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오후 5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경신진 두만강 하류. 강 건너에는 함북 샛별군이 보였다. 조중 국경선에 저녁노을이 변방의 마을을 물들였다. 이 마을 앞으로는 샛별군·온성군 사람들이 주로 도강을 한다. 변방 대대에서 두만강을 순찰하거나 가끔은 불시에 집을 방문해 탈북자들을 색출하기도 한다.
이 마을에 시집 와 살고 있는 탈북녀들은 5명이다. 한 집을 빼곤 모두 처녀로 시집을 왔다. 두 집은 아이가 있다. 다섯 명 중 세 명은 모두 2년 전에 송환된 경험이 있다. 변방 대대에서는 탈북 여성들이 사는 줄 알면서도 눈감아 주고 있다. 지금은 탈북자들이 넘어오는 경우가 적다. 지금 탈북자들은 북으로 송환되었다가 재탈북하거나, 밀수를 위해 마을에서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들뿐이다.
지난해 가을엔 탈북자 한 명이 마을에 들어와 농가의 부부를 꽁꽁 묶어놓고 물건을 털어갔다. 그 후 잠깐 변방 대대의 단속이 심했지만 지금은 형식적이다. 이 마을 농촌집에 들어와 머슴으로 살고 있던 40대의 한 탈북자만 죄없이 붙들려 가 송환되었을 뿐이다. 기자는 탈북자들을 만나러 이 마을에 세 번째로 찾아왔다.
좋아서 사나? 바빠서 살지!
6개월 된 아이를 업고 보건소에 가 아이를 치료하고 집으로 향한 탈북자 조미진씨(가명·35·함북 온성)의 뒤를 따랐다. 마을 한 귀퉁이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방 한 칸의 흙벽에는 가느다란 구멍이 뚫려 신문지로 막았지만 틈새로 실바람이 들어와 신문지가 흔들거렸다. 방안에 앉자마자 낯선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들었는지 조씨의 남편 류지열씨(가명·37)가 기침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었다. 술 냄새를 짙게 풍겼다. 그는 기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당신이 왜 왔는지 짐작은 가지만 묻고 싶지 않다”면서 “사진은 찍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다 손님이라며 부인에게 상점에 가 술을 사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한잔 해야지.”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장롱 밑에 접어둔 지폐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를 방바닥 위에 눕히고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총각 장가를 갔기에 부인에게 밑져 산다고 했다. 부인은 조선에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탈북 후 오갈 곳이 없어 이 집에 와 살고 있었다. 겨울에는 할 일이 없어 마작놀이를 하고 술 먹는 게 일이라고 했다. 여름에는 두만강에 나가 낚시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며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부인은 술병을 들고 다른 아낙네와 함께 들어왔다. 남편은 한국 사람이 왔다고 제 민족끼리 모인다고 웃었다. 함께 온 아낙네는 당차게 생긴 여인이었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5년째인 탈북자 김영미(가명·33·함북 샛별)가 류씨에게 “산모에게 술심부름이나 시키는 머저리 같은 나그네(남편)”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류씨는 “우리 안까이(부인)는 나 아니면 못 산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에 간다고 용 되나”
부인 조씨는 마른 명태와 찬을 놓은 술상을 올렸다. 말이 없고 순박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 여인과는 대조적이었다. 둘은 이 마을에서 제일 친한 동무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이 마을에 살면서 함께 일하다 친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조씨에게 ‘언니’라고 부르긴 했지만 말투는 반말이었다. 그녀는 5년 전 시집 와 살면서 6세 된 남자아이가 있다. 남편은 한국에 돈 벌러 가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중국 호구도 돈을 주고 만들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과도 자주 통화한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면 시내로 나가 살겠다면서 중국 생활에 만족해한다. 한국 소식에도 밝았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간다고 그곳에서 용 되는 것도 아니고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에 산다. 여기에서 잘사는 게 한국에서 못사는 것보다 낫다.”
김씨는 탈북자들이 많을수록 한국 정부에 짐만 되고 이용 가치도 없다면서 “뒷집에 사는 아무 엄마는 한국병에 걸렸다”고 투덜거렸다. “한국에 가려면 새끼라도 까놓지 말고 가지, 다 큰 새끼 버리고 도망가려다 남편에게 얻어터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김씨는 그 사람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 여자 때문에 우리 마을에 시집 온 조선 여자들이 지금까지 죄인 취급 받는다고 했다. 옆에 앉아 술잔을 권하던 조선족 류씨(김씨의 남편)는 “어렵고 힘들 때 시집 와 살다가 한국으로 도망가면 자신들은 도토리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 류씨에게 술을 권했다. 취기가 조금 올랐다. 이름이나 고향은 기록하지 않는다면서 설문용지를 꺼냈다. 남편은 한참동안 설문용지를 훑어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조씨도 설문용지를 훑어본다. 2년 전 한국 사람들이 교회 믿으라고 찾아왔다가 설문조사 한번 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이런 것을 하면 시끄럽지 않은가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탈북녀 김씨가 “일없다”면서 볼펜을 달라며 협조해 주었다. 남편 류씨는 찡그린 표정으로 거푸 담배 연기만 내뿜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조씨는 “아이 아빠의 성격이니 노여워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북에서 장사를 하다가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조선돈 3000원을 주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했다. 농촌에 일자리를 구해 준다는 한 조선 사람의 말을 믿고 중국 땅을 밟자마자 온 곳이 이곳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와서는 울고불고 하소연했지만, 빈 몸으로 조선에 갈 수도 없고 팔려온 몸이라 쉽게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지난해 가을 친오빠가 찾아와 3일간 머물다 북으로 갔다고 했다. 돈과 양식을 마련해 주고 두만강까지 나가 배웅해 주었다. 오빠가 간 뒤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조씨는 조선에 남편과 아이가 있다. 남편의 장래를 위해 이혼수속을 끝냈지만 아이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나와 한 푼도 벌지 못하고 가정이 깨지고 빈털터리로 혼자서 살 수 없어 류씨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한탄하다 아이가 생겼다. 그녀는 “미우나 고우나 이제 함께 계속 살아야 하는 게 내 팔자”라며 가난하게 살아 마음이 아프지만 결혼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고 부언했다.
그녀와 대화 중 기자가 알고 있는 탈북자 이야기가 나왔다. 북에 있을 때 옆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 탈북자의 친척이 중국에 있다는 말을 믿고, 장사를 해서 마련한 돈 1만원과 친정집에서 빌린 돈을 빌려주었다. 그 탈북자는 중국에서 잘사는 친척집에 갔다 오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준다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었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기자에게 어디서 보았는지 꼬치꼬치 묻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4년 전 연길에서 만났지만 모른다고 했다. 부인은 그 여자를 잡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그 탈북자 가족은 4년 전 NGO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한국에 와 살고 있다. 기자는 더 이상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순박해 보이던 부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면서 분노에 가득 차 보였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부인은 아이를 가슴에 껴안고 젖을 물렸다.
탈북녀 김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남의 호주머니 털어서 자기 주머니에 넣는 인간이 총명한 줄 알지만 발 뻗고 편안히 잠자지 못할 거야.”
김씨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집에 올 시간이라며 기자에게 함께 가도 괜찮다고 해 김씨의 집으로 향했다.
자식 놔두고 한국에 갈 수 없어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김씨의 집은 조씨의 집과는 대조적이었다. 이 마을에서도 형편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김씨의 시어머니는 손자와 놀다 말고 한국 사람이라는 말에 한국에 간 자신의 아들과 연관이 있는 줄 알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씨의 여섯 살배기 아들이 김씨에게 다가와 “엄마”하고 가슴에 안겼다. 김씨는 아이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를 두고 한국에 간 남편보다 먼저 한국에 갈 생각도 해봤다.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한국에 가서 정착금 받고, 살 집이 나오면 남편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남편이 반대했다. 남편의 반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에 이 마을에 살던 OO 엄마가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한국에 갔다. 그녀는 정착금을 받아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남편도 믿었다. OO엄마와 그녀의 남편은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전화통화도 자주 했다. 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OO엄마가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OO엄마는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딱 한번 생활비를 보내준 뒤 연락을 끊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자와 눈이 맞아 동거를 하면서 ‘더 이상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남편에게 절교장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매일 술만 먹고 지내다가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이런 전례를 알고 있었기에, 김씨의 남편이 그토록 강경하게 반대한 것이다. 여기보다 더 편한 곳에 가면 남편과 자식을 버릴 수 있다며 안 된다고 했다. 남편은 “너도 한국 가게 되면 한가지다. 새끼고 남편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국에 가는 다른 탈북자와 똑같이 취급받기는 싫었다. 남편은 집에 놀러오는 탈북녀들도 꺼려했다. 전화가 와도 바꿔 주지 않고 끊어버렸다. 김씨는 처음으로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마을에서도 북조선 여자들은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며 미심쩍어 한단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엄마 없이 자란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아이가 어두운 그림자를 지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첫 발자국이 마지막 발자국인데 또 발자국을 떼서 뭐하겠습니까? 중국 내에서도 조선에서 왔다 하면 낮게 보는데 한국에 가면 더할 게 아니겠어요?”
중국 호구 만들어 북조선에 다녀왔다
다른 마을에 비해 이 마을에 사는 탈북녀들은 조용한 편이다.
한국에 간 탈북녀가 한 명 있지만 모두 중국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파출소에 신고하지 않고 공안들이 마을에 오면 숨으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한때는 파출소에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 탈북녀들을 조사한 적이 있다. 신분증을 만들어 준다는 소문도 있었다. 한 집에 1000 원씩 걷어 파출소에 등기한 적이 있지만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김씨는 말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조선 여자들, 파출소에서 다 알아요. 붙잡으려고 하면 다 잡아가지 내버려두겠어요? 일만 없으면 눈 감고 넘어가는 게 중국 정부라고…. 내가 호구(신분증) 만든 것도 알고 보면 불법이지만 눈 감아주고 있어요.”
김씨의 희망은 남편이 한국에서 돈 벌어 돌아오는 대로 도회지로 나가는 게 꿈이었다. 호구가 있어도 주위 사람들이 모르는 게 좋다고 했다. 중국 호구로 북조선에 두 번이나 갔다 왔다고도 했다. 친척 방문 형식으로 남편과 함께 조선의 어떤 도시에서 가족들을 만나 중국에서 가져간 물건과 돈을 건네 주었다. 고향 마을엔 가지 못했다. 얼굴을 아는 고향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선의 식량 사정이 자신의 탈북 전보다는 완화되었더라며 웃었다. 조선 사람들이 중국처럼 장사도 하면서 자력갱생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녀가 건네준 물건들을 대거리(곱배기)로 장사해 생활 형편이 좋아졌다고 한다.
김씨는 고향의 가족들과도 편지를 주고 받는다며 세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중국에 사는 친척의 신분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뒤탈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 정도의 뿌듯함을 맛보는 사람은 이 마을의 탈북녀들 중 김씨 정도밖에 없다. 다른 탈북녀들은 김씨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시집 잘 갔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김씨는 말했다. 기자는 김씨에게 결혼생활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말해, 제 나라에서 시집가 사는 게 옳단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후회한들 달라질 게 없잖습니까. 우리 나그네(남편), 나 바쁠 때 만났단 말입니다. 혼자 생각해 보면, 그 때 만나지 않았다면 이 낯선 땅에서 내 운명이 어떻게 변했겠습니까? 날 고와해 주고, 우리 아이 예뻐한단 말입니다. 내 성격에 조선에서는 이런 나그네 만나기 힘들단 말입니다.”
한국 놈들이 중국 농촌 망가뜨렸다
김씨와 대화 도중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김씨는 전화를 받으며 기자에게 눈짓했다.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한 마을에 사는 탈북녀라면서 ‘오라고 할까요?’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OO 엄마, 지금 우리 집으로 오라’며 한참을 얘기하다 전화를 끊었다. 30분 후 또 한명의 탈북녀가 들어왔다. 기자와 눈을 마주치자 깜짝 놀랬다. 김씨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국에 있는 남편의 친구라고 운을 뗐다. 그제서야 자리에 앉았다. 탈북한 지 7년째 된 그녀는 농번기철이라 바쁘다고 했다. 그녀는 김씨에게 “한국에 왜 안 가는갚 물으며 농담을 했다. 김씨는 기자를 가리키며 “이 아저씨보고 데려 가겠는가 물어보라”며 웃었다. 김씨의 시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애 듣는 데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말을 끊었다. 며느리에게 보따리를 꺼내라며 작은 짐들을 만지작거렸다. 한국에 가면 아들에게 짐을 부쳐달라고 했다. 보자기 안에는 쇠고기 말린 것, 진도핀 알약, 백두산 꿀, 약초들을 넣었다. 김씨는 시어머니가 준비한 물품들을 보자기에 싸서, 한국에 가면 꼭 전달해 달라며 남편의 휴대폰 번호와 함께 건네주었다. 옆에 앉아 지켜본 탈북녀 나혜정씨(가명·32세·함북 온성)의 표정이 어두워보였다. 나씨는 몸 구석구석 어디 한군데 안 아픈 곳이 없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씨는 중국에 나와 시집 온 게 두 번째라고 했다. 한족 마을로 시집가 중국말도 모르고 너무 고생해 새벽에 도망 나온 곳이 이 마을이었다. 결혼생활에 만족치 못해 고민하고 있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시는 북조선에 갈 수 없을 것 같고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도 했다.
“북조선 사람들에게 뛰쳐나오지 말라고 하고 싶단 말입니다. 나오면 나올수록 가시덤불 길이니까. 누구나 고생하며 살지. 강냉이밥 먹고, 죽 먹고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디다, 솔직히….”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그녀는 힘없이 방안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나씨가 남편의 목소리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나씨의 남편과 또 다른 두 명의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기자의 멱살을 잡으며 욕을 했다. ‘XXX, 공안에 신고하겠다’며 카메라 가방을 뺏고 필름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입에서 술냄새가 짙게 풍겼다.
탈북녀 김씨와 시어머니는 한국에 있는 아들의 심부름을 온 것이라며 말렸다. 탈북녀 나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집앞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기자가 탈북녀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브로커로 보였는지, 그들은 “한국놈들이 찾아와 중국 농촌 망가뜨렸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싸움을 말리지 못한 김씨가 촌장집으로 전화해 촌장을 불렀다.
기자는 평소 안면이 있는 마을 촌장의 중재로 봉변을 면했다.
중국에서는탈북녀들과 함께 사는 그들의 결혼생활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소문 없이 조용히 살아가기를 바라는 남편들은 부인이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기자의 취재는, 살얼음판을 건너듯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얼음이 꺼지는 위험을 암시하기도 한다.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취재라는 명목으로 무작정 찾아갔던 그날의 기억은 기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첫댓글 ㅡㅡ;; 조선족꽃뱀이 한국총각들 더 망칩니다
댓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