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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3,15-16.21-22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경기방 형제자매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초대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온 게 아니라 초대받았다 그랬죠?
그렇죠, ‘그분이 불러주셨다.’ 이 얘기죠.
오늘 제대 앞을 아름답게 꽃꽂이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겨울에도 나는 실내를 차갑게 하고 사니까 굉장히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오늘 3개가 왔는데, 2층 경당으로도 올라가고 또 군데군데 잘 놓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꽃바구니가 오면 필요한 꽃들은 전부 다 말려 벽에 걸어놓거나 하죠.
그런데 말려보니까 희한해요.
다른 꽃들은 안 그런 데 장미꽃은 냄새가 안 나던 것도 1년 2년 지나 냄새나기 시작해요.
아무튼 꽃바구니 만들어 오시느라고 애쓰셨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 이 자리에 세례 안 받으신 분이 한 분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일단 이곳에 발을 디뎠으니깐 이제 뭐 방법이 없을 겁니다.
이제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들리겠죠.
여러분들 세례받을 때 생각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신부님 이마에 물 부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베푸나이다.’
그런데 대부분 교우들이 물 세례받은 것은 기억하는데, 그 세례받는 날 성령 세례받은 건 기억을 안 하고 살아요.
물과 성령으로 세례받았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이사야서 42장 1절부터 그 유명한 대목이 나오고 있죠.
오늘 강론의 주제는 ‘예수님을 닮은 세례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 받은 장소가 어디였죠? 요르단강.
혹시 요르단강 가보신 분 계십니까? 그곳 물에도 들어가 보셨나요?
나는 들어가 봤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2천 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물세례를 받으셨구나.’
그 당시 요한이 주는 세례는 지금처럼 이마에 찔끔찔끔 물을 붓는, 그게 아니었죠.
그냥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는 거예요.
그때 생각하면서 저도 그냥 푹 잠겼다가 나왔죠.
그리고 생각했던 것이 ‘그래 세례 때 확실히 담가야 해.’
뭐든지 담가야 맛있어, 겉절이보다는 김치도 항아리에 담가야 맛있고.
이것이 확실한 통계인지 모르는데 어느 목사님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개신교에는 파가 많은데, 천주교보다는 개신교 신자들의 냉담 비율이 적은 거 아시죠?
그런데 개신교 중에서도 죽었다 깨어도 냉담 안 하는 교파가 침례교래요.
침례교는 정말 세례 줄 때 욕조를 갖다 놓고 물에 푹 담갔다 꺼낸대요.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 냉담자가 많은 것이 물을 덜 부어서 그래.
그리고 그것도 조금만 흐르면 짜증 부리고.
사실 물을 많이 부어야 열심한 신자가 된다는 걸 내가 체험했거든요.
내 강론에도 나오지만, 옛날에 내가 군종 신부 때 사격장에서 기적이 일어났었죠.
그것 때문에 1개 대대가 연병장에 모여서 세례식을 했단 말이야.
워낙 많으니까 하나하나 어떻게 다 이름을 불러요.
성수채에 세례수를 찍어 뿌리며 다니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세례명은 각자가 대.’
이렇게 한 바퀴를 삥 돌았죠.
그날 돼지를 두 마리인가 세 마리를 잡았죠.
밥을 먹고 짚차 끌고 나오는데 백미러를 보니 한 놈이 그냥 죽으라고 쫓아와요.
차를 세우고 헉헉거리며 뛰어오는 아이에게 물었어요. ‘너 왜 그래?’
그랬더니 자기는 세례 못 받은 것 같대요.
뭔 소리냐 물으니, 자기한테는 물이 한 방울도 안 튀었대.
그래서 지금 신부님을 쫓아가지 못하면 자기는 한평생 고민 속에 살 것 같대요.
자기는 사이드에 있었기 때문에 물방울이 앞 사람 어깨에만 탁 떨어지고 자기에겐 안 왔대요.
세례 안 받은 거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위병소에서 양동이에 물 잔뜩 채워 위병소 밖에 무릎 꿇고 군복 윗옷만 벗으라 했죠.
그리고 런닝 샤스 위에 머리에서 부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분명 토마스라고 했을 거야, 세례를 줍니다.’
물을 많이 부어서인지 얘가 일반 대학 다니다 들어왔는데, 나중에 제대하고 졸업하고 신학교 들어갔어요.
지금 서울 교구 신부로 잘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시원치 않은 이유가 세례 때 확 잠겼다가 꺼내야 하는데, 코에 물이 들어가든 말든,
그냥 찔끔찔끔 몇 방울 떨어뜨리고 받았다고 하니 약발이 오래 못 가는 거야.
요르단강에 예수님은 침수하셨잖아요.
요르단강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되게 신선했어요.
우리 지금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상상을 해 봐요.
그때 당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았다고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왔어. 세례받으러.
예수님은 그 사람들 사이에 껴 있었던 거예요.
특별 대우를 받은 게 아니에요. 혼자 단독으로 준 게 아니었어요.
군중들 사이에 예수님이 껴 있었어.
세례자 요한도 사실은 예수님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때 세례 주면서 안 거예요.
‘저기 내 동생이 와 있구나’가 아니었어요.
저도 사제로 살면서 수도 없이 세례를 줬겠죠.
정말 한 특별한 경우는 한두 번 있었어요. 몸이 몹시 아파서 올 수 없는 사람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성당에서 줬어요.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 몇 시에 오세요?’ 그렇게 준 것이 아니죠.
수많은 사람이 가슴을 치며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러 몰려왔을 때,
그 군중 틈에 끼어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시면서, 요한 앞에 나타나시는 예수님.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나타나신 것일까?
특별 대우받으면서 나타나신 게 아니었다고 그랬죠.
권능을 가지신 그분이 무엇이 부족해고 아쉬워서 죄인들 틈에 끼어 세례받고자 하셨던 건가?
예수님 죄 있으세요? 없으세요? 없으신 분이에요.
세례는 ‘죄 사함’ 때문에 받는 거예요.
또 그 당시에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어요.
만일에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세례자 요한이 깔아뭉갰다면 사람들은 요한을 그냥 메시아로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복음에 나오듯이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이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따랐던 제자들 보러 뭐라 그래요?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자기 제자를 보내는 건 쉬운 게 아니에요.
최상의 자리에서 차선의 자리로 내려앉는 거는 쉽지 않아요, 권력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이 난리 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 대한민국도.
최고의 자리에서 그 밑으로 내려가는 건 쉬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의 모습도 참 위대한 거고, 군중들 사이에 끼어서 죄인들 사이에서 끼어서 같이 세례받는 예수님의 모습도
우리에게는 많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세요.
‘왜 예수님이 죄도 없는 그분이 세례받으셨을까요?’
그렇죠. 표양을 보이기 위해서.
그분이 죄가 있기에 죄 씻음을 받으려고 세례받은 게 아니라,
죄가 없는 나도 이렇게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진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표양으로 보여주신 것이죠.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세례에 대한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이래요.
요한의 세례 이전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세례받는 의식이라는 게 아예 없었어요.
다만 누구한테만 세례 줬느냐? 다른 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들에게만 베풀었어요.
그 이유는 죄에 물들고 더러워진 개종자들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우리는 선민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본인들은 절대 세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이렇게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만 세례를 줬던 게 세례의 유례예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뭐라 그래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막 어리둥절하고 난리가 났어.
‘아니 우리 유대인들이 왜 세례를 받아야 해?’
어리둥절하지만 요한의 그 강한 외침을 듣고 사람들은 요르단강에 와 세례를 받았던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한 가장 큰 일이 뭐냐? ‘민족 회개 운동’이었어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을 찾게 하는 거였어요.
선민사상이라고 하는 그 교만에 빠져 있던 그 유대인들에게 민족 회개 운동을 시킨 거죠.
지금이야말로 우리 지구인 회개 운동이 정말 필요할 때죠, 말세예요.
나는 40 몇 년 동안 정말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 민족의 회개를 위해서,
수많은 피정과 또 본당 신부하면서도 평일 강론도 피정 강론하듯 하면서, 게으름 피지 않고 강론했어요.
정말 되돌아보면 나는 강론하는 데 게으름을 떤 적은 없어요.
평일 강론이든 주일 강론이든 피정 강론이든 특강이든 늘 내 생애의 마지막 고별 강론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임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뒤돌아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요.
내 강론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개했을까, 회개한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42년 동안 강의를 했으면 수많은 사람이 들었을 텐데,
그 강론을 들었던 사람들이 회개해서 그 회개의 연대성으로 다른 사람에게 회개가 퍼져나가고,
또 내 말씀이 계속해서 전달되었다면 지금보다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됐었을 텐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어떨 때는 내가 유혹에 빠질 때가 있죠.
본당 신부 때도 평일 강론을 보통 30분 이상 했어요.
그런데 그 많은 얘기를 듣고 가만히 뒤돌아보면, 여전히 성당 안에는 패거리들이 있고,
입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어도 누구 하나 죽이려고 사나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서 모함하고.
본당에서도 그런 것을 보면서 아무리 몇 년 동안 좋은 강론을 들어도 다 때가 있구나.
어떤 사람들은 내 강론이 길다고 다른 미사를 가거든요.
그 사람도 언젠가는 마음의 문이 열릴 때가 있겠죠.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도 그랬을 거예요.
몇십 년 전에 누가 테이프 하나 줬는데 그냥 쳐박아 놨다가, 갑자기 벼랑 끝에 서서 어떻게 듣다 보니 가슴에 와닿고.
그래서 나는 세례자 요한 같이 살려고 애를 썼어요.
큰 주제는 정말 ‘회개 운동’.
요한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자기 죄를 의식했고 전에는 몰랐던 하느님의 필요성을 깨달았죠.
하지만 사실 어찌 보면 이것도 그때뿐이었어.
왜? 바로 이 인간들이 예수님 돌 던졌잖아요.
세례자 요한 쫓아다녔던 사람들이 다 예수님 3년 동안 쫓아다녔잖아요.
그런데 예수한테 돌 던지고 ‘죽여라. 바라빠를 놓아주어라.’
좋은 얘기는 다 들었던 사람들이에요.
세례자 요한 강론만 들었겠어요? 예수님의 강론도 3년 동안 들었잖아요.
그러더니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회개를 통해 새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면서 세례를 겸손하게 받으시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려 세례받으실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어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성부의 선언 소리가 들렸어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 말은 시편 2장 7절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은 이사야서 42장 수난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메시아가 나올 때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과연 ‘수난당하는 야훼의 종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오늘 제1독서에 나오죠.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4절에 제가 다시 읽어드릴게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제1독서 네 줄에 나오는 예수님이 가실 길은 어떻게 표현이 되느냐?
무엇보다도 첫 번째 조용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행동하신다는 거죠.
나팔을 요란하게 불거나 소란을 피우면서 ‘나 메시아다.’ 떠들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 싸우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들의 죄악을 참으시는 모습으로 예수님이 등장하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메시아의 출현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마구간에서 태어났겠어요?
성탄절이 되면 마구간을 우리는 이쁘게 장식하죠.
하지만 마구간이 예쁜 데예요, 깨끗한 데예요? 소똥 돼지똥 제일 더러운 데가 거기예요.
그것도 요람이 뭐야, 말 구유, 말먹이 있는데 포대기 하나 깔고.
이렇게 메시아의 출연은 출생부터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거였습니다.
둘째, 오늘 이사야서에서 또 어떤 얘기가 나옵니까?
상한 갈대처럼 약한 사람들에게는 온유하시다.
절대로 그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작은 불씨도 살리시고 내적 힘을 주셔서 잘 타오르게 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이제 42장 1절에서 4절의 말을 다시 요약하면 그거죠.
‘예수님은 치욕과 모욕이 있다고 해도, 조용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하느님과 함께 성부의 뜻을 행하시는 메시아다.’
그런 모습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세례받으셨어요, 화려하지도 않고 요란 떨지도 않고.
또 그분이 앞으로 죄인을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도 나왔죠.
이사야에 오히려 그 죄인 하나하나까지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다,
어떻게든지 살려보려고 애쓰시는 분으로 메시아에 대한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말 그대로죠.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사람까지도 다시 일으키고 끌어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아멘
여러분 자신이 상한 갈대로 살아갈 때가 있죠, 꺼져가는 등불처럼 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조금 더 뒤를 보면 나보다 더 심하고 아픈 모습으로 상한 갈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꺼져가는 등불 같은 사람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주는 삶이 세례받은 자의 첫 번째 의무와 권리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사람의 두 번째 의무요, 권리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정의로워야 한다.
세 번째 의무는 마음의 눈이 먼 이들의 눈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현재의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삶,
그래서 그들에게 하느님이 계심을 증거하고 해방과 자유를 주는 삶이 돼야 한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고, 성경의 주요한 테마는 사실은 ‘해방과 자유’예요.
해방은 다른 말로 치유를 뜻해요. 그리고 자유를 뜻해요.
여러분들 세례 받을 때 세 가지의 아주 높은 지위에 이렇게 오른다고 그랬죠, 뭐예요?
그리스도의 사제직, 에언직, 왕직. 순서는 상관없어요.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삶을 살라는 거죠?
한마디로 봉사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솔직히 봉사 받으실 때가 마음이 편합니까, 봉사할 때가 편합니까?
할 때가 편하죠.
누가 잔디밭 이쁘게 잘 가꾼 데 가서 앉아서 즐기기는 좋아해요.
하지만 이렇게 가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풀을 뽑았는지,
또 누가 알아주든 말든 쭈그리고 앉아서 미사 끝나고 풀 뽑고 화장실 청소하고 가는 것은 거는 생각 안 하거든.
깨끗한 화장실에서 일 보는 것은 봉사한 것이 아니라 받는 거예요.
봉사 받기만 한 사람은 봉사를 안 해봤기 때문에 그 어마어마한 기쁨을 못 느껴요.
그런데 봉사를 해본 사람은 누가 알아주든 말든 ‘주님이 흐뭇하시겠다, 예수님 조금이라도 닮아가야지,’
이런 마음으로 하다 보니 그냥 묵묵히 하는 거예요, 묵묵히.
여러분들 피정 때 말했는데 기억나세요? 주보를 7년 동안 다리미질 한 자매,
미사 끝나고 나면 주보 버리고 가는 사람 되게 많아요.
사실은 그거 다 돈인데, 신자들 헌금으로 주보 만든 것 아닙니까?
나중에 보면 처박아 놓고, 구겨놓고, 강론 안 듣고 낙서해 놓고, 뭐 별의별 주보가 다 있어.
그런데 그 자매는 내가 있는 7년 동안 교우들이 버리고 간 주보 갖다가 오후 내내 다림질해
저녁 미사 때 딱 주보 상에 갖다 놓는단 말이에요.
그런 거 한두 번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봐요.
그 자매는 자기가 하는 거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거야.
나만 알고 있었어요. 사무장도 몰랐어요.
왜? 내 사제관 서재 유리창에서 성당으로 그 자매가 들어가는 게 보였거든.
그 자매는 성당에서 드러나는 자매도 아니었고 직책을 맡고 있는 자매도 아니었어요.
그 자매를 볼 때마다 내가 이 성당 떠날 때 저 사람에게 큰 상을 주어야지 생각했죠.
떠나는 날이 됐어요, 환송식이 있었겠죠?
신부님 한말씀하라길래, ‘나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고 잘 살다 갑니다. 저기 저 자매님 앞으로 나오세요.’ 했죠.
사람들이 다 뒤를 돌아봤죠. 그 자매도 또 자기 뒤를 돌아봅디다.
‘자매님, 본명도 잘 모르겠네. 빨간 옷 입은 자매요.’
어리둥절 앞으로 끌려 나왔죠.
사람들 도대체 왜 신부님이 송별 미사하는데 저 자매를 불러내나, 공개 재판하나 했겠죠.
‘왜 이 자매 불러냈는지 모르죠?’ 물으니, 모두 모른대요.
그래서 이 자매가 내가 부임하던 첫 주일부터 7년 동안 한 주도 안 빠지고
여러분이 버리고 간 주보를 다리미질해 새 주보로 만들어 가져다 놓으신 분이시고,
그리고 이 자매 볼 때마다 떠날 때 상을 주고 싶었었다고 이야기했죠.
알고 계셨나 물으니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상 주려고 내가 앞으로 불렀다고 하니, 그때야 막 박수 소리가 여기서 들리더라고.
그래서 상 줬어요. 5인용 밥상.
그런데 밥상만 주면 김웅열 신부가 아니죠.
거기에 봉투까지 하나 줬지. 그 봉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12박 13일 해외 성지 순례 경비부터 비행기 표까지.
나중에 본당에 전화했더니, 후임 신부 하는 말,
‘신부님, 뭘 어떻게 하셨기에 신자들이 주보만 주우러 다녀요?’
하여튼 꼭 뒷북 치는 분들이 있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해야지.
처음부터 주보 줍고, 처음부터 화장실 청소하고, 처음부터 시간 나면 잔디밭 풀 뽑고 가야죠.
그것이 사제직의 목적입니다.
사제직의 목적은 군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에 있어요.
저도 고백성사 보며 항상 제일 먼저 ‘내가 과연 봉사하는 사제로 살았던가’를 깊이 묵상해요.
봉사 받으려고 하진 않았는가?
물론 내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분이 봉사하시어 힐링 피스 가든이 움직여 나가는 거예요.
나 혼자는 할 수가 없죠.
그렇지만 사제 마음 자세가 ‘사제니까 당연히 저런 봉사 대가를 받을 수 있어.’이건 아니죠.
늘 미안해하고 늘 감사하고 늘 어쩔 줄 몰라요, 사실은 와서 도와주고 그럴 때.
그래서 세례를 받은 예수님처럼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살아야 해요.
사제직의 목적은 뭐예요? 봉사하는 데 있다.
봉사하면 기분이 나빠질까요, 아니면 행복해질까요?
(대답)행복해져요.
그렇게 알고 있으니 제발 좀 하시라 이 말입니다.
봉사는 딴 게 아니에요.
하다못해 성당 좀 일찍 가서 빗자루 들고 성당 앞마당 한 번 쓰는 것도 큰 봉사예요.
화장실 청소, 쓰레기 줍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까?
순서는 상관없지만, 두 번째로 예언직을 살펴봅시다.
예언직의 목적은 뭘까요? 말 그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이거는 의무예요.
여러분은 세례받고 전교하신 분들이 몇 분 되십니까?
예언직, 분명히 이건 의무인데 내가 게을러서 또는 자신이 없어서 주저하죠.
피정 때 했던 이야기인데 기억나시나 모르겠어요.
예비자 교리 첫날 신상 카드 쓰잖아요, 그 맨 밑에 입교 동기를 적는 곳이 있어요.
보통 80%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한 10%는 이웃의 권유로.
그리고 자기 발로 찾아왔다는 사람들도 꽤 돼요.
그런데 아주 특이한 입교 동기가 하나가 나온 거예요.
어느 형제가 쓰고 간 건데 동기가 뭐냐?
아주 간단해 ‘성질나서’
성질나서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왔다니, 일주일 동안 너무 궁금한 거예요.
다음 주일 첫 교리를 하고 그 형제에게 차 한잔하자며 따로 불렀어요.
내가 신부 생활하는 동안 이런 입교 동기는 처음 봤는데, 뭐가 그렇게 성질이 나서 천주교 들어오셨냐고 물었죠.
그 사람들이 웃으면서 진짜 성질이 나서 온거니 들어보시래요.
그러면서 자기 회사에 한 사무실에서 거의 30년 동안 같이 근무하는 직장 상사가 있대요.
얘기 듣기로 상사는 성당에서 회장부터 레지오 단장도 하고, 책상에도 작은 십자가도 있대요.
차에 묵주 달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혼자 중얼중얼 염주인지 뭔지 굴리고 있대요.
그 상사랑 술을 먹은 것만 해도 대략 한 300번 먹었대, 그 긴 시간 동안.
형 같은 그런 사람이래요.
정말 지나가는 말이라도 ‘우리 성당 한번 가자’ 그 말해주기를 30년을 기다렸대.
그런데 한 번도 안 해주더래요.
내가 그렇게 가능성이 없어 보이나, 자괴감도 들고. 저놈은 교회 다닐 놈도 아니라고 개무시당하는 느낌도 들고.
한 번만 해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끌려갈 준비를 30년 전부터 했는데,
이러다 내가 안 되겠다. 내 발로 걸어가야겠다고 생긱했대요.
그래서 성질나서 왔대.
그런데 사실 이게 웃을 얘기가 아니에요.
주변에 보면 여러분과 관계성 있는 사람들, 피붙이, 같은 일터 사람들, 한 아파트 주민.
또 냉담자들은 좀 많아요?
과연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명을 행하려고 애를 썼는가?
여러분들 그거 아셔야 해요.
우리가 나중에 나도 그렇고, 심판대에 한 번 서잖아요.
심판대 섰을 때 기준이 그 세 가지에 대한 이행 여부예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얼마나 충실히 하고 살았나?
그리스도의 예언직, 그리스도의 왕직을 얼마나 충실하고 살았나?
이 세 가지가 우리 심판의 아주 중요한 테마예요.
그런데 죽을 때가 다 됐는데 뒤돌아보니 한평생 봉사한 게 뭘까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를 써도 한 기억이 안 나,
또 한평생 내가 누구한테 전교했나, 세례를 시킨 적이 있나 아무리 찾아봐도 한 번도 없어.
왕직도 마찬가지고
무섭지 않으세요?
그 세 가지를 못 하고 죽었는데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했을 때 무서운 얘기죠.
세상 사람들은 얻을 수 없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그걸 행해야 해요.
사제직이 되려면은 봉사해야 돼요.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행하려면 전교해야 되죠.
버스 터미널이나 지하철 같은 데 ‘예수 믿으십시오.’하는 분들 있죠?
그 사람들 보면 여러분들 무슨 생각해요?
‘극성~~ 꼭 저렇게 해야 해?’
그렇게 해야 해요, 그 사람들이 맞는 거예요.
내가 못 하기에 질투심 때문에 그 사람들 막 욕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본당에 있을 땐 고백 성사 보속은 오로지 한 가지였어.
전교시키려고 ‘터미널에 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10번 외치기.’
며칠 지나 몰래 가서 보면, 그런 보속은 처음 받아본 거잖아요?
어떤 사람은 차 하나도 없는데 혼자서 ‘예수 믿어요.’, 안 할 수는 없겠고.
가서 ‘버스에서 사람 내릴 때 해요.’ 하면, 모두 깜짝 놀라죠.
그렇게 한 이삼 년을 하고 이제는 됐겠다 싶어 가두선교를 시작했죠.
미사 끝나고 나면 첫 번째 나가는 무리는 깡통 들고 쓰레기, 가게 앞에 꽁초 주웠죠.
그 뒤에 띠 하나씩 메고 천주교 알려드리는 책자를 가게마다 나누어 주었죠.
난리 났었어요, 그때 평화신문에도 났었잖아.
그 당시 예비자만 240명이었고, 170명인가 세례를 받았죠.
천주교 신자들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순복음 교회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도 아니라.
우리 천주교 신자들도 동기부여만 해주고 목자가 잘 끌어만 주면 얼마든지 전교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남은 세례 받은 자의 마지막 의무와 권리가 뭐예요?
왕이 되는 거예요.
왕직의 목적은 뭐냐? 영적 자유를 누리는 거예요.
노예들은 팔다리가 다 묶여 있죠.
밤에 도망갈까 봐 발을 채우고 허리띠를 뺏어요.
노예들은 자유가 없고 왕들은 자유가 있어요.
영적 자유는 뭐냐? 다른 말로 무소유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해요.
물질로부터 노예가 돼서는 안 되고, 욕심, 교만, 미움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서 영적인 자유를 누려야 해요.
결코 이 세 가지가 다 쉬운 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목적은 봉사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 예언직의 목적은 선교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 왕직의 목적은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데 있다.
여러분들 솔직히 차만 있으면 어디든지 다 가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 마음이 자유로운 건 아니야.
감옥이라고 하는 개념은 얼마나 넓은 곳에 사느냐 작은 곳에 사느냐하는 개념이 아니죠.
정말 작은 공간에 살아도 영적 자유가 있는 사람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비행기 타고 전 세계를 다 돌아다녀도 미움이라고 하는 감옥, 용서 못 하는 감옥,
욕심이라고 하는 감옥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행복하질 않잖아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왕직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런 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기쁘게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 이 세 가지의 모습의 모범을 보여주신 거죠.
그렇기에 예수님 족보에서 예수님 이름 다음으로 올라가야 할 이름은 바로 우리 이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패밀리에요, 맞죠?
마태오 복음에 예수님까지만 족보에 있죠, 그다음에 누구 이름이 올라가야 한다고요?
골룸바 이름이 올라가야 하고, 토마스 아퀴나스 이름도 올라가야 하고, 김웅열 신부 이름도 올라가야 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호적에 올라가야 할 사람들이에요.
같은 패밀리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삶이 우리 나중에 심판 기준이 될 것이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이 아닌 것은 아시죠?
유튜브 들어보면 따로따로 분리해서 얘기도 하고, 많이 얘기했죠.
우리가 세례받았을 때 물로만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도 같이 받았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행할 수 있게끔 우리의 버팀목이 돼주고 힘을 주시는 분이 누구예요?
성령이시죠. 그리고 거기에 한 분 더 성모님이세요.
힘들고 어려울 때 성령께 도움을 청하고 성모님께 매달리면 우리의 기도 절대 거절하시는 법이 없다는 게 우리 가톨릭 교리죠.
그러니 우리는 성모님께 전구 청하고,
또 내가 성화 되기를 원하시는 성령께 ‘제가 힘이 약합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고 늘 청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