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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 아나키스트의 세상살이 원문보기 글쓴이: anarc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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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멸치를 먹어야 칼슘이 보충되나?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1) | ||||||
“채식은 이제 저에게 선택이 아닙니다.” 이렇게 과분한 지면이 허락됨을 감사히 여기며 이제부터 왜 필자에게 채식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 되었는지, 음식문화에서 채식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잘못 알고 있고 무엇을 더 알 필요가 있는지를 적어 보려 한다. 또한 우리 인간도 육식동물과 같이 동물을 잡아먹어야만 영양을 얻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오류를 지적하려고 한다. 아울러 한 사회에서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지도 함께 적어 보려 한다. 만약 앞으로 필자가 쓰는 글에서 조금이라도 용납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면 가차 없이 반박해 주시길. 모든 일이 그렇듯, 깨닫고 알게 되면서 스스로를 고쳐나가고 바꿔나가는 행위는 고립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진정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것임을 한 번 더 새겨 본다. 첫 번째로 필자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고민거리로 골라낸 것이 바로 ‘칼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항상 잠이 부족하기만 한 청소년 시절, 가방을 챙기고 식탁에 앉아 잘 넘어가지 않는 아침밥을 억지로 몇 술 떠서 넘길 때에 이내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한창 클 때에는 칼슘섭취가 잘 돼야 해! 그래야 뼈도 튼튼해지고 건강해지지. 멸치 좀 꼭꼭 씹어 먹어! 자, 여기 우유도 한 잔!” 아! 그렇지 않아도 막 일어난 터라 쓰고 텁텁한 입맛에 마른 멸치반찬을 억지로 꾸역꾸역 넘겨 먹어야 하다니. 또 이놈들은 얼마나 비린가! 그리고 저 우유는 등교 도중 늘 내 아랫배를 공격해 곧 설사란 놈을 불러올 것이 자명할진데. 아, 괴롭다! 어릴 적부터 한 번씩은 해봄직한 식사풍경이라고 말해도 될까? 뭐, 사실 필자는 외가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많아 아침을 맞닥뜨린 어머니와의 상황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경험이 될 수 없겠지만, 이렇게 똑같은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이와 비슷한 어떤 형태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을까? 칼슘과 멸치, 우유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귀가 따갑게 들어왔으리라. 칼슘하면 늘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 멸치와 우유다. 우유는 또한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나올 법하여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멸치라는 생선과 칼슘의 관계부터 짚어 보자. 글을 쓰는 도중 필자는 또 어릴 적 기억이 생각나 속이 불편해진다.
필자는 어른들 말씀을 그래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믿어온 아이였던 터라 ‘뼈가 튼튼해지려면 멸치를 많이 먹어야 한다’라는 한마디에 된장찌개 속 제일 밑바닥에 제 할일을 다하고 퍼져 누워 있는 멸치까지 야무지게 다 씹어 먹었다. 종종 가계의 절약을 위해 값싼 찌개용 멸치를 육수로 우려낸 날은 그놈이 어찌나 크던지 고등어새끼처럼 누워 있었다. 이놈은 살점들이 허물어져 허연 뼈까지 드러내 놓고 된장찌개 국물에 둥둥 떠 있었다. 필자는 그러한 녀석들까지도 뼈의 튼튼함을 목적으로 코를 막고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정말 싫은데 억지로 먹어야 할까’였다. 그렇다면 멸치에는 얼마나 많은 칼슘이 들어있는 것일까? 100g당 칼슘함유량은 다음과 같다. 큰 멸치 1905mg, 중간 멸치1290mg, 작은 멸치 902mg. 마른새우는 2300mg이나 된다. 이 정도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고리는 바로 동물성 칼슘과 식물성 칼슘의 체내 흡수율에 관한 점이다. 다시 말해, 동물성 칼슘 흡수는 몸을 산성화시켜 오히려 칼슘의 배출이 많아지게 된다. 아무리 많은 칼슘을 흡수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에 소개된 아래의 자료를 보자. 칼슘흡수율(미 임상영양학 저널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 방울양배추 63.8% 겨자잎 57.8% 브로콜리 52.6% 순무잎 51.6% 케일 50% 우유 32% 이번에는 채식가들이 즐기는 곡류에 들어있는 칼슘양과 위에서 소개한 달걀, 소고기, 멸치 등의 칼슘양과 비교해 보자. 칼슘양 비교(『전은자∙서민자의 영양급식과 조리』참조) 서리콩 224mg 흑태 220mg 노란콩 240mg 참깨 1245mg 들깨 351mg 고구마줄거리 1552mg 달걀 100mg 소고기 6mg 동아대학교에서 개최된 제7회 국제해초심포지엄에서 일본의 다나카 박사는 “멸치의 칼슘 체내 흡수율은 25%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미역, 다시마 같은 갈색해초류의 칼슘흡수율은 이보다 훨씬 더 높다”고 말했다. 또한 갈색해초류들은 몸속 오염된 독소를 배출하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도움 - 한울벗채식나라 운영자) 필자는 된장이나 여타 찌개, 통밀국수 등에 필요한 국물을 우려낼 때 멸치 대신 다시마와 표고버섯 등을 사용한다. 또한 멸치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음식이 채식가들이 주로 먹는 ‘현미밥과 깨’에 넉넉히 들어있다면 믿어 주실 건가? 너무도 사소하게 알려져 있을지 모르는 ‘현미밥과 깨’에 말이다. 비단 현미밥과 깨뿐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자. 아침 출근시간에 현미밥 한 그릇, 된장찌개, 그리고 깨 한 숟가락 고소하고 기분 좋게 씹어 드시고 나가보시라.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그 속에 다 들어있으니! 지금 필자의 식사시간은 너무도 행복하다. 먹고 사는 것이 별 의미가 없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요리가 취미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필자는 칼슘을 섭취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 천만에 말씀! 예전보다 더 건강해진 필자는 요가와 헬스로 몸 상태를 확인하곤 한다. 멸치를 전혀 먹지 않는 필자는 요가선생님께서 지도자 과정을 해보라고 하실 정도로 몸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06.15 ⓒScience Times |
사람들의 육식 위해 사람들이 굶는다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2) | ||||
나무를 베던 사람이, 닭의 목을 치려던 요리사가, 생체실험 대상이 된 쥐에게 약물을 투여하려던 의사가 순간 TV에서 “골인”이라고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듣게 되면서 그들은 그들이 해하려 했던 대상 즉, ‘나무와 닭과 쥐’를 얼싸안고 기뻐한다. 그래서 축구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는, 그만큼 축구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한마음으로 엮어주는 큰 울림의 역할을 한다는 광고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참 무섭다. 동물과학 저널 ‘Journal of Animal Science' 편집위원이자 오리건 주립대학 동물과학 교수인 피터 R. 치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축업자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소비자들이 대부분 동물을 어떻게 키우고 처리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육식을 하는 소비자가 대량 생산방식의 계사를 방문하여 닭들을 어떻게 사육하고 어떻게 ‘추수’하며, 또 조류 처리공장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하늘에 맹세코 닭고기뿐만 아니라 어쩌면 모든 육류를 끊겠다고 맹세하게 될 것이다. 소비자가 고기를 입에 집어넣기 전까지의 과정에 무지하면 무지할수록 그만큼 현대식 축산업계에 유리한 것이다.” 돼지고기 삼겹살집의 간판로고엔 살찐 돼지가 함박웃음을 웃으며 자신의 살을 뜯어 달라 노래하고 있다. 후라이드 치킨 집에는 예쁜 벼슬을 늘어뜨린 닭이 제발 나를 먹어달라며 유혹의 웃음을 흘리고 있다. 그들은 전혀 괴롭지 않고 전혀 두렵지 않은 듯 보인다. 도살장에서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며, 앞선 동료의 찢겨지는 살덩이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쳐다보며 두려움과 공포로 떨며 절규의 울음을 우는 소! 제대로 죽지 않은 돼지의 머리를 수차례 둔탁한 무기로 내려치며 잡담을 나누는 도살노동자. 그리고 그의 발 아래 널브러진 채 목숨이 붙어 있어 더 괴로운 돼지! 좁은 닭장 안에서, 마치 창고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어진 불필요한 기물들처럼 쳐 넣어져 스스로의 삶을 용납할 수 없어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그래서 자신의 몸을 뜯고 동료의 몸을 뜯어먹는 광기를 어쩔 수 없는 닭!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좁은 유리관에 갇혀 재수 좋으면 한 번의 약물로 세상을 뜨기도 하지만 재수 없는 것들은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는 운명을 부여받은 실험용 쥐! 이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공존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자신의, 삶의 모순에 몸서리를 치면서 말이다. “사육과정을 알면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다” @img2@종일을 굶은 배고픈 아이는 세상의 반대쪽에 살고 있는 소가 그 자신들보다 더 많은 곡식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또한 그 소는 그 아이의 양식을 뺏어먹고 싶었을까? 그들 몸이 절대로 원하지 않는(받아들일 수 없는) 사료를 먹고 미쳐버려서 생긴 ‘광우병’은 다시금 그들을 잡아먹는 우리 ‘사람’의 안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과테말라에서는 다섯 살 미만 어린이 중 75%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영양실조가 너무 심각해서 네 살까지 살아남은 어린이가 50%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과테말라는 대부분의 농경지를 육류생산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매년 4천만 파운드의 육류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의 인구 중에 식량부족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은 12억 명이다. 한편, 미국에서 생산하는 옥수수 중에 가축이 먹는 양은 77%에 달한다. 만약 미국의 가축이 먹어 치우는 콩이나 기타 곡물을 사람에게 준다면 14억명이 양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가축들을 먹기 위해, 즉 사람들이 육식하면서 살기 위해 사람들이 굶는 형편이다. “사람들의 육식 위해 사람들이 굶는다” 필자는 사실 채식이란 것을 삶의 가운데로 가져가고자 마음먹으면서 그 첫 이유가 건강의 안녕을 위한 선택이지 못했다. 사실 인간의 식문화에 육식이 더 해롭고 불필요하며 몸을 망치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는 사실은 그 이후에 차츰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필자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떤 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고 할까? 스스로 담배를 끊을 때도(사실 이 담배라는 것은 새벽녘 고독한 싸움과도 같은 창작이라는 것에 늘 함께하며 용기와 위로를 주던 유일한 것 이었다) 필자는 식도암이나 간암이나 여타 그것으로 인한 몸의 부적절한 신호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언제부턴가 필자가 즐거워하는 담배를 태우는 행위가 혹 필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해로움을 주고 있진 않은가? 필 수 있는 권리와 냄새를 맡지 않을 권리의 동등함 같은 것에 관해 조금씩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면서, 그러한 고민들의 시작과 함께 읽게 되었던 <3.3인치의 유혹>(저자 코너굿맨, 아일리쉬 타임즈 기자)은 필자에게 담배회사를 향한 분노와 함께 금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책은 필자에게 담배회사의 이윤추구를 위한 엄청난 사기극과 파렴치함을 알게 해주었으며, 또한 같은 인간을 상대로 상당히 자유로운 창의력을 기반으로 한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증명해 주었다. 이 담배를 주제로 한 외국수필 하나는 필자 안의 잠자는 자존심을 일깨워 내기에 더없이 적당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 사이의 공존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조심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여전히 우리는 늘 우리와는 다른 생을 살아가고 있는 다른 생명들, 즉 그들의 삶의 환경을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유를 할 수 있고 바르고 그른 것에 관한 주관을 가질 만큼 지적으로 성장한 동물이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좀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의학과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가면서도 자칫 그로 인해 소홀해지는 환경이라는 개념과 상대적으로 소외받게 되는 다른 생명체에 관한 걱정과 염려를 감히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육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형성시켜주며 지구의 환경과 자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내 몸과 내 가족의 건강을 늘 신선하게 유지시켜주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행위라면 지금이라도 필자는 채식주의자란 꼬리표를 당장에라도 떼어내고 말 것이다! 또한 동물들이 필자의 귀에 대고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들은 오후 한나절 한가로운 풀밭을 거닐고 사랑하는 나의 엄마 젖을 마음껏 먹으며 형제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누리며 살고 있지요. 결국 언젠가 당신들 인간의 생명유지를 위해 우리 몸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저마다 잘 이해하고 깨닫게 된 답니다. 그 어떤 강요와 두려움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어요. 우리를 걱정하고 마음 아파 하는 당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린 지금 행복하게 당신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고 있답니다.”라고 속삭여만 준다면 더 이상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 각종 자료는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을 참조했습니다. | ||||
/가수 박창근 | ||||
2006.06.27 ⓒScience Times |
철분은 우유보다 채소에 더 많다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3) | ||||||
- 조지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의 조언처럼 식물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은혜롭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제각기 이해관계로 얽혀 있기 마련이고, 저마다의 영향을 주고받는 톱니바퀴처럼 연결돼 모든 생명은 살고 있다. 그런데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 속에서 맘을 다치지 않기만을 노력한다면 잘못된 것, 진실이 아닌 것, 그릇된 것, 또한 올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결국엔 대충 정리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결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유제품 생산으로 벌이를 하는, 가축을 길러 죽여서 생업을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그렇게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을 하지 않고도 다른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좀더 생산적이고 세상에 이로운 일은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위생시설이나 부당한 모든 행위를 떠나서라도 도축장에 끌려 들어온 그 녀석(소)의 천진한 눈에 고여 있는 젖은 눈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일을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많게든지 적게든지 자의적으로든 강압적으로든 섭취하게 되는 우유! 이번 회에는 우유에 관해서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자, 이제 우리가 거의 완전제품으로 추앙하는 유제품 및 우유에 관해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유를 먹고 나서 배가 살살 아파 설사를 한다거나, 가스가 찬다거나, 위가 매우 불편해진다거나 하는 이러한 증상은 우유를 먹는 많은 사람들이 겪어본 증상들이다. 이유는 요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유제품인 우유에 들어있는 탄수화물 유당인 락토스를 소화해내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의 사람들은 거의 90% 이상이 이러한 증상을 보인다고 하는데 이 현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리 사람의 경우 이 락토스를 분해하는 효소인 락타제는 만 네 살이 지나면 몸속에서 더 이상 합성해 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 뜻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모유를 접하는 시기를 길게 잡아 네 살 정도까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모든 동물들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먹는 그 시기는 자신의 몸무게가 2배가 되기까지의 가장 왕성한 성장을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왕성한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동물들 각자의 어머니 몸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모유이다. 사람은 동물들 중 비교적 가장 적은 성장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모유, 혹은 소의 모유인 우유도 자신들의 종의 성질에 맞게 어느 정도까지의 한시적인 섭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 어떤 동물들이 우리 사람처럼 징그럽게 다 성장한 후에도 남의 젖을 빨아먹고 살고 있을까? 다시 말해 네 살 정도까지의 왕성한 성장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차분한 영양공급과 운동으로 많은 세월에 걸쳐 점진적인 느린 성장이 사람에게는 이루어진다.
물론 우유는 빠른 기력회복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금식을 하다가 극단적인 행위가 깨달음을 주진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기력회복을 위해 우유 한 잔을 받아 마셨다는 이야기도 불교에선 전해 내려온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 이후에도 우유를 몸에 달고 사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부처님은 위염과 장염, 그리고 소화불량에 심지어 골다공증까지 겹쳐 깨달음을 전하는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좀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면 부처님은 아마도 먹는 일에 그렇게 민감해 하지 않는, 불완전한 채식 수행을 했을 것이고, 그 대안으로 매일 먹는 우유 즉 동물성 유제품에 의존하다가 자꾸만 부족해지는 철분의 섭취를 위해 급기야는 고기를 먹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장난기 섞인 상상력이 혹여 불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석가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나 자신(부처)도 믿지 말라. 어디에도 집착 말라’라고 하셨다. 큰마음의 종교로서 불교를 이해할 때 마음 넉넉한 불자님들의 이해를 바라며 필자의 애교로 간주하고 가볍게 넘겨주길 바란다. 이제 우유, 즉 각 동물들의 모유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 과연 지금처럼 우유가 갓난아이에서부터 늙어죽을 때까지 우리사람들이 꼭 먹어야 하는, 하루라도 먹지 않는 날엔 무언가 우리 몸이 부족해져서 나빠질 것만 같은 염려와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정말 인간에게 무조건 필요한 완전제품인가? 아래의 표를 보자.
위에 나타나 있듯이 철분 함량은 채소가 더 많다. 또한 우리의 보편적인 식사(유제품과 고기식단을 배제한) 안에서도 충분히 단백질 섭취는 이루어지며 그 이상은 전혀 필요하지가 않다. 앞선 글에서 동물성 단백질은 우리 몸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초래하며 대부분이 흡수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배출된다고 설명했다.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신선한 채소들과 곡류가 넘치는데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기와 유제품 및 우유를 섭취해야 하는가? 최근 모 회사 우유광고를 보면 ‘몸에 좋은 우유’, ‘칼슘이 들어있는 우유’, ‘일등급 우유’ 등의 카피문구가 나오면서 가격은 자꾸만 올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예전에 우리가 먹었던 우유는 무언가 부족한 무언가 모자란 우유였단 말이 되는 셈이 아닌가? 이번 글에서 우유로 시작된 단백질에 관한 이야기가 맺어지기는 힘들 것 같다. 두 편으로 나누어 다음 번엔 과연 단백질 섭취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그리고 골다공증과 같은 질병의 원인이 과연 우유나 고기섭취, 즉 동물성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생기는 병인지 혹시 그 반대는 아닌지에 논해보려고 한다. | ||||||
/가수 박창근 | ||||||
2006.07.11 ⓒScience Times |
식물성 단백질 vs 동물성 단백질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4) | ||||
물론 지금까지도 어쩌면 이러한 현상들은 너무도 편협한 채식식단으로 오랜 날을 지내왔거나 어쩌면 고기에 대해 맘 속부터 가져왔던 환상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앞선 글에서 석가모니 예를 들기도 했지만 불완전한 채식식단으로 인한 마음적·육체적 영양부족이 우유나 달걀 같은 동물성 단백질 과다 섭취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은 오히려 체내의 철분부족을 가져와 다시금 고기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옛 시절을 살아오신 어른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이나 높은 집안에서나 즐겨 접할 수 있었던 육식문화를 어떤 신분상승의 하나로, 가난과 굶주림을 벗는 이상적인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맘 속 한 편에 늘 자리해 두고 염원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헐벗고 굶주렸던 일반 사람들이 먹고 살 수밖에 없었던 콩죽이나 여타 잡곡 그리고 김치나 된장 같은 발효식품의 위대함을 과학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던 시절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선조들이 생일 때나 구경할 수 있었던 흰 쌀밥조차도 지금에 와서 득보단 실이 많은, 거부해야 할 ‘삼백’(흰 쌀밥, 흰 밀가루, 흰 설탕)의 하나로 자리해 있다. 실제로 그때 당시의 서민들의 먹는 문화는 생각보다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 참으로 웰빙을 추구하고 몸에 맞는, 몸을 위한, 그야말로 이치를 헤아리는 그러한 건강식단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요리의 실제 의미는 세상이치를 헤아리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식단이 그토록 건강밥상이었음에도 헐벗고 굶주렸던 이유는 바로 그 식단의 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바로 수확하는 대부분의 농작물을 관아에 넘기거나 지주에게 몽땅 바쳐야 하는 ‘악법’에 있었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가난의 시절을 겪어 오신 어른들의 이따금씩의 ‘고기예찬’은 필자를 쓸쓸하게 한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고기 먹는 일’은 따지고 보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유’, ‘누릴 수 있는 여유’, ‘가지고 있다는 의미’, ‘남들처럼 행복할 수 있는 권리’의 의미로 여겨졌을 수 있는 일이다.
앞선 글에서 사람이 굳이 모유 시기 이후에도 다른 동물의, 그것도 성격과 질이 다른 젖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한 것에 대해 조금 더 보충의 의미로 위에 참조할 만한 비교표를 적어놓았다. 미국의 영양학자 중 특별회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수잔 하발라(suzanne havala, 저서「Being vegetarian for dummie」)는 그 역시 우유를 완전제품으로 강력한 세뇌를 당한 보통의 미국인에 불과했었다고 한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젖(밀크, 모유)은 종(種)에 따라 구분을 해야 한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종만을 위하여 젖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소젖을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 성장한 소도 소젖을 마시지 않는데 말이다. 왜 소는 계속해서 소젖을 마시지 않으며 인간은 왜 개젖이나 곰젖은 마시지 않는 것일까?" 수잔 하발라가 습득을 강요받았던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완전식품’이라는 것이 있다. 사전적 정의는 ‘우유 따위와 같이, 건강상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단독 식품’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완전한, 적어도 그거 하나면 족할 것 같은 아주 흡족한 기분을 갖게 하는 참으로 바람직할 것 같은 식품! 바로 모두가 들어온 바와 같이 ‘우유와 달걀’이 당당히 거기에 속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제 몇 가지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왜 동물성 단백질이 그토록 우리 마음 속에 필수불가결한 식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러한 당위성을 입증 받았을까? 또는 왜 완전한 식품으로 칭송하는 음식이 식물성이 아닌 동물성인가? 식물성 단백질이 동물성 단백질보다 왠지 한 등급 아래일 것만 같고 혹은 이 둘의 영양분이 같다고 치더라도 식물 쪽은 무언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유(현재까지도 동물성 단백질을 양질의 고급 단백질이라 하고 식물성 단백질을 낮은 질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에는 아래와 같은 수십 년 전의 실험 결과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존 로빈스는 이야기한다. 동물성 단백질이 식물성 단백질보다 더 뛰어나다는 결론을 도출시켜준 중요한 역사적 실험결과가 하나 있었다. 1914년 오스본과 멘델의 단백질 실험이 그것이었는데, 그들은 생쥐의 실험을 통해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 생쥐가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한 생쥐보다 더 빨리 자란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해냈던 것이다. 다소 단순하고 간단명료했던 이 실험은 이후로 동물성 단백질을 식물성 단백질보다 우위의 위치인 A급 단백질로 놓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1940년 좀더 세분화한 실험으로 이어졌고 여기에서, 실험의 대상이 된 생쥐의 성장에 필요한 필수적인 아미노산 10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그 물질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생쥐성장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계속적인 실험을 통해 생쥐의 성장을 가장 촉진시켜주는 이상적인 아미노산 배합비율을 산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단백질이 바로 동물성 단백질, 그 중에서도 특히 ‘달걀’에서 발견되는 단백질의 유형과 비슷했다는 것이다.(ROBIN HUR, FOOD REFORM: OUR DESPERATE NEED, HEIDELBERG PUBLISHERS, 1975, PAGE 2,95-6) 이 실험결과 주위로 점차 모든 가축동물 사육연맹단체의 이해와 거대한 자본이 모여들게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 이는 곧 거대한 ‘완전식품’의 논리를 도출해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단체나 사람들은 바로 ‘미친’ 이로 취급받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지금까지도 소수 양심가들의 주장은 그렇게 큰 사회적 파장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그야말로 ‘까다롭거나 좀 독특하고 별난 논리주의자’ 쯤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임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사람이 직접 먹고 마시는 중요한 일에 대해, 생쥐를 가지고 한 실험결과를 토대로 맹신하고 있는가? 지금까지도 그 이론은 왜 대세인 것일까? 거기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본의 힘이 작용을 하고 있기에 그런 것일까? 정녕 식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단백질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좋은가? 그보다 우리는 동물성 단백질의 과잉 포장된 이론에 여태껏 몸을 맡기고 혹사시켜 오진 않았을까? 도대체 요즘 들어 그토록 부르짖는 단백질은 그럼 우리 몸에서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모든 열량의 얼마를 단백질로 채워야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로 단백질은 우리 몸에 어떻게 필요하며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필자도 헬스를 즐긴다. 공연일정으로 집을 떠나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늘 꾸준히 운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가 필요한 만큼 불편 없이 움직여주는 내게 알맞은 신체이다. 간혹 사진에 걸린 우람한 체형의 보디빌더들을 보며 감탄도 하지만 필자는 지금의 몸에 큰 불만이 없다. 그런데 당연히 헬스장을 오가면서 자주 듣게 되고 접하게 되는 것이 ‘단백질’에 관한 것이다. 보디빌더들이나 보디빌더를 꿈꾸는 사람들 대부분은 보충제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탄수화물 보충제나 단백질 보충제 같은 것 말이다. 액기스로 많은 양질의 단백질을 알약으로 보충할 수 있어 선호의 대상이기도 하다. 필자는 채식을 하면서도 이 부분, 바로 단백질에 관한 부분은 온전히 주관적 자아를 실현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채식인들도 동물성 단백질을 먹지 않으니 식물성 단백질이라도 많은 양을 넉넉하고 충분히 섭취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늘 필자를 따라다녔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큰 관심사도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 공급을 최상으로 하라는 것이 명제이고 간혹 누구누구는 하루에 달걀 흰자 몇십 개를 먹는다더라 하는 소문을 쉽사리 들을 수 있었다. 정말 보디빌더 혹은 체력소모를 많이 하는 운동선수들과 같은 사람들은 과다한 단백질이 필요한 것일까? 튼튼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그토록 많이 필요한 것인가? 단백질은 우리 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단백질은 실제 효소교체, 혈액세포 재생, 머리카락이나 손톱의 자람, 항체를 생산하는 등의 특정과제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헬스장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동물성 단백질이 근육생성에 중요한 벽돌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단백질은 정말 몸을 움직이거나 운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배우인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그의 책 「남자들을 위한 아놀드의 보디빌딩」에서 “좋은 식사의 기본은, 내 공식에 따르면 몸무게 1킬로그램 당 1그램의 단백질이면 충분하다”며 보디빌딩을 위해서 심지어 총열량의 70%까지 단백질 섭취를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아놀드의 체험에 인한 공식대로라면 건장한 80킬로그램의 남자에게 필요한 하루 단백질의 양은 많아야 고작 80그램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시간이 되신다면 이것을 하루평균 섭취 칼로리에 비교해서 수치계산을 한번 해보시라. 채식주의자이면서 운동선수인 사람은 전체 인구에 비교했을 때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이면서 운동선수인 소수의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놀랍도록 대단하다. 아놀드 이외에도 학자 겸 운동선수인 데이브 스콧은 그 누구도 두 번 이상 우승기록을 갖지 못했다는 ‘하와이 철인 삼종경기’에서 무려 4번이나 우승을 했고 이외에도 완전채식주의자이면서 1일3종 경기에서 세계기록을 갱신한 식스토 리나레스, 원거리 달리기 올림픽 메달을 9개나 땄던 파보 누르미, 400미터 장애물 8년 연속 우승의 에드윈 모세, 2세부터 채식을 해온 자유형 역사상 최초기록 보유자가 된 머레이 로즈, 채식가이면서 보디빌더였던 안드레아스 칼링 등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채식주의자 스포츠맨들이 있다. 스포츠맨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긴 철학자, 과학자 등의 인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 ||||
/가수 박창근 | ||||
2006.08.20 ⓒScience Times |
동물성 단백질이 골다공증 예방해줄까?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5) | |||
일본에서도 채식주의에 대한 관심은 꾸준하다. 일본인 쯔루다 시즈카라는 작가가 쓴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는 역사적인 일본의 채식문화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간디, 톨스토이와 같은 세계적인 유명인들이 베지테리안으로 살다간 에피소드들을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지난번에 썼던, 근육형성에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다 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필자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도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고 양자의 편은 갈리게 마련일 것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기 위해 뒤져본 그 어떤 것에서도 채식주의자들이 부족한 단백질을 공급받고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 로빈스의 〈DIET FOR A NEW AMERICA〉에서 인용된 많은 저명한 과학전문가들의 견해들을 다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의학잡지 <랜싯>지의 한 편집자 - “예전에는 식물성 단백질이 저급한 것으로 분류되어 최상급인 동물성 단백질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추세다” ▲ 하버드대의 한 연구팀 - “설탕과 잼, 젤리처럼 단백질이 전혀 없는 식품들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우를 빼놓고는 눈에 띄게 단백질 부족을 일으키는 채식식단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 미국 식이요법 협회 저널 - “어떤 경우, 어느 집단의 경우에서나 필수아미노산의 필요치를 2배 이상,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더 많이 초과했다.” ▲ 영양학자 존 샤펜버그 박사 -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활동적인 성인에게 단백질이 부족하면서도 적당한 열량을 가진 시험식을 짜내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란 점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가장 뛰어난 영양학 전문가로 손꼽는 사람인 나단 프리티킨은 채식가들이 섭취하는 총 열량 중 필요로 하는 단백질은 고작 6%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일상식사에서 9%보다 낮은 비율의 단백질을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했다. 곧, 아무리 부족한 식사를 하게 되더라도 기본적인 단백질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앞에서 인용한 모유 내 단백질의 함량비교에서처럼, 사람이 평생에 걸쳐 가장 왕성한 성장을 이루는 아기 때에도 모유에는 고작 5%의 단백질만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성장한 어른은 그 이상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존 로빈스는 내리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이러한 경험을 스스로 하고 있다. 비록 필자는 보디빌더와 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을 만들길 원하고 있진 않지만 여러분이 우려할 만한(?) 식단으로 생명을 영위해가는 입장에서 필자가 필요한 몸의 근육을 만들어 가는데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우유를 먹지 않게 된, 아니 적게 먹고자 생각해본 분들이 계시다면 믿고 실행에 옮겨보시라. 몇 달 전 필자를 취재했던 <채식이야기>의 저자이며 채식물결잡지 발행인이기도 한 이광조 씨를 만났었는데 그는 필자에 관한 취재 이후에 세계격투기 챔피언인 권영철 씨를 취재하게 되었다면서 자랑했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격투기쪽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하는데, 찍어놓은 동영상을 보면 세계챔피언답게 채식으로 다져진 강인함과 날렵함,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식적 견해로 채식을 주장하더라도 젊은 시절 한번쯤은 이소룡을 꿈꿔봤던 청소년들에게는 이러한 권영철 씨 같은 분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몸이 부실해질까 두려워, 불쌍하지만 고기를 먹어야 된다는 분이 계시다면 이 또한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권영철 씨는 공중을 뛰어오르며 말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삐뚤어진 식단 예컨대, 삼백(三白) 식품을 너무 과하게 먹는다든가, 매 끼니를 인스턴트로 먹는다든가, 물 이외의 음료를 즐긴다던가 하는 습관을 갖지만 않았다면 장담하건대 여러분은 운동이 너무 하고 싶어질 것이다! 어떤 때에건 체내의 다양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마다 단백질의 필요량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차이를 아무리 인정하고 십분 양보하더라도 지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단백질에 관한 강조는 너무도 지나치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인 것이다! 지난번 글 ‘식물성 단백질 vs 동물성 단백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과연 우유와 같은 동물성 단백질은 몸의 뼈를 튼튼하게 해주며 골다공증을 예방해 주는지 살펴보자. 날로 뼈가 약해지는 것 같아 몸에는 잘 받지 않는 우유지만 칼슘과 뼈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좀더 열심히 우유를 마신다고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아시아 성인의 거의 90~100%가 유당분해효소결핍을 경험하고 있고 미국의 흑인이 그 뒤를 따르며 백인은 10%가 경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각 가정의 냉장고에는 늘 리터들이 우유가 벽면에 위치하고 있다. 상하게 될 때까지 잊어버리고 방치해두는 경우도 많으리라. 우유를 사먹지 못하는 가난한 가정은 한때 우유가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뭐 요즘은 그걸로 목욕을 하면 피부가 좋아진다고 해서 그렇게 크게 아까워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무언가 어떤 음식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약’ 이거나 ‘독’이거나. 동물의 고통지수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으로 단기간 골다공증을 유발하는 주사를 투여 받은 쥐가 늘 즐겨먹는 달콤한 음식을 선택하지 않고 쓴 약(그것은 병의 고통을 줄여주는 항생제였다)을 본능적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동물도 인간과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과,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그들은 가장 본능적인 순간에 진정으로 그들의 신체에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그 쥐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학습이 되지도 않은 냄새의 진통제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그 이후 병을 낫게 된 후에 비로소 그 쥐는 늘 찾던 달콤한 음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의 먹을거리는 얼마나 본질과 동떨어진 포장을 입혀놓았는가? 자극적인 양념과 각종 착색제, 향신료 등. 우리가 먹는 우유와 달걀은 어떤가? 대량의 우유생산을 위해 젖소는 다량의 성장촉진제와 호르몬제를 투여 받는다. 닭은 또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알을 낳고 있는가? 한울벗 채식나라 운영자인 한울벗님은 그의 책 <채식은 사랑입니다>에서 “현재의 시판되는 우유는 모두 살균을 하는데 이렇게 열을 가열받은 우유는 근원적 파장이 뒤틀리고 변형되는데 이렇게 변조된 우유를 먹게 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질병, 예컨대 불임, 생리 이상증세, 소화불량, 장 무력증과 같은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다소 심각하게 말하고 있다. 우유에 있어서 더욱 상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책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프랭크 오스키 저/원제-Don't drink your milk)에서는 좀더 심각하게 우유의 신화에 대해 꼬집는데 우유로 인해 철분결핍성 빈혈, 아토피 피부염, 심장마비, 동맥경화까지 초래한다고 외치고 있다. 또한 골다공증을 예방하기는커녕 골다공증 유발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마지막 주제인 우유는 골다공증과 같은 뼈의 질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일단 현재까지 나와 있는 실험의 결과에 주목하자. 1994년 미국 전염병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의 연구에 따르면, 우유를 더 마신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자신의 뼈에서 더 많은 칼슘을 잃었다는 결과가 나와 있다. 그리고 <미 임상영양학저널> 2001년 1월호에서도 동물성 단백질을 많이 섭취한 여성이 적게 섭취한 여성보다 무려 3배의 뼈 손실의 가능성이 확인되었고 골반 뼈 골절 위험성은 4배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곧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체내의 칼슘을 빼내간다는 것이다. 식물성은 알카리성인데 반해 동물성 단백질은 산성식품이다. 이 산성식품을 과다섭취하게 되면 우리 몸의 혈액은 산성화로 진행되는데 이때의 몸은 산성화로 인한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자구책을 찾게 된다. 바로 뼈에서 빼낸 알칼리성 무기질인 칼슘으로 혈액의 PH농도(수소이온농도 : 용액 1g 속에 존재하는 수소이온의 그램이온수를 의미, 산성〈PH7(기준)〈알칼리성)를 조절하게 된다. 말처럼 동물성 단백질 식품 즉 산성화된 식품을 많이 섭취하면 할수록 체내의 칼슘은 자꾸만 빠져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 우리 몸은 자꾸만 더 많은 칼슘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칼슘의 양보다 칼슘과 인의 비율이다. 만약 칼슘과 인의 비율이 낮아지면 아무리 많은 칼슘을 섭취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동물성 단백질은 인에 비해 칼슘의 비율이 너무 낮아 그 칼슘은 제 역할을 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반대로 과일이나 야채 같은 알칼리 식품인 식물성은 그 비율이 높다! 혹시 뼈 손실의 결과에 있어서 동물성 단백질 섭취 이외의 어떤 것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에는 이와 같은 ‘만약’에 관한 실험결과가 나와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골밀도 클리닉 연구소장인 데보라 셀마이어 박사는 그의 연구에 있어 연구자들의 나이, 체중, 흡연, 운동, 칼슘복용 등과 같은 현재 상황을 동일하게 조절하고 난 뒤의 실험에서도 똑같은 결론, 즉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한 사람보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 사람에게 있어 뼈 손실, 골반 뼈 골절의 위험성이 수 배가 더 높다는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핀란드, 스웨덴, 미국, 영국과 같이 유제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골다공증도 또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TV 광고에서 뼈를 튼튼하게 하는 우유에 관한 카피가 성행하는 현실에서 과연 우유가 뼈를 건강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는 그 어떤 실험 결과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정리를 하면, 골다공증을 예방하려면 체내 뼈 속을 칼슘으로 튼튼히 채워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혈액을 산성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심각히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산성화된 혈액이 스스로의 자구책으로 굳이 뼈 속에서 알칼리성 무기질 칼슘을 빼내는 수고를 못하도록 해야 한다. 식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이러한 염려와 우려를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알칼리성 식품이므로 불필요한 식물성 단백질을 다소 과잉했더라도, 동물성 단백질보다 다소 낮은 칼슘의 양을 식물성으로 섭취를 하게 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과도한 단백질 섭취는 골다공증을 유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이 부분에 관해 도움이 될 만한 ‘고단백 식사를 했을 경우와 저단백 식사를 했을 경우 칼슘균형치의 변화’에 관해 연구된 자료는 존 로빈스의 앞서 말한 동물성 단백질은 칼슘 흡수율이 알칼리 식물성보다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몸속에서 어찌되든 밖으로 배출되게 마련이다. 말처럼 배출이라도 시원스럽게 되면 다행일진대 그렇지도 못하다. 이것이 오줌으로 배출될 때는 잘 알다시피 과잉된 단백질이 신장에도 또한 상처를 주게 된다. 결국 과잉 동물성 단백질 섭취는 뼈의 손실과 함께 골다공증의 위험, 심지어 신장조직 파괴, 신장기능 저하의 문제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우유를 먹고 키를 쑥쑥 키우는 것이 당면한 큰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만약 쑥쑥 크는 키와는 반대로 장 기관들이 그 키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빨리 성장하는 만큼 빨리 죽게도 된다면? 그리고 늘 잦은 질병으로 정신과 몸을 혹사시키게 된다면? 그래도 쑥쑥 더 키가 크길 바라겠는가. 앞서 예로든 ‘완전식품을 도래시켰던 쥐 실험’은 이후에 연구원들도 믿고 싶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고 말았다. 동물성 단백질로 쑥쑥 성장한 쥐들은 결국 다른 쥐들보다 빨리 죽었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늘 잔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생을 영위해 갔다. | |||
/가수 박창근 | |||
2006.08.22 ⓒScience Times |
다른 생명체의 고통 줄이기 위해 채식해야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6) | ||||
소위 ‘설탕’ 하나를 놓고도 수백 가지의 의견들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른 각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며 또 그것들은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로, 마치 사회 속의 구조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다가 또 섞이기도 하면서 우리의 정신과 이성을 적잖이 뒤흔들어 놓는다. 굳이 필자의 주장을 말해보라고 하면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얻는 것이지만 정제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영양분을 잃어버리는 껍데기! 즉 얼마의 탄수화물만 남은 보잘것없는 식품.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열강의 대륙침략의 산물! 서양 역사 속에서의 부와 재력의 과시’와 같은 여러 가지의 긍정적이지 못한 답변을 내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백해무익한, 부정한 식품이라고 근거를 제시하는 학자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와 반대로 적당한 섭취를 권장하는 쪽, 그리고 설탕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잘 이용하자는 이론도 상당수이다. 아니, 이 후자의 주장은 거의 지금까지 ‘육식’이 인류가 시작된 이래 줄곧 인간사회에 절대 뗄 수 없는 음식문화라는 주장과 함께 대세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시대이건 먼저 자리 잡고 앉은 가치를 부정하기는 정말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증명되지 않고 오로지 예측과 습관 그리고 지배시스템에 의해 맞춰져온 가치들(즉 ‘지구는 평평하다’와 같은)과 당당히 맞서 싸우고, 또 그러한 허점투성이의 모순들에 대해 절대 비굴해지지 않고 스스로를 끈질기게 더 담금질 해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사고할 줄 아는, 자유로운 의식을 가질 줄 아는 인간이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책무가 아닐까 한다. 아마도 사회운동, 인간운동의 모든 운동이 이와 같은 동일한 출발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의 힘을 다해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고 또 스스로 깨지고 깨져서 줄곧 좀더 바른 것으로 향한 행진을 계속해나가야 할 것 일진데. 필자는 고민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 아무리 유익한 정보들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를 스스로 가지게 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시하며 그에 따른 또 다른 더 다양하고 복잡한 논리들을 생산해 낸다. 그것이 그야말로 홍수처럼 우리를 덮치게 되면, 어느 즈음에 우리는 틀린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해 내고자 하는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에 짜증이 날 것이고 머리가 아파오면서 급기야 난 모르겠다는 식의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린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볼 수 있다. 필자의 집에 초대된 손님에게 필자 나름의 지식과 가치관에 기초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요리된 음식을 내어놓자, 평소의 입맛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 그 손님이 급기야 “나는 그냥 내가 먹는 식으로 먹고 빨리 죽을래”라고 하며 더 이상의 관계를 원치 않게 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지금 필자가 쓰는 이러한 글 또한 그 홍수의 한 가닥을 장식하고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또다시 사람들의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드는 다분히 그저 홍수와 같은 정보로만 보여지고 말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까? 추상적인 필자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하는 많은 것들은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행여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의 입장만을 고수하기 위한 욕심을 서로 경쟁하고 탐하게 되지는 않을지. 이러한 것들은 필자를 참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와 함께 과연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더불어 사는 삶, 땅을 되살리고 지구를 숨쉬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인간의 삶, 진정한 해방, 아름다운 세상은 가능이나 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이 토로한 것처럼 그 자신 스스로는 인간 모두가 채식주의를 실현하게 되길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필자가 음반에 발표했던 <귀기울여보게>의 원 가사는 단지 중국고대문헌의 글귀라고 떠도는 소문 이외에는 구체적인 출처를 알기 어려운데 그 가사의 내용을 인용해본다. “수많은 세월 동안 냄비 속의 국은 미움과 분노를 끓이고 있네 그건 멈춰지기 어려워라 이 세상에 군대와 사람들의 재앙이 왜 있는지 그대 알고 싶거든 깊은 밤 도살장에서 들려오는 가여운 비명소리에 귀 기울여 보게...” 참으로 오래 전에 어느 누가 노래했던 글이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 심각하게 들으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저 아무런 느낌이 없는 분도 계실 것인데, 이 문헌의 떠도는 글귀 하나로 필자는 염세적이던 인생의 가치가 변화되었고 앞으로의 내 삶의 목적의식이 분명해졌다. 가슴 한곳을 찌르듯 여전히 전율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그 글은 곧 내 삶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셀 수도 없는 시간의 이전 세월의 어느 지구 한 켠에 똑같은 사람으로 고뇌하고 사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던 이름모를 한 사람이, 지금의 어떤 한 무지한 인간에게로 그 ‘고독함’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결코 어떤 단백질, 지방 수치에 따른 건강의 이로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고 난 뒤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관계로 지내온 두 사람이 있다. 물론 그들은 제도로서의 결혼에 있어서도 자유로웠다. 지성인으로서 필자의 가슴에 너무도 튼튼히 새겨져 있는 이름 ‘스콧 니어링’ 과 이따금씩 외롭고 고독한 밤이면 그의 목소리에 잠을 청하고 싶은 ‘헬렌’이 그 둘이다. 이 둘은 부부였다. 유일하게 필자가 흠모하는 부부, 가장 지적이고 실천적이면서 자유로운 사랑을 했던 이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헬렌 니어링의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우리말 번역 출간-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에서 헬렌 니어링 자신은 스무 살 연상의 그의 동료이자 배우자인 스콧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경우 나는 완전한 남자를 찾았으며, 그 사람은 그보다는 덜한, 나로 만족했다...” 그들은 운명처럼 서로를 존경했으며 삶의 목표가 같았고 그랬기에 채식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정말 인용하려고 하는 부분은 이러하다. “억압이 널리 퍼져 있는 이 세계에서, 당신은 노예상태를 없애는 일을 돕는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낮은 계층이 있는 한 나는 그 속에 있다. 범죄의 요소가 있는 한 나는 그 일부이다. 감옥에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뎁스가 말했습니다)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그 고통을 없애는 데 과거에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천품이나 능력을 써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위의 글은 스콧이 연설일정으로 집을 떠나있을 때 아내 헬렌에게 보낸 무수한 편지 글 중의 한 부분이다. 내가 고통을 원치 않듯 다른 이들, 더 나아가 다른 생명들에게 고통을 주길 원치 않는다고 하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인간다운 가치실현은 사실 간단명료하면서도 쉬운 일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이해관계, 자본과 여러 가지 잡다한 망상에 얽혀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에 큰 영향을 남기고 간 많은 성인, 학자, 문학가, 예술가들도 그랬고 지금의 많은 사람들도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같은 종으로서의 동물을 해치고 괴롭히지 않고도 더 건강하고 유익하고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계속되어 오고 있다. 소위 인간은 태생적 ‘잡식’이 가능한, 인간 삶에 뗄 수 없는 사냥과 가축사육, 그리고 성취감을 드높여주는 고기섭취를 하지 않고서도 적당히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 순박한 물음에 관해 짧게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감해주는 것으로도 내 삶이 즐거워질 수가 있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 ||||
/가수 박창근 | ||||
2006.09.17 ⓒScience Times |
채식을 위한 ‘식물 살생’은 도살과 다르다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7) | ||||
어미 소에서 갓 태어난 송아지는 젖을 빨 겨를도 없이 어둡고 좁은 우리에 감금된다. 4개월 정도를 앉지도 일어서지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도 못하게끔 처해진 상황 속에서 그들이 느낀 외로움과 공포는 과연 어떤 수준의 것이었을까?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 보들보들한 연한 살코기를 생산해내기 위해 인간은 그 송아지 주위에 단 한 뼘의 헛된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울러 기아상태에 놓인 송아지가 본능적으로 철분섭취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 녀석이 갇혀 있는 우리의 사방을 쇠가 아닌 나무로 교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필자는 “과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악’은 어디까지일까”라는 물음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글쓴이는 때때로 되도록이면 더 자연스럽고 단순하고 원초적인 생각으로 돌아가곤 한다. 지능을 가진 인간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줄 아는 인간이,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이 아프듯 다른 이들의 고통도 아플 것이니 그 아픔을 주기 싫어하는 본능적인 인간이 최소한의 파괴로, 최소한의 살생으로 주어진 한 생을 살아가고 싶은 열망을 가지는 것이 잘못인가? 그 단순하고 보편적인 바람에도 절충과 타협과 현실적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는가? 과연 학교에서 가르치는 도덕의 본질과 사회를 살아가면서의 도덕의 본질은 다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가 사람다운 사람 냄새 나는 적절한 사회인가? 적어도 식물을 키우는 행위는 땅과 환경을 더 풍요롭게 살리는 길임은 조금만 관심을 가져본 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같은 살생이라 한다 해도 과일이나 식물을 키워 먹는 행위에는 또 다른 생명의 잉태가 그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전달이 되며 사람은 그 자연의 순환을 돕는 중간자적 일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같은 살생도 이렇게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채식도 생명을 죽이는 일이니 육식과 뭐가 다른가?’ 하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살생으로 조금이라도 덜 해로운 자신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적어도 나와 같은 동물은 먹지 않겠노라는 마음을 먹은 채식주의자, 즉 베지테리안들은 채소를 먹을 때에도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면 웃으실 것인가? ‘나무를 베어도 그 나무가 아파할 것이다. 우리가 잡아먹는 동물의 고통과 마찬가지이지 않은가’라는 주장으로, 소박하고 순수하기만 한 채식인들에게 그 같은 마음 아픈 공격은 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만약 그렇게 공격하는 분이 계시다면, 보라! 과연 그것이 “나 지금 두렵고 미치겠소. 너무 고통스럽소”라고 하며 발버둥치는 동물을, 그것도 추측이 아닌 내 눈앞에서 직접 호소하는 그들을 생명부지가 아닌 유희와 쾌락을 위해 살생하는 당위성을 갖게 한다고 보시는가? 어쩔 수 없이 차를 타야 하기에,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게 될 오염이 우려되어 공회전을 줄이고 얼마 안 되는 거리는 걸어 다니고자 애쓰는 것과 어차피 가지고 있는 차이고 어떻게 하든 환경오염은 피할 길 없으니 ‘그것들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커먼 연기를 보란 듯 더 많이 뿜어내는 것, 과연 이 둘이 같을 수 있는가.
한편, 그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도살시스템이 동물들에게 고통을 없애주는 식으로 운영되고 순간적으로 죽음을 맞게 해주는 것이 전부라면 오늘날의 도살장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동물의 육체적 삶 외에 정신적 삶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육식을 하는 사람, 즉 우리 모두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동물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동물들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도살장으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그런 이유로 우리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공포!’가 더 심각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p. 290.) 템플 그랜딘은 “여러분이 동물에게 정신적으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겁을 먹게 만드는 것이다. 동물들에게 공포는 너무 가혹하다. 나는 이것이 고통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할 때마다 항상 두려운 표정을 짓는다”고 역설했다. 더불어 그는, 동물은 육체적 고통은 적게 느끼고 정신적 공포는 많이 느낀다고 지적했다.(p. 290.) 필자는 학창시절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닭의 목을 비트는 것을 봐 왔다. 그리고 집에서 키우던(그 당시 우리 집은 어느 산에 위치한 유원지 계절장사를 했었다.) 늙은 고양이를 대구 칠성시장에 내다 판 적이 있었다. 그때의 돈 이천 원을 받고 함께 살아온 늙은 고양이를 보양탕집 앞 지저분하고 녹슨 고양이 우리에 던져 넣고 돌아서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옮기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때 차라리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뛸 것을.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는 우리집 고양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먼저 잡혀온 다른 고양이들의 잊을 수 없는 눈.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두려움과 공포뿐이었다. 그 옆에는 물론 개들의 우리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들은 한 마리씩 끌려 나가 머리를 내려까이고 가마솥에 쳐넣어졌다. 차라리 잡혀 죽는 놈이 덜 불쌍해 보였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놈들은 몹시도 끙끙 앓으면서 고개를 반대로 돌리는데, 차마 보지 못하고 곧 닥칠 자신의 순서에 대한 공포로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어대는 그 모습은 마치 사람과 너무도 흡사했다. 오 신이시여, 인간다움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더 호소할 수 있기를! 정말 이러한 광경이 인간세상에서 없어질 수 없는, 정말 어쩔 수 없는 풍경이며 선택이라면 최소한의 할 수 있는 노력만이라도 우리가 해주기를! 이제 우리는, 사람과 육식의 관계는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가 되어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속) | ||||
/가수 박창근 | ||||
2006.09.19 ⓒScience Times |
인간은 원래부터 육식문화 속에서 살았나?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 (8) | ||||||
“여러분은 ‘내 생각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자유와 해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범부중생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면 늘 발목이 걸려서 넘어지지요. 비가 오든 말든 날씨가 흐리든 맑든 자기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면 자유로워집니다. 이게 대자유, 대해탈입니다.” 그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자. ‘자기 소견을 내세우지 않는다’라는 뜻은 자신의 주관 없이 떠밀려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선생님이 학생들과 수업을 하는데 수십 명이 되는 학생들 하나하나가 모두 내 말을 알아듣기를 모두가 경청해서 이해를 다 해주기를 고집하지 말아라’ 하는 뜻의 가르침이다. 이는 선생님이 ‘학생들이 듣든 말든, 내지는 듣기 좋아할 소리만 골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좋은 내용의 올바른 가르침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들은 저마다의 차이가 있고 다른 수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선생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신경이 쓰일까? 학생들이 모조리 미워지기도 할 것이고 또는 스스로를 비관하여 자신의 직업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채식주의자의 삶이란 것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즈음을 회상해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많이 했다. “정말 이렇게 좋은 걸 왜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명의 해침을 방관하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내 몸도 건강해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생명과 환경을 더 좋아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이 길로 접어들게 만들어야 하겠다!” 어쩌면 이러한 조급하고도 쫓기는 듯 다짐했던 생각들은 글쓴이가 그렇게도 경계해 왔던 무조건적인 강요와 강압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글쓴이는 나중에야 깨닫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유형의 그 무엇 중 만약 어떠한 한 생명의 부당한 고통을 강요해서 얻어지는 음식이라면, 또한 그것이 어떤 경우에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피하고 싶은, 피해달라고 외치고 싶은 여전한 바람이다. 채식주의자인 필자는 최근 병원의 식단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꼈던 적이 있다. 현대의 성인병 대부분에 그리고 식도암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동물성 지방, 즉 육식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듯(필자는 TV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의 10월 25일분 방송분을 재미있게 보았다.) 조금만 더 신중하고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환자의 식사를 책임져 준다면 회복률과 완치가능성을 높여주는 데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진 않을까? 우리나라에도 유기농 채식 위주로 한 식사법을 병행해서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방법을 택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여수 요양병원> 같은 곳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그 수는 미비한 실정이다. 이것은 현재 고기를 재료로 하는 식당의 전체식당 점유율이 90%인 것처럼 우리에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과 아쉬움, 그리고 불편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요즘의 문화다양성은 어쩌면 더한 획일화를 낳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아직도 바깥에서의 식사 중 95%를 원하지 않는 재료와 메뉴를 선택하면서 하고 있다. 간간히 눈에 띄는 채식전문식당을 굳이 찾아가야 하는 인내를 감수하면 나머지 5%는 살아 있다. 우리 식문화에 뗄 수 없는 음식의 하나로, 재료로 자리하고 있는 이 고기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서처럼 인간은 원래 나무열매만을 먹으며 살았을 수도 있으며 진화과정에서처럼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사냥과 육식을 병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원숭이과 동물들을 살펴봤을 때나 신체적 조건 등을 유심히 따져보았을 때, 육식전문 동물로서의 성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상황과 환경의 적응능력과 지능이 높은 인간이니만큼 순간상황에 따른 어느 정도의 ‘육식이 가능한’ 동물로서 성장했으리라. 점차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문화적 습성을 갖게 되면서 차별화된 고지능(수준 높은)의 동물로서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서구문명의 시작단계에서부터 인간과 함께 해온 동물이 있었다. 바로 소이다.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엔트로피>의 저자이기도 한 제레미 리프킨의 책 <육식의 종말>을 소개하며 동시에 강력 추천한다. 인류문명의 발상에서 오늘날 자본과 관련되어 거대한 식민정책과 경제적 원동력에 이르기까지 그 곁에서 늘 함께해 오며 인류의 역사문화 종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온 동물이자 가축이었던 소에 관한 여러분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정확한 사실근거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검증을 통해 풀어낸 인류와 소의 연관된 역사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그리고 날카롭고 따뜻한 시선으로 인류의 나은 내일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바람직한 생각과 발상으로의 공유를 유도해내고 있다.
황소신앙(미트라교)은 현재의 기독교 태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12월 25일 예수탄생일 또한 이 미트라교에서 날을 빌려올 정도로 당시 대중의 거대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서양문명의 곳곳에 소의 흔적이 없는 곳은 없으며 영향력 또한 실로 엄청나다. 그래서 육식문화는 서양, 채식문화는 동양이라고 흔히 말해 오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일본 학자인 쯔루다 가르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채식주의자이다. 쯔루다 가르시는 일본은 농경시대였던 야요이 시대까지는 잡식을 했었고 그 이후 675년 텐무천왕이 동물과 생선을 먹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채식 위주의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로 불교가 융성하면서 채식에 대한 관습은 지속되었고 불과 100년이 되지 않은 19세기 초 네덜란드 의학(육식이 건강에 좋다는 이론)이 전해지면서 육식보급이 대중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또 전체적인 흐름에서 서양이 육식문화였다는 이야기는 때때로 설득력을 잃는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윈, 헨리 데이비드 소로, 벤자민 프랭클린, 뉴턴, 밀턴, 토마스 모어, 장자크 루소, 바그너, 셰익스피어, 조지 버나드 쇼, 안나 킹스포드(그는 광적인 사냥애호가 이기도 했었다), 톨스토이, 간디 등 서구의 역사에 큰 정신적 영향력을 미쳐온 이들이 채식주의자로서의 삶을 제시했다고 지적했다. 동양의 농경채식문화가 오늘날 서양에 보급되고 있다는 단순한 주장과, 또한 서양의 육식문화가 동양에 전해진다는 보편적인 이론에 조금 다른 시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글쓴이 같은 사람도 집밖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통제되고 자유롭지 않아 여간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닐진대 선구자들의 고뇌는 과연 어떠했을까? 쯔루다 가르시는 또 “채식민족이어야 할 동양인들이 고기를 즐겨먹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육식민족인 서양인 가운데서 오히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해온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채식문화와 육식문화를 지리적으로 구분하기란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11.01 ⓒScience Times |
웰빙과 베지테리안의 진정한 의미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 (9) | ||||||
이것들은 서로의 차이일 뿐 정확하게 옳고 그른 것은 그 누구도 쉽게 판단하고 분별해내기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어느 쪽에 서있던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토로하고 증명해내는 작업을 수행하며 토론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모두는 멈출 수 없는 소중한 행동임이 자명하다. 이즈음에서 여러분은 혹시 궁금하지 않으신가? 도대체 그 무엇이, 그토록 현실의 대중적 삶에서 가끔은 소외되기도 하고 가끔은 오해를 부르기도 하는 어려움과 비난, 불편한 시선을 받기까지 하면서 글쓴이를 포함한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절제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게 만드는 것일까? 주변의 사람들은 필자가 ‘반(反) 육식가’라고 소개하면 긍정적인 표현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 “맞아요, 채식을 하면 아이들도 성격이 온순해지고 착해지는 것 같아요. 육식동물에게도 채식을 하도록 도와주면 서서히 변해가면서 온건해지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잖아요?” 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고자 할 때가 있다. 자! 몇 가지를 지적해보자, 첫째로 채식을 해서 온건해진다는 단순한 논리는 바로 육식문화와 뗄 수 없는 역사적 관계를 지속해온 남성중심의 지배사상의 영향이다. 그 옛날 힘센 남자들은 생존의 수단으로 사냥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운 좋게 잡아온 동물들은 집에서 기다리는 여자와 아이들에게 더한 감사와 복종을 강조하게 되고 자신의 강력한 권력의 당위성을 인정받는 매개가 된다. 그렇게 잡아온 음식을 먹는 순서도 서열이 있다. 힘을 제일 많이 소비한 남자가 먼저 먹고 남는 것이 있다면 여성과 아이들의 몫이 된다. 이는 동양의 농경중심사회에서의 여성의 높은 지위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채식 위주의 농경문화에서 삶은(boil) 고기는 여성적이다. 삶의(life) 과학이 녹아 있는 삶은(boil) 음식은 이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는 지혜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서구적인 굽는 문화는 바로 현재 여러분이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설익은 스테이크, 피가 절절 흘러내리는 덜 익은 가축의 살로 대표된다. 그것은 삶아서 여러모로 쓸모 있게 다양한 음식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달리, 단숨에 먹어야 하고 내가 이 동물을 잡아서 이겼노라고 하는, 정복심이 이글이글 불타는 승리감에 도취된 음식인 것이다.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 고기문화에서도 ‘수육’이 점차 사라지고 굽는 고기 음식점이 많아지는 것은 그러한 서양의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예일 수도 있겠다. 둘째로 채식을 해서 온건해진다는 말은 조금 바꾸고 싶다. 채식을 하는 동물은 굳이 싸워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으므로 하루 종일을 쓸데없이 눈에 힘을 주고 경계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잡혀 먹힐 것을 걱정하는 것과 꼭 잡아야 나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모질고 슬픈 운명인지. 셋째로는 채식을 해도 성날 때 성내고 화날 때 화낸다는 것. 위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글쓴이는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요즘은 채식하면 성질이 더 더러워집니다. 짜증도 더 냅니다. 길을 한번 걸어보세요. 내 마음에 드는 거리 풍경이 어디 하나라도 쉽게 보입니까? 채식가들은 자신이 고기를 안 먹는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이 입안에 넣고 있는 붉은 고기 덩어리들을 볼 때도 마음이 편하진 않습니다. 점심 때 친구들과 밥 한번 사먹으려고 노력해보세요. 식당을 찾으러 돌아다니다 보면 얼마 안 가서 짜증나실 겁니다. 만약 온순해지기 위해서 채식을 하시려면 하지 마세요.”
그는 1842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베지테리안’이라는 말의 어원은 vegetable, 곧 채소가 아니라 라틴어 ‘uesere(~에 생명을 주다, 활기차게 하다)’이며 그것이 vegetarian이 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번역어인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베지테리안이라는 의미를 다 담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글쓴이가 늘 사람들을 만날 때나 노래를 하면서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 것도 이와 같다. 필자가 주위로부터 들어왔었던 ‘웰빙가수’에 대한 의미 속에도 이와 같은 해석의 불명확한 점이 문제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채식주의자 가수’이자 ‘웰빙가수’로 불려지곤 했으니, 이러한 베지테리안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둘의 근본적 차이를 이해시키는 것도 하나의 좋은 운동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쯔루다 가르시가 명확히 밝히는 ‘베지테리안’의 의미는 ‘식물성 식품만 먹는 것을 넘어서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고 극복하는 것’이다. 좀더 풀어서 설명해보면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건강을 위한 것, 또한 동식물에 대한 사랑, 또 이 사회와 지구의 건강으로 확장시켜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들의 식생활에 육류를 포함시키지 않는 사람’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곧 개인의 단순한 질병으로부터의 보호차원의 건강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사는 삶의 가치관, 즉 한 개인의 사상이며 세계관 즉 스스로의 존재를 표현하는 철학적 가치인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주의자, 사회개혁가로서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던 스콧 니어링의 삶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따금 주변의 “저는 고기는 먹지 않지만 굳이 무슨 주의자는 싫어요, 당신은 어때요?” 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필자는 오히려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저는 채식주의자 곧 베지테리안입니다!”라고.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11.07 ⓒScience Times | ||||||
어느 베지테리안의 풍성한 식탁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 (10) | ||||||
발갛게 상기된 예쁜 소녀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처럼, 어느 날 문득 이러한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찾고자 자연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어 시작된 일상적인 나의 사소한 변화들은 점차 내 삶의 거대한 활력소가 되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나의 소리를 간직하며 노래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주변 다른 사람들의 적지 않은 변화도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일상에서의 행복’이란 것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는 여유를 알게 되었다. 이따금씩 필자로 인해 ‘채식’을 알게 되고 실천하게 되어 고맙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꼭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아닙니다, 그대는 이미 그대 마음 속에 한갓 사소한 생명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는 ‘그대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던 것을 실천하게 된 시기가 바로 저를 만난 오늘인 것뿐입니다.” 글쓴이는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행복하다. 글쓴이가 가진 생각을 실천했을 때의 그 기쁨보다 몇 배 더 앞선 기쁨이었고 더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존 레논이나 폴 메카트니 같은 유명한 베지테리안도 아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세기를 초월한 예술가도 아닌 필자가 무슨 힘이 있어 그들을 깨우치고 이끌어 내었겠는가? 별 볼일 없는 한 사람의 낮은 외침과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내 것으로 가져갈 수 있었던, 그래서 스스로의 것으로 물화시켜낼 수 있었던 그들의 그 마음! 바로 그 보석 같은 마음이 있었기에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지면을 허락받은 것에도 고마움과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필자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을 맞이하게 되면 마음 속으로 살짝 흥분되는 것을 숨기지 못한 채 주방에서의 손놀림이 몹시도 분주해진다. 한 가지 나쁜 습관이 있다면 필자가 무엇을 요리할 때면 곁에 누구도 거치적거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데, 도와주겠다는 좋은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오만함을 극복하려 현재 노력 중이다. 차를 한 잔 내어놓은 뒤 우선 가스렌지에 스테인리스 냄비를 올려놓고 약한 불로 달군 다음 국산 현미식용유를 두른 뒤 고춧가루를 한두 스푼(기호에 따라 양을 조절한다) 넣고 고추기름을 낸다. 이 고추기름은 참으로 다양하고 맛있는 여러 가지 찌개를 요리 할 수 있는 아주 괜찮은 재료가 된다. 노릇노릇 고추기름이 달궈져 고소한 향을 피워내면, 이어서 알맞은 양의 물을 부어 다시마를 잘게 끊어 넣고 끓이면서 그 속에 들어갈 재료들을 준비하게 된다. 토란, 고사리 등의 나물을 무쳐 넣으면 채식 육개장이 되고 고추장 간으로 느타리버섯, 새송이버섯, 팽이버섯, 표고버섯 등을 넣으면 그야말로 시원한 버섯찌개가 된다. 간은 소금과 생협용 간장, 그리고 조선간장을 이용하며 기호에 따라 마늘과 생강, 후추 청량고추 등을 이용한다. 이따금씩 별미로 식물성 단백질을 추출해서 만든 콩단백이나 채식업체에서 판매하는 콩고기, 또는 콩으로 만든 콩햄(여기에는 약간의 우유와 달걀이 첨가된다.) 등을 넣어 만들면 고기 건더기를 원했던 손님에게 정말 깨끗하면서 시원하고 얼큰한 찌개 맛을 보여 줄 수가 있다. 필자는 가끔씩 찌개를 만들어 먹는데, 들어가는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전문 요리가가 아니기도 할 뿐더러 찌개나 전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소견은 바로 어떤 특정한 요리를 위한 특별한 재료가 필요한 것이 아닌, 묵은 재료와 남은 재료를 이용하기 쉬운 재활용의 차원으로서도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육고기나 다시다 또는 멸치나 그 외 생선추출 육수 등을 제외시킨 국물에 어울리는 다양한 나물이나 채소는 그 은은하고 멋스러운 향을 제대로 뽐낸다. 감자, 고구마, 근대, 시금치, 콩나물, 숙주, 쑥, 양배추, 묵은 김치, 깻잎, 양파, 당근, 파, 호박 등의 제철 식물들을 포함한 수도 없는 나물과 채소들은 멋진 찌개의 재료가 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고루고루 전해준다. 사실 찌개는 매일 먹을 수가 없다. 자칫 과식을 불러오게 할 수도 있으며 식사는 약간 마르게 먹는 것이 소화에 좀더 도움을 주기에 아쉽지만 아낄 수밖에 없다. 수수, 조, 검은콩, 메주콩 등의 곡류를 섞은 현미밥을 준비하고 찌개처럼 늘 먹고 싶지만 개인적으로 조절을 필요로 하는(필자는 여느 분들과 마찬가지로 밀가루 음식을 상당히 좋아했다. 라면이나 우동을 너무 좋아해 만약 지금도 채식라면을 몇 개 사놓는다면 순식간에 해치울 정도이다.) 채소전(채소전에 들어가는 채소 또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엔 꼭 통밀가루를 이용한다. 미국산이나 호주산 백밀가루보다 소화나 영양에 있어 월등히 앞선다. 필자가 만들어 먹는 많은 다양한 전들 중에 가장 선호하는 것은 양파전이다. 밀가루 갠 물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양파를 잘게 썰어서 함께 섞고 프라이팬에 꽉 채워 붓는다.
필자는 필자의 식탁에서 단순히 동물고기 재료 하나 빠졌을 뿐인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소위 만들어 먹는 것에 대한 무의미함, 허무함과 귀찮음을 가졌던 이전 모습을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고뇌와 희망 그리고 절망의 깊은 허무를 노래하는 이들이여! 당신의 식탁에서 동물의 시체를 재료로 삼는 것을 과감히 한 번 거부해 보라. 그리고 무슨 운동이든 한 가지를 꼭 내 일처럼 중요한 스케줄로 삼아 실천해 보라! 그대의 힘과 에너지는 다른 세상을 위한 또 다른 희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찌개를 만들든 된장국을 끓이든 본능처럼 넣어왔던 멸치와 육고기의 육수 대신 다시마나 버섯으로 물을 우려보시라. 멸치의 비린 냄새와 다시마의 비린 냄새가 얼핏 비슷하면서도 다르듯 동물성 비린 냄새가 침범하지 않은 국을 몇 번 접하다 보면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더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 무엇인가 더 본연에 가까운 맛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필자의 요청으로 김장을 두 번 하는데, 하나는 멸치나 갈치젓갈로 간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자를 위해서 젓갈 대신 배나 무로 맛을 낸 김치인데 이제는 어른들도 젓갈 들지 않은 김치가 참으로 시원하고 김치답다고 좋아 하신다. 영덕 바닷가가 고향인 그 분들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젓갈류는 기호식품으로 늘 식사 때마다 내어 놓으시는 것을 감안하면 과히 경이로운 변화가 아닌가? 그 외에도 근댓국, 콩나물국, 시금치국, 시금치 된장국, 된장찌개, 청국장, 미역국, 감기를 예방하는 무국,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해먹는 김국, 채식육개장, 얼큰 채식찌개(얼마 전 어른 생신 때 해드려 인기몰이를 했던 국인데 이름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아 채식소고기 국이라 설명했다) 등등 고기육수를 하지 않고도 수없이 많은 찌개와 국은 만들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채식을 하면 식사 때 도대체 뭘 해먹는 거예요?’ 하고 물어온다. 글쓴이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어 “아직도 순서가 안 돌아와 못 해먹어본 게 있습니다” 하고 말한다. 생협에서 나오는 통밀국수가 있다. 물론 국산용 백밀국수도 있는데 필자는 통밀국수를 별미로 만들어 먹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가장 손쉬운 ‘쌈장 국수’이다. 국수를 끓여 찬물에 씻어내어 그릇에 양만큼 담고 거기에 쌈장을 한 술 넣은 후 들기름을 붓고 깨를 친 후 비벼 먹는다. 생각 이상으로 별미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꼭 한 번 시도해 보시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포화 지방산인 오메가3, 오메가6은 이 쌈장국수 하나로도 해결이 된다. 들기름, 홍화씨유 등으로도 오메가3은 충분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국수로 해먹는 것 중 채식스파게티가 있다. 이것은 스파게티 소스를 집에서 만들면 된다. 폭이 넓은 냄비에 낮게 깐 물을 약한 불에 끓이면서 칼로 토마토 윗부분에 열십자로 흠을 내어 여러 개를 넣어둔다. 물이 끓으면서 토마토의 껍질은 살짝 일어나면서 저절로 어느 정도 벗겨지는데, 필자의 경우 젓가락으로 껍질을 집어 하나씩 떼어내고 익은 토마토를 으깬다. 여기에 식초, 조청 한 숟갈(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된다.), 소금, 간장, 약간의 고추장으로 함께 섞어 맛을 내면 소스가 완성되는데 여기다가 양파, 버섯, 호박 등을 잘게 썰어 함께 조금 더 익혀주면 아주 괜찮은 스파게티 소스가 탄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스를 국수나 스파게티 면발에 올려놓으면 별미음식이 또 하나 탄생되는 것이다. 음식에서의 비전문가인 필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채식음식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식탁에서 단지 움직이는 생물들 몇몇이 배제된 것 뿐, 여러분들의 생활에 필요한 영양분과 활력소는 전혀 침해당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다. 채식음식은 별스러운 것도, 그렇게 구하기 힘들고, 귀한 것도, 비싼 것도, 손이 많이 가는 것도, 맛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영양섭취에 무언가 부족한 듯 아쉬워 보이는 것도 절대 아니란 것이다! 이렇게 채식을 위주로 한 음식을 비전문적으로 소개하다 보니 필자의 개인적 경험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한 듯싶어 얼른 떠오르는 책 몇 권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다.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11.29 ⓒScience 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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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으로 인해 환경오염이 늘어난다”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 (11) | ||||||
소위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 요리다’라는 말처럼 먹고사는 것은 왜 중요한 것일까? 한 나라의 위대함은 짐승을 다루는 방식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고 말한 간디는 사회 속에서의 가장 아래의 약자를 그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대하며 어떤 대우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 곧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어떤 대상을 우리가 먹기 위한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것에는 단순히 우리 인간의 생명연장 수준 이상의 무엇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 로빈스는 우리가 그저 술안주로 혹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한 유희를 포함시킨 음식재료의 하나로 다루는 ‘고기 덩어리일 뿐인 닭’에 대해 ‘멋진 닭’이라고 말한다. 우리와 다른 대상 즉 우리와 같이 느끼고 숨쉬고 사유할 줄 아는 한 대상을 놓고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머리 회전이 둔한 사람을 가리켜 닭대가리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과연 닭은 머리가 둔한 동물인가? 존 로빈스의 책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존 로빈스, 이무열 역, 아름드리미디어, 2001)에는 암탉에게 뿔닭 알을 놓아주고 그 암탉이 자신이 낳은 알과 다른 알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가를 실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암탉은 그 뿔닭 알을 정성껏 품어 새끼를 탄생시키는데 이 암탉은 보통 병아리가 먹는 밀기울을 그 뿔닭 새끼들에게 먹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먹는 개미집의 흰 번데기들을 찾아 준다. 한번도 키워본 적 없는 다른 종류의 닭 새끼를 키우는 방법을 암탉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지능이 아닌 본능인가? 자신의 가족이 아닌 종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행동은 단순한 지능 이상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이 암탉에게 오리알을 주었는데도 결과는 앞선 예와 같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암탉은 그것들을 정성껏 품어 오리가 탄생했고 이 오리들을 데리고 개울로 ‘꼬꼬꼬’ 하며 이끌고 가 그들을 물속으로 끌어 들였다. 신이 허락한 닭의 수명은 15년∼20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음식재료가 되는 닭의 수명은 2∼3년이나 갈까? 닭장 속에 처해진 삶의 현실은 그들을 요리해서 먹는 우리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음을 우리는 과연 알고 있을까? 돼지의 아이큐는 사실 개보다 더 높다. 돼지는 썩은 것, 상한 것들이 이것저것 뒤섞인 음식들을 해치우는 실로 쓰레기 처리의 일등공신이 아니다. 돼지의 코는 우리 사람보다 더 민감하여 더럽고 불쾌한 냄새를 더 잘 파악 해 낸다. 그들은 원하지 않는 음식을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원하지 않는 냄새를 맡으며 먹는다. 돼지는 도살되기 전까지 닭장 속의 닭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미쳐버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속의 돼지는 사람보다 더 애교를 부리고 뛰어놀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데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 클리블랜드 애머리.” 너무도 정확하면서 소름 끼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소들은 왜 그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싸움을 해야 하는가? 경북 지역 소싸움축제를 보고 있으면 슬픈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먹고 싶지 않은 곡류를 섭취해야 하며 주사는 왜 맞아야 할까? 그것은 그들의 삶을 위한 인간의 배려인가? 인간을 위한 소들의 배려인가?
밍크의 부드러운 가죽과 털을 얻기 위해 산 채로 동물들의 가죽을 벗긴다. 이러한 행위는 영상을 통해 여러 번 고발됐다. 더 고차원적이며 더 지능이 높은 인간으로서 허용할 수 있는 행위라고 억지 당위성을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내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가죽이나 생명을 앗아 갈 때는 최소한의 도리나 기준, 그에 부합할 만한 사정은 있어야 할 것이다. 저 약육강식의 세계라 불리는 초원의 동물들의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간들의 세계보다 더 상식적일 때가 있다. 세상을 알아야 가능하다는 이 ‘요리’의 재료선택의 무분별한 발전과 개발(?) 덕택으로 인해 이 지구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언제까지나 흔할 줄 알았던 땅과 물과 공기도 이제 심각하게 걱정을 해야 하는 수준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육식의 종말>(제레미 리프킨, 신현승 역, 시공사, 2002)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자동차의 배기가스와 비대하게 수가 불려진 지구상의 모든 소들이 내뿜는 메탄가스에 있다는 주장을 이제는 간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학시절 동기와 한 번 글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자신이 공부하고 일하는 영국에는 글쓴이가 살기에 참 좋을 만한 환경이 많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그곳에는 채식주의자 전용 슈퍼마켓이 동네에도 있으며 채식으로 주문이 가능한 음식점이 널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은 벌써 이러한 문제를 함께 깨우치고 공유하고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베지테리안에 대한 인식이 ‘독특한 개성을 지닌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보통의 구성원으로 그들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며, 또한 그들로 인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기도 하면서 정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용하며 극복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규모의 육식문화와 여전히 설전을 벌여가면서 말이다. 거리에 나온 모피불매 운동을 하는 나체의 여인들! 평화와 반전 그리고 생명의 존귀함과 사상의 자유를 노래하던 존 레논이 들었던 확성기! 이러한 행위들은 어느 한 유별난 개인주의자의 퍼포먼스가 아닌 우리 모두의 숙제이자 미래의 모색인 것이다. 앞서 채식음식을 이야기하면서 음식 하나하나에 대한 즐거움을 표하면서도 글쓴이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쌀을 얻고 곡식을 기르고 과일을 수확하고 여러 땅에서 나는 식물들을 키워 섭취하는 것 또한 그 속에는 무한한 겸손과 존중과 감동과 절제 그리고 용서와 생명에 대한 겸허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입속으로 들어가 내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 어느 것 하나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채식주의자들에게도 음식의 유희적 쾌락이 지나치지 말라는 법 없는 것처럼, 이 또한 늘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하겠다. 재미있는 것은 음식의 쾌락과 재미, 그리고 지나친 탐욕은 우리 사람과 비슷한 유형의 생명 즉 움직이고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것(주로 동물)들을 대상으로 할 때 더욱 강하게 표출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때때로 먹는 것에 너무 과장되고 너무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며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점심엔 꼭 무엇 무엇을 챙겨 먹어야만 이 하루가 잘 마무리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12.04 ⓒScience Times | ||||||
채식전문 음식점을 찾아가다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 (12) | ||||||
한창 채식에 관련된 이것저것을 수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에 찾게 된 채식음식점이라 많은 것을 체험해보고 경험하고 싶어 했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허연 머리를 길게 늘여 뒤로 묶은 어른 한 분이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글쓴이 얼굴을 보며 “쉽지 않은 이 길을 가는 것 보니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한 것 같다”고 인사를 건네면서 당신의 지난 인생을 이야기했다. 그는 젊어서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해봤다고 했다. 그러다가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인가’ 하고 고민을 하기 시작해 지금의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부인도 참으로 깊은 얼굴이었는데 자신을 이끌어준 아내라고 소개했다. 50이 넘어서야 생명과 생명의 관계를 깊이 사유하게 되었다는 그 분은 돈을 벌기 위해 채식음식점을 시작하면 다 망한다면서 스스로의 명상과 깨침을 위한 하나의 장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그때는 한 사람당 팔천 원이었는데 현재는 어떨지 모르겠다. 한두 개의 음식에는 우유가 약간 첨가된 음식이 있다. 대체적으로 약간 달콤한 것도 있는데, 음식점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뷔페가 아닐까 한다. 참고로 글쓴이의 집에는 설탕이 없다. 상대적으로 채식음식점이라 하더라도 당도는 여느 음식점과 비슷할 수 있을 테니 참고하시라. 춘천에 가보고자 하는 분들은 한번 들러보시기를 바라면서 기왕에 채식전문 음식점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전국의 채식요리점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의 경험으로는 집에서 가볍게 해먹는 현미와 된장 그리고 몇 가지 채소들이 빠지지 않는 단순하고 소박한 채식요리가 제일이다. 그러나 바깥생활을 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이나 아니면 이따금씩 새로운 다른 음식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시간을 갖길 원하는 분들을 위해 몇몇 검증된 채식음식점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따금씩 채식가들에게도 얼큰한 중국집의 짬뽕과 자장면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필자는 집에서 가끔 생협에서 나오는 춘장을 사서 국수사리로 자장면을 만들어 먹곤 하는데, 기억에 남는 곳이 인천공연을 갔을 때의 차이나타운 안에 위치한 태화루였다. 짬뽕국물 맛이 시원하고 독특한 향이 좋았고, 자장면 또한 짜고 달지 않아 좋았다. 여느 채식중국집이 그러하듯 채식과 육식을 병행하여 장사를 한다. 채식코스를 미리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인천에는 채식뷔페집이 하나 더 있는데 백운역에서 가까운 <산들바람>이라고 하는 식당인데 이곳에는 모든 재료를 유기농으로 취급하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해준다. 음식점 공간을 친환경공간으로 설계해 맛을 더해준다. 또한 얼마 전 대구MBC 방송 취재로 알게 된 범물동 동아쇼핑 맞은편 농협건물 지하의 유기농 채식뷔페집 <이플>이 있다. 원래 이곳은 유기농매장이었는데 유기농을 취급하고 운영하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채식음식점이 되고 말았다는 가게 주인의 말씀이 인상적이다.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이다.
대구에는 중구 봉산동에 있는 <보리수>라는 채식한정식집도 유명한데 값은 5천원이다. 일반 한정식에 비교해서 비싸지 않고 맛깔스럽다. 아울러 대구에서 약간 벗어난 경산에 가면 경산 밀레오레 근처에 <청우방>이라는 중국집이 있다. 짬뽕이든 자장면이든 채식으로 해달라고 하면 친절하고 반갑게 맞이해 준다. 현재 운영사정상 채식만 하지는 않고 있지만 채식음식으로 주문하면 주인아저씨가 더 반가워하면서 그만의 비밀(?)을 말해주기도 한다. 채식으로 요리를 하면 더 깔끔하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리하는 사람도 기분 좋고 먹는 사람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으신다. 한편, 얼마 전 광주공연을 갔을 때 그 장소가 5·18기념공원이었는데 그곳에 세워진 기념문화관 안에도 <자연생활 채식뷔페>집이 있었다. 공연을 주최한 풍경소리의 사회를 보신 목사님께 그곳이 공원 측에서 운영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맛을 본 몇 군데의 채식식당과 채식 빵가게 그리고 여의도 쪽의 채식요리가 가능한 중국집이 있었는데 필자 개인적 경험으로는 아무래도 가격을 비교해보면 지방 쪽이 아직까진 더 만족할 만했다. 이럴 것이 아니라 현재 검증된 전국의 채식식당 목록을 알 수 있는 채식사이트를 알려 드릴 테니 여러분들이 어느 지역을 가던 참고하셔서 구경해보시기 바란다. 스스로의 삶의 진정성을 지켜내며, 그 울림을 스스로 귀담아 들으며, 오늘 내가 먹는 음식과 내가 엮여지는 그 순환의 고리의 중심에 스스로를 올려놓아 자신을 담금질하며 늘 깨어 있으며 생의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라면서! * 채식식당 목록뿐만 아니라 채식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이트. 한국 채식인 연합회 http://new.vegetus.or.kr/ 생명과 환경을 살리는 채식모임 http://cafe.naver.com/eatpeace.cafe 한울벗 채식나라 http://www.hanulvut.com/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12.07 ⓒScience Times |
채식 열풍’과 광우병에 대하여 | ||||||
가수 박창근의 채식문화 이야기 (13) | ||||||
채식주의자인 필자의 체험으로 미뤄보면 ‘채식의 열풍!’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기껏 채식을 주 메뉴로 하는 음식점이 몇 군데 더 늘었을 뿐. 사실 전국의 식당 수로 비교해본다면 미성년자의 머리카락에서 새치를 발견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채식주의’는 열풍을 동반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이따금씩 매체를 통한 건강한 먹을거리, 비만, 심장병, 광우병과 같은 신체의 위협에 대응하는 어떠한 본능적인 대체방법을 채식 먹을거리에서 찾긴 하겠지만 말이다. 앞서 글에서도 논해본 바 있지만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이용하는 것으로 채식주의자, 곧 베지테리안의 의미를 설명하기는 너무도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기에 이 두 경우가 때때로 같은 수준에서 비교가 되어질 때면 필자 같은 사람들은 입과 손발이 더 많이 부산스러워지게 된다. 가끔씩 우리 앞의 논리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때때로 귀찮은 일이 되더라도 꼭 짚어가지 않으면 큰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단지 채식주의자가 갑자기 더 많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거리에서 채식전문점을 쉽게 찾아낼 만큼 식당이나 가게가 늘어난 것도 아닌데 왜 사회가 바라보는 눈에는 ‘채식’이 열풍처럼 비춰지는 것일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나, 가족 우리 개개인의 삶의 질에 관한 관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그 원인을 더 가속화시키게 된 우리 주변의 모든 자연환경의 퇴보에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한 환경,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의 유발이 개개인의 건강과 삶의 질에서 출발을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이후로도 그 사고의 범위가 진보되지 않고 머무르게 되었을 때 부딪히는 여러 가지 논리적 모순과 걱정, 고민에 대한 난관에 맞서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때때로 그것만이라도 고마울 때가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뒤늦게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사회를 꾸리고 무법자처럼 누려오다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인간의 노예로, 인간의 쾌락의 노리개로, 인간의 끝이 없는 식탐의 재료로만 취급받아왔던 동물들의 역습은 얼마나 큰, 얼마나 거대한 공포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얼마 전인 12월 7일엔 “거짓말로 위협받는 식탁, 한미 FTA와 광우병 ‘미쳤∼Day’”라는 제목의 행사가 만해NGO 센터에서 있었다. 여기에서는 11월 29일 KBS 스페셜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을 제작했던 이강택 PD가 방송으로 다 내보내지 못한 자료들과 내용들을 토대로 강연회를 열었으며 영상과 토론회 등의 다채롭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일반인들을 만났다. 필자에게는 그리 충격적이지도 낯설지도 않았던 내용의 KBS 스페셜이었지만 아마도 이러한 내용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일반인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파급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해본다. 몇 달 전이었다. 가까운 친척 몇 분과 함께 필자가 추천한 채식음식점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동석하셨던 외삼촌과 식사 도중 채식식당에 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 한창 뉴스거리가 되었던 광우병에 관한 소신을 그 분이 필자에게 말씀하셨다. “광우병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를 알고 있어? 그건 말이야. 소는 자고로 초식동물이야 그제? 이 소라는 놈에게 주인이 동물사료를 주면 어떻게 돼? 풀을 먹는 소는 되새김질을 하며 그 풀의 영양소를 더 잘게 분해해서 영양을 잘 섭취하는 것인데, 동물성 사료를 갔다 먹이게 되면 그것들을 본능적으로 되새김질을 시작하게 될 거 아니겠어? 근데 너도 알다시피 고기 먹고 난 뒤 가끔 ‘위’에서 역류한 음식물을 다시 삼켜봤겠지? 그때 어때? 시큼한 냄새가 가히 역겹지 않았어? 고기와 같은 동물성 음식을 되새김질 하게 되면 이렇게 역하고 고약한 냄새가 입 안에 진동하게 될 텐데 그 놈의 소가 자꾸만 그런 냄새를 맡고 되삼키고 하다보니 이놈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미쳐 버리는 거 아니겠어? 광우병이 그렇게 해서 생기는 거야! 소가 지놈 식사 때마다 열 받아 미치는 병이야!” “거짓말로 위협받는 식탁, 한미 FTA와 광우병 ‘미쳤∼Day’”라는 행사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변혜진 보건의료 단체연합기획국장은 광우병에 관해 이렇게 설한다. “이 미친 질병은 인간이 만든 질병이다. 조류독감도 자연의 재앙으로 보이는 듯하지만 사실은 각 나라에 맞는 ‘토종닭’을 없애고 거대 농가기업들이 온통 동일한 종으로 닭을 ‘세계화’하면서 시작된 질병이니, 제대로 알고 보면 기업들의 떼돈을 벌기 위한 세계화 작전으로 진행된 또 다른 전염병의 세계화인 셈이다.” 필자가 요즘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책 ‘동물의 역습’(마크 롤랜즈 저, 윤영삼 옮김)에서는 ‘광우병’ 또한 그동안 인간으로 인해 재앙과 같은 삶을 강요받아온 모든 종류의 수많은 동물들이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무서운 역습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한다. 집약적 축산방법, 즉 공장식 축산업에 의해 발생한, 인간에게로의 치명적 유형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광우병이며 이것은 소에게 그의 동료인 죽은 소를 갈아서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것이 원인이라고 간단명료하게 꼬집는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그 같은 사료를 만들어 먹이는가? 그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라고 소리를 높인다! 바로 농장식 축산경영에서 공장식 축산으로 바뀐 것도, 자본주의 안에서의 이윤추구 즉 자본경제논리에 따른 비용절감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많은 고기를 생산해내면서 되도록이면 기업주는 적은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 실험의 대상이 지각이 있는 살아있는 생명일지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광우병에 관해 조금 더 알아보자. 광우병은 말 그대로 ‘소가 미치는 병’인데, 주로 소에게 발생하는 전염성 뇌질환이다. 소해면상뇌증이라고 하는 이 병은 ‘소의 뇌에 수세미 같은 구멍이 수없이 뚫려 거동이 불편해지고, 갑자기 미친 듯이 포악해져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처음에는 1970년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영국에서만 나타났던 풍토병의 하나였다고 한다. 광우병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프리온(Prion)은 ‘특이단백질-단백질 Protein’과 비리온(Virion : 바이러스 입자)의 합성어로, 바이러스같이 전염력을 가진 단백질 입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동물성 변형 단백질은 일반 단백질을 변형시킨다. 이것은 수천 도의 고온이나 높은 기압에도, 땅에 파묻어도 그 감염력은 사라지지 않고 그 영향력 또한 가히 엄청난데 광우병에 걸린 소 한 마리는 2만 배의 감염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변형 프리온에게 감염된 소의 시체를 사료로 먹고 다시, 광우병에 걸린 소를 만약 사람이 먹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 광우병이 인간에게 만약 감염이 되면 인간 또한 뇌에 굳은 덩어리가 생겨 뇌 기능이 마비되고 죽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광우병(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인 것이다. 발병이 되면 4개월에서 1년 사이에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니 실로 무서운 병이 아닐 수 없다.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인간 광우병)에 걸린 사람은 처음에는 80명 정도였다고 하나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최소한 천명 이상, 14만 명 이하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마크 롤랜즈가 ‘동물의 역습’을 집필하던 당시인 2004년도에 영국에서만 100명 가까이가 이 병으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이 인간 광우병은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증가 추세에 있다. KBS스페셜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뇌하수체로 만든 호르몬 주사를 맞고 그것을 통해 ‘CJD(인간광우병)’에 감염된 자식을 잃은 희생자 가족의 인터뷰가 실려 있기도 하다. 사람의 음식이 되고 있는 소는 비단 동물시체를 갈아 만든 사료를 먹는 것 이외에도 수많은 항생제와 성장호르몬, 화학약물들(미국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143가지 약물과 화학물질이 검출되었는데 이들은 42가지 암을 유발하거나 유발의심을 받는 물질이며, 20가지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하는 의심을 받는 물질이고, 6가지가 유전적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의심을 받는 물질이었다. 동물의 역습 p. 357)을 강제 섭취당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되어온 미국의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비판과 고발은 미국 사회에서의 커다란 식문화의 영향을 가져다 줄 정도였다. 바로 필자가 이 지면으로 여러 번 소개를 했던 책 중 하나인 존 로빈스의 ‘새로운 미국인을 위한 식생활-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나 ‘음식혁명’, 그리고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 등에는 줄곧 이러한 축산업의 대기업화, 공장식화를 꼬집어 왔던 것이다.
이 때부터 소와 닭들은 넓은 초원이나 마당을 자유로이 거닐거나 뛰어다닐 수가 없다. 몸을 옆으로 돌리기도 힘든 좁은 우리 안에서 도축되기 전까지의 삶을 연명해야만 한다. 기업가는 가능한 한 좁은 땅을 사용하고 작은 시간 안에 많이 살을 찌워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간단한 방법으로 도살을 해야 더 많은 돈을 벌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 해에 도살되는 소의 수는 3천700만 마리라고 하니 한 해마다 거의 우리나라만한 땅의 인구수가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당 400마리의 소를 도살시킨다는 이야기는 도살장의 위생과 청결 그리고 그들의 비교적 정상적인 도축과정은 상상도 해볼 수 없는 도축장면을 추측가능하게 한다. 도축과정은 누구도 볼 수 없다. 모든 촬영과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궁금해 하시는 분들께는, 동물보호단체인 PETA TV (http://www.petatv.com)를 소개한다. 모든 촬영이 금지된 곳에서 위장 잠입취재까지 마다하지 않고 찍은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이 상상했던, 아니면 상상을 하기 싫어했던 그 장면 그 이상의 슬프고도 두려운 장면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육식이 나의 체질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계시는 분들은 이러한 동영상을 절대 상영하시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아마도 그때는 심각하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량 공장식 축산업에서 음식의 재료로 길러지는 소들이 과연 무얼 먹는지 알게 되면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절대 풀을 뜯어먹지 않는다. 때로는 동료 가축인 돼지와 닭의 부산물을 먹기도 한다. 돼지와 닭은 소의 부산물과 내장을 원료로 만든 사료를 먹는다. 이들은 서로 서로를 먹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들 가축들은 이처럼 서로의 오염을 나누어 갖는 삶을 산다. 광우병은 비단 소에게만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어미젖을 아주 잠깐 맛본 송아지들은 이후 동료들의 시체에서 뽑아진, 피를 우유와 섞은 갈색 이유식을 주인으로부터 선물 받는다. 참으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자본의 힘으로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다. 최소 자본투자로 최대 이윤추구! 자본의 놀라운 황금알 낳기! 그러나 그 황금알은 우리에게 ‘미친’ 정신과 ‘미친’ 병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FTA에서 논란이 예상되고 있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왜 우리가 그렇게 우려해야 하며 그토록 무섭다는 것일까? 한 해 거의 한 나라의 인구수에 버금가는 소의 수를 도살하는, 매일로 치면 10만 마리의 소가 도축되는 미국의 도살과정에서,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비상인 ‘광우병’에 관한 검사는 고작 0.1%인 100마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사회를 잠깐 들여다보자. 미국은 선진화된 나라이다. 그만큼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와 식생활 수준도 높아졌고 국민들의 의식수준 또한 우리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담배나 패스트푸드회사가 자국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돌파구를 어떻게 열었던가? 바로 이윤추구의 대상을 제 3세계, 아시아권 같은 개발도상국들한테로 판매로를 개척하지 않았는가? 왜 미국이 현 시점에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소고기를 경제성장에 비해 다소 의식수준이 높지 않은 외국에 팔아야 할 수밖에 없는가? 대량생산의 시스템을 가진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산된 농산물과 고기가 어떻게든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국의 국민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질수록 유기농이나 무농약, 유전자조작을 하지 않은 농산물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더 안전하고 더 믿을 만한 고기에 대한 관심 또한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국의 모 대규모 담배회사 사장이 자국 내의 판매가 원활하지 않자 이제 자신들의 주 고객 대상을 아시아권의 청소년으로 정하고 전략을 짜겠다는 노골적인 인터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가 기억난다. 이처럼 현재의 미국에서 길러지는 소들 중 광우병에 대한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99.9%의 고기에 대한 전면 수입이 허용된다면, 아마도 육식을 하는 많은 분들은 끼니 때마다 붙어 있는 목숨을 일일이 체크하는 하루를 살아야만 하지 않을까? | ||||||
/가수 박창근 pckun@nate.com | ||||||
2006.12.20 ⓒScience 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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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달 말일 부산환경음악회에서 만났던 박창근님과 함께 일정을 맞추어 공연 하기로 했답니다. 기획만 잘 하면,, 가능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