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식 / 왕이 없는 나라 『동심 동화 1편』... 동심문학 2021년 봄여름, 7호... 2021.5.5. 발행
■ 안재식 『동심문학 동화 1편 』
- 왕이 없는 나라
。 동심문학 2021년 봄여름. 7호
。 2021년 5월 5일 발행
。 정가 11,000원
왕이 없는 나라
안재식(1942~)
동쪽의 넓고넓은 바다를 안고 동글동글하게 살아가고 있는 조약돌나라가 있었어요.
조약돌나라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웠어요.
그런데 조약돌나라에도, 가끔씩 거센 파도가 밀려와 온통 쑥대밭이 되곤 하였어요. 그럴 때마다 조약돌들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서로서로 붙잡아주고 위로하면서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았어요.
어느 날, 천둥 번개가 번갈아 치며 변덕을 부렸어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폭풍우가 휘몰아쳤어요. 커다란 파도와 함께 큰돌멩이 하나가 조약돌나라로 얼떨결에 떠밀려오게 되었어요.
큰돌멩이는 바닷속 바위틈에 끼어 살았었는데, 잠든 사이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던 것이에요.
한밤중에 낯선 나라로 떠밀려온 돌멩이는 무서움에 떨면서 밤새 울었어요. 자기가 살던 옛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무서웠어요.
조약돌들도 갑자기 나타난 돌멩이를 보고 잔뜩 겁을 먹게 되었어요. 돌멩이는, 동글동글 작고 순진한 조약돌들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험상궂게 생겼어요. 그래서 조약돌들은 무섭게 생긴 돌멩이에게 눈길조차 주지를 않고 슬슬 피하곤 했어요.
돌멩이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어요. 그러나 조약돌들조차 모른 척하니 더욱 슬프고 야속한 마음이 들었어요.
외로워진 돌멩이는 온갖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조약돌들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어요.
“조약돌님, 내가 몸집도 크고 험상궂어 보이지만 실은 나도 여러분처럼 순진한 돌멩이랍니다. 전에 내가 살던 곳은 나보다 더 험상궂고 덩치가 큰 바위들 뿐이었어요. 하지만 폭풍우가 몰려오는 날이면 큰 바위틈에 내 몸을 의지하고 안전하게 살았었지요. 그런데 내가 잠든 사이에 그만 파도에 휩쓸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나도 고향이 그립지만 갈 수가 없으니 어떡합니까! 딱한 사정을 생각해서 제발 여러분과 함께 살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조약돌나라 규칙도 잘 따르고, 여러분보다 덩치가 크니까 힘든 일은 도맡아하겠어요.”
돌멩이의 간절한 부탁에 마음씨 고운 조약돌들은 함께 살기를 허락해 주었어요.
“그렇게 하지요. 우리보다 몸집이 커서 땅은 넓게 차지하겠지만, 우리가 조금씩 양보하면 같이 사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조약돌들은 돌멩이가 땅을 쓰도록 조금씩 양보하였어요. 그리고 먹을 것도 나눠주고, 파도를 피하는 방법도 알려주었어요.
조약돌들과 돌멩이는 서로 다투지 않고, 낮에는 온몸이 노글노글할 때까지 햇살에 찜질하면서 사이좋게 살았어요. 하늘이 높고 푸르른 날이면 갈매기의 합창을 따라 신나게 노래도 불렀고요. 밤이면 밤바다에 멱감으러 뛰어드는 별을 세면서 서로 만족하며 살았어요.
이제 조약돌나라에는 평화로운 생활이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어요.
햇살이 점점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구어지더니, 어느새 해님도 피서를 떠나고 장마가 왔어요.
해님이 보이지 않던 날이었어요. 번갯불이 번쩍번쩍 빛나고, 우렛소리가 꽝꽝 귓전을 때리며 폭풍우가 휘몰아쳤어요.
바다는 커다란 물기둥을 일으키며 조약돌나라를 휩쓸었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우로 조약돌나라는 안절부절못하였어요.
조약돌들은 몸을 땅바닥에 찰싹 붙이고 폭풍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돌멩이도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려 큰 몸집에 여기저기 상처가 났어요.
그때 돌멩이를 향해 조약돌들이 소리쳤어요.
“어이구! 조약돌 깔려죽겠네. 돌멩이님, 파도에 밀리지 않도록 땅바닥에 몸을 밀착하고 있어야 해요. 그러지 않으니까 우리들을 깔아뭉개고 있잖아요.”
“조약돌님, 나도 어지러워 죽겠어요. 전에 살던 곳으로 휩쓸려갔으면 좋겠는데, 몸을 움직여도 도로 제자리니, 하여간 조금만 참으세요.”
돌멩이는 이 기회를 틈타서 고향을 가야겠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거친 파도에 어지럼만 일 뿐 다시 제자리였어요.
고향에서는 바위틈에 몸을 숨기면 어지럽지가 않았었는데, 조약돌나라에선 숨을 곳도 없어서 돌멩이는 슬슬 화가 났어요.
반면에 조약돌들은 덩치가 큰 돌멩이에게 깔려서 몸뚱이가 으깨지고, 몹시 아팠어요.
조약돌들은 돌멩이에게 조심하라고 일제히 고함을 질렀어요. 이윽고 돌멩이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후회하게 되었어요.
돌멩이도 깔려 있는 조약돌들에게 화풀이를 하였어요.
“너희들과 살다가는 오히려 나만 죽겠어. 너희들이 작다 보니 도움받을 것도 없고, 이제부턴 내 맘대로 살 거야. 여기서는 내가 몸집도 크고 힘이 제일 세잖니?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왕을 할 테다. 모두 그리 알고, 시키는 대로 햇!”
지금까지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돌멩이가 갑자기 사납게 돌변하였어요.
조약돌들은 기가 질려 아무도 돌멩이의 호통에 반대를 못하였어요.
결국 조약돌들은 돌멩이의 폭력과 횡포에 벌벌 떨면서 어쩔 수 없이 왕으로 모시게 되었어요.
왕돌멩이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고, 조약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이면 하나, 둘 조약돌나라를 떠났어요.
조약돌이 떠날 적마다 왕돌멩이는 남아 있던 조약돌들을 밀고 자빠뜨리며 화풀이를 하였어요.
마침내 조약돌들은 몸뚱이에 온통 상처가 나고, 뾰족하게 되었어요. 반질반질 윤이 나고, 동글동글 예쁘던 조약돌들이 뾰족뾰족한 모습으로 험상궂게 변해 버렸어요.
결국 조약돌들도 왕돌멩이의 모습을 닮아갔어요.
조약돌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불평을 늘어놓았어요.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인지 모르지만, 평화롭던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어!”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던 내 몸이 돌멩이 때문에 볼품없이 거칠어졌어.”
“그러게 말이야. 동글동글하던 몸뚱이가 뾰족하게 모가 생겼다니까…….”
“어이구, 말도 말아요. 우리 집 큰애는 돌멩이한테 배웠는지, 친구들과 매일 싸움질이에요.”
“아, 글쎄, 우리 할멈은 돌멩이가 밀어서 허리가 부러졌어. 어이구, 불쌍한 우리 할멈!”
“자, 여러분! 우리들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저 못된 돌멩이를 조약돌나라에서 쫓아냅시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돌멩이를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조약돌들은 왕돌멩이를 내쫓기로 결정했어요.
가장 뾰족하게 거칠어진 조약돌이 앞장서서 왕돌멩이를 밀치기 시작했어요. 뒤이어 많은 조약돌들이 왕돌멩이를 공격했어요.
“아이고, 아파! 왕돌멩이 살려! 웬 조약돌들이 동글동글하지 않고, 왜 이리 뾰족하게 거친 거야. 에고, 내 허리야.”
왕돌멩이가 조약돌들을 내려다보니, 전에 보았던 예쁜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어요. 거칠고 모난 조약돌들만 잔뜩 있는 걸 보고 크게 놀랐어요.
왕돌멩이는, 조약돌나라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조약돌에게 그 이유를 물었어요.
“어이, 영감조약돌! 조약돌들이 왜 이리 험상궂게 변한 거야? 나한테도 덤비고 있잖아!”
“그건 돌멩이님이 작고 동그란 조약돌들을 자꾸만 밀고 자빠뜨려서 그렇게 된 거예요. 밑에 깔려서 깨지고 부서지고, 그래서 모두 뾰족뾰족하게 변한 것이랍니다.”
“뭐야? 못된 조약돌들 같으니라고, 감히 내 탓이라고!”
왕돌멩이는 버럭 화를 내면서 영감조약돌을 힘껏 밀어버렸어요.
그날 밤, 왕돌멩이의 꿈속에는 낮에 봤던 영감조약돌이 나타났어요.
영감조약돌은, 왕돌멩이가 밀친 곳이 으깨져서 뾰족한 쪽을 뿔처럼 들이밀며 달려들었어요. 왕돌멩이가 도망가도 영감조약돌은 뒤따라와서 부딪히고 밀치기를 계속했어요.
덩치 큰 왕돌멩이의 몸도 뿌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어요.
평소 왕돌멩이가 큰소리를 내면 벌벌 떨던 영감조약돌이 이젠 아무리 야단을 치고 화를 내도 떨기는커녕 무섭게 계속 달려드는 거였어요.
“살려줘! 살려줘! 제발 그만!”
영감조약돌에게 울면서 사정하다가, 왕돌멩이는 꿈에서 깨어났어요.
‘휴우, 꿈이었구나. 다행이닷!’
왕돌멩이는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조약돌들의 모습은 모두 동글동글하고 친절했었는데, 돌멩이가 왕이 되고부터 거칠고 모나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빨간 해가 바다 끝에서 쏘옥 얼굴을 내밀며 방글방글 웃는 아침이 되었어요.
조약돌들은 왕돌멩이가 오늘은 무슨 못된 짓을 할까? 의심의 눈초리로 몸을 움츠리고 눈을 떼지 않았어요. 그리고 언제든지 뾰족한 몸뚱이로 덤비어들 자세를 하고 있었어요.
왕돌멩이가 말을 꺼냈어요.
“그동안 여러분에게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은 떠돌이 신세인 나에게 살아갈 자리도 마련해 주었는데, 난 그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왕으로 모시라면서 못되게 굴었습니다. 조약돌나라엔 왕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곳인데도 내가 욕심을 부렸어요. 결국 여러분을 거칠게 만들었고요. 여러분이 날 용서해 준다면, 처음 이 나라에 들어와서 약속한 대로 앞으로는 여러분의 방패막이가 되겠습니다.”
왕돌멩이는 조약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어요.
그러나 조약돌들은 돌멩이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로 돌멩이의 행패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돌멩이는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조약돌들이 야속하였어요. 그러나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어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조약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땅바닥에 몸을 찰싹 붙이고 파도와 사투를 벌였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갔어요. 조약돌들의 뾰족한 몸은 부드러운 파도의 손길에 매만져지면서 반질반질 동글동글하게 예뻤던 본디 모습을 되찾았어요.
조약돌나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어요.
그때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어요.
“우리는 조약돌나라에 살고 있는 모래알이랍니다. 조약돌님들 덕분에 파도에 떠밀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있지요. 조약돌나라 평화가 곧 우리들의 행복이에요.”
조약돌들과 돌멩이는 낭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몰라 두리번거렸어요.
“여기, 여기에요. 여러분이 밟고 있는 모래랍니다.”
그때서야 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반짝이는 작은 체구를 한 모래들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어요.
“에구, 미안해요. 우리가 모래님들의 작은 체구를 밟고 있었네요.”
“미안할 것까지야 있나요. 우리가 비록 체구는 작지만 서로서로 뭉쳐 있어서 여러분 무게 정도는 거뜬하게 참을 수 있답니다. 다만 여러분이 싸우고 밀치느라 왔다갔다 하면 우리도 흩어지게 되지요. 그동안 우리도 살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랬군요. 우리는 돌멩이 때문에 피해 입은 것만 억울해서 싸우다 보니, 모래님들의 고통은 생각하지를 못했어요. 아휴, 정말 미안해요.”
“내 잘못이 크지요. 나만 편하자고 행패를 부렸으니,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돌멩이가 몸을 움직여 큰절을 하려고 하니, 그 밑에 깔릴 뻔한 조약돌과 모래가 아프다고 엄살을 떨었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조약돌들과 모래들은 서로 쳐다보며 큰소리로 웃었어요. 돌멩이도 따라 웃었고요.
웃음소리에 조약돌 틈에서 꿀잠을 자고 있던 게도 깨어났어요.
“조약돌나라에 평화가 온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환영합니다. 나도 이 나라에 살고 있답니다.”
게가 뒤뚱뒤뚱 일어나더니, 커다란 왕발로 가위질 춤을 추며 축하해 주었어요.
| ▶안재식(安在植) 약력 1942년 서울 신설동 출생.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회 지도위원, 「소정문학」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수상 : 환경부장관 표창(1997. 문학부문), 한국아동문학작가상 외 시가곡 : 「그리운 사람에게」 등 20여곡 저서 : 『야누스의 두 얼굴』 등 20여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