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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호른의 위용)
스위스의 작은 마을Zermatt에 가게되면 자동차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알프스에서 가장 유명한 봉우리인 Matterhorn(4,478미터)을 볼 수 있으며 이 외에도 해발 4,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를 자그만치 29개나 더 볼 수가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탑10 봉우리 중에 9개가 이 곳에 속해 있다. 과히 알프스의 지붕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이탤리 국경지대에 있는 몬테 로싸(Monte Rosa) – 독어로는 두포르쉬피체(Dufourspitze)로서 해발 4,634미터이다.
(스위스의 국기는 이 기차와 같이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되어있다)
70년대 초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막 들어 갔었을 때였다. 부모님이 항상 따라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시며 단골 동네 이발사 아저씨를 괴롭혀(?)가며 가꿔 온 완벽에 가까운 내 헤어스타일을 사정없이 빡빡 밀어 버리고는 나체가 된 듯한 창피함도 잠깐. 새 교과서를 발급받아서 지나간 달력을 찢은 종이로 정성껏 싸고 교과목 이름을 앞옆으로 일일이 적어 놓았었다. 그리고 공책도 매 교과목마다 하나씩 준비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6년간 주 6일의 등교를 단 한번의 결석도 없이 다닌 결과로 개근상을 받게 되었었다. 그 상의 부상으로 받은 것 중의 하나가 공책 5권이었다. 이 공책의 표지 전면은 멋있는 눈 덮인 산의 정상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 멋진 사진이 왜 그렇게 잊혀지지 않고 근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그 산이 스위스에 있으며 이름은 마터호른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90년대 초 쮜리히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내 어느 관광 여행사 앞을 지나 가는데 한 사진이 내 눈길을 사로 잡았었다. 옛날에 보았었던 공책표지에 있던 그 산이었다. 수년간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들킨 것 같이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그 길로 당장 스위스 친구에게 달려갔다. 당일치기로 갔다 오기엔 좀 먼 거리라면서 말리는 친구에게 더 상세한 정보를 알아 내곤 그 주말에 가 보기로 작정을 하고 나니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 처럼 주말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한여름이라 해가 일찍 돋은 토요일 새벽 같이 일어나 쮜리히의 반호프로 달려가 쩨르맛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방방곡곡 어느 구석을 가나 아름다운 스위스는 기차여행을 하는데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절경들로 더더욱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막상 와서 보게 되는 마터호른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멋있었고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그저 한동안 한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럼 내가 경험했던 쩨르맛과 마터호른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을 아래의 사진들과 함께 같이 즐기시길 바라며…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비가 내린 직 후라면 더 멋있었을 폭포)
(기차에서 바라 보이는 자동차 도로용 교각들)
(언덕위의 집들과 교회 – 한여름에도 산꼭데기에 덮힌 눈을 보는 것은 알프스에서는 흔한 일)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 농촌이라면 논밭, 목축지대라면 젖소가 보여야 되는 것 아닌가?)
(젊은 세대들은 아마 모를 것 같은 남진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 그림같은 집을 짓고 ~~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쩨르맛 빌리지 진입구 강변에서)
(쩨르맛 가는 길 – ~~동구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쩨르맛의 호텔들 – 한국 동해안의 설악동이 생각나신다고요?)
(쩨르맛에 자동차가 없는 대신 무공해 전기로 가는 그린카는 있다)
(아니 스위스에 왠 미국산, 멕씨코산 맥주간판이? 미국인 관광객을 위한 배려? 몇년 후엔 칭따오 맥주간판이 있을까? – 쩨르맛 빌리지의 관광 기념품가)
(설백색과 녹색의 오묘한 조화)
(쩨르맛 빌리지로 들어 가는 길)
(기차내에서 아쉬운 작별을 취하며 돌아 본 마터호른)
다음 방문엔 이 곳에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는 스키 리프트를 타고 유럽서 가장 길다는 슬로프를 타고 활강해 보았으면, 아님 50Km나 된다는 트랙을 따라 정처없는 나그네 길로 산행을 떠나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짧은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로서 나의 데쟈부는 70년대초 중학교때의 공책 표지사진으로부터 40여년만에 실지방문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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