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31대 왕으로서 의자(義慈)는 휘(諱;임금의 이름)로서, 그는 왕의 시호가 없다. 무왕(;재위600-641년)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다. 641년 3월 무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또한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의자왕의 업적과 자취 보기..
642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왕이 각 주와 군을 돌아보며 죽을 죄를 지은 죄수 외에는 모두 풀어 주었다 . 그리고 7월에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8월에는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지방에 나누어 살게 하는 한편,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치하하고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상으로 주었다.
643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에 왕은 고구려와 화친(和親)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공격하니 신라 왕 덕만(德曼)[선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644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은 사농승(司農承)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니 왕은 표를 받들어 사례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9월에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 5월에 왕은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는 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쳐들어 왔다.
647년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步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648년 3월에 의직(義直)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649년 8월, 왕이 좌장군 은상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 등 7성을 쳐서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백제군을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흩어진 군사를 모아 도살성 아래에 머물러 다시 싸웠다.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11월에 우뢰가 치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651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 『해동(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犬牙].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해 하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하자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脣齒]과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으로 어찌 위기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廢)하게 되여 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게 된 것과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머무는 것[進止]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록[決戰]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것이며,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652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53년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655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5월에 붉은 색의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울면서 법당[佛宇]을 돌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7월에 마천성(馬川城)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655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5월에 붉은 색의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울면서 법당[佛宇]을 돌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7월에 마천성(馬川城)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656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時]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백제의 멸망 과정 보기..
657년 정월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4월에 크게 가물어 농작물이 말라죽었다[赤地].
659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의 두 성을 쳤다. 5월에 서울[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 회화나무의 줄임말로서, 콩과의낙엽교목임]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660 년 2월, 왕도의 우물물이 핓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이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4월에는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또 왕도의 사람들이 까닭없이놀라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달아나다가 엎어져 죽는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재물을 잃는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5월에 폭풍우가 불었다. 천왕사와 도양사 두 절의 탑에 벼락이 떨어지고,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공중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6월에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또한 야생의 사슴[野鹿]과 같은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泗河) 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왕도의 모든 개들이 길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더니 조금 있다가 흩어졌다. 어느 날은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 보게 했더니 한 마리의 거북이 나왔다. 그 등에는 '백제는 보름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했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巫]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國家]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일까 합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660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백제를] 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당나라[大國]의 후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달솔(達率;2품)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角之勢]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對陣]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方舟]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幷馬]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伯)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會戰]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步騎]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성(都城)으로 나아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蘇定方)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京師]로 보냈다. 나라는 본래 5부(部)·37군(郡)·200성(城)·76만호(萬戶)가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령하여 서울[都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고종(高宗)[上]이 꾸짖고는 용서하였다. 왕이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상례(喪禮)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하였다. 융(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하였다. 왕문도(王文道)가 바다를 건너다가 죽자 유인궤(劉仁軌)로 대신하게 하였다.
<두산 대 백과사전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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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백자 마지막 왕 의자왕의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많은 의문점이 남는다.육로와 수로를 동시에 공격 당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수비한 굿강한 군사력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쉽게 무너진 점이랑 백제의 영토의 크기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우리나라의 사대주의 사학으로 말이 암아 아쉬운 점을 남기는 백제의 마지막이 아닐 수 없다.
백제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의장왕인데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나 몰라라 했을까?아닐 거이다. 이건 필시 나중에 백제멸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나당 연합의 계책이 담겨져 있어서 오랬동안 구전되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백제를 다스릴 동안은 그런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내 팽계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당으로 끌려간 이후에 그런 행동을 보이고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하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된다.
아마도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서의 마지막 생활에 관한 내용이 와전되고 겹쳐져서 주색에 빠진 군왕으로 후세에 전달이 되는 것 같다.해동증자라는 그의 별칭에 걸맞이 않은 행동을 할 만큼 사리분별력이 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아마도 귀족세력들의 음모와 계략으로 참 정치를 펼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백제의 영토를 일본에서 동남아까지로 보는 시각이 있다.아직 정설로 받아들여 지지 않지만 연구와 노력이 더 해진다면 어느정도 밝혀 질 것이다.그렇게 된다면 백제 의자왕에게 따라다니는 오명도 벗겨 질 것이다.백제 의자왕 아래에는 성충,계백,흑치상지등 뛰어난 문,무관들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다만 이들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음로로 그 빛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 백제의 마지막을 물들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첫댓글 일본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지라... 일본 서기에 보면 백제가 멸망할때 '조정의 신료들이 이제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며 서쪽을 향해 대성통곡을 했다"는 구절(이게 정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책에서 본 적도 있고.. 뭐 내부적인 문제(귀족들의 반목등등)과 외부적인 문제(고구려의 지원 X, 왜의 늦은 지원)가 결합되서 망했겠죠... 김유신장군이 5만을 투입하고 계백장군이 5천을 투입한 상황에서(이 당시의 병사는 대부분 사병이라고 하더군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백제 귀족들은 뭐했는지도 궁금하고... 하여간 백제의 멸망은 좀 의문시 되는 점이 많음;
일본서기에 대한 우리 사학자의 견해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입니다.. 일본서기의 난점이 그것인데.. 아무래도 일본서기의 편찬 저의가 좀 의도적이라 찬양적인 면이 많이 들어가있지요.. 그래서 일본서기의 내용으로 우리 역사를 뒷받침할 근거로 만들기도 하지만 반면에 우리 역사에 해가 될 내용도 많기 때문에 많이 걸러서 인용하고 있지요
엘리자벳님 일본서기에 대한 우리사학자의 견해에 대해서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어느 대학 어떤 교수가 일본서기를 그런 식으로 다뤘는지...사학계 어떤 학자가 그랬는지...
소위 사대주의 사학이니, 축소사관이니 왜 이런 말이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역사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단시간에 축소왜곡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남아에 있던 백제유적을 태평양전쟁기간동안 일본이 몽땅 없애기라도 했다는건지.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라고 하지만, 단지 승자가 자기에게 좀 더 유리하게 기술한다는 거지 그렇다고 패자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자왕이 초반에 의욕적인 통치를 보였지만 성왕의 패전이래 백제의 상황은 사실 많이 기운 상태였습니다. 왕 혼자서 "잘해보겠다"고 한다고 갑자기 나라가 부흥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효종이 "북벌"을 외친다고 북벌이 될만큼 조선의 국력이 강성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백성들 삶만 더 어려워 졌습니다. 더구나 국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신라랑 전쟁을 거듭해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지만 국력은 더더욱 피폐해지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귀족들의 충성심도 떨어지죠. 적이 쳐들어오고 사비성이 포위당해 함락될때까지도 주요 귀족들은 왕을 구원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백제는 내부 분열의 모습을 보였고 그 책임은 당연히 의자왕에게 있죠.
백제의 의자왕이 귀족을 배제하고 자신의 친족, 왕자에게 권력을 배분한 영향이 매우크죠..
왠지 우리 사회에는 우리 역사는 왜곡되어 있다, 라는 근거없는 피해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천년전에 동남아부터 중국대륙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가지는지 의문...(필리핀인과 한국인간의 인종적 유전적 관계라도 조사해보고 하는 말인지.. 심지어 불가리아인이 한국인과 동족이라고 하는 인간까지 있으니..)
그분들은 특별한 분입니다. 신경안쓰셔도 되요;
근거없는 피해의식이 아닙니다 광개토대왕릉비도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최초 발견자는 일본군 만주지역 소령이죠.. 이름은 기억안나지만.. 그리고 다른 부분보다 더욱 훼손되어 있는 부분도 있구요.. 중국의 동북공정은 두말하면 입아프죠..
광개토대왕릉비가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것과 백제가 동남아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일본 일부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 근거로서 광개토대왕릉비를 멋대로 왜곡해석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이고 우리 국사책에 그들의 헛소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란 간단하게 왜곡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일본은 만주침략의 명분으로서 우리 역사와 만주의 연관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축소왜곡을 했다는 것은 단지 일본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랬을것, 라는 편견일뿐입니다.
의자왕이 폭군이라는건 신라에 의한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백제가 그렇게 강성했다가 순식간에 신라에게 개털린 이유는 오랜기간의 귀족과 왕의 주도권 다툼이 컷다고 생각합니다.
주도권 다툼을 정리하지 않고 러쉬치러 다녔다는 건 왕의 실책 아닌가요?
외국과의 분쟁을 통해 일시적인 내부의 단합을 유도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도 자주 써 먹으면 약발이 다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일시적인 단합을 이루어내었다 하여도 그것은 사상누각과도 같은지라 다른 정책을 통해서 뒷받침해 단단하게 결속시켜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죠. 어쩌면 의자왕은 그렇게 만들어진 일시적인 단합을 완전한 복종으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요?? 어쨌든, 내부 단결을 위해 분쟁을 일으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후속조치를 취할 정치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외국에게 털리는 거면 몰라도, 외국을 털러 가는 것이 그렇게까지 내부 세력 단합에 좋은 거 같진 않습니다만.
의자왕이 막장이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하지 않지만, 일단 지도자로 합격점을 주기 어렵습니다. 전쟁을 할 시점이 있고, 내치를 할 시점이 있는데, 내부를 반드시 평화롭게 해야할 필요가 있던 시점에서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면, 승리하더라도 결국엔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자왕이 주색잡기에 놀아나는 패주가 아니었더라도, 국력면에서 비슷한 신라와 당나라에게 털렸다는 건 분명히 의자왕의 외교상의 실책입니다.
이분의 정력은 하늘을 찌릅니다. 아들도 많아요
정력이 하늘을 찔렀더라도 일개 촌부였다면..... 한 분만 좋았겠죠... 아니면 맞아죽었던가;
무슨 근거로 사대주의 사학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근거로 백제 영토가 동남아까지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까지 역사연구하신 분들은 전부다 멋모르고 그냥 주절거리는 바보천치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제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제가 바보라서 그런가요? 저런 말 하는 사람들이 바보로 보이는건?
바보라기 보단 노력을 안하죠.... 조금만 발품팔고 논문 뒤지고.. 교수님께 자문구하면 상당부분 의문이 풀리는데..
전 사대주의 사학이니 반도사관이니 하는 말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현대 재야사학의 근본을 마련한건 황해도 군수 문정창과 같은 친일파 출신임에도, 광복 초 일제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에 최전선에서 반박하던 (물론 문제점도 많았지만 -_-) 이병도씨가 왜 이완용급 매국노로 평가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상으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빛보다 빨리 가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빛보다 빨리 가면 된다는 걸 만들면 되지?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만드는지, 왜 만들 수 없는지, 어떻게해서 이렇게 되는건지는 모릅니다. 그저 머릿속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채 망상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보고 바보다, 라고 단 3명만 말해도 그 사람은 진짜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 세상이죠. 문정창이 자신의 잘못을 회계하기 위해 자랑스런 재야사학을 창시했다, 따위의 개소리가 바이블로 나오더군요.
깜빡이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합니다...'있을거야'라고 가설은 누구나 세울 수 있습니다...그 가설을 입증하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겠죠...즉, 이랬을 것이다...라는 추측은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그리고 깜빡님도 말씀하셨지만...'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에 너무 큰 환상을 가진 분들이 많은데...아무리 승자라도 역사를 아주 바꾸지는 못합니다...기본적으로 있는 얘기에서 시작되지 없는 얘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만들어도 후세가 바보가 아닌이상 바로 잡히는 것이 역사입니다...
만일 한국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면? 정당한 사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바로잡으면 그만입니다...애당초 역사란 정답이 없는 학문입니다...누가 더 설득력 있는 근거로 논리적인 가설을 세우냐...의 문제겠죠...그리고 자꾸 강단사학, 한국의 사학계 어쩌고 하는데...막연히 썩었다 썩었다...한국사학계는 이렇더라...라는 추측과 카더라 통신말고 어떤 교수가 어떤 식으로 논문을 썼더라...라고 딱 가져오시길 바랍니다...물론 가져오는 논문은 다 읽어봤어야 겠죠...
동북공정을 바로잡아주세요~우실하 교수의 요하문명론을 추천드리죠 참고로 두번 정독했구요 저는 사서 봤지만 조금 큰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에 아마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