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자신의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는 참으로 비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은 이런 참담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랜 세월을 대적에게 쫓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젊은 시절에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고,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자식에게 쫓겨 다니며 살았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들의 막강한 세력 앞에 그래도 소수의 무리지만 자신의 도피생활을 돕고, 안전을 염려하며 걱정해 주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윗을 사랑했기에 어떻게 하든 그가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들은 피해 다니는 다윗을 향해 ‘깊은 산속으로 도망하여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숨어라.’고 충고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만약 이렇게 다윗을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이들이 없었다면 다윗은 과연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들보다 더 소중하고 고마운 이들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태도를 취한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무리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그들의 요구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는데 또 어디로 피하라고 하느냐?’(1절)는 반응이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윗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였다. 비록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도움을 주는 가까운 친구 혹은 부하나 동료들일지라도 그들의 말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먼저 귀를 기울었다.
다윗은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믿음 없는 자의 입장에서는 산속 깊은 곳이 안전한 피난처가 되겠지만 다윗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피난처요 요새며 피할 바위이고 산성이었다.
심지어 다윗은 원수들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에도 스스로 칼을 들어 그들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삼상 24:1-7; 26:6-12 참조). 그 이유는 주께서 그들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죽어야 한다면 여호와께서 친히 죽이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 생명을 여호와께 맡긴 것뿐만 아니라, 대적의 생명까지도 여호와의 손에 의탁한 그야말로 철저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자세이다.
그는 또 여호와 하나님을 성전에 계시는 분으로 묘사했다(4절). 이 말은 깊은 뜻을 내포하는 의미심장한 신앙 고백이다. 다윗이 대적들에게 쫓겨 다니고 죽음의 위기에 몰리지만 여호와의 품을 피난처로 여기고 평안히 지낼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이런 믿음에서 나왔다.
자신의 공로와 가치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꼭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신앙이 아니라 교만이다. 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이런 자들을 많이 본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자신이 살아서 열심히 일해야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런 것은 극히 교만한 자의 심성이다.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이 지켜 보살피시는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전에 계시는 분,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희생제물을 드린 분이기에 그 희생 제물을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고 살리신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다윗 자신은 대적에게 죽어 마땅한 자이지만 주께서 굳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셔서 보살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제물이 되셨기에 그것 때문에 자신을 용납하셨다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자기 택한 백성을 용납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대신 제물로 드린 십자가 사건이 중심에 있다. 다윗은 이런 근거 때문에 자신을 주께서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믿는 여호와는 하늘 보좌에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시고 계시는 분이다. 악인들의 행위를 감찰하시고, 또 자기 택한 백성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악인들은 결국 심판의 대상으로, 그리고 자기 백성들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감싸 안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7절)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스스로 의로우셔서 의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의는 자신의 선한 뜻대로 자기 택한 백성에게 자기 아들의 희생을 근거로 용서하셔서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그 모든 것들이 담겨있는 일 전체이다. 스스로 의로우시기에 의로운 일을 좋아 할 수밖에 없다.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라는 말씀도 위의 구절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할 말씀이다. 주님 주시는 의를 덧입은 자는 결국 그분의 은총을 찬양하게 되고, 그분의 하신 일을 영원히 감사 찬양하기 위해 주님과 더불어 영생할 것이다. 영원히 그분의 영광의 광채를 보면서 경배를 쉬지 않을 것이다.
시편 12:1-8절
불의한 사회, 진실이 왜곡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1절)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온통 거짓과 위선과 권력자에 대해 아첨하면서 살아가는 외식하는 자들이 판을 친다.
이런 모습은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한 자들 즉,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에 다가가기를 힘쓰고, 쾌락을 쫓아 달려갈 뿐이다. 무엇이 진리이며 경건한 삶이 왜 필요한 것인지, 정직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거짓이 되었건 아부가 되었건 그들이 결과적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만족과 행복인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거나 그분의 뜻을 사모하는 심정은 아예 없다. 오직 자기 영광만이 최대의 목적이며 기쁨이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를 쉬지 않고 스스로를 포장하여 과대 선전하기에 바쁘다.
또 자신의 만족을 위해 연약한 자를 잔인하게 짓밟고, 의로운 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악한 인간들의 세상을 하나님은 방치하고 계시지만은 않는다. 여호와는 아첨하는 입술이나 자랑하는 혀를 지극히 싫어하셔서 결국은 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3절).
이런 여호와의 일은 세상이 경건하고 충실한 자를 없어지게 하는 것과 정 반대의 현상이다. 이 사실을 다윗은 잘 알고 있기에 여호와께 현 사태를 고발하고 속히 개입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 땅의 강자로부터 짓밟히고, 힘이 없어 자신의 것마저 다 빼앗기고 궁핍하게 살아가는 자기 백성의 탄식을 다 듣고 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억울하게 짓밟히고 빼앗기며 생명마저 위협받으며 살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시고 세상 악한 세력들이 손대지 못할 안전지대로 그들을 옮기실 것이다.
이것은 연약한 자의 자기소망 때문에 이뤄지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악한 자들은 연약한 자에게 힘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고 착취하면서도 더 많은 것을 갖고자 소망하며 신께 기도한다. 그러면서 거창한 기도의 명분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주시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자신의 힘을 동원해 모으는 것으로 모자라, 더 큰 힘을 소유한 하나님의 힘을 동원해 더 많은 것을 모으려 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세상 종교의 모습이다.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그 기도의 내용은 자기 욕망 채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의 완악한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이 응답하시는 기도는 당신의 뜻에 부합할 때만 이뤄진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 노력, 간절함 등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하다’(6절)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약속에 대해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다 성취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고, 오직 자신의 맹세에 대해서만 이루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그분의 말씀은 순결한 것이다.
이 시의 저작 연대가 다윗이 왕으로 재직할 당시 백성들의 거짓된 모습을 보면서 지은 것인지, 아니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왕에게 아부하고 거짓을 일삼는 자들을 보면서 탄식하며 지은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었던 관계없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진리를 사모한다거나 정직과 경건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는 않는다.
과연 이러한 세상에서 나 혼자라도 진리를 끝까지 고수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손해를 보고,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쓰는 상황에서 굳이 진리를 말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것이다. 그러나 거짓이 영원히 숨겨질 수는 없고, 진리가 끝까지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자라면 현재의 불이익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죽은 하나님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리고 어떠한 사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자기 약속은 이루고야 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성도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취후 승리이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승리하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사수해서 그것을 의로 인정받아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다가 그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된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시편 13:1-6절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 참으로 다양한 환경을 겪으면서 다양하게 반응하는 신앙인들의 고백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과 아픔이 감사와 기쁨으로 승화되는 장면도 목격하고, 억울함과 비참함이 관용과 평강으로 표출되는 것도 확인했다.
어쩌면 시인들이 겪은 개인적인 일들을 보면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왜 나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 때문에 주눅이 들고, 근심과 염려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시편에 기록된 것 같은 아름다운 시를 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 시인들의 마음을 공유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들 역시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 때문에 사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안은 신앙의 힘으로 잘 버티고 참았는데 이제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러 울부짖고 있다는 느낌이다.
남의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주님만 바라보면 승리할 것이다. 곧 좋은 날이 올 거야.’ 등등의 말로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도 하고, 혹은 신앙심을 더 북돋우며 어려움을 잘 극복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자이기에 모든 상황을 이런 식으로 이겨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고,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내뱉는 것이 모두 신앙심이 없어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환경을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이 고통 속에 놓여 있으되 때로는 묵묵히 지켜보고만 계시고, 악한 세력들에 의해 언약이 무시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대응할 힘이 없는 무능자처럼 잠잠히 기다리고 계시기도 하고---
1,2절에서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느 때까지니이까?”를 반복하며 부르짖는 시인의 외침은 절박하다는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래의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얼굴 빛을 비추시는 분(시4:6, 67:1, 80:3)인데, 마치 영영 자기백성 다윗을 잊으신 분처럼 묵묵부답하고 계시니.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근심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고통과 아픔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원치 않는 일들이 닥쳐온다. 우리의 욕망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이런 아픔을 겪게도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1,2절의 탄식에 가까운 외침으로 시가 끝나지 않고, 새로운 기대와 희망과 함께 성도의 심성이 3절 이하에 담겨 있다.
3절에 “나의 눈을 밝히소서”하는 기도가 나온다. 바른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만 성도로 살아갈 수 있기에 이런 간구를 드리는 것이다. 눈이 어두워 “사망의 잠”에 빠진다면 사단의 노리개로 평생을 살게 될 것이다. 고통과 아픔이 온다 할지라도 영의 눈을 뜨고 사태를 즉시 할 수 있다면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함정에 빠지게 될 때, 사단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반대로 밝은 눈으로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된다면 원수 마귀는 패배할 것이다. 이 승리는 단순히 성도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가 된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기에 결코 고통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았다. 아팠고 괴로웠고 힘들었지만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은 긍휼로 자신을 돌보시는 분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6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는 고백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나의 행위대로 책하거나 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끝까지 용납하시고 감싸주시고 사랑하시는, 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다윗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 택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세상의 악한 세력이 우리를 손대지 못하도록 보살피시고 끝까지 인도하셔서 당신과 함께 영생하도록 하신다. 이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다윗은 5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4:1-7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그 기준을 정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며,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기준이 합당한 것인가?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자도 많고 능력 있는 자도 수다하다. 이들은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고, 또 응용력이 뛰어나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정교한 손재주와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받고 쓸모 있는 인재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자이며 그 종말은 영원한 지옥 형벌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세상 기준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전혀 다르다. 이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지 갈등하는 자들도 있다. 그 이유는 어디를 기준으로 해서 살 것인가 하는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삶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어리석은 길을 자청해서 가는 자는 없다. 모두가 현명한 선택을 원하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소망하며 신중한 선택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심사숙고해도 우둔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뜻을 살펴 헤아리는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하나같이 자기 영광을 꿈꾸고 쾌락과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며 제 갈 길을 간다. 이렇게 각자 옳다고 여기는 길을 향해 걷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물질, 그리고 사람들을 의식할 뿐이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죄악을 일삼고 남에게 욕먹을 일도 주저하지 않고 행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이 땅의 삶이 끝인 줄 아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모르기에 그리고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그 이후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육신의 삶이 목을 맨다.
만약 이들이 죽음 이후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들 눈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했을 것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만으로 만족함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는 참 평안을 바라며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각없는 행동을 일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를 억압하며 먹이로 생각하여 집어 삼키는 완악한 삶을 산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때 어리석은 자들은 산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비웃고 조롱했다. 그들에게는 방주보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사고팔고 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120년 후에 있을 홍수 심판을 믿지 않았고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판은 찾아왔고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모두 물 심판에 수장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한 부자의 이야기도 하나님 없는 자의 미련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비유 중 하나이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창고를 더 넓혀 평생을 먹고 마셔도 남을 넉넉한 양식을 쌓아두고는 이제 평안히 먹고 마시면서 여생을 즐기려고 했다. 이런 자를 향해 예수님이 던진 말씀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절)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영생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어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영원한 하늘나라보다 세상 물질이 더 소중했기에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포기하고 떠났다. 이처럼 세상 물질을 천국보다 더 귀히 여기는 자를 향해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24절)고.
이것은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땅의 삶이 더 비중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삶이 비중이 있는가에 따라 어리석은 삶을 사는가, 혹은 지혜로운 삶을 사는가 판가름 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세상만 의식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육신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시편 15:1-5절
본 시편은 다윗이 스스로 질문을 던진 후 그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질문의 내용은 ‘과연 어떤 자가 성전에 나아갈 자격이 있는가?’라고 묻고 난 후, 그 자격에 대해 행해야 할 일(긍정적인 측면에서)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부적적인 측면에서)들을 한 절 한 절 번갈아 서술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주의 장막에 유할 자(혹은, 성산에 거할 자)”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며 온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의 장막에 유할 자에 대한 자격 요건이 제시되어 있고 그 요건에 그 어떤 자도 합당한 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2절에서 다윗이 제시하는 ‘주의 장막에 유할 자’의 자격 요건을 살펴보자.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진실한 마음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같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마24:27). 이 말씀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선하다는 칭찬을 듣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이기심과 명예와 부를 위해 이런 외식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비단 그들에게만 국한 되는 책망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 모두에게 내린 꾸지람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우리는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3절에는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다. 친구와 이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늘 부닥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악을 행치 않고, 훼방치 말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누구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성전에 나아가는 자격 요건이 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우리가 고의적으로 나와 마주치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그런 악행을 행치 않는다 할지라도 무심코 우리가 한 행위에서 피해를 줄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우연히 발생하는 일 때문에 성전에 나아갈 수 없다니 좀 이해할 수 없다.
또 4절을 보면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 경외하는 자를 존대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 사실 이 부분도 성도가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 또한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삶이다. 멸시할 자와 존대할 자를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불신자를 보면서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멸시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부러워해서 그것을 본받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마음이 생길 때는 그들을 멸시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마음으로 그들을 흠모하게 된다. 또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성도들의 삶을 볼 때는 존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고난과 핍박의 삶을 보면서 별로 본받고 싶지 않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자들을 결코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격이 못된다고 한다.
5절 말씀에는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으나 이 또한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나도 모르게 이권에 개입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요구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인간들인데, 이들을 향해 성전으로 나아가는 자의 자격여부를 거론한 것은 성전에 가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지 아니한가? 가능성이 있는 말을 해야 노력하고 힘써서 자격을 구비하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이것은 애초부터 가능성 자체를 말살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럼 왜 이런 되지 않는 자격 요건을 다윗은 제시하고 있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는데, 다윗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이후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들은 후 쓴 시편 51편에서 밝히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라고 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죄악을 거론한 바 있다.
이렇게 인간의 생리를 잘 아는 다윗이 어찌하여 성전에 거할 자의 자격을 그렇게 서술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다름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함께할 자가 없으며, 그분께 제사 드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인간들이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입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함 받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 쪽으로 성도를 몰아가는 것이다.
시편 16:1-11절
시편을 읽으면서, 내 마음과 시인의 마음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의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도 주님을 의지하며 살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뻐 찬양을 할 때도 있지만,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전부 감사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부분적인 감사나 특별한 사건에 국한해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살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주님께 포로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8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절) 등의 구절을 보면 다윗의 삶은 온통 여호와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1절 말씀에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보통의 경우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돈을 의지하게 되고, 권력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기타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세상 그 무엇을 피난처로 여기지 않고 오직 ‘주께 피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이 4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언제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기에 세상의 것들이 모자라고 없어서 불평하고 원망할 이유는 사라질 것이다. 또 여호와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감사요 기쁨이며 찬양의 이유가 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절)라는 구절은, 바로 이런 시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자의 지파에 따라 하나님이 나눠주신 기업이 있는데 이것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누가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각자의 분깃이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의 땅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고 남의 땅을 폄하할 필요도 없다. 즉 내 기업과 다른 이의 기업을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이 땅에 보내진 우리들에게 주님은 홀로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시고 그 전리품을 자기 백성에게 나눠 주셨는데 이것이 각자가 받은 기업이기에 그저 감사와 감격만이 있을 뿐이다.
그 기업을 보면서 시인은 주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다. 땅이 얼마나 기른 진 곳인지, 그들이 살기에 얼마나 넓은 지역인지 이런 조건을 따져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감격할 일인 것이다.
성도라면 누구나 다윗과 같은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이다. 따라서 당연히 다윗과 같은 찬양을 마땅히 드려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일들이 실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기에 어설프게 남과 비교하는 멍청한 짓을 버리고 내게 주신 분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감사로 표출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아무리 고맙고 감사한 생각이 들어도 내 마음이 감사가 아니라 불평이 나온다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배워서 탄생하지 않는다. 성령이 성도를 탄생시킨다. 죄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감사하게 하시고 찬양토록 이끄신다. 이렇게 성령에 사로잡인 성도는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8절)라는 구절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움직여 가심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의 이끄심 속에 놓여 있는 자는 세상 풍파에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8절)라는 고백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악한 마귀가 온갖 유혹으로 다가와도 성도를 이길 수 없다. 그 이유를 9-10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성도는 주를 찬양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만약 주를 찬양할 수 없다면 이는 성도라 할 수 없다. 다윗처럼 어떤 순간에도 주를 향한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올 때 이것은 성도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찬양하는 성도를 보면서 자기 백성으로 찬양토록 하신 그분의 솜씨를 또한 찬양할 일이다.
시편 17:1-15절
악한 원수들이 까닭 없이 다윗을 에워싸고 넘어뜨리려 하는 상황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여호와는 성도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시며, 자기 백성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자신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위기, 곤경, 낭패를 당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 땅에 살면서 이런 것들을 피할 재간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다윗의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분께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 살아가는가? 본 시편은 이런 물음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여호와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께 피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여호와를 바라며 그분의 뜻을 찾기 보다는 당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 누명을 벗고자 한다. 그것이 세상 법정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정당함을 보증해 줄 사람인 경우도 있고, 때로는 돈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세상만사가 그분의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고백하면서 세상의 방법과 인간의 재주로 만사를 해결하려 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의 유익과 만족만 추구하는가? 이것이 바로 창조주 중심의 삶이 아니라 피조물인 내가 주인 된 전도된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것이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9절)는 하나님께서 발생시키신다. 이런 원수의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주의 기이한 인자하심과 권능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심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기에서의 탈출, 죽음에서의 구원, 사망에서의 부활은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결과로 주어진 크나큰 선물이다. 이 귀한 선물을 소중히 여기라고 주님은 때때로 성도들에게 두려운 대적을 만나게 하시고, 극한 곤경에 처하게도 하신다.
이런 원수들의 권세는 참으로 놀랍다. 도무지 우리의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마치 젊은 사자가 은밀한 곳에 숨어 먹이를 포획하는 것과 같고, 그 움킨 것을 찢으려는 맹수와 같다. 이들의 힘 앞에 우리는 어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다윗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를 찾고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13절)라고. 이것이 바로 성도가 주께 피하는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성도를 대적하는 인생들은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세상 것들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간다. 물질의 풍족함과 자녀들의 번성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있다. 다음 그 다음세대까지 세상 것들을 상속해 주면서 그것이 전부인 냥 여긴다.
그러나 성도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면서 그분 얼굴 뵐 것을 기대하며 산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라”(15절)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다 얻어야 만족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하늘의 것으로만 만족을 누린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는 말씀이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핍박과 고난이 없는 성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롬8:18)는 경미한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으로 말미암아 낙심하고 좌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고난 후에 있을 영광을 고대하며 기뻐한다.
풍랑과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위에 성도는 서 있다. 풍랑을 피할 수도 없고 파도를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성도이다. 풍랑 없이 살아가는 자가 평안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풍랑 속에서 주를 바라보는 자가 평안을 누린다.
시편 18:1-24절
본 시편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의 위협으로부터 지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었기에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 드리는 것이다.
다윗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호와는 어떤 분이었을까? 그는 오랜 세월동안 전투에 나가 싸운 군인이었기에 군인의 안목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데, 여호와를 향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 나의 산성이시로다”(2절)라고 했다. 이런 표현 하나하나가 너무도 적절한 주님의 지키심과 보살핌이 잘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서술하면서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4,5절)고 했다. 여기에서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음부의 줄, 사망의 올무’ 이런 표현들을 통해 자신이 원수 앞에서 생명이 위태로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자기 백성을 외면치 않으시고 지키시는 여호와는 참으로 권능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다. 자기 백성이 억울하게 고통당하면서 부르짖는 소리에 분노하시면서 그 원수를 진멸하시는 여호와의 모습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화를 내시니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요동했으며, 입에서 불이 나와 사르고, 뇌성과 번개를 발하시고, 세상의 터가 드러남’이 되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정말 여호와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윗의 주를 향한 사랑은 어느 누구보다 깊고 높다. 이것은 다윗이 다른 사람보다 감성이 풍부해서라거나 인정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구출하신 여호와의 능력을 목격했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원수들을 가볍게 꺾으신 주님의 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았기에 자신 또한 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즉 사랑의 원인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닮았고 진실된 것이었다.
잘못 생각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무조건 내 편이 되셔서 나를 지키신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큰 착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을 지키시고 보살피신 것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에 처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무조건 다윗 편이어서 그를 대항하는 자를 물리치신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뜻을 외면했을 때는 하나님이 다윗을 적으로 간주해서 채찍질 하신 것을 보면 안다. 예를 들면,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취해 낳은 아이를 죽이셨다거나(삼하12장 참조), 인구조사로 이스라엘 백성이 3일 동안 온역으로 7만 명이 죽어간 사건(삼하24장 참조)을 보면 잘 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지 어떤 개인을 위해 움직이지 않으신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복하는 자로 살아야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분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안전하다는 식의 발상은 신앙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잘못된 사고에 젖어 이것이 마치 대단한 믿음인 냥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것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름의 우상을 섬기는 꼴이다. 이런 모습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라고 하면서 춤추고 놀았고, 또 법궤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법궤를 적들에게 빼앗기고 전쟁에서 무참히 패한 역사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착각으로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다윗의 고백으로 비쳐지는 여호와는 철저히 자기 뜻을 실행시키시는 분이다. 자기백성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실 때 악한 원수들이 이를 막고 저지하려 할 때 그냥 넘기시는 경우는 없다. 크게 진노하시고 원수를 진멸하셔서 끝까지 자기 뜻을 성취시키는 여호와다.
성도는 이런 사실을 알고 여호와의 뜻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 뜻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이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 때 원수의 핍박과 위협이 따른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원수를 여호와께서 친히 물리쳐 최후 승리를 쟁취하시기에 그 주님을 믿고 찬양하자.
시편 18:25-50절
50절로 구성된 본 시편은 전반부(24절까지)와 후반부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다윗을 한없이 낮추셔서 연약한 가운데서 지키시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이었다면, 후반부인 25절 이후에 서술되는 하나님은 다윗을 강성하게 하시고 높이셔서 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런 폭넓고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든 상황을 내 중심으로 놓고 내가 편리한 쪽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을 바라면서, 나를 강하게 하셔서 세상을 호령하고 원수들이 내 발 앞에 복종하도록 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자기 백성 지키기는 아니다. 이와는 정 반대의 상황으로 몰아가실 경우도 있다. 한없이 낮추시고 연약해서 도무지 대응할 힘이 없고 그냥 원수에 의해 무참하게 당하기만 하는 경우 말이다.
설사 이런 환경이 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없다고 여겨서는 아니 된다. 이 때도 역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 이런 사실을 알 때 다윗처럼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주께 감사할 수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주를 향한 찬양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이 노래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본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를 나타내시고,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고,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는 낮추시는 분’(25-27절)이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착하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도 우리를 착하고 선한 쪽으로 살려주신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온당하지 않다. 반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하며 살고, 사랑을 입었기에 사랑을 베풀며, 긍휼을 얻었기에 긍휼을 보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데, 이런 측면에서 그는 신실하신 분이다. 만약 주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분이라면 우리가 주를 믿는 것이 허무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30절)라는 표현이 바로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요, 실수나 실패가 없으며, 충족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다윗이 느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정미하다’는 묘사는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뜻인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확한 것이 하나님 말씀이며, 이렇게 틀림없는 약속 실현을 확인하면서 그 말씀이 한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원수도 상대하려고 하고, 내 앞에 닥치는 모든 문제를 풀려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힘을 필요로 하고 능력을 소유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모든 것의 해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내게 닥친 문제가 내 문제이기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숙제요, 내가 경험하는 세계가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주님이 당하시는 일임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고,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 풀려간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 성도는 놓여 있고, 이런 과정에서 고난과 핍박과 위험과 고통이 수반되지만 이런 일을 통해서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목격하게 되고, 그분의 능력을 찬양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된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절)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을 원수의 압제에서 구원해 내시는 분이기에 삶을 통해 이런 경험을 한 다윗은 매사에 주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다.
성도는 세상에서 평안과 쾌락을 목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고난이냐 평안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여호와의 주 되심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과 권세를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 삶의 이유이다. 다윗처럼 어떤 순간에서도, 그리고 어떤 형편에서도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느껴져야 하고 그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시편 19:1-14절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솜씨와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주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또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믿는 자는 성도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주의 영이 임한 성도의 눈에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으로 비쳐진다. 그러기에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하나님의 장엄하신 솜씨를 노래하게 되고(1절), 날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그분의 변치 않고 지속되는 약속을 감사하게 된다(2-4절).
이런 하나님의 한결같은 마음을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으며,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온 대지를 비출 때 그 온기를 피하여 숨을 자 없듯이(6절)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과 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모두가 감사할 수는 없는 것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인데 이들 외에는 이 땅에 펼쳐져 있는 그분의 솜씨와 약속이행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아간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늘에 떠 있는 천체들도, 숲 속의 동.식물들도, 그리고 인간들 역시 이런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우연한 일이 아니며, 오늘 내리는 비가 이유 없이 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이려하는 적들 또한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 일으키셨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알고 믿었기에 순간순간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고 그분의 뜻을 보았기에 범사에 감사가 터져 나온다.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하신 대로 이루시는 그분의 신실하심을 맛보지 못한 자는 도무지 감사와 찬양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거저 물질이 주는 육신의 쾌락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전능자의 영광이나 약속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 사람들을 보라! 과연 그들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가? 누구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는 없다. 나의 영광, 나의 만족,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이 목적이요 이유가 되어 행동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성도는 다르다. 은혜를 입고 사랑을 받은 성도는 늘 주님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세상만사가 그분의 말씀대로 진행됨을 믿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7-8절)
영혼을 소성케 하는 말씀,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는 말씀,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는 말씀이기에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한다. 이 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에다.
말씀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의 존귀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돈을 사랑하게 되고, 육신의 쾌락에 탐닉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맛을 들인 자는 그 말씀이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10절)는 고백을 서슴지 않는다.
다윗의 이런 시적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과거 세상 사람들이 값진 것이라고 자랑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들을 가진 자였다. 가문도 최고였고, 학벌도 최고였고, 모든 이들로부터 최고로 존경받은 삶을 살았던 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배설물”로 여긴다(빌3:8)고 했다.
솔로몬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남겼다(전1:2). 왕이라는 직위, 많은 학식, 부와 명예 그 무엇도 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주의 영이 임한 자에게만 이런 깨달음이 주어진다. 나를 큰 죄과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님의 은총을 아는 자는 주의 영이 임한 자이며 이런 자만이 다윗같은 찬양을 드릴 수 있고, 세상 것보다 주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시편 20:1-9절
고대의 전쟁에서는 왕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장군들과 병사들이 따라가는 대열을 취했는데, 본 시편은 전장으로 나아가는 왕과 병사들을 위해 백성들이 먼저 기도하고 있고(1-5절), 그리고 연이어 왕이 기도(6-9절)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온 백성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기를 간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바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승리에 대한 확신에 찬 기도였다.
“환란 날”은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1절)라는 구절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선택 받은 민족이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늘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살피신다는 뜻이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2절) 라는 구절이나,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32절)는 말씀은, 자기 백성들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려고 짐승을 번제로 드려 대신 죽게 하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드리는 간구이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볼 때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에 이 일을 상기시키면서 전장으로 나아가는 왕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막연히 자신들을 편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면 이는 허망한 기도가 되고 말 것이다. 무조건 내가 잘 되어야 하고, 평안해야 하고, 고통이 없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짓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기도하면서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위해 그 백성을 승리로 인도하시고 번제의 희생을 근거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용서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는 자라면 당연히 그 믿음에 의한 간구는 승리의 또 다른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5절)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투는 반드시 여호와의 이름이 승리하고 그 승리를 감사하며 깃발을 펄럭일 것이란 확신을 담고 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한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면서 전투에 임하는 왕의 마음은 얼마나 든든했을까? 다윗 왕은 백성들의 기도에 화답하는 차원에서 더욱 확신에 찬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6절) 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신을 적들에게 패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적들은 병거와 말을 앞세워 전투에서 승리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확신을 8절에서 보여주고 있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여기에서 두드러진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지 않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이루려 한다. 그래서 전쟁을 치를 때는 당연히 많은 무기와 병력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신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관자란 사실을 믿기에 자신들의 힘과 지혜가 아닌 여호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다.
구약에 나타나는 모든 전쟁들은 전부가 무기와 여호와의 이름이 싸운 전투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결코 그들이 무기를 앞세워 애굽을 이긴 것이 아니었다. 어린양의 피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였고, 홍해바다의 물이 애굽 병사를 몰살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에도 무기가 아닌 횃불과 나팔을 들고 나가 승리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 골리앗 장군을 물리칠 때에도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나간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치르는 전쟁이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기에 전투에 앞서 하나님께 승리를 확신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성도의 주인은 여호와시다. 세상의 주권자도 여호와시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 계획대로 이끄시고 성취하시는 분이다. 이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는 본 시편처럼 환란 날에도 불안과 공포로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