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일상 속 하느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지가 2천 년 전이나 지났다고 해서 지금이 그때보다 더 가까워진 게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느님 나라가 내게 가까이 있을 뿐이다. 그리로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곧 하늘나라다. 그분과 맺는 깊은 친교로 나는 하늘나라로 들어간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예수님은 설교로 그리고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셨다. 다리 저는 사람이 반듯이 서서 걷고 뛰고, 안 났던 병이 났고, 마귀는 쫓겨났으며, 죽은 사람까지 되살아났다. 모두가 온전해졌다. 하늘나라에서는 그 사람들처럼 모두가 온전하고 완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그 회당장은 예수님께 자기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하며 와서 손을 얹어 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되살아날 거라고. 그때는 사람이 죽으면 하루 이틀 동안 그 영혼이 그 몸 주위를 떠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운 좋게 그 영혼이 다시 그 몸과 합쳐지면 되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됐으니 그럴 희망조차도 없다고 말한 거였다.(요한 11,39) 예수님은 절박하게 청하는 그 아버지의 청에 따라 그 즉시 그 집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 시신을 만지는 건 지금도 꺼려지는데, 그때는 훨씬 더 큰 일이었다. 시신, 나병 환자, 불결한 병을 앓는 사람을 만지는 건 물론이고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 했다. 그들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과 접촉하는 건 오늘날 뱀이나 바퀴벌레를 손으로 잡는 느낌과 비슷했을 거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혈루증이 있는 여인이 당신을 만지게 하셨고, 나병 환자에게 손을 얹으셨고,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들은 모두 온전해져야 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하느님은 내 안에 계신다고 배웠다. 하느님은 아주 가까이,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 나를 감시하시는 게 아니라 나를 온전하게 해주시려고 문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신다. 이런 하느님을 왜 무섭고 두려운 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를 고치시려고 기꺼이 당신이 더러워지시는 분인데 말이다. 나를 살리려고 죽임을 당하시는 분인데 말이다. 하느님 안에 있으면 여전히 죄인이면서도 나는 온전하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신다. 영성체로 매일 주님을 내 안으로 모시면서도 전율하거나 감격하지 않는다. 그런 신심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그 반대로 그게 일상이라서 놀라거나 감동적일 게 없다는 뜻이면 정말 좋겠다. 하느님이 내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 주님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이는 되살려내졌지만 컴퓨터나 스마트 폰은 고치실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들을 고칠 수 있는지는 아신다고 믿습니다. 시시콜콜한 거까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제가 주님 곁을 떠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