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손톱자국'
오충공 감독이 아주 오래 전 1983년에 찍은 박물관에 전시될 법한 영화다. 무려 30년이 지났다. 나중에 감독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해국 일본도 피해국 한국도 철저하게 외면하고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아서 영화를 상영하기 힘들었던 여건이 그렇게 화석화되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로서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증언에 참여한 사람들은 벌써 고인이 되었다.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규모 7.9의 강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주변 관동지역을 강타한다. 점심준비로 불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곳곳에서 화재가 나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다. 땅은 갈라지고 불길은 퍼지고 많은 폐허된 거리에서 모든 것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로 공포에 떨었다.
내무성은 지진 다음 날 2일 도쿄에, 3일에는 가나가와현과 사이타마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전쟁이나 반란도 아닌 자연재난에 계엄령은 실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위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조선인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도둑질을 했다." 는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사람들은 그 말을 믿기 시작했다. 경찰과 군대와 지역에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들은 무차별적으로 아주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불과 며칠만에 6천명이 넘는 조선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에게 고향이 있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유족들은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독립신문에 보도된 희생자는 6661명. 일본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였으나, 피해자 수를 줄여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형식적으로 연행 조사했지만, 기소된 사람들은 무죄방면하였다. 이제까지 사법적인 책임이나 도의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9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방치해 오고 있다.
오감독은 이렇게 전했다.
당시 학살 사건은 일본이란 국가,민중, 민족의 범죄다. 요행히 당시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동포들이 부산에 귀국하면 항구에서부터 경찰이 찾아와서 겪은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며 감시하고 집까지 따라와서 밥도 사주면서 학교에 다니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회유했다고 한다. 일본은 자기들의 범죄를 은폐하는데 아주 철저했다고 한다.
작년 일본 구마모토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당시 어떤 나쁜 일본인이 sns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는다" 는 이야기를 퍼뜨렸다고 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9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아직도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
과거에 대한 일본 사회 내의 정리와 반성이 따르지 않았다는 이런 증표들은 이따금 한일의 시민단체와 개인들 사이의 소통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국가의 은폐와 이따금 드러나는 숨겨진 증거의 편린들. 숨겨진 발톱이 제목인 이유이리라.
현재 이 관동대지진 학살 문제에 뜻있는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첫째, 진상규명, 둘째, 보상, 셋째,명예회복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조작한 헛소문을 사실로 믿고 있다. 이미 동학농민혁명 때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 그 후로 관동대지진, 난징대학살에서 대학살은 반복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과거사가 드러나지 않고 반성되지 않아 오늘과 같은 박정희 시대 못된 짓들이 되풀이 되듯이 과거 비극의 역사에 대하여 국민들이 무관심하게 지나가면 또 다시 같은 비극이 생긴다.
최근에도 일본내에서 건축공사하다 유골이 나오면 일본인들이 "조선인 노예다" 라고 말한다고 한다. 아직도 일본 곳곳에 은폐된 역사의 사실들이 많다. 동굴같은 곳에는 잡혀가 노예처럼 생활하던 교포들이 써 놓은 "고향에 가고 싶다" 같은 낙서가 써 있다고 한다. 양국간에 풀어야 할 일은 많은데...일본이 원전사고마저 일어나 관련 발굴이나 조사 등의 해결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개인적 느낌이다.
오감독은 금년 9월 이전에 후속 영화 '1923 제노사이드-93년'을 침묵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그 분의 오랫동안 이어진 바른 뜻이 널리 펼쳐져 진정한 한일관계로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