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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
느 11:1-14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3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
4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5 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6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7 베냐민 자손은 살루이니 그는 므술람의 아들이요 요엣의 손자요 브다야의 증손이요 골라야의 현손이요 마아세야의 오대 손이요 이디엘의 육대 손이요 여사야의 칠대 손이며
8 그 다음은 갑배와 살래 등이니 모두 구백이십팔 명이라
9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
10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11 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이니 그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므술람의 손자요 사독의 증손이요 므라욧의 현손이요 아히둡의 오대 손이며
12 또 전에서 일하는 그들의 형제니 모두 팔백이십이 명이요 또 아다야이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블라야의 손자요 암시의 증손이요 스가랴의 현손이요 바스훌의 오대 손이요 말기야의 육대 손이며
13 또 그 형제의 족장된 자이니 모두 이백사십이 명이요 또 아맛새이니 그는 아사렐의 아들이요 아흐새의 손자요 므실레못의 증손이요 임멜의 현손이며
14 또 그들의 형제의 큰 용사들이니 모두 백이십팔 명이라 하그돌림의 아들 삽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
느 11:1-14 / [예루살렘의 주민을 늘리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백성의 지도자들이 정착하고 있었으나 도성의 재건공사와 방위의 책임 때문에 주민이 아주 부족하였다. 그래서 다른 지방의 주민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 열 집에 한 집은 예루살렘에 이주시키기로 하였고 아홉 집은 남아서 살도록 하였다. 2) 여러 가지로 조건이 불리한데도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가는 가정들은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았다. 3)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의 명단] 유다 지방의 마을들에는 이스라엘 주민들이 살았고, 이들이 사는 마을에도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성전 막일꾼들과 솔로몬왕을 섬기던 노예들의 후손이 함께 살았다. 이런 주민들은 모두 자기 마을에서 제 땅을 지니고 살았다. 유다 지방의 대표자로서 예루살렘에 살던 이들은 다음과 같았다. 4) 예루살렘에 살던 이들은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들 몇 명이었다. 유다 지파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 그의 조상은 아버지 웃시야로부터 그 윗대로 스가랴와 아마랴와 스바댜와 마할랄렐과 베레스에 이르렀다. 5) 유다 지파의 마아세야. 그의 조상은 아버지 바룩으로부터 그 윗대로 골호세와 하사야와 아다야와 요야립과 스가랴와 실로에 이르렀다. 6)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의 후손은 모두 468명으로 전부 용사였다. 7) 베냐민 지파의 살루. 그의 조상은 아버지 므술람으로부터 그 윗대로 요엣과 브다야와 골라야와 마아세야와 이디엘과 여사야에 이르렀다. 8) 그밖에도 갑배와 살래 등이 있었는데, 모두 928명이었다. 9) 그 지도자는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었고, 핫스누아의 아들인 유다는 예루살렘 도성 절반 구역의 구역장이었다. 10) 제사장들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한 이들은 다음과 같았다.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 11) 성전의 최고 책임자인 스라야. 그의 조상은 아버지 힐기야로부터 그 윗대로 므술람과 사독과 므라웃과 아히둡에 이르렀다. 12) 이러한 제사장들의 친척이 모두 822명이었는데, 그들은 성전의 제사 업무를 도와주는 이들이었다. 제사장 아다야. 그의 조상은 아버지 여로함으로부터 그 윗대로 블라야와 암시와 스가랴와 바스훌과 말기야에 이르렀다. 13) 아다야의 친척들 중에는 모두 242명이 가문의 어른들이었다. 제사장 아맛새. 그의 조상은 아버지 아사렐로부터 그 윗대로 아흐새와 므실레못과 임멜에 이르렀다. 14) 아맛새의 친척들 중에서 128명의 용사가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하그돌림의 아들 삽디엘이었다.
예루살렘은 예부터 이스라엘의 관습적인 수도로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1-2) 예루살렘은 외세에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살기를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지만 용사들은 자원해서 살겠다고 했습니다(6). 예루살렘에 남는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지키고 보호하는 책임을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2).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어 예배의 중심지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산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주의 성전에 살며 항상 주께 찬송하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이 시온으로 가는 것을 사모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시 84:4-5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3-9) 예루살렘에 거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다와 베냐민 자손입니다(4).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늘 함께한 지파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거는 일부터 시작하여(창 44장) 자손대대로 서로 돕는 지파로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며(4) 자신의 위치에서 희생하여 가문과 조상의 가치를 빛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에서 희생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문의 자손들을 축복하십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시 37:25-26)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10-14) 왕손과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남을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도 함께 남았습니다(10). 그들은 예배를 인도하고 성전을 관리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명 따라 거주를 정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과거에는 직업에 따라 거주를 정했으나 요즘은 자녀교육을 위해서 또는 재산증식을 위해서 거주지를 정합니다. 이런 세태에 본문은 많은 울림을 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직업과 거주지를 정하는 것,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결단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적용: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있나요? 성전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오노레 드 발자크. 사람들은 보통 익숙한 것만 하길 원하고 조금의 변화를 겪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매번 왔다 갔다 하는 길만 다녀서는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없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옮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비 뽑힌 대로 순종한 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리라는 것의 믿음입니다. 조금 무섭더라도 가보지 않은 옆길에 새로운 풍경으로 눈이 즐거워질 수 있기도 하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순종하면 지금 누리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더 크게 채워주시는 은혜 위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
느 11:1-2 / 피종진목사
예루살렘의 상징은 ‘내세의 천국, 지상에서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구별하신 곳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실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성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도 이 성을 생각하며 울었던 사실은 이 성이 그들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시 137: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파될 때도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는 어떤 사람이 거하였습니까?
첫째, 백성의 두목들이 거하였습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느 11:1a) 백성의 두목으로 지도자가 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를 불문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통치했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전도하면서 신앙의 성장이 이루어져 유기적인 조직체를 이루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성전을 위하고, 하나님의 성민들과 주의 백성들을 위하고,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는 지도자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교회를 핍박하고 멸시하거나, 교회의 존재를 어렵게 만들고,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고, 또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따랐습니다.
모든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거하여야 합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신앙을 떠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고,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우리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국가의 지도자든, 또 지역사회의 지도자든, 또 영적인 지도자든 모든 두목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둘째, 제비뽑아 십분의 일에 해당된 자들이 거하게 하였습니다.
“그 남은 백성은 제비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느 11:1b)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신령한 지혜와 은혜가 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움이 있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비로 뽑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태로부터 택정해주셨고(갈 1:15), 만민 중에서 택하여주셨으며(신 10:15),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벧전 2:9).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군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전쟁을 하는데, 불신앙의 세력과 평생을 싸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과 평생을 싸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움의 사탄의 권세와 싸우면서 살아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큰 무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선택받은 반열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뽑힌 사람들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다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깨닫게 해주시고, 또 그 일을 하게 해주시고, 역사를 나타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땅만 보고 살지 말고, 천국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내 능력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이 우리에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셋째, 자원하는 자들이 거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두목들이 우선적으로 거하고, 제비를 뽑아서 십분의 일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거하게 했는데, 이제는 자원하는 사람도 거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두목이 안 된 사람은 거하지 못하고, 십분의 일에 제비 뽑히지 않은 사람은 거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막을 내리고 닫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원하는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하고 싶어서 불타는 마음으로 자원해서 할 때 하나님이 크게 축복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원이란 원어에 보면, ‘자발적인 소원’, ‘자신을 재촉해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고 물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고, 시편 기자는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라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거하게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하게 하시는 이유는 ①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행 1:12) ②능력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을 받아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③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④축복과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느 11:2, 사 31:5). 천국을 바라보고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헌신과 감사의 축제
느 11:1-2, 12:43-47 / 김동국목사
"주님의 뜻과 주님을 향한 자기 헌신의 일치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이요, 형통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스탈린의 딸 스페트라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미국 생활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녀는 “제 스스로 뭔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이 결정해준 대로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되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는 자신이 얻은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 무척 부담스러웠던 것이었습니다.
권리를 바르게 행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권리를 잘 행사하는 것은 의무를 바르게 이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떻게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지 잘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서면 어떻게 권리를 행사할 지에 대한 자기 주장을 펴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오르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바르게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미디안 족속을 기드온과 3백 용사를 들어 물리치셨습니다. 승리한 기드온의 용사들은 기드온에게 그들을 다스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고 대답합니다.
기드온은 3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보다도 자신의 권리를 바르게 고백하고 행사함으로 진정한 승리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성벽 재건을 52일 만에 이루어냅니다. 자신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겠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더 많은 권리가 주어질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의 권리사용에 있어서 첫 번째 우선 순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당신의 뜻을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나의 것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순종하고 섬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일들을 보며 불평하라고 주신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왜?’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정확하고 바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오늘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나에게 말씀해주신다면 내 모든 것을 다바쳐서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큼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뜻을 듣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자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에게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시지 않는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는 두가지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해내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들로서 주님의 뜻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합한 자기 뜻을 세우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라는 말씀이 목사님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해왔지만 정작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세운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지만 자신의 자유와 권리, 아들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자발적으로 세운 자기 의지와 자기 뜻, 자기 헌신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많은 기도를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기도응답의 조건은 먼저 그 분의 뜻 안으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가 그분의 뜻 안으로 우리의 삶을 선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나의 권리를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리는 것이 바로 기도응답의 핵심입니다.
주의 뜻과 일치된 삶
느헤미야가 민족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일치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느헤미야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이요, 그의 삶이 형통하게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추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모든 것을 헌신하며 나아갔습니다. 이런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공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공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에게 성벽 재건뿐만 아니라, 영적인 재건과 생활의 재건을 이루는 기회와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이스라엘이 영적인 부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재건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했듯이 백성들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통해서 백성들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느헤미야 11장 1, 2절입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이 본문은 내용상으로는 7장 4절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당시 예루살렘 성읍은 1백42년 동안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황폐했습니다. 또 성벽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거하지 않아 성벽을 적들로부터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인구를 재배치해서 예루살렘 성읍을 중심으로 해서 유다를 견고히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읍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다섯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읍은 하나님의 전이 있어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율법을 잘 지키도록 요구받았습니다.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땅에 사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두 번째, 예루살렘은 상업도시가 아니어서,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장사를 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백성들 중 많은 수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거하는 집이 농토 가까이 있기를 원했지, 도시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은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살기보다는 조상의 집이 있었던 고향땅에 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예루살렘 성읍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고 그리 비옥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산다는 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한 결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 가운데 임재하시겠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읍은 중요한 성읍입니다. 스가랴 8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국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통한 축복의 말씀을 이방에 비추도록 부름받은 선택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을 굳건히 지켜야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성 가운데 머물게 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가진 권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도록 돕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세 부류의 사람이 예루살렘 성읍에 거합니다.
첫 번째, 백성들의 두목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층으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읍에 머무는 것이 마땅하고 용이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백성들의 두목을 그들의 주권과 권리에 따라서 머물게 한 다음에 두 번째로 ‘제비를 뽑아’ 백성들을 성읍에 거하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서 제비를 뽑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하는 행사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제비뽑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권리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거하게 된 사람들은 주권도, 권리도 없었지만, 자원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길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축복하면서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격려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자원하는 사람, 자신의 권리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상황을 지배하는 능동적 삶 살아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수동적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다해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아무리 억압적인 상황이라도 지배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배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 5:38~41)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무거운 짐도 종으로서 지지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노예로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 상황의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함께 하는 백성들도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들을 성벽재건 사업에 동참시켰고, 예루살렘 거주에 함께 동참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3절에서 12장 26절까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모두가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스타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일꾼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붙잡아 천대까지 복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켰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화평과 일치를 얼마나 이루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나의 이름을 날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기억하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저는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을 기록하고 여러분을 기뻐하고 축복하고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존귀케하는 은혜와 은총을 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물을 흘린 자만이 진정한 기쁨의 의미를 압니다. 모든 백성이 자원해서 얻는 승리, 성벽의 재건은 진정한 공동체의 회복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승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 예배로 표현합니다. 느헤미야 12장 27절과 43절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하나님께서 백성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그들에게 즐거움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들은 함께 고난을 겪고 자신의 권리를 헌신함으로 얻은 승리이기에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도비야와 산발랏이 ‘너희가 쌓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 가도 무너지리라’고 조롱했던 그 성벽에서 유대 사람 수만 명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 찬양의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도하고 대적들은 ‘저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구나’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쌓은 성벽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이 성벽은 모두의 것임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의 것입니다. 교회는 모두의 소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진정한 주인이신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성벽을 행진하며 자신들의 땅임을 주장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토지의 한 부분을 걷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땅임을 주장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7)는 음성을 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여러분이 발로 밟는 모든 땅이 여러분의 것이 되길 축복합니다.
자기 권리 포기로 얻는 진정한 승리
한 지도자의 바른 권리사용, 느헤미야의 하나님 앞에서의 권리포기, 이것을 통해 다 함께 성벽을 재건했고, 다함께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고, 다함께 기쁨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한국 교계의 한 지도자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난 한평생 집 한 칸도 마련하지 못했고, 내 평생 저금통장 하나도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사위집에 얹혀 살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어떤 단체의 장이 되려 노력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노벨상에 버금가는 템플턴상을 받은 한경직 목사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어느 누가 이분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이용해서 얻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러움과 영화가 그 길을 후원해줍니다. 또 다른 길은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포기해서 얻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만큼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반드시 자기 권리포기와 아픔과 수치와 모욕의 강을 건너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공입니다.
이 길을 선택한 가장 위대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길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2)
자리를 잘 잡으십시오
느 11:1-2 / 문기태목사
페허가 되었던 예루살렘성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52일만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성은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같은 쓸슬한 성읍이었습니다. 당시에 도시가 텅비어 있는 모습을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느 7:4)'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얼마가지 않아 흉가처럼 폐가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잘 건설하였어도 성읍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예루살렘성은 142년동안 외부에 의해 수없이 침입과 약탈을 당하였습니다. 그 성에 거주하여 산다는 것은 대단히 불안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내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유대민족의 예배의 중심지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신앙의 구심점입니다. 그 성을 어렵게 건축하였으나 사람들이 살면서 지키지 않는다면 성읍뿐아니라 신앙과 함께 민족정신이 영영히 무너질 위기인 것입니다.
그처럼 그 성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들로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주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습니다. 누구나가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지향하기 때문에 새로운 거주지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성은 주변 적들의 침략위험이 가장 많은 성읍이었습니다. 반드시 누군가는 이주해와서 살아야 했는데 모두가 망설이는 중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결단한 이들은 백성들의 두목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백성들중에서 제비뽑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지도자 - 백성들의 두목
지도자들이 편안한 곳만 차지하고 위험한 곳으로 백성들을 내모는 나라와 민족은 시끄럽습니다. 그 운명이 위태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6,25전쟁시 정부는 전투에서 이기고 있으며 안전하다고 발표했습니다. 백성들로 안심하게 하고 지도자들은 최후방으로 도망가고는 한강다리를 폭파했습니다.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희생을 당하였습니까? 훌륭한 인재들을 그때 많이 잃었습니다. 지금도 나라가 어려워지면 지도자들은 자기들 살길을 찾아 외국에 재산과 가족들을 빼돌린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지도자들이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없이는 나라가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몇 년전 미국과 전세계를 감동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 재벌 타임 워너사의 아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뉴욕의 할렘가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다가 불량한 학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조너선 레빈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검소하게 살면서 헌신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조너선을 추모하는 눈물의 행렬은 인종을 초월하여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계실거예요."라고 울먹였습니다.
자식들을 편하게 살도록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금력과 권력을 동원하는 우리의 지도층들과 달리 희생과 헌신을 가르치는 지도층들의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험한 예루살렘성에 가장 먼저 살기로 결단한 이들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랬기때문에 다 망한 것 같은 민족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유다지파, 베냐민지파, 레위지파에서 그런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유다지파는 왕족입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지파 즉 종교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지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큰 일을 감당하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격인 목자들이, 그리고 중직자들이 대접받는 자리, 존귀한 자리보다는 욕먹는 자리, 손해보는 자리, 힘들고 희생하는 자리를 감당하려고 앞장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 눈치나 보며 위험부담을 기피하지 말고 부담스런 일을 홀로 감당하려고 용감하게 총대를 메야 합니다.
여러분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지도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십시오. 은사와 소명에 따라 믿음이 성숙된 사람들이 많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앞장서서 희생하려고, 부담스러운 일을 힘껏 감당하려고 여러분 자신을 기꺼이 주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2. 선택된 사람
많은 백성들중에서 십분의 일이 제비뽑기로 선택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데도 맛디아와 요셉 두 사람을 추천하고서 기도하고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습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16:33)'
그런데 눈여겨 볼점은 제비뽑기로 결정된 백성들이 보이는 자세입니다. 아무도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예루살렘성읍으로 이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속에서 순종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교회안에서 어떤 결정이 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제비뽑기는 하지 않았어도 대부분 기도하며 무엇인가를 결정합니다. 그런 결정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를지라도 일단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이고 수긍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직결된 반응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런 부담스런 일에 많은 사람중에 내가 선택되었을까? 재수 더럽게 없네!'하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당시에 좋아보이지 않으나 엄청난 축복의 기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교회안에도 3D가 있습니다. 얼굴은 하나도 서지도 않으면서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일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합니다. 대부분 싫어하는 그 일을 다른 사람아닌 내가 하도록 선택되었다고 기분나빠하지 마십시오. 불만을 접고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3. 자원하는 사람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었으나 자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백성들이 축복 하였습니다. 그들이 왜 자원하였을까요? 자신의 안전이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원자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헌금도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더 귀하게 받으십니다. 봉사도 자원하여 하는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희생도 자원한 희생이 진짜입니다. 벧전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여러분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여서 다른 이들이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하고 희생이 요하는 일에 자원하여 앞장선 때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우리 교회가 모든 일에 눈치보고 기다리지 않고 자원하여 서로하려고 앞장서는 이들이 많은 교회가 되어 주님께 크게 스임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모두가 기피하는 위험한 성읍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매력이 없는 쓸쓸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모든 사람이 다 살고 싶어하는 중요한 성읍이 됩니다. 하나님께 축복받고 안전한 땅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좋은 곳만 찾아 다니면 더 좋은 곳을 따라 계속 옮겨다녀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하고 결단하고 순종하면 그 곳을 가장 좋은 곳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옮겨가라고 가리키시는 여러분의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순종하라고 지시하시는 당장의 눈에 좋아보이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축복을 확신하고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복 받을 사람들
느 11:1-2 / 김형준목사
미국의 국립묘지인 알링톤에는 독립전쟁이후 미국의 역사를 지켜낸 사람들의 묘가 있습니다. 이곳은 관광코스로도 유명하지만, 단순한 관광코스 외에도 미국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알링톤을 방문하도록 합니다. 알링톤에 가면 미국을 빛내고 지켰던 유명한 사람들의 묘와 함께 마지막 코스에 무명용사의 묘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무명용사의 묘가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희생했던 이름모를 용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또 강대국일수록 무명용사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도시마다 무명용사의 묘와 꺼지지 않는 불이 있어서, 러시아의 신혼부부들은 이곳을 반드시 참배하면서 기념촬영을 한다고 합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역사의 요구 앞에 조용히 사라져간 사람들의 희생을 문화와 생활 속에서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는 결코 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여러 신문을 훑어보고 방송을 보았지만 현충일에 관한 기사나 특집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은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와 화해에 걸림돌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현충일을 단순히 과거에나 존재했던 사건으로만 기억한다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자원하는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갈 뿐 아니라 이 사회는 개혁과 법률, 철저한 이해관계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 11장과 12장은 성벽을 건축한 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냈던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공로는 잘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쉽게 잊혀질 수 있는 무명용사들의 역할에 대해, 성전의 문짝하나 단 사람의 이름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느헤미야라는 한 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역사 속에 잊혀졌던 수많은 사람들-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는 분명히 포착된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공평하고 실수 없으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의 주변 상황은 정말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국방, 자주독립을 말하지만, 좀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열강들의 각축장으로서 한국은 강대국 사이에서 수없이 줄타기를 해왔던 아픔이 있습니다. 강대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해야한다고는 하지만 이상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남북의 끝없는 대결과 강대국들의 이익 사이에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써갈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만약 2004년 6월 동안교회와 동안 청년들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신다면 어떻게 기록이 남을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당시 성을 건축한 이후 역사의 전환기에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특히 느헤미야가 무명용사들의 역할을 클로즈업 시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노라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우리도 작지만 크게 쓰임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느헤미야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무명용사들을 통해 그 삶의 원리를 찾기 원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명용사들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기 삶을 헌신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미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7장 4절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예루살렘성은 참으로 화려했던 도시로 다윗을 거쳐 솔로몬에 이르러서는 세계 전무후무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고 뛰어난 건축술과 예술성을 자랑했던 도시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화려함도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와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하기를 원했고 누리기를 원했고 흠모했던 성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영광과 영화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부터 90년 후에 느헤미야가 와서 성을 건축할 때까지 160년간이나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70년간의 포로기 이후에 성을 재건하겠다고 사람들이 돌아왔던 적이 있으나 또 적들이 쳐들어와 일부 회복해놓은 것마저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풀과 무너진 벽돌, 옛날 화려했던 잔해들만 나뒹구는 참혹한 곳이었습니다.
성에 머물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치워야 할 수많은 쓰레기와 잔혹한 잔해들 때문에 시 외곽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로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요 왕 같은 족속으로 삼겠다 하셨으며, 메시아를 보내어 전 세계를 통치하겠다고 약속하셨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성을 건축했어도 성에 거할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에 거한다는 것은, 적들이 쳐들어올 때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두목들, 즉 지도자들이 거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성에 거하는 조건으로 상여금이 주어졌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거하면서 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어림없었기에 제비뽑기를 해서 성 외곽에 사는 사람들 중 10분의 1을 성안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제비뽑기에 뽑힌 사람들을 보고 재수 없게 걸렸다고들 얘기했겠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들이 아닙니다. 나머지 10분의 9, 제비 뽑히지 않은 성 외곽에 부유하고 사치스럽게 살던 사람들 중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생긴 사람들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생긴 사람이란, 내적으로 새로운 충동과 변화가 일어난 사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아쉬울 것 없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제비에도 뽑히지 않았으며, 건설되는 예루살렘 성만 보면 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 성은 어떤 성인가. 하나님 약속하신 영적인 세계가 아닌가.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는 땅이 아닌가. 성의 외곽 지역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 보다 힘들고 수고스럽다 할지라도 이웃과 후손들에게 물려줄 영적 유산을 개척하고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 비전과 꿈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우리끼리 사는 것 보다 저곳에 들어가 약속하신 믿음의 유업을 세워가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겠는가.’ 불 같이 뜨거운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자원하는 자들, 안락함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무너진 조국을 위하여 자기 삶을 던지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성을 다시 세울 수 있었고, 후손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줄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 역사는 새롭게 기록될 수 있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서 외에도 출애굽기 35장 성막을 지을 때 달란트대로 자원하는 무명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성막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명의 사람들은 광야 길을 걸어갈 동안 성막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막에 나와 죄를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이 성막을 통해 공급받은 힘으로 포기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무명의 용사들이 섬겼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수동적인 사람 수천 명 수만 명이 자원하는 몇 사람에 의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살아있는 소수가 중요합니다. 우리교회는 출석 교인이 약 사천 명 가량 됩니다. 지난 52일 새벽기도 때는 오백 명 전후로 꾸준히 출석하는 것을 보며 사천 명 중에 불과 오백 명 뿐인가, 재직이 천여 명이 넘는데 중직자만 해도 그렇게 되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제 마음에 감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성도, 새벽에까지 나와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새벽에 누가 깨운다고 나오겠습니까? 엄마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청년들이 새벽에 나와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들이 자기 문제만을 놓고 기도했을까요? 개인적인 어려움도 없건만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겠기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허락받은 자기 삶을 함부로 쓸 수 없어 주님께 자원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눈물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 일이 아닙니다, 내 일입니다. 국가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내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사명입니다.’라고 받아들이며 새벽 기도와 새벽성가대,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깊은 절망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만드실 것을 확신합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드오리아(D'Auria)의 소설 중에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케리 쿠퍼 주연의 하이눈(High No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고 합니다.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이 어렵다 할지라도, 유혹이 많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역임을 믿고 자원하는, 바로 여러분같이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드실 것입니다.
성 외곽에서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무명용사들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간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2004년 6월 하나님의 역사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저는 간절히 소원합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민족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헌신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둘째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또 다른 자원하는 무명의 용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전의 일을 맡아 섬겼습니다.
11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이들이 성전 안의 사역에 헌신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독을 아시지요? 다윗과 솔로몬 때에 제사장을 말합니다. 또 스라야라는 사람은 잡혀가기 전의 제사장을 말합니다. 그 자손들이 새 역사관을 가지고 해야 할 수많은 일 중에서도 성전의 예배를 돕는 일에 헌신하며 봉사했습니다. 새 역사관이란 이스라엘 역사가 패망한 이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에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언약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언약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자기 쾌락과 이익을 쫓기 시작했으며, 윤리와 도덕은 무너지고 공동체는 파괴되어 서서히 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죄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사유하심을 맛봅니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삶을 살다가 와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보니 버려진 인생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러한 예배의 기적과 이적을 무명용사들은 알았기에 예배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배는 진정 우리 삶을 바꿉니다. 말씀이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찬양이 지친 마음에 새 힘을 불어 넣고, 기도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시야를 밝힙니다. 그리스도 안의 참된 교제는 세상에 찌들고 지쳐있던 몸과 영혼에 용기를 주고 격려해줍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통해 이렇듯 새롭게 될 수 있다면, 예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 세파에 지친 사람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 가치를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도록 돕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다. 예배위원으로, 찬양대로, 안내 위원으로 그리고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섬김과 봉사가 있습니다.
저는 새벽 4시 30분쯤 혼자 본당에 올라와 볼 때가 있습니다. 6시 쯤 되면 예배를 안내하는 집사님들이 와서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 본당 안을 다 살핍니다. 여러분이 버리고 간 휴지조각도 다 줍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인상 찌푸리지 않도록, 예배하는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분들입니다. 오늘 어쩌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 가운데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는 계기가 되도록 준비하고 섬기는 마음, 주님은 이들을 통해 생명을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영적 역사를 일으키는 예배에 실패한다면 다른 모든 것에도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으면 영적으로 심각한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찬양의 감격, 하나님의 음성과 사인 그리고 비전이 없다면 몸부림 치셔야 합니다. ‘주님! 제게 예배를 통한 만남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격을 사모하십시오. 예배는 우리 피조물 됨을 확인하고, 가는 길과 그 의미를 공급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를 확신 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12절에 나오는 아다야는 가르치는 사람, 교육하는 사람들입니다. 소그룹으로 모여 하나님의 기준을 삶 가운데 바로 세우도록 말씀으로 교육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열어가셨습니다. 이렇듯 주차장에서 주방에서 카페에서 서점에서 교회 구석구석 말없이 섬기며 예배가 예배되도록 숨어서 섬기는 봉사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 가십니다.
셋째, 무명용사들 중에는 기도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17절 말씀 “또 아삽의 증손 삽디의 손자 미가의 아들 맛다냐니 저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 되었고”, 기도할 때 말씀을 인도하는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라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무릎 꿇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하나님께서 그를 지도자라고 명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는 기도로 하나님 역사를 인도하고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의 지도자로 누구를 명하실까요? 돈 벌어오는 사람일까요, 가장일까요, 나이 많은 사람일까요?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 문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위치에서 발휘되는 지도력도 있지만, 저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 생사화복을 주관하심,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이심을 믿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인 사람 느헤미야의 눈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를 움직이는 지도자로 발견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5장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이야기한 후, 결론적으로 6장에서 이 일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강함을 입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절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사도 바울 같은 영적 대가들도 성도들에게 분별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담임목사인 저와 여러분을 영적으로 가장 가까이 묶어두셨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공급원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세워주셨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역을 평가 받고 기쁨과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둠의 영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할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제가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만들고, 영적으로 성도들을 무장하고 성숙시키는 일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게 하고자 저를 방해할 것입니다. 또 저와 여러분의 의사소통 통로를 차단하여 건강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담임목사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해주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 라인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이 기도제목을 적어 중보기도 카드를 내시면 적어도 쉬지 않고 매일 열 시간 이상씩 중보 기도하는 팀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와 말씀의 기름부음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아들이고 헌신하며 새롭게 결단하도록 기도하는 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기도할까요? 눈에 보이는 예배라는 사건 이면에서 기도가 맡고 있는 역할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할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어쩌면 작고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눈 말씀처럼 작지만 하나님 눈에 포착될만한 일이기만 하면 됩니다. 모세처럼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는 육체적인 이득을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자원하는 마음, 예배 자리에 나아가 자신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대신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겸손한 간구, 나아가 현상 뒤에서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개인의 삶과 역사를 위탁하는 기도 용사로 서는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의 역사를 새롭게 써 가신다는 사실을 이제 영적인 눈을 들어 살펴보셔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유명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 대신 보다 더 중요한 주님의 관점에 있어서 소중한 삶이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여 한 행위는 결단코 잊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느헤미야와 같이 영적으로 예리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책에 기록하여 기억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를 잊지 않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4년 6월 한반도와 한국의 역사적 기록에 저와 여러분이 겸손하고 진실하게 쓰임 받았던 무명용사처럼 쓰임 받고 칭찬받아 기록되는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거하는 사람
느 11:1-6 / 박찬길목사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를 보고선 부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예전이나 요즘이나 할 일이 얼마나 많아요. 옛날에는 옛날대로,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바쁘게 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쁘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힘썼는지 모릅니다. 아마 세계 교회사에 우리 나라와 같은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아주 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서울에 가면 덕수궁이 있는데... 돌담길 걸어보셨어요? 돌담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정동제일교회가 나옵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데 1895년에 건축을 시작했으니 역사적인 건물이지요. 그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 아펜젤러 목사님이 교우들과 함께 건축헌금을 했는데 그만 모자라는 거예요. 이 소식을 청년부의 김귀동이라는 학생이 들었어요. 이화학당에 다니는 학생인데, 이 학생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돈이 없어서 힘들어한다는 소리를 듣고선 자신도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학생이니 돈이 있어야지요.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기도하다가 하루는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자. 생각해 보니까 긴 머리카락 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 자기 머리카락을 쑥 잘라서 그걸 팔아서 건축헌금을 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저희 어릴 때만해도 머리카락이 돈이 됐거든요. 가발을 만들어서 수출하던 때라서 머리카락은 요긴하게 사용됐어요. 아마 100년 전에는 그것보다 더했는가 봅니다. 학생이 머리카락을 잘라서 헌금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온 교우들이 감동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 더 힘을 내자. 그래가지고 모자라는 금액을 채워서 건축을 마무리했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를 사랑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교회에 일만 있으면 앞장섰습니다. 선교 초기라서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인데도 교회를 먼저 생각했다는 겁니다. 자기집 일은 내일로 미루어도 교회 일은 절대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늘 교회가 먼저였어요.
우리 나라는 가을에 김장을 하잖아요. 김장을 해도 교회 것이 먼저예요. 하나님의 것이니까 먼저 하는 거예요. 뭐를 하나 사와도 제일 좋은 것으로 사 왔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까, 성물이니까 구별된 마음으로 드렸다는 거예요.
교회를 얼마나 아끼는지, 자기 집에는 풀이 나 있어도 교회는 풀이 없을 정도였어요. 예배드리기 전에 일찍 와서 뽑고 예배드리고 나서 뽑고..., 그러니 교회가 깨끗할 수 밖에 없지요. 저희들도 어른들에게 배워서 중학교 다닐 때인데도 봄이면 꽃을 많이 심었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산에서 진달래를 캐다가 교회에다 심고..., 교회를 꽃동산으로 만드는 거예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가 언제나 중심이었습니다. 평소에도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고, 자신이 어려울 때는 물론이고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교회 중심이었어요. 사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중심에 선다는 것은 부담되는 일이지요. 당시에 장로 권사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교회 살림은 늘 적자였어요. 저희 아버지가 재정부장을 오래 하셨는데, 보니까 교회 재정이 부족하니까 목사님 생활비를 제 때에 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당시 재정부장의 역할은 목사님 생활비를 어떻게 해서든지 제 때에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아버지가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매월 봉급이 나오잖아요. 교회 재정이 모자라면 당신의 봉급에서 보태서 목사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지내다가 추수감사절이 되면 맞추는 거지요. 이런 교회는 그래도 괜찮은 교회이고, 많은 교회가 어렵게 지냈어요. 그러니 장로 권사는 얼마나 힘든 직분이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고 30년 전에 저희 어릴 때에 이야기입니다. 장년들은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만큼 부유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교회를 사랑해서 헌신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교회의 중심에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몸바쳐 충성하였던 믿음의 자랑스런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철저하게 믿음으로 가르쳤던 위대한 믿음의 부모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믿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지요. 선배들이 뿌려놓은 씨앗 때문입니다. 우리 실력 때문이 아니라 선배들의 실력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 중심에 거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복음이 전파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교회의 중심에 서서 신앙 생활하는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그것을 알려주고 있잖아요.
느헤미야 당시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무너진 성을 다시 쌓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방해하는 세력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느헤미야 4장 7절과 8절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입니다. 그들은 연합군을 형성해서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칼을 차야만 했고, 나팔을 부는 사람을 항상 옆에 두고 쌓아야만 했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52일만에 기적적으로 성벽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쌓았는데 성 안에 들어가서 생활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성전을 다시 수축할 때도 적군이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성벽을 완성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던 겁니다. 요즘 말로 전시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성 안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성 안에 살기보다는 자기 고향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위험을 무릎 쓰고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살겠어요. 그럼에도 누군가는 예루살렘성 안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제비 뽑힌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십분의 일을 제비 뽑아서 강제로 이주시킨 겁니다. 셋째는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은 교회를 개척하는 것과 같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은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좋은교회는 10년 전에 이곳 샌프란시스코에 개척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성장해왔습니다. 한인들이 많지 않은 곳에 이 정도로 모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앞으로 우리교회가 꾸준하게 성장하면서 교회의 일꾼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교인이 많을 때에 더욱 건강하게 부흥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좋은교회가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생활하기로 작정한 지도자와 같은 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자원한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인 중에 아멘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민 목회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반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목사가 100% 맞는 이야기만 하겠어요? 때로는 마음에 맞지 않을 때고 있고 교인들 생각과 다를 때도 있겠지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 지난 10년간 한번도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왜 그것을 해야 합니까? 꼭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다른 방법도 있는데..., ' 반문하신 적도 없고, 반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멘 권사님으로 부르고 있고 밖에 나가서 자랑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 교인은 초기에 영주권을 준다는 직장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영주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유학을 와서 취직해 가지고 영주권을 받는다는 것은 미국 생활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잖아요. 이 형제가 그 때에 다니고 있는 직장은 영주권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다른 직장에서는 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중하게 사양했다는 거예요.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교회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영주권을 준다는 직장이 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면 교회가 더 힘들어지니까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떠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보통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형제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교회의 중심에 서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현재의 직장에서도 영주권을 얻게 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지금도 권사로 잘 섬기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청년들도 참 열심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예배만 드리고 가는 수준이 아니잖아요. 교회 살림을 하잖아요. 청년들이 살림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주일에 교회 일하다가 늦게 갈 경우가 많잖아요. 월요일이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저 내일 시험이 있어서 가봐야겠는데요. 바쁜 일이 있어서 오늘은 그냥 가려고 하는데요..., ' 이런 말하는 이들이 없었어요. 비록 월요일에 바빠서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그 일을 핑계로 교회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마 그 친구들 교회 일하느라고 밤 많이 샜을 겁니다. 그들은 교회가 일할 사람이 적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 중심에 서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두 분야에서 중심에 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에 중심에 서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평안할 때에 중심에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20년 동안 목회 하면서 보니까 교회도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어요. 아니 예수님 오실 때까지 교회는 힘들고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교회가 힘들고 어려우면 떠나지요. 이해가 되지요. 힘들잖아요. 특히 이민생활도 어렵고 힘든 데에 교회까지 힘들면 더 힘들어지니까 떠나는 거지요.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중심에 서는 교인이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짊어지는 마음으로 중심에 서서 교회를 이끌고 가는 교인이 있다는 거예요. 교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몸으로 하는 일이 필요하면 몸으로 헌신하고, 물질이 필요하면 헌금하고, 기도가 필요하면 무릎 꿇는 교인이 있어요. 마치 백성의 지도자처럼, 제비 뽑힌 사람처럼, 자원한 사람처럼, 힘들고 어렵고 피곤하고 손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하여 중심에 서서 교회를 지키는 교인이 있다는 겁니다.
평안할 때에 중심에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안정되면 그 때에 중심에 서는 사람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선호합니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부담이 되지 않잖아요. 조금만 노력해도 생색이 나니까 모여듭니다. 그냥 모여듭니다.
지난주간에 서울에서 오신 어느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씀을 하세요. 권사님이 섬기는 교회가 예배당을 새로 건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걱정이라는 거예요. 궁금해서 물었어요. '권사님, 예배당을 짓는 것은 복인데 뭐가 걱정이세요. 돈이 없으세요' 보통의 교회가 예배당을 지을 때에 돈 때문에 고민을 하잖아요.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그런데 권사님은 다른 대답을 하셨어요. "교인들 때문에 걱정이라는 거예요."
저는 더욱 궁금해졌어요. 예배당 짓는 것이 얼마나 복인데, 평생토록 한번도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권사님의 대답은 이래요. 예배당을 지으면 교인들이 떠난다는 거예요. 예배당을 짓는 일은 영광된 일임에도 헌금을 해야 하니까 떠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세요. 그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 예배당 다 지으면 다시 올 겁니다.
제 마음이 씁쓸했어요. 속으로 생각했어요. 멍청한 교인이다. 예배당 짓는 것이 얼마나 복인데, 본인들이 수만, 수 십만 불 헌금 할 것도 아니면서 예배당 짓는다고 교회를 떠나나..., 예배당 짓는 것이 힘들어도 중심에 서서 짊어지면 나중에는 말할 수 없는 복을 받게 되는데, 참 어리석은 교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중심에 거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때에 예루살렘 성은 변두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기 싫어했던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언제 죽을지 몰라서 회피한 사람들, 예루살렘에서 사는 것을 뽑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축복이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변두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보세요.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바사의 속국으로 있을 때에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왕정시대의 술 맡은 관원은 중요한 자리입니다. 왕을 가장 가깝게 모시며 왕의 고민을 상담하며 왕과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자리입니다. 막강한 자리이지요.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는 자리일 겁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 좋은 자리를 내려놓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가장 좋은 것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아는 사실은 느헤미야는 잃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관직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공급받아 성전을 재건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아름다운 신앙을 성경에 기록하셔서 후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 3절 이하에는 예루살렘에서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을 주축으로 제사장 계열과 족장들, 그리고 레위인 등의 이름이 나옵니다. 6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살기로 작정한 베레스 자손이 468명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섬기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신다면 변두리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 무엇인가 찾으시기 바랍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서 회피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이나 물질로 손해나고 짐을 지는 일이 무엇인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예루살렘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곳이 수지 맞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한 곳입니다. 이러한 일에 앞장서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고 가치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한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교회의 중심에 거하는 사람들이고, 나중에는 반드시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구 아버지가 늦게 교회를 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목사이니까 아들 체면 때문에 교회를 나가 주신 겁니다. 이 어른이 교회에 나가주시면서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겁니다. 하루는 이제까지는 아들을 위해서 교회에 나왔는데, 이제부터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어르신이 교회에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할 일이 없는 겁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서 그 교인들이 이곳 저곳에서 각자 맡은 일을 감당하는 겁니다. 한번은 화장실에 갔는데 어지럽더라는 겁니다. 대개 화장실은 부담 없이 사용하잖아요. 교인들도 교회 화장실은 막 사용합니다. 휴지를 늘어트려서 사용하고, 어떤 때는 물도 잘 안 내리고..., 화장실이 깨끗한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는 화장실 청소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다음주일부터 교회에 올 때에 아예 장갑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 분은 교회에 오면 먼저 화장실부터 들어갑니다. 예배가 끝나면 화장실에 들어갑니다.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청소하는 거예요.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줍고, 물이 있으면 걸레로 닦고..., 시간만 있으면 청소하는 거예요. 교인들에게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 어르신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화장실에 가서 은혜 받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존경받으실 어른이십니다. 이 분은 크게 표시가 나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교회의 중심에 거하며 신앙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교회의 중심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가 예루살렘 성인 좋은교회를 지켜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제가 지키겠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표시가 나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교회에 필요하다면 시간으로 몸으로 물질로 중심에 거하면서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또한 이렇게 기도하고 고백하며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시편 126편 6절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한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인 교회를 사랑하면 형통합니다. 예루살렘인 교회의 중심에 거하면 복을 받습니다. 표시 나고 생색나는 일에 중심에 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변두리에 거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교회는 교인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손해나고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교인이 많을 때에 부흥하고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좋은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려는 지도자와 같은 교인이 많은 교회, 제비 뽑혀도 아무 말 없이 받아드리는 교인이 많은 교회, 자원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좋은교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교회로 만들 욕심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교회의 중심에 거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 모든 교우들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믿음으로 먼저 하겠다고 나서기를 바랍니다.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가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 하나님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한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기업이 성공할 확률은 5%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95%가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는 사람들은, 교회 의 중심에 거하는 사람들은 100% 성공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후원해 주시고 하나님이 밀어주시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제비 뽑혀도 믿음으로 감당하려는 마음으로 교회의 중심에 스셔서, 십자가와 같은 짐을 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며 헌신하셔서,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중심에서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평생토록 신앙 생활할 때에 섬기는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중심에 서서 하나님께 큰 힘이 되는 교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에 큰 덕을 끼치는 교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