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류락진 선생 장례, 민족통일장으로 치르기로
지난 1일밤 별세한 고 류락진 선생에 대한 장례가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진다.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 장례위원회는 2일 오후
유족대표와 통일광장, 범민련, 광주전남민중연대 등 지역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장례위원회 구성을 위한 모임을 갖고 고 류락진 선생에 대한 장례를
고인이 평소 조국통일과 민족 화합에 힘써온 행적을 기려 '통일애국열사 고 류락진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어
장례위원회는 오는 5일 오전 광주 동구 장동 범민련 사무실 앞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락공원을 거쳐 경기도 파주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이 영면해있는
보광사 장지로 향할 예정이다.
장례위원회는 또 범민련 남측본부와 광주전남연합, 광주전남통일연대, 광주전남민중연대소속 원로들을
고문으로, 소속 단체 대표들은 장례위원을 맡기로 했다. 또 장례위원장에 이규제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홍번 범민련 광주전남연합 의장, 임방규
통일광장 대표로, 호상에는 양심수 출신 기세문 선생과 광주전남통일연대 이명한 상임공동대표가, 집행위원장에는 박상춘 범민련 광주전남연합 사무국장이
각각 맡기로 했다.
한편 이날 새벽 선생과 함께 '구국전위'사건으로 함께 복역했던 안재구 선생이 다녀갔고 하루 전 타계한 고
윤영규 선생 장례위원을 맡은 정희곤 전교조 광주지부장과 고 윤 선생의 유가족이 빈소를 찾아 서로를 위로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이날
오후에는 전 백양사 주지이자 류선생과 함께 재야 운동을 이끌었던 지선스님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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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락진 선생에게 보내온 화환들
ⓒ안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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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락진 선생의 별세를 추도하는 단체들이
보내온 화환 ⓒ안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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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16시 20분...통일운동 동료들 "할일 다하지 못하고 떠난 것이 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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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류락진 선생
빈소ⓒ안형수 |
| 어제밤 별세한 류락진 선생의 빈소에는 침통함과 고인에
대한 아쉬움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 새벽부터 광주 북구 용봉동 현대병원 빈소에는 과거 통일운동을 함께 했던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통일광장 회원으로 기세문, 권낙기, 임방규, 안희숙, 변숙현, 박길한, 김해석, 안학섭, 문상봉, 서순정, 윤성남,
김영승 선생등이 어제 새벽 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와 분향했다.
기세문 선생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우리가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몇십번이나 넘겼는데 이제 편한 맘을 가져라고 했다"며 "예전같으면 말을 하지 못했을 텐데 왠지 그냥 류선생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옥중생활 중 공안당국의 전향공작으로 류선생과 함께 고생했던 안학섭 선생도 "0.75평에 10명을 한꺼번에 넣어놓고 한
사람씩 꺼내 전향서를 작성하라고 고문하던 시절이 생각난다"며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훌쩍 갈 줄은 몰랐다"고 비통해
했다.
한국전쟁당시 지리산에서 인연을 맺어 평생을 함께 해온 류선생의 미망인 신애덕 여사는 "생전에 해야 할일들이 많았는데 못하고
가서 너무 한스럽다"며 울먹였다.
현재 유족, 광주전남통일연대, 범민련 인사들은 장례위원회 구성을 위한 모임을 갖고 장례절차와
일정등에 대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류락진(柳洛鎭.만 77세.광주 북 매곡동) 선생 연보
1928년 8월 26일(양력 10월 9일):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에서 출생 1933년: 부모 따라 일본땅으로 이주
일본에서 소학교(8년제), 사범학교(5년제) 수학 1946년 2월경: 귀국(고향인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 정착)
1950년 5월: 국민대학 수학 1950년 9월 28일 유엔군 9.28 서울 수복되자 입산(전북 순창 회문산 등지)
1952년 3월 : 지리산에서 체포, 광주 포로수용소(현 전남대 병원 인근 철길가)에 투옥. 1952년 3월 30일: 비상사태하의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피검(군법재판소에서 사형선고) 1952년 10월경: 민간 재판소로 이양돼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 선고 1957년
10월 3일: 비전향 만기출소 1957년 : 신애덕씨와 결혼. 1958년 ~ 1963년 건축공사 현장에서 근무 (1964년 2급
건축기사 자격취득) 1963년 말 ~ 1971년 3월 : 전라남도 보성군 예당중.고등학교 교사로 8년 근무 19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선고 1971년 3월: 통혁당 재건사건(호남 총책)으로 피검(서울지법에서 사형선고)
1972년: 서울고법에서 무기선고 1972년: 대법원에서 무기확정 1972년~1989년: 5월까지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1980년 5월 27일 동생(류영선)이 시민군으로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총을 맞아 사망, 본인은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원임. 1989년: 전주교도소로 이감 1990년 2월: 20년 복역후 감형 출소(보안관찰 대상자 처분) 1994년 7월:
구국전위사건으로 구속(서울 지법에서 무기선고, 서울고법에서 8년선고. 대법원 상고포기 형 확정) 1999년 8월 15일:
8.15특별사면으로 비전향 출소(현재까지 보안관찰자 처분) 2002년 5월 30일: 광주지법, 백운산지구 빨치산 위령비 비문 작성 사유로
불구속 입건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선고(국가보안법 7조 위반)) 2001-2003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2000년-현재 통일광장 회원 2005년 4월 1일 23시 45분 향년 78세로 영면.
수상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미협)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서협) 광주시미술대전 특선 3회, 입선 7회
광주시 미술대전, 추천작가 전라남도 미술대전 특선 3회, 입선 7회 전라남도미술대전 추천작가 전국무등미술대전 입,
특선 8회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회원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회원 |
[1신]...2005년 4월 2일 10시 30분 통일운동가 류락진 선생 별세...1일 밤 지병 악화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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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운동가 고 류락진 선생 영정
ⓒ안형수 |
| 통일운동가이자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할아버지로 알려진
류락진 선생이 1일 밤 11시 40분에 별세했다.
류 선생은 오랜 복역생활로 허리가 좋지 않아 2년전 허리수술을 받았으며 이
후유증으로 지난해 광주 서구 상무지구 우리병원에 한달정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뒤 큰아들 진우씨 집에서
요양해왔다.
그러던중 2주전부터 기력이 쇠해지고 건강이 악화돼 광주 북구 용봉동 소재 현대병원에 입원했으며 진찰 결과 폐부위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틀 전 상태가 악화돼 이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가 어제밤 별세했다. 향년
78세
류선생은 평소에도 오랜 복역생활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호흡이 곤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류 선생은 박정희
정권시절 전남 보성 예당중학교 교사로 재직중 1971년 ‘통혁당 재건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1968년 8월 24일 박정희 정권 최대 조직사건인 '통일 혁명당' 사건이 밝혀지고 이후 1979년까지 전국 10개 조직을 적발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1년 5월 14일 류선생을 포함 11명이 북한지령으로 조선노동당 호남지부구성 및 시도단위 지하당조직 건설과 공장,
탄광에 핵심조직, 혁신계정당 침투로 적화통일, 혁명이론을 유도했다는 혐의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국가기관에 의한 고문과 사건
조작의혹이 있다는 주장이 일면서 참여정부 '국가기관 과거사위원회' 조사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통혁당 재건사건으로 구속된
류선생은 1988년 노태우 정권에 의해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90년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19년만에 가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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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가 생전의 류락진 선생. 류 선생
왼쪽부터 기세문, 서옥렬 그리고 오른쪽으로 권오헌, 박창수 선생.2004년 5월 ⓒ시민의소리자료사진 |
| 그러나 1994년 다시 ‘구국전위(救國前衛)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이 사건은 수학박사로 미적분학의 권위자이던 안재구(당시 경희대 강사)씨가 총책으로, 류선생은 호남책으로
조선노동당의 남조선 지하당인 ‘구국전위’를 구성하고, 남한 내의 동향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는 안기부의 혐의 발표가 있었으나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주장이 제기돼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시절 이 지역 재야 인사들이 ‘류락진 선생
석방추진위원회’를 통해 양심수로서 최고령인데다가 형기의 절반이상 복역(8년이상)했으며 5.18유가족인점을 들어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자 당시 민주노총 금속연맹 단병호의장과 함께 사상전향제의 후신인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기도 했다. 류선생은 1999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뒤 감옥생활에서 배운 서예로 후학을 지도해 왔다.
류선생의 동생 영선(당시 28세)씨는 전남대 화학과 재학중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부근에서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유가족으로는 한국전쟁당시 지리산에서 만나 결혼했던 미망인 신애덕(74)여사, 아들 류진우, 류식, 딸 류소영, 류선영, 며느리 김명희,
정정님, 사위 채명수, 문홍근씨가 있다. 발인은 5일 오전 8시이며, 빈소는 광주시 북구 용봉동 소재 현대병원.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소재 보광사. 현대병원 062)570-0402 |
첫댓글 한마디로 지 ㄹ ㅏ ㄹ 들하고 자빠젓다.. 빨치산빨갱이..적화통일꿈꾸던 저 민족반역자 김일성에게 충성한자를 .. 저들은 정신이 온전한 자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