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 내 또래의 신진공고 학생들이 시골에서 올라와 우리 집에 세를 얻어 자취를 하였다.
그들은 주로 야간에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였는데 그 중 충남 천안에서 온 규상이가 있었다. 그는 착하고 순했다. 월남의 티우 대통령을 그가 닮은 듯 하여 나는 그를 월남이라고 불렀다.
늦은밤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그는 삼양라면 한박스를 어깨에 메고 상기된 얼굴로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주책없이 그 라면을 냄비에 수북히 넣고 끊여서 그들과 함께 먹기도 했다.
그들은 객지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하여 항상 긴장된 눈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들 중 광기는 전라도 정읍이 고향이라고 했는데 내가 놀랄 만큼 그는 이기적이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혼자 가기가 심심하기도 해서 그에게 응암동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는 마지못해 나를 따라나섰는가 싶다.
광기와 같이 도축장 다리를 건너 쓰레기 더미 위 파랗게 돋아난 시금치 밭을 가로질러 논을 막아 호수 같은 물가 가장자리를 걸어 신양극장을 지나 커다란 상점에 들러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이 무슨 이유로 자기를 데리고 갔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 없었다.
내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친구이기에 같이 가지고 했던 것인데 그는 그 시간이 아까웠던 지 나에게 눈을 치뜨고 따지고 달려드는 거였다.
내가 머뭇거리자 앞으로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고 내게 냉정히 경고하고 말도 안 하고 앞서 가는 것이었다. 나는 뜻밖에 이용이라는 말을 그에게 듣고 인간에게서 처음으로 차가움을 느꼈다.
규상이와 광기는 우리 집 누추한 방에서 고생을 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떠나갔다. 나 역시 그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근거리에서 보고 고향을 떠나 고생해 볼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 고행을 거듭한 나는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진학을 하였다.
내가 남가좌동에 위치한 명지대학을 다닌 관계로 신사동 다리 앞에서 새로나 제과점을 차려 동업하고 있는 명회와 형문이 형을 자주 찾아갔던 것이다.
그당시 그들은 군에서 제대를 하여 명회네 빌딩에서 장사를 하였기에 장사해서 남은 이익금은 모두 주머니에 넣고 유흥비로 써 버렸다. 내가 집을 떠나 고생한다며 형문이 형은 군입대를 앞둔 나를 데리고 대연각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을 자주 갔었다.
그곳에 웨이터는 몇 개의 테이블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너도 좋고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녀 우리를 부럽게 하였다. 내가 군에 가기 전 그 형과 함께 한 젊은 시절은 나에게 큰 도움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곳에 내가 가야되는지 아니 되는지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기에 하는 말이다.
하루는 명회가 내가 추워 보였던지 자신이 입고 있던 가죽 반코트를 그냥 줄 수는 없고 거저 주는 거라며 2만원만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형문이 형도 명회가 너를 생각해서 싸게 주는 것이니 사라고 하여 나는 숨겨 논 쌈짓돈을 꺼내어 명회에게 주고 가죽코트를 태어나 처음으로 입어보았다.
나에게 조금 큰 듯하여 어깨가 나보다 넓은 내 형을 줄까하다가 남이 입던 옷을 교사를 하고 있는 형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이 꺼림찍 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뜬금없이 규상이가 수소문을 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그는 나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계천을 돌며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처지가 딱하고 그가 몹시 추워 보이는 것 같아 나는 명회에게 산 가죽코트를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나중에 나에게 올 때 2만원은 가지고 와야 한다고 했다. 내 초등학교시절 나보다 한 살 아래 인 조카 윤선이가 가죽잠바를 입고 학교에 입학해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무척이나 부러워며 키가 자랐다.
그 시절은 지나가고 대학생 때 난생 처음으로 입어 본 가죽코트를 과감히 벗어 나는 월남에게 입혀 보냈던 것이다. 며칠 뒤에 오마 하고 갔던 그는 그 이후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러했겠는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나는 우연히 천안에 갈 일이 있어 천안역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토대로 묻고 물어서 그의 집을 가보았다. 규상아 하고 들어섰는데 그의 할머니가 누구요 하며 창살 문을 여는데 앞을 못 보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규상이 친군데요. 규상이 어디 갔어요. 했더니 규상이 서울 갔는데 하시는 거였다. 나는 앞을 못 보는 할머니가 불쌍하고 순간적으로 놀래서 그의 할머니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돌아서 나왔다.
나는 그의 지난날 열악했던 성장환경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아버지가 철도공무원이기에 기차는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자랑삼아 말하며 라면을 허겁지겁 먹던 그가 나는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