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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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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육신만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알콩-달콩 삽시다.
어떤 부부가 아주 심하게 부부 싸움을 하였답니다. 평소에는 ‘알콩-달콩’ 재미있게 잘 살았는데 그날은 서로 오해도 깊고, 또 그동안 쌓인 응어리를 푸는 방법으로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으로 정말 대판 싸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오래갈 일은 아니었습니다. 둘 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보았답니다. 고해성사를 마친 남편은 참으로 이상한 보속을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콩 한 주먹을 구두에 넣고 일주일간 다니십시오.” 남편은 정말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바싹 마른 알 콩 한 주먹을 구두에 넣고 엿새나 다녔습니다. 얼마나 발바닥이 아픈지 정신이 버쩍 나기도 하고, 부부 싸움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그런 보속을 주신 신부님이 얄밉기도 하고, 또, 그 얄미운 신부님이 아내에게는 어떤 보속을 주셨는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보속을 어떻게 주셨어?” 아내는 힐끗 남편을 쳐다보더니 “콩 한 주먹을 구두에 넣고 일주일간 다니라고 하시데.”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아내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더랍니다. “콩 한 주먹이라고 하셔서 난 삶은 콩 한 주먹을 비닐에 싸서 넣고 다녔지.”
1980년대에 유행했던 유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얘기하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머리가 확실히 좋거나 꾀가 많다.’라기도 하고, ‘그렇게 보속을 주시는 신부님이 어디 있냐?’하는 사람도 있고, ‘어쩌면 그렇게 깊은 뜻의 보속을 주시는 신부님이 계신가?’ 또는 ‘그런 보속을 주셨다고 자기가 무슨 모범생이라고 그렇게 절뚝거리며 알 콩을 넣고 다니는 바보가 어디 있어?’ ‘남자는 무지 아팠겠지만 여자는 얼마나 찝찝하고 물컹거렸겠어?’ ‘두 사람 다시는 부부 싸움 하지 않겠다.’는 등 별의별 얘기가 많았습니다.
부부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공동체 생활에서 ‘알콩-달콩’ 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전에서는 ‘알콩-달콩’을 ‘[부사]아기자기하고 사이좋게 사는 모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기자기하고 사이좋게 사는 부부나 공동체나 이웃들을 알콩-달콩 산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알콩-달콩’을 엉뚱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알 콩’은 콩을 수확해서 콩 깍지에서 알 콩을 거둬들이고, 멍석에 바짝 말려서 썩지 않게 해 놓은 콩을 ‘알 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쉽게 깨지지도 않고, 잘 굴러다니고, 조그맣고, 단단합니다. 어려서 소가 알 콩을 먹고 배 속에서 불어서 배 터져 죽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달 콩’은 물에 불리거나 볶아서 가루를 만들거나 삶아 날콩이 아닌 콩을 말합니다. 잘 으깨지기도 하고, 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모양과 맛으로 변하기 좋은 콩을 말합니다. 메주를 쑬 때 콩을 불려 푹 삶아 ‘달 콩’을 만듭니다. 절구에 넣고 잘 찧어서 메주를 만들기도 하고, 살짝 삶아 비린내를 가신 다음에 갈아서 콩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는 콩을 말합니다. 그리고 물에 잘 불려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기도 하고, 큰 가마솥에 달달 볶아 인절미의 콩가루를 만들어 먹는 달 콩은 콩의 비린내가 가시고 달고 고소하기도 하여서 아마 ‘달 콩’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알콩-달콩으로 사는 모습은 알 콩처럼 자기의 주관이 뚜렷하고,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굴러다니고,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부딪치는 모양으로 사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 또 달 콩으로 사는 모습은 잘 으깨지고 부서져야 단 맛을 낼 수 있는 희생과 화합의 모양으로 사는 것을 나타내기도 할 것입니다. 한 쪽에서 알 콩으로 살면 다른 쪽에서는 달 콩으로 살아야 조화와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둘이 같이 알 콩으로 살면 언제나 부딪치고 말썽만 일으킬 것이고, 둘이 같이 달 콩으로 살면 주관도 없고, 독특한 정체성도 없어서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사회와 공동체와 가정은 모두 알 콩 - 달 콩이 어우러져 서로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원리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는 조비(曹丕)와 조식(曹植)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조조가 죽은 후 위 왕이 된 조비는 동아왕(東亞王)으로 책봉되어 있는 조식을 불러 "내 앞에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 한수를 지어라. 그렇지 못하면 칙령을 배반한 죄로 엄히 다스리리라."고 명합니다. 조식은 그 유명한 칠보시(七步詩)을 짓습니다. "콩을 삶음에 콩깍지를 태우니(煮豆燃豆萁), 가마 속 콩이 뜨거워 우는구나(豆在釜中泣).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나왔건만(本是同根生), 뜨겁게 삶음이 어찌 이리 급한고(相煎何太急)."
요즘 교회의 모습이나 정치의 모습이나 가정생활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서 그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합니다. 알 콩이 더 많았고, 달 콩이 더 적었던 삶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어떻게 알콩-달콩으로 살았는지?
- 야고보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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