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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형분석상담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성경으로 아들 키우기
최에스더 지음
규장 / 2007년 4월 / 216쪽 / 9,000원
▣ 저자 최에스더
큰아들을 낳고서 어떻게 키울지 몰라 울기만 했던 초보엄마 시절을 거쳐, 홈스쿨링(자택학습)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지만, 아들을 둔 여느 엄마들이 겪는 일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집 안과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아들의 힘 을 감당하느라, 그것도 아들 둘을 키우면서 더하기 2가 아니라 곱하기 20이 되는 에너지와 소음을 감내하느라 허리가 휘는 세월을 보냈다. 딸아이들 엄마처럼 아이의 손을 잡고 조용하고 우아하게 걷는 소박한 꿈을 가졌지만, 현실은 “아이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아닌지 병원 한번 데려가보라”는 소리를 듣고 대성통곡하는, 아들을 둔 엄마들의 마음이 바로 그녀의 마음이다.
성경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아들과 함께 만났던 성경의 남자 인물들을 통해, 남자에 관한 시각이 많이 교정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남자인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여자인 자신과는 다른 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해야 할지, 그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남자다운 남자, 참 신실한 일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엄마들과 함께 성경에서 받은 은혜와 지혜를 나누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슬비성경암송학교 유니게 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암송학교 강사로 활약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성경 먹이는 엄마』가 있다.
▣ Short Summary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리라는 열정으로 뭉친 엄마들 가운데 유독 화장도 못하고, 옷을 제대로 차려입지도 못하고,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손을 잡은 엄마들이 있었다. 열의 여덟은 연년생 아들들을 키우는 엄마였다. 강의가 끝나고 문을 나서려는 내게로 와서 내 손을 잡고 눈물부터 흘리는 엄마, 그 엄마의 등 뒤에 업혀 있는 작은아이, 그리고 그 엄마 곁에 서서 엄마가 왜 우는가 걱정하는 큰아이를 보면서 나도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내 손에 결코 들어오지 않으려는 아들들을 키운 나는, 그들이 왜 우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인터넷에 열어놓은 나의 카페에도 “도와주세요”로 시작하는 글은 분명히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의 긴급요청이었다. 수백 가지의 사례에 이런저런 조언을 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글에 깊이 있게 답글을 달기란 무리였다. 그러나 아들 키우는 엄마들의 힘든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이었기에, 그들을 돕고 싶었다. 내가 그들보다 조금 먼저 발견한 해결책은 언제나 성경말씀 속에 있었기에, 이제 그들에게 그곳을 안내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을 아이와 계속해서 읽으면서, 나 혼자 읽었을 때와는 다른 시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그 시각으로 본 말씀은 색다르게 재미가 있고,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었다. 그렇게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아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내 마음을 비우기도 하고, 내 요구가 욕심이었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말씀이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서 아이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만 해서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내 말은 1초도 안 지나서 잊어버리고 마는 아들을 보면, 나는 한숨이 나오곤 했다. 그러나 말씀을 아들과 나 사이에 두고 좀 멀찌감치 바라보니, 내 아들은 정녕 나의 것이 아니었고, 여자인 나와는 정말 다른 존재였다.
나는 이렇게 조금 눈을 떴는데도 아들 키우는 맛이 달라졌는데, 아들을 키우는 모든 크리스천 엄마들이 아들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주신 이 아들을 더 이상 버거워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쁘고 지혜롭게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 손을 잡고 울었던, 성도 이름도 모르는 그 엄마들의 눈물이 이 책을 세상에 나오도록 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정말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들이 하나님께서 거두실 기쁨의 단이 되기까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눈물과 고생을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키우자. 주님께서 도우신다.
▣ 차례
들어가는 글
1장 대한민국에서 아들 키우기 - 그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
2장 아들은 누구인가? - 하나님의 것이다
3장 아들은 누구인가? -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4장 아들은 누구인가? - 아버지이다
5장 아들은 누구인가? - 군사이다
6장 아들은 누구인가? - 형제이다
7장 아들은 누구인가? - 남편이다
8장 아들은 누구인가? - 주님의 청년이다
9장 아들은 누구인가? - 믿음의 백발노인이다
10장 아들은 누구인가? -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11장 당신은 누구인가? - 예수님의 제자이다
맺는 글
부록 - 아들에게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
성경으로 아들 키우기
최에스더 지음
규장 / 2007년 4월 / 216쪽 / 9,000원
1장 대한민국에서 아들 키우기 - 그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
여자인 엄마에게 남자인 사내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아들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엄마의 그 좁은 뱃속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며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해서, 태어나 엄마의 품에서 자라는 내내 지칠 줄 모르고 집 안과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닌다. 그 힘을 감당하느라 엄마들은 허리가 휜다.
이제 열한 살이 되는 나의 큰아들을 키운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 세월을 지나왔나’ 하는 생각에 감개가 무량하다.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며칠이라도 보낼 수 있는 나와는 달리, 우리 아들의 하루는 언제나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세게 열어젖히고 옆방으로 가서 책장에 있는 책을 모두 꺼내 뒤로 던지는 놀이로 시작되었다. 그러고 나서 장난감은 일단 다 뒤집어놓고, 아빠 책상 위로 기어 올라가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온갖 신기한 것들을 모두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거나, 아니면 침으로 푹 적셔놓은 뒤 아래로 하나씩 던졌다.
어쨌거나 집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견딜 만했다. 그러나 문밖을 나서면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일단 아이는 뛰기 시작한다. 내 손은 기어이 뿌리치고, ‘설마 저기까지 갈까?’ 하고 속으로 믿어보다가 망설임 없이 가버리는 아이 때문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왕복 8차선 찻길로 뛰어드는 아이를 붙잡으러 나까지 찻길로 뛰어들어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는, 아이 엉덩이를 마구 두들겨 패준 적도 있다.
가까운 공원에 모처럼 나가서 조용히 아들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싶어도, 끝도 없이 뛰는 아들 덕분에 공원의 후문은 어디에 있는지, 그 후문 뒤에는 뭐가 있는지, 다시 차를 세워둔 정문 근처로 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아들이 있는 엄마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딸을 둔 엄마들은 이쯤에서 왜 아들을 둔 엄마의 목소리가 큰지, 왜 그 큰 목소리로 제 아들 이름을 그렇게 불러대는지 이해하셨을 줄로 안다. 우리도 딸아이들 엄마처럼 조용하고 우아하게 아이와 함께 걷고 싶다. 정말이다.
이 책에서 나는 아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만났던 성경 속의 인물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이전과는 다르게 성경 속의 남자들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남자에 관한 나의 시각을 많이 교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에 관한 엄마로서의 나의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 성경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며 내 아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있는지, 어떤 모습이 부족한지 잘 살펴보자. 그리고 내 아들은 누구와 비슷해서 누구를 모델로 하여 키우고 싶은지 그림도 한 번 그려보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아들을 키우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와 몰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을 허락해주실 것이다.
2장 아들은 누구인가? - 하나님의 것이다
몇 해 전, 시아버지께서 미국의 한 주립대학으로 1년간 연구교수로 떠나시게 되면서 큰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님께서는 아이가 아직 어릴 때 넓은 세상을 구경시켜주고, 영어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해주겠다고 하시며, 당신께서 잘 데리고 있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떻게든 말려볼 심산으로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완곡하게 말려도 비행기 티켓 예매까지 마쳐버리셨다.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아버님의 제안에 그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없었다.
‘왜 나는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하는가?’ 이렇게 고민하는 내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에스더야, 너는 아이들을 내보내놓고 길게 전화도 하고, 책도 읽고 잠도 자고 했지만, 나는 그 아이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단다. 너는 이제까지 네가 아이들을 지키고 돌보며 키웠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돌아서고 나서까지 아이들을 지킨 건, 미안하지만 바로 나란다. 내가 한국에서만 아이들을 지킬 수 있고 미국에서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섭섭하다.”
나는 이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다시 한 번 실감나게 깨달았다. 내가 키우고 있는 아들을 사실은 하나님께서 키우고 계셨으며, 그런 그 아들을 하나님께 보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중에서야 부모 동행이 아니면 어린아이들이 와서 공부할 수 없다는 미국의 법을 알고 한바탕의 해프닝은 조용히 끝이 났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요게벳은 이제 태어난 지 석 달이 되어 엄마를 알아보고 싱긋싱긋 웃었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기 모세를 살리려고 바구니를 만들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바구니를 만들었을까? 라헬은 어린 요셉과 막 태어난 베냐민을 남겨두고 눈을 감아야 했다. 참으로 눈을 감기 어려웠을 것이다. 죽는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 남겨진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눈이 감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는 자식이 없어 눈물짓는 여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소원을 아뢰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셨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아이를 젖 뗄 때까지만 자신이 키우고, 이후에는 하나님의 성막에서 자라게 한다. 그때는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성막에서 온갖 추잡한 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던 것 같다.
이 세 엄마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자신의 아이들의 손을 놓았다. 결코 쉬운 포기는 아니었으나 그들은 순종했다. 라헬이 어쩔 수 없이 놓았던 요셉의 손을 잡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 이끄셨다. 요게벳이 나일 강에 띄운 모세를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끄셨다. 한나가 근심과 걱정을 물리치고 놓았던 사무엘의 손을 하나님께서 잡으시고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다지셨다.
3장 아들은 누구인가? -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아이들이 때때로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겨우 말을 하게 되는 나이에는 동화책에서 본 것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더 자라서 이제는 구분할 때가 된 것 같은데도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면, 이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구분이 안 되어서 그러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설 때가 많았다.
그러나 아이는 책에서 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계속 이야기들을 자주 지어냈다. 지어낸 이야기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지어낸 이야기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충분히 가르쳤고, 알아들었는데도 으쓱하고 싶은 마음에 정말 일어난 일이었다고 고집 부릴 때, 나는 아이에게 “너는 누구냐?”고 대뜸 물었다. 이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아이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네가 하나님 일을 할 사람이고, 너의 할아버지의 손자이고 너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보이지 않는 너의 이름표에는 네 이름만 적혀 있는 게 아니라, 너의 아버지의 이름, 할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데, 그 이름들을 달고 있으면서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아이는 아무리 어린 아이라지만, 그 순간은 참 숙연해졌다.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아이라 하더라도 그의 행동에 이렇게 영향을 미친다.
성경에서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과 그 사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교해 살펴볼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이 그 인생에 얼마나 큰 복이어서 사람을 얼마나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반대로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저주여서 사람을 절망과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히게 만들며 죄의 노예가 되어 마귀에게 끌려 다니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동시대를 살면서 극명하게 대비가 되는 사람이 바로 사울 왕과 다윗이다. 사울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더 준수한 자가 없다고 성경이 표현할 정도로 출중한 외모의 청년이었고, 아버지의 작은 명령에도 최선을 다하는 착한 아들이었다. 그는 기름부으심을 받으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그러나 사울은 기름부으심을 받았을 때의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하는 것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늘 민감하게 살펴보았다. 왕이 된 후에는 전쟁을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겠는데, 오겠다고 약속했던 사무엘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제사장의 일을 하고야 만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말 몰랐고 철저한 오해 속에 살다 간 사람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영광도 잃어버리고 생명도 잃어버린다.
베들레헴 사람인 이새는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을 아들 축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사무엘의 눈에는 다윗이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워 보였으나, 이새의 눈에는 아무리 어려도 제 몫은 해야 하는 아들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누구인지 잘 알았던 어린 다윗은 자기에게 주어진 양들을 돌보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는 목동으로 찬양자로 자신의 어린 날들을 성실하게 채웠으며, 그 후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세워지는 기름부으심을 받았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의 심기를 달래는 노래하는 사람이었을 때에도, 긴 세월 동안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에 놓였을 때에도, 자신은 사울 왕의 아랫사람임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를 섬겼다. 다윗이 사울에게 무모해 보일 정도로 충성했던 까닭은 그가 겸손해서라기보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4장 아들은 누구인가? - 아버지이다
아들들은 아빠를 닮고 싶어 한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도 메고 구두도 신고, 자동차 운전도 하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용돈도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시계도 차고, 머리에 무스도 바르며 꼭 아빠처럼 진짜로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 부부는 아빠가 하고 다니는 모양보다는 아빠의 말씨, 조용한 걸음걸이, 깔끔한 뒷정리, 근면 성실… 뭐 이런 것을 먼저 배우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것은 나중 일인 것처럼 보인다. 아들이 자라서 맡게 될 여러 가지 역할 가운데서 중요한 하나가 아버지의 역할인데, 아이들은 그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된다.
성경 속에서 참 허무한 두 왕을 만난다. 역사 이래 더 이상의 부와 지혜를 겸한 자가 없을 정도의 왕이었던 솔로몬 왕과 죽음 앞에서 기도로 생명을 연장 받았던 히스기야 왕이다. 잠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을 지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을 쓴 솔로몬 자신은 아들에게 이 말씀을 가르치지 못했는가 보다. 아니면 가르쳤으되 삶으로 보여주지 못해서 아들이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왕이었으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귀한 글을 남겼으나, 그 말씀대로 살아보지는 못했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나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은 살리고, 나와 내 자식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참으로 두렵다.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남유다 왕국에 한 왕이 있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처럼 옳은 일을 한 왕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왕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당시에 대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그 때에 앗수르는 유다 사람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왕궁에 있는 은과 금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성을 완전히 포위해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전의 왕들이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오던 것처럼 하지 않고, 눈과 귀와 입을 막고 오직 하나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는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강하고 악명 높기로 유명한 앗수르의 군대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조용히 죽이신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솔로몬도, 히스기야도 큰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만 있고 자식은, 다음 세대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가 되었다고 다 아버지로서 세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어린 아들을 키우지만, 나중에 이 아이가 어떤 인물이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낼 것인가만 그려보지 말고, 한 사람의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들을 키우자. 무엇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하는지, 무엇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남편들은 아버지가 되는 순간, 아니 아버지가 되기 전부터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5장 아들은 누구인가? - 군사이다
이름이 유별나게 특이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름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가 컸다. 내 이름에 온갖 장난을 거는 남자아이들이 싫었고, 내 이름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어른들이 싫었다. 학생 때, 학기 초가 되면 선생님들이 출석부에서 아이들 이름을 죽 읽어 내려가다가, 갑자기 호명을 멈추고 출석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셨다. 분명 내 이름을 읽기 위해 몇 초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늘 그때쯤 엄마께 여쭤본 것 같다. 내 이름을 왜 에스더라고 지으셨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해주셨다. “아들 셋을 내리 낳고 너를 가지니 금방 딸인 걸 알겠더라.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지. 이왕에 딸을 주신다면,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될 딸을 주시기를 바란다고,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딸 하나 있는 게 엄마 닮아서 못생기면 안 되잖니.”
‘나라와 민족,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사람이다.’ 이런 작은 소리가 어린 시절 내 귀에 심심하면 들려왔다. 나는 정말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면서 일찌감치, 내가 그런 인물이 되기에는 공부를 너무 못하며 끈기도 없고 노력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라와 민족이라는 단어는 점점 흐려지고 옅어지다가 마침내는 사라지고, 나는 흔하디흔한 아가씨 가운데 하나가 되어 일찍 결혼을 선택하게 되었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성경을 읽어가는 중에 엘리야 선지자가 승천하는 장면을 만났다. 그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람이 될 거라는, 어린 시절 들려왔던 소리가 다시 깨어나 나를 점점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아기를 우리 민족의 병거와 마병이 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부족해서 제 힘과 지혜로 키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아기가 엘리야와 같이 민족을 품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첫아들을 태중에 품고 극적으로 재회한 ‘나라와 민족’이라는 단어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내 기도의 운명이 되어, 지금까지 이 아이를 위한 기도 제목이 되고 있다.
선지자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서 악하기로 유명한 아합 왕과 그의 왕비 이세벨의 시대에, 우상에 찌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선지자이다. 그는 민족이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신, 그들의 머릿속에서 많은 우상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버린 신, 조상들에게서 배운 것은 이제 거의 다 사라지고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바다를 갈랐다던가,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렸다던가 하는 신으로 겨우 기억되는 신인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워 이겼다. 엘리야는 이 세상의 악, 즉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자신이 받고자 하는 모든 악한 것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지만,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과 그 전쟁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승리하신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다.
무엇이 나라를 지키는가? 국방력인가, 경제력인가, 신기술 개발인가, 대체에너지 개발인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 한 사람인가, 대한민국 1%에 해당하는 두뇌 집단인가? 무엇이 나라를 두렵게 하는가? 초강대국의 반대편에 서는 건가? 휴전선에 맞대고 있는 나라의 핵미사일인가, 날로 성장해가고 강해져가고 있는 주변 국가들의 야심인가?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나라의 영적 용사들이요, 나라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그런 용사가 없는 것이다.
우리 아들들은 하나님의 용사로 길러져야 한다. 나라의 운명을 지고 있는 영적 용사로 길러져야 한다. 아들들에게 이 민족과 이 나라와 이 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할 일을 받아오도록 가르쳐야 한다. 대한민국의 남아는 군대를 다녀와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적 남아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영원히 자신의 민족적 자아를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해 눈물 흘리며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6장 아들은 누구인가? - 형제이다
친정도 시댁도 친구도 없는 타향에서 아들 둘을 키우며, 새벽에 나갔다가 자정 가까이나 되어서야 들어오는 남편만 기다리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막 태어난 둘째 아들은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서 깼는데, 이 아기를 깨우는 주범이 다섯 살 된 우리 큰아들이었다. 아기가 잠이 들어야 나도 겨우 때를 놓친 밥을 먹고, 대충이라도 집을 치우고, 그동안 방치되었던 큰아이를 좀 봐주겠는데, 아기가 사르르 잠에 들려 하는 때에 큰아들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엄마를 떠나갈 듯 부르곤 했다. 그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난 아기는 울거나 다시 칭얼대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화가 나던지, 조용히 하라고 큰아이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전까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화난 엄마의 말과 표정에 기가 잔뜩 죽어서 조용해진 큰아들에게 다가갔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나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던 큰아들, 작게 접어진다면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다니고 싶었고,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예쁘게 부은 눈으로 나를 보며 웃어줄 때는 세상에서 이렇게 멋진 아기가 내 아들이라니 하고 아침마다 새롭게 감개무량했었다. 그랬던 이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났다고, 그 동생 자는 걸 깨웠다고 도끼눈을 뜨고 소리를 지르다니, 나는 내가 정말 미웠다.
아기의 모든 행동은 용납되고, 형이 당하는 크고 작은 수모는 형이기에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안 된다. 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용한 관찰자이다. 귀로, 눈으로, 기운으로 느끼며, 이 집 안 사람들이 언제 웃는지 언제 화를 내는지, 내 형은 어떤 때에 부모에게 야단을 맞고 어떤 때에 칭찬을 받는지 조용히 몇 년을 지켜보고 있다. 동생은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는지 알기에 별로 실패하지 않고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만, 관찰과 연구가 없었던 형은 늘 이리저리 치인다. 그러니 동생이 미워지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강한 힘과 놀라운 화술을 가진 형은 이제부터 늘 동생을 이리저리 놀리고 제압하고 은근히 괴롭히기 시작한다. 형이 좋아서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자신을 괴롭히고 놀려 먹으며 때리기까지 하니, 동생도 형이 싫어지기 시작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불행한 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인과 아벨이, 에서와 야곱이 처음부터 서로 싸우고 죽이겠다고 쫓아다닌 것 같니? 아니야 세상에 단둘뿐인 형제였는데, 가인과 아벨이 어렸을 때 얼마나 둘이서 재미있게 놀았겠니? 너희들보다 더 딱 붙어서 온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았을 거야. 게다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야. 그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함께해서 그야말로 일심동체야. 서로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내느라 다른 친구가 별로 필요하지 않을 만큼 그들이 얼마나 서로 재미있게 지냈겠니? 지금 너희들처럼 작은 다툼이 시작되고, 양보 없이 배려 없이 이해 없이 지내다보면, 어느덧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에서와 야곱이 되는 거야. 너희들도 나중에 에서와 야곱처럼 한 명은 죽이겠다고 쫓아가고, 한 명은 달아나고 할 거야?” 이렇게 물으면 절대로 아니라고 둘 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바꾸라고 이야기해준다.
7장 아들은 누구인가? - 남편이다
성경에 많은 부부들이 나오지만, 나의 결혼을 돌아보면 늘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온다. 남편과 사별한 이방 여인 룻, 들에 나가 이삭을 줍거나 얻은 음식으로 살아야 했던 참으로 궁색하고 구차한, 볼 것 없는 가련한 여자를 하나님은 그 족속 가운데에서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유력자, 보아스에게로 이끄신다. 룻을 배려하고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서두르는 보아스의 모습에서 참 남자다움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정혼한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남자로 인함이 아니라 성령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하나, 이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믿지도 못할 일이다. 요셉은 역시 이 말을 믿지 못했으나,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배신에 치를 떨거나, 질투에 사로잡혀 흥분하지 않았다. 성경을 보면 그가 이 일을 어떻게 조용히 처리할 것인지 생각하다 잠이 든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계획하심 아래서 일어난 일이라고 전하자, 그는 꿈에서 깨어나서 주저하지 않고 바로 마리아를 데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아기를 낳기까지 아내를 지키며 자기의 할 바를 지켰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이혼녀 룻과 도저히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게 아이를 가진 마리아가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준 보아스와 요셉에게 얼마나 고마웠을까. 그 남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 그대로 조용히 따르는 모습이 얼마나 감사했을까. 룻과 마리아는 그 남자들이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던 그 남자들은 지혜와 순종으로 아내를 맞이함으로써 구세주의 조상이 되는 큰 은혜를 입는다. 바로 이런 모습이 진짜 남자의 모습이다. 보아스와 요셉과 같이 이렇게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진짜 남자이다.
큰 아이가 아직은 어리지만, 자랄수록 더 깊은 곳을, 더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도와주고, 가진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하고자 하는 자세를, 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도록 계속해서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남자로 내 아들을 준비시켜야겠다. 여자를 보호하고 여자에게 양보할 줄 알되 그 많은 여자 가운데서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를 발견하고, 그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기뻐하는 멋진 남편으로 자라기를 기도하고 키울 것이다.
8장 아들은 누구인가? - 주님의 청년이다
믿는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양가의 조부모와 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는다. 아기가 좀 자라서 유치부에라도 가서 성탄절 연극이라도 하면 교회가 난리가 난다. 그러나 유치부를 졸업하면서 이름 속에 담겼던 열정과 성의가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아이들을 믿음 안에서 키우기 위해 부모들이 가졌던 고민과 열정과 실천력이 대부분 팍팍 꺾이고 만다. 사실 그때부터가 실전인데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기도를 가르치고, 예배드릴 때마다 데리고 다니고, 헌금 드리는 것을 가르치고, 찬양을 크게 부르게 하다가 갑자기 어느 한 시점에 교회에서 아이들이 일제히 사라진다. 우리가 사춘기라고 부르는 시기, 그리고 청년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아이들은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이제까지 부모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왔지만, 이제부터는 자기의 의지대로 예수님을 알고 만나고 믿고 전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해왔던 대로,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며 교회를 섬기는 일을 이제까지보다 더욱 진지하게 힘써야 한다. 아이의 내면에 숨어 있어 미처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것을 부모가 도와주어야 한다.
성경에 자신의 젊은 날을 흔들림 없고 실수 없이 하나님으로 채웠던 남자가 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왕의 진미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멸망한 나라에서 정복 국가의 노예로 끌려왔지만, 자신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며 그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지,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모든 것에 눈을 감고 제국의 영재로 남아 그 신분에 맞게 성실하게 살 것인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다니엘이 소년이었을 때 그는 이미 지혜와 지식이 탁월했지만, 그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와 지식을 들어 천하만국이 알도록 사용하셨다. 다니엘은 전 생애 동안 그 자신을 지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 기도를 통해 더욱 자신을 정결케 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과 환상을 통해 열왕들과 대제국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외쳤다. 그런 그가 노인이 되어,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정적들의 간계로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이 한군데도 상하지 않도록 굶주린 사자를 조용케 하셨다. 청년기의 헌신과 성결은 한 사람의 삶에 중요한 엔진이 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년 문화는 정말 중요하다. 기독 청년들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모든 것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무제한으로 주어지는 이 시기에 자신의 문화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결정해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중심은 내 힘과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9장 아들은 누구인가? - 믿음의 백발노인이다
인원수로 보자면 교회에 여자가 많지만, 헌신의 열정으로 보자면 남자가 여자 못지않다. 과거에는 학생부의 회장이 모두 남자였다. 남자여서 시킨 것이 아니라 맡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청년들에게 그 나이의 여자가 보여주는 것과는 비교하기 힘든 믿음의 확신과 진지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열정이 청년부로 가서 절정을 이루다가, 결혼을 하면서 슬며시 여자 뒤로 물러선다. 이유를 알 수 없다. 이제까지의 것을 바탕으로 가정을 세우고, 자식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더욱 성숙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뒤로 물러만 간다. 교회에 꾸준히 나오는 성실성 하나로 나중에는 교회의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이미 그에게서 살아 있는 믿음이 주는 생명력을 찾아보기란 정말 힘이 든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성경에는 많은 노인들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들은 지팡이를 짚고 있거나 백발이었으며, 수염이 긴 노인들이었다.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론을 세우시고 욥을 회복시키실 때 그들은 모두 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절정을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이렇게 살면서 삶을 마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노인들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다.
하나님께서 나이가 든 노인들을 부르실 때에는 그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그 집안의 부르심이요 그 가문의 부르심이 되었다. 노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 집안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식구들이 노아를 도와 방주를 지으면서, 그 집안의 수장의 순종이 그 집안 전체의 순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세상이 물 심판을 당할 때 그 집안만이 살아남는 두려운 영광, 복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께서 그 혼자만을 직접 부르셨으나, 그의 순종이 곧 집안의 순종으로 이어졌다.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의 집안이, 그의 가문이, 그의 민족이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얻었다. 특별하고도 기구한 운명을 가진 동생 모세의 삶을 지켜보던 아론 역시 그 동생의 옆에 서서 그를 도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조용히 순종했다. 그 한 사람의 순종이 그 가문의 순종으로 이어져, 아론의 가문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사장 가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백성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는 영광의 직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젊은이의 헌신은 자신에게 제한된다 하더라도, 노인의 헌신은 집안의 축복이요, 가문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순종도 사랑하시지만, 일생을 살아오면서 마지막에 세상의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노인들의 순종도 참 사랑하시는 것 같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에녹이나 엘리야와 같은 노인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뛰게 하고 바로 천국으로 들어오게 하시겠는가.
내 아들은 이제 곧 청년이 될 것이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한 집안의 가장이 될 것이며, 곧 여러 식구를 이끄는 한 가문의 수장이 될 것이다. 이런 그의 존재는 너무나 중요하다. 그가 믿음의 불을 끄지 않고, 불꽃을 줄이지 않고, 더욱더 하나님 가까이로 가는 삶을 살 때, 그로부터 받는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은 참으로 클 것이다. 인생의 어떠한 순간이라도, 그때가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아론처럼, 욥처럼 순종한다면, 그의 집안과 그의 가문이 하나님께 순종해 그분의 뜻을 이루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10장 아들은 누구인가? -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지막 때의 교회에 대해 성경에 모든 것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반복해 말씀하신다. “이기라”고 하신다. 교회에 불어오는 유혹과 시험의 때를 이기는 자에게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큰 복이 약속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은 늘 나의 교회 생활의 지표가 된다.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를 부르시며, 그 교회 공동체를 보시고, 그 안에 있는 나를 보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귀하게 보신다. 그 교회에서 지금 교회가 교회답게 서야 할 기준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모두 나처럼 교회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며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또한 교회를 사랑하기 바란다.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시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정말 바란다. 이 허술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의 집단을 보이는 대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요란과 소란을 파악하는 이성의 눈보다는,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계시는 것을 보는 영적인 눈이 먼저 뜨이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심을 읽어내기보다는 그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 같은 것도 사랑받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기를 바란다. 어느 교회의 어느 자리가 자신의 자리인지 알기를 바란다. 또한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옮기시기까지 죽도록 지키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서 인생의 모든 답을 하나님께 받아오기를 바란다.
나는 교회 안에서만 자랐지만 그곳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 나는 나의 아이들을 교회 안에서 키울 것이다. 교회에서 하는 것은 다 할 것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서 삐걱거리며 흔들거리겠지만, 그 모든 것을 경험하며 그것을 뛰어넘게 가르칠 것이다. 교회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교회의 문제를 품에 안고 기도로 뛰어넘는 사람들로 키울 것이다. 나의 아들들은 교회의 기둥이 되기를 바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서 버티는 우직하고 충성스런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 근사하지만 불안한, 똑똑하지만 때로는 아쉬운 일꾼이 되지 말고, 이 일 저 일 맡겨놓고 그 일을 잊을 수 있는 믿음 가는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
11장 당신은 누구인가? - 예수님의 제자이다
한 교회에서 여러 아이들을, 여러 형제와 자매들을 지켜보자면, 참 흐뭇하고도 부러운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과거에는 참 소심하거나 덜렁거리는 아이였건만, 어제는 참 이기적이고 새침하기만 한 자였건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우리 교회에서 변화된 것을 발견했던 이들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반전의 기회를 주신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일찍 잃게 하심으로, 어떤 이에게는 자식을 잃게 하심으로, 어떤 이에게는 자식에게 병을 주심으로, 어떤 이에게는 재물을 가져가심으로, 또는 먼 땅으로 보내심으로 반전의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이 아픔을 통해서 이제까지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나를 만나고 싶으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까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나였다면 진리와 선과 악을 제대로 구별하는 나로, 이제까지 멀찌감치 서서 하나님과 교회를 구경만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반전의 기회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그런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반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감당했던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심을 받았던 베드로이고, 또 한 사람은 이방 민족에게로 보내심을 받았던 바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다 지켜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분이 보는 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하고 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제 베드로는 스스로에게 느끼는 절망으로 현재를 부인하고 싶은 마음인지 과거의 삶으로 자신을 던지듯, 다시 그물을 던진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고 그의 삶을 반전시키실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삶에 이렇게 예수님께서 찾아와주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죄책감으로 얼룩진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반전의 기회를 통해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서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목숨을 다해 지키는 제자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 받은 배경에 온전히 충실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배우고 믿는 바에 따라, 기족의 율법과 질서를 위배해서 이스라엘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게 하는 예수님을 쫓는 무리들을 최선을 다해 없애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가 배운 것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그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갈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다. 이제까지의 삶을 모두 무너지게 하시려고, 그가 믿고 있는 바를 무너뜨리려고 그에게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고자 하는 삶에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삶으로 반전되는 기회를 바울에게 주신 것이다.
이들은 이 기회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을 제자로 삼으시려고 부르셨다. 그들의 허물 많은 인생에 기꺼이 개입하셔서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출생의 한계, 집안의 한계, 인격의 한계, 실력의 한계 속에 가두어두지 않으신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누구라도 다다를 수 있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에게 멋지게 뛰어넘으라고 반전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