향력이 커지니까 환경 단체들을 끌어들이면서 뭔가를 같이 하자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정책이나 사업을 개발과 성장의 관점에서 반환경적인 쪽으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실에서 환경 단체들이 거버넌스나 파트너십과 같은 명분으로 섣불리 정부 쪽에 참여하는 것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환경 운동에 상처가 될 수 있고 시민 대중의 환경 운동에 대한 지지와 신뢰에도 악영향을 미칠 위험성이 있다. 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이 정부를 비롯한 제도권에 의해 시민 사회에 대한 포섭 및 관리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측면 또한 간과하기 어렵다. 이 경우 환경 운동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정부가 자신의 반환경적 본질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이 어떤 사안을 둘러싸고 갈등과 분쟁이 불거진 후에 사후적으로 진행될 경우 더욱 문제가 된다. 즉 정부가 어떤 일을 시작해 일단 진행부터 하고 나서 주민 반발이든 시민 단체의 문제 제기든 뒤늦게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면 그제서야 주민․시민 환경 단체․관련 전문가 등을 불러 모아 조정 기구나 협의 기구를 만드는 식의 문제 해결 방도로서 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환경 단체가 정부 쪽의 골치 아픈 일을 사후적이고 결과적으로 합리화․정당화시켜 주는 ‘들러리’ 역할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보다 본질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제반 ‘힘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이 민주적이고 공정하게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참여 당사자 혹은 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이 전제되어야 하는데(이 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정치사회적 권력, 물적 토대와 물리적 강제력, 정책 경험과 실행력, 정보력, 담론 구도와 홍보력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국가와 자본의 힘이 시민 사회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이 구조적으로 환경 운동을 비롯한 시민 사회의 의도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특성과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환경 운동의 제도화 혹은 체제 내화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객관적인 현실과 국가의 성격, 그리고 정치사회적 역학 관계 등에 대한 냉철하고도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별 단체들에 대해서는 각각의 지향점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얘기하기 어렵지만, 환경 운동 전체 차원에서 볼 때 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은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운동의 중심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제도화 문제의 이러한 위험성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운동의 역동성과 활력과 전투력이 저하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운동의 건강하고도 장기적인 발전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단체와 사안에 따라 인식이나 접근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범답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한 어떤 사안이든지 이른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각각의 해당 사안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조건과 맥락과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면밀하게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만, 두어 가지 정도의 원칙은 얘기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어떤 정책이나 법이나 사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초기 시작 단계라면 환경 운동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환경 운동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소중하지만, 어떤 일이 한참 진행된 후나 갈등과 분쟁이 벌어진 후에 환경 단체를 은근슬쩍 끌어들이는 식이라면 냉정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해 최근 정부가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춘천-양양 구간 제2 영동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처음 설계 단계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주민․환경 단체 등 주요 당사자들을 모두 참여시켜 노선을 어디로 할 것인지, 터널을 뚫을 것인지, 다리를 놓을 것인지, 생태 통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의견을 반영해 결정하겠다고 한 것은 ― 물론 환경 운동의 입장에서는 도로 자체를 건설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또 앞으로의 경과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체 차원에서 볼 때 이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이 소수의 상층 지도부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원과 시민의 밑으로부터의 광범한 의견 수렴 및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후의 평가와 검증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환경 운동의 권력화 문제 또한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만큼 환경 운동의 위상과 힘이 커졌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보수 언론 등의 악의적 공격은 논외로 치더라도, 모든 힘은 잘 쓰면 ‘약’이 되지만 나쁜 쪽으로 사용되면 ‘독’이 된다는 것은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를 들어 이 문제가, 보수 언론의 의도적인 공격 탓이든 아니든, 환경 운동의 커진 힘과 권력이 기업체에 물품을 판매하거나 재정 후원을 끌어오는 데 활용된다는 식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부각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예컨대 천성산 문제와 관련해 지율 스님의 단식에 대해 정부가 취한 태도를 두고 ‘일개 여승의 단식 때문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대규모 국책 사업이 파행을 겪는 게 말이 되는가’, ‘국가와 정부의 권위를 어디서 찾을 것이며, 이런 식으로 가다가 정책 혼란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따위로 이어지는 공격과 비난은 어처구니없는 망언에 불과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환경 운동이 단순히 정부 정책을 좌절시키거나 국가 권력을 굴복시키는 모양새로만 비추어지는 것은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보수 언론 등의 왜곡과 매도에 대해서는 그것대로 명확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환경 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환경 운동의 권력화 문제는 대중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대중의 의식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환경 운동의 힘과 영향력을 정부 정책의 전환, 세상의 변혁, 삶과 가치관의 변화 등과 같은 환경 운동 본연의 목적과 방식에 맞게 행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5. ‘환경 귀족’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환경 귀족’ 문제가 제기된 이후 일각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하고 불필요한 논란이 빚어지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분명히 전제해 둘 것은, 이 문제는 이른바 ‘상층 명망가’ 중의 특정 극소수에 대한 얘기일 뿐이지 활동가들 전반에 대한 얘기는 아니며, 그래서 어렵고 힘든 조건 속에서 헌신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활동가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쪽으로 얘기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환경 운동의 급속한 발전 과정에서 언론의 각광과 대중적․사회적 명성을 독(과)점하는 개인과 단체가 생겨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운동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필요하기조차 하다. ‘소수의 선각자’나 높은 지명도를 확보한 이른바 ‘스타 운동가’가 때때로 운동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런 인사들이 우리 사회에 환경 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우며 눈부신 발전을 이끌어온 바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고, 이 점은 마땅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어차피 겪어야 할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현실에서 이러한 개인과 단체가 본래 의도가 어떠했든 환경 운동 전체를 지나치게 ‘과잉 대표’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환경 운동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시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지적이 억울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의 힘과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과 시민 대중의 기대도 커지기 마련이므로, 운동가(조직)라면 이처럼 사회적․대중적으로 규정되는 공적인 역할과 임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 그 부작용이나 문제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선 지적할 것은 환경 운동 전반과 환경 단체 내부의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운동의 활력을 저하시킨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소수의 특정 지도부와 핵심 간부 중심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면서 단체의 진정한 주인인 회원과 시민, 그리고 대다수 활동가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 소통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대목인데, 그 결과 안으로부터나 밖으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차단되고, 단체 운영이 관료화․경직화되고, 운동의 성과와 영광이 소수에게 독점되면서 일선에서 헌신하는 대다수 활동가들이 소외감과 무력감과 허탈감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앞서 말한 자기 반성과 자기 혁신의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과도 맥락이 닿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운동 전체 차원에서 보자면, 이른바 메이저 중심주의, 운동 패권주의, 운동 권위주의, 조직 이기주의, 단체 간 헤게모니 다툼 등의 논란도 대체로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정 개인과 특정 단체의 과도한 부각과 독주, 그리고 이들의 이기적이고 패권적인 활동 방식으로 인해 전체 운동 차원에서 건강한 연대와 협력의 분위기가 훼손되고 효율적인 역할 분담에 애로가 생기는가 하면 단체 간의 불신과 갈등이 초래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활동이 곧 환경 운동 전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빠지거나 협력하지 않으면 전체 운동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거나, 연대 활동에 있어서 자신들의 주도권이 관철되지 않으면 소극적인 참여나 생색내기 식 협조에만 그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환경 운동 전체의 역량 결집 및 제고에도 걸림돌이 되고, 운동의 활력과 역동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환경 귀족’의 행태와 활동 방식도 문제이다. 이를테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자리를 찾아다니고, 행사장 다니면서 축사하고 시상식하고 사진 찍고 악수 나누는 일에 몰두하고, 단체를 기업체 운영하듯이 수익을 올리는 활동이나 사업을 자꾸 벌이고, 환경 운동의 커진 힘과 영향력과 지명도가 기업의 후원이나 정부의 예산 지원을 확보하는 데 사용되고, 정치인․고위 관료․기업체 간부 등 ‘힘세고 권력 있는 자들’과 어울리는 데 익숙해지고, 환경에 대한 진정성은 없이 환경을 매개 혹은 명분으로 하여 이른바 사회 지도층 명망가들과 어울려 ‘사교 클럽’ 비슷하게 운영하는 등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환경 운동 내부의 논란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 대중에게도 그대로 비침으로써 시민들이 환경 운동에 대한 애정과 성원을 철회하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는 환경 운동의 장기적이고 건강한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또 이런 모습은, 예를 들어 부안 주민들과 수많은 활동가들이 피땀 흘리며 싸우는 모습이나, 종교계 성직자들이 목숨을 건 삼보일배와 단식을 하는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성직자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과 운동가의 그것은 다르다. 또 아무리 지도자라 해도 일반 운동가에게 성직자들이 보여준 바와 같은 극단적인 희생과 헌신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사리에도 맞지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온갖 고생을 감내하며 묵묵히 헌신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때깔 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만 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정도가 지나쳐 보인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이 문제는 소모적인 논란에서 끝낼 일이 아니라, 환경 운동의 건강하고도 성숙한 발전이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환경 운동의 새로운 리더십, 곧 시민 대중과 활동가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보다 성숙한 환경 운동의 리더십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하는 보다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들 이외에도 언론과 환경 운동의 관계, 기업과 환경 운동의 관계, 환경 운동을 비롯한 시민 운동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 문제 등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 모든 것을 다 다루자면 논점도 분산되고 분량도 너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되어 생략하였다. 토론 과정에서 기회가 된다면 논의될 수 있기를 바란다.
6. 대안은 무엇인가?
오늘날 환경 운동은 객관적인 정세와 주체적인 조건의 두 측면에서 공히 전환기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적인 성장도 물론 계속해야 하지만, 그에 걸맞은 ‘질적인 구조 조정’과 ‘뼈를 깎는 자기 성찰 및 자기 혁신’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를 위한 향후 환경 운동의 과제와 관련해 몇 가지 사항만 제안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대중적 설득력과 흡인력을 갖춘 새로운 의제 설정과 담론 개발 능력을 다양하게 길러야 한다. 기존의 환경 운동은 수시로 불거지는 굵직굵직한 현안 대응에 바빠 많은 시민 대중과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의제와 담론 개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듯싶다. 작금의 경제 우선주의 대세와는 별개로, 앞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성숙할수록 환경 가치와 이른바 ‘녹색의 의제들’이 제도권이나 기존 정치 세력에 수용․포섭되는 경향이 강화된다고 가정할 경우 환경 운동의 설 자리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일반 시민 사회 운동 차원에서 보면 요 몇 년 사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운동, 학교 종교 수업 반대 운동, 외국인 노동자 관련 운동, 다양한 소수자 운동, 이라크전과 관련한 반전 평화 운동, 사형제 폐지 운동, 여성 운동의 성인지적 예산 편성 운동 등 참신한 이슈들과 새로운 움직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흐름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시민 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면서 ‘운동의 다양성’을 키워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환경 운동도 깊이 참조하여 멀어져 가는 대중을 다시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다채롭고도 풍요롭게 개척해 나가야 한다.
둘째, 환경 운동의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환경 운동의 자기 성찰과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별 단체 내부뿐만 아니라 환경 운동 전체 차원에서도 민주주의가 더욱 활성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곧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 소통 시스템을 원활하게 가동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를 위해 환경 단체들은 시민 회원의 총의를 상시적으로 묻고 이들로부터 엄밀한 평가를 받는 쌍방향 소통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하며, 나아가 운동의 사회적 책임성과 일반 대중과의 역동적인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단체 외부로부터도 객관적 평가를 받는 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단체 안팎의 평가와 인식을 교차 점검하면서 새로운 교훈과 시사점 및 대중과의 접점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단체 안팎의 성찰과 평가가 상호 피드백하는 시스템을 운용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향후 환경 운동은 이처럼 안으로뿐만 아니라 밖으로도 민주적이고 수평적으로 열려 있는 구조로 가야 한다.
셋째, 각종 풀뿌리 운동을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 환경 운동의 가장 강력한 희망의 근거가 풀뿌리에 있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또한 이는 환경 운동의 범주와 내용의 확장․심화라는 과제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특히 지역 차원에서 다양한 풀뿌리 주민 운동들, 예컨대 여성 운동, 교육 운동, 보육 운동, 먹거리 운동, 평화와 인권 운동, 복지 관련 운동, 자치민주주의 운동 등과의 연대와 협력을 한층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구체적인 생활과 삶에 밀착하여 지역과 시민에 뿌리내리는 환경 운동을 펼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환경 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환경 단체들마다 보다 특화되고 차별화된, 다시 말해 각자의 개성과 색깔을 보다 뚜렷이 드러낼 수 있는 운동 영역을 개발하고 확보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단체는 백두대간․갯벌․강 등과 같은 자연 생태 분야에 집중하고, 또 어떤 단체는 토지 문제, 도시 문제, 난개발 문제, 오염 피해와 환경 불평등 문제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사안에 주력하며, 또 다른 어떤 단체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감시와 대안 제시, 담론 개발, 이슈 파이팅 등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식 등의 형태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껏 환경 단체들은 운동 내용과 방식이 ‘백화점’이나 ‘종합 선물 세트’ 식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 왔는데, 최근 이러한 ‘다양화’와 ‘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다. 기존 단체들도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거니와, 자기만의 개성적인 활동 영역과 운동 방식을 지향하는 새로운 단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것으로서, 이처럼 ‘운동의 다양성’을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가능만 하다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성공적인 ‘모범 사례’를 만들어내고 이를 확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제반 조건과 환경이 잘 갖추어졌다고 평가되는 특정 시(市) 등의 단위에 환경 운동의 역량을 결집해 지방 선거에서 환경 운동 인사나 환경 친화적인 인사가 시장이 되고 이 지역의 다양한 환경 운동과 주민 운동 등 시민 사회 운동 역량들이 대거 결합하고 여기에 지방 의회와 기업 등도 변화시켜 우선은 작은 단위에서라도 진정한 녹색 정치, 녹색 행정, 녹색 지역 공동체의 모범적인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고 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지역과 주민의 삶이 동시에 새롭게 변화되는 모습들, 곧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 현실 속에서 구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섯째, 환경 단체들의 이념적․철학적 기초와 지향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뭉뚱그려 같은 환경 운동의 범주에 넣는다 하더라도, 환경 운동의 수준과 지향점과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정책 및 행정의 변화, 과학기술의 발전 등을 중시하는 개량적․관리주의적 환경 운동에서부터 현대 물질 문명 자체의 뿌리로부터의 전환을 지향하는 근본생태주의적 운동,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에 초점을 맞추는 좌파적 환경 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그 갈래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이념적 기준뿐만 아니라 활동 방식에 따라서도 다양한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신이 속한 단체나 자신이 하는 일의 이념적 위상과 철학적 기초는 무엇인가에 대한 밀도 있는 고민과 토론은 활동가들 개인뿐만 아니라 환경 운동 전반의 내적인 성숙에 소중한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결국 환경 운동의 가장 큰 화두는 ‘현장’과 ‘대중’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 운동의 진정성과 역동성과 다양성을 새롭게 고양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풀뿌리 대중 속으로, 현장 속으로, 지역과 생활 속으로 환경 운동의 뿌리와 더듬이가 뻗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 환경과 생명을 갈수록 벼랑 끝의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이 폭력과 불경(不敬)의 시대에 가장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맞설 수 있는 참된 저항의 동력은 바로 현장의 풀뿌리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처럼 현장과 대중으로 스며드는 운동을 ‘물과 같은 환경 운동’이라 부를 만한데, 『노자』 제78장에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天下莫柔弱於水 而功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라는 대목이 나온다. 늘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항상 빈 곳을 채우며, 그렇게 사방의 물을 온전히 다 끌어모아 깊고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물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환경 운동의 속성을 많이 닮았다. 작금의 개발 광풍이 온 자연과 생명을 집어삼키는 ‘불길’이라면 새롭게 거듭나 분출하는 환경 운동의 힘찬 물줄기야말로 이 불길을 진압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