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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샘마을에도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상장마을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2그루인데, 현재의 마을회관 앞에는 장정 5명이 팔을 둘러도 모자를 만큼의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의 와중에 불타 없어졌는데 무려 한 달을 탔다고 한다.
그 느티나무가 얼마나 큰 나무였는지 실감하게 해주는 이야기다.
또 그 느티나무 가지위에서 사람이 잠을 자기도 했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고 말했다.
월앙마을에서 상장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벚나무 서낭이 있었다고 하고, 상장마을의 길가에는 지금도 참나무 서낭이 있었다.
다만 도로 공사로 인하여 고개가 낮아지면서 서낭나무는 사람들의 접근이 어렵게 되어있어 예전처럼 돌을 던지고 떡을 가져다 놓고 고사를 지내는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70세 이상 된 노인들은 상장마을에서 예전에 산제사를 지냈었다는 옛날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70세 이상 된 주민들도 실제로 산제사를 지내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다만 지금은 조그마한 암자가 들어선 곳에 예전에 산제당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이 암자는 예전에 봉무암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비봉암이라고 불린다.
이 비봉암이 있는 산이 죽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비봉산인데 마을에서는 지통산이라고도 불렀다.
이 지통산에는 다양한 이름을 가진 바위들이 있는데 여자의 치마처럼 생겼다는 치마바위(옹녀가 치마를 너는 모습이라고도 했다.),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소머리 바위, 자동차처럼 네모지게 생긴 자동차 바위, 장수가 쌓았을 거라는 장수바위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치마바위가 있는 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나가는 길이 없어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곳이라고 해서 ‘피난골’이라고 불리는데 이곳에는 장수가 앉았던 모양의 자리와 장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했다.
또 해가 넘어갈 무렵 치마바위에 귀를 대고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고 했으며 이 인근에 명당자리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지통사와 비봉산(지통산)에서 발견된 유물-정병(淨甁)
마을사람들은 비봉산에는 3개의 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중 하나가 물탕골(약수터) 근처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많은 기와가 있었고 특히 고려시대에도 굉장히 귀했던 것으로 알려진 ‘청기와’도 발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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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기와를 발견했던 상장마을 조규호(1945년생) 전 삼죽면 이장단 협의회장. |
이 청기와는 삼죽면 이장단 협의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조규호(1945년생)씨가 발견해서 보관했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청기와가 발견된 절터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지통사(智通寺)’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입증되는데 우선 지명과 관련해서이다.
마을의 지명이 지통말인데 지통말이라는 유래와 관련해서 『안성군지』(1990년)의 자료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가 대체로 비슷했다.
마을사람들은 종이를 만들었다고 해서 종이 지(紙)를 써서 지통말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와 마을에 있는 산에 지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지통말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산 이름을 마을사람들은 지통산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옛 문헌의 기록이다.
『경기도불적자료집』(1999년)에 의하면 지통사(智通寺)에 대한 옛 문헌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梵宇攷)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두 기록 모두에 지통사는 죽산의 비봉산(飛鳳山)에 있다고 했다.
또한 1530년(중종 25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단지 비봉산에 있다고만 되어 있으나 1779년(정조 3년)에 간행된 범우고에는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표현되어있어 16세기까지는 존속했다가 18세기 말엽에는 폐사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지통사는 신라시대에 지통대사라는 분이 있던 사찰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정황은 이번 마을 탐방을 통해 불과 3개월 전인 10월초쯤에 내장리의 비봉산에서 문화재가 출토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비봉산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정병(왼쪽)과 국보로 지정된 정병(문화재청 자료 사진).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터를 닦는 과정에서 작업을 했던 중장비 기사가 발견했다는 유물 몇 점이 그것인데 그 중 하나가 ‘정병(淨甁)’이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정병’이 출토된 곳은 무덤자리로 추정되는데 묘를 둘러쌌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병’은 불교에서 ‘모든 악을 씻어 버리는 의식에서 사용하던 용기’라고 하는데 기자가 확인한 ‘정병’은 그 모양과 크기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정병과 흡사했다.
▲ 정병이 출토된 곳을 설명하는 상장마을 김수영(1939년생) 안성문화원 감사.
따라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비봉산에서 출토된 정병 역시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알밴 가재를 잡아서 끓인 국 맛이 일품
내장리 마을 노인들은 만난 사람 모두가 어린 시절 ‘거북놀이’를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특히 월앙마을에서 만난 이승호 노인회장은 거북놀이 과정을 실감나게 이야기 했다.
거북놀이를 하면서 ‘난장아 난장아 놀아라, 거북아 거북아 놀아라’하는 노래도 불렀고, ‘거북이가 배고파 죽었습니다’하는 재담을 하면 떡이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승호씨가 군대에 있을 때 충남 성환에서 시집왔다는 이병순씨는 겨울에 빨래를 하고 돌아오다.
너무 손이 시려워서 들고 있던 ‘놋대야’를 깨뜨린 적이 있다며 고생담을 이야기 했다.
겨울에 빨래하면서 고생한 이야기는 하장마을에서도 황길분, 이명호, 정희화씨 등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 마을 우물은 따뜻한 편이었는데도 겨울에 빨래를 하면 손등이 터져서 피가 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하면 믿지 않는다’며 웃었다.
▲ 이승기(1936년생) 전 삼죽면 이장단 협의회장이 웃샘골을 가리키고 있다.
삼죽면 이장단 협의회장을 지내기도 한 이승기씨는 농악은 하장마을이 제일이었다고 자랑하면서 마을회관에 직접 지은 마을 유래 글을 적어 놓았다며 자식들이 모두 잘되어 자신은 복인(福人)이라며 자랑했다.
하장마을에 살던 사람으로 원래 경비대 장교였다가 6.25가 터지면서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들어갔다가 월북한 사람의 동생이 월북한 형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는 사연도 마을사람에게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수업료도 받지 않고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했다는 상장마을의 최재정씨를 만나서는 할아버지가 보던 많은 책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 장수가 쌓았다는 장수바위 앞에 선 김수영(1939년생. 오른쪽), 최재정(1941년생).
상장마을의 김수영씨는 비봉산 자동차바위와 장군바위 인근의 계곡을 소개하면서 그곳에서 이른 봄에 잡은 알밴 가재와 마늘 잎, 고사리, 취나물, 돼지고기 등을 넣고 끓인 국이 일품이었다면서 지금은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그 밖에도 일제시대 말기 삼죽지소장의 별명이 늑대부장이었고, 긴 칼을 차고 다녔으며 사람을 잘 팼다는 증언도 들었다.
마을에서 기억하고 있는 출향인은 대법원 판사(재임기간 1982년 - 1987년)를 지낸 오성환(1934년생) 변호사였다.
그 형제와 후손 모두가 은행장이나 서울대 교수 등을 지낼 만큼 잘 된 집안이고, 오성환씨는 삼죽면사무소가 용월리로 옮겨왔을 때 삼죽면사무소 현판글씨를 써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 망월놀이를 했던 산을 설명하는 이승호(1934년생).
▣ 알차서 무거운 내장리 쌀
내장리의 논은 물이 풍부한 옥답이라 논농사가 잘되는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월앙마을에서는 구체적으로 쌀 한가마니가 다른 곳 쌀은 5되가 남는데 내장리 쌀은 속이 알차서 무거워 5되가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월앙마을의 자랑은 씨족사회라 위, 아래를 가리고 어른 공경할 줄 알고, 6.25 난리를 겪었어도 파리 한 마리 안 죽은 화목하고 단결이 잘되는 마을이라는 자랑을 들을 수 있었다.
마을 바램은 다른 곳처럼 복합영농을 해서 일거리가 늘어나서 인구유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들 울음소리도 듣고 마을이 활기가 넘쳐야 하는데 지금은 마을이 너무 조용하다는 이야기였다.
상장마을에서는 가족적인 분위기와 화목한 마을이라는 자랑을 들을 수 있었고 지통사와 마을 느티나무에 대한 자부심도 들을 수 있었다.
▲ 왼쪽부터 하장마을 황길분(1935년생), 이명호(1936년생), 정희화(1937년생).
하장마을에서는 근면하고 자주성 있고 협동심 있으며 다른 마을에 피해주지 않는다는 자랑을 들을 수 있고 마을 사람들의 쉼터인 고목나무(느티나무) 밑에 눈, 비 피할 수 있는 시설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들을 수 있었다.
첫댓글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