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옷 같은 여름에 들어서고 막연했던 휴가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면서 거의 충동(그 순간엔 그랬다)에 가까운 강릉행 기차여행을 강행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한번은 해보고 싶었던 '기차 타고 강릉행'이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먼저 강릉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광안내책자 송부를 부탁해놓고 일주일전 기차표 예매에 들어갔다. 물론 좌석은 넉넉한 때다.
여행의 시발점은 순천역,
8월 14일 00:06 순천-->부산 04:08 주중요금적용으로 15%할인된 9900원-->이하 동행 1인
같은 날 09:10 부산-->정동진 17:30 역시 주중요금적용 -20100원
15일 16:30 강릉-->조치원 22:30 -16800원
16일 00:28 조치원-->순천 04:28 -14200원
경기도를 빼고 전국을 기차로 한바퀴 도는 셈이다.
8월 13일 퇴근 후 집에 들러 최소한의 짐을 꾸리고 역을 향했다.
동행의 푸짐한(?) 배낭을 보고 1박3일 여정의 고달픔이 살짝 엿보이는 듯 .
부산까지 가는 동안은 내쳐 자기로 한다.
기차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창 밖 풍경 내다보기일텐데 밤이라 창에 하룻동안 지친 내 얼굴밖에 비치지 않음이니 한잠 청해 두는 것이 앞으로의 여정에 보탬이 되리라.
밤을 달린 기차가 부산에 안착하고 다음 기차 탈 때까지의 시간적 여유와 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찜질방을 찾아보지만 찜질방을 보이지 않고 웬 스포츠마사지 간판은 그리 많은지...
결국 역 광장에서 날을 새기로 하는데 하늘에 달과 별이 참 맑다.
비 소식이 있어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다. 역 근처 식당에서 아침식사 해결하고 드디어 강릉행 줄서다.
휴가 막바지에 내일이 공휴일이라 그런지 역사는 사람냄새가 겹겹이 포개지는 것 같다.
초행이라 잠들지 않고 지나가는 역마다의 풍경을 담으려던 내 거창한 생각은 부산을 벗어나고부터 밀려오는 잠더미에 산산히 부셔지고 만다.
잠결에 경주 영천 의성을 지나고 안동에 이르러서야 정신이 드는 듯, 잠을 떨쳐내고 바깥에 시선을 돌리며 그나마 자주 이용했던 전라선과는 다른 풍경을 발견한다.
전라선이 시야가 넓게 트인 평야지대를 주로 달리는 반면 이곳 중앙선에서 영동선으로 접어들면서 산과 산을 헤집고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새삼 내가 영동을 달리고있다는 실감을 한다. 춘양을 지나고 승부 통리 도계역 등 낯설지 않은 역명이 다음 번 여행지를 예약이라도 하는 듯 지난다.
동해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정동진까지는 내내 바다를 보며 달리게 된다. 짙푸른 바다와 길게 내달은 백사장, 떼로 모여든 갈매기 그리고 사람사람사람
여행길에 들어서기 전부터 지도를 보며 아쉬워했던 부산 강릉간 해안을 따라가는 기차선은 왜 없나에 대한 답이라도 얻으려는 듯 시선은 내내 바다를 향하고...
그 시원한 바다냄새란....
곳곳에 송림이 있어 틈새로 보이는 바다 또한 고른 감성을 자극한다.
정동진,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한없이 수평선만 바라봐도 좋을, 그러다가 보랏빛 어둠이 수평선위로 살짝 발을 디딜즈음 해안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는 어선들의 불빛은 노곤한 하루를 달래는 '풍경'이다. 어찌 해돋이만이 이곳을 대변한다 할까.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표현이 딱 맞을 듯 싶다.
어느곳이 그렇지 않을까마는 바다가 있고 바다를 느낄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정동진은 참 아름답다.
묵을 곳을 정하고 이부자리에 누운 게 마흔 시간만인가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부벼가며 바다로 향하는데 빗방울이 듣는다.
민박집 할머니 말씀이 지나가는 비란다. 정말이다. 빗방울은 지나가고 모래위에 서서 해를 맞았다. 수평선 위 이부자리마냥 깔린 구름을 들추고 빛이 오르고 있다. 눈이 부시다...
8ton 모래를 품고 해를 바라보고 섰는 모래시계를 뒤로 정동진-강릉행 통일호 기차에 올랐다.
강릉역에 내려 커피한잔으로 피곤을 쫓고 동행이 한잠 청하는 30여분동안 여정을 정리한다.
목적했던 오죽헌, 선교장, 허난설헌 생가터등을 둘러볼참으로 관광안내소에서 교통편을 묻고 시내버스로 오죽헌 도착,
입구에서 아침 겸 점심 삼아 요기를 하고 오죽헌 들어서는 데 광복절이라 입장료가 무료란다.
다른건 제치고 뒷곁 오죽숲으로 들어섰더니 아름드리 솔숲이다.
한참 소나무와 맞대고 섰다가 나와 분향소에 분향하고,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역사속으로 들어가 사임당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죽헌을 나와 멀잖은 위치의 선교장은 택시를 이용해 이동하고, 선교장 또한 저택보다는 솔숲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 돌아 나오는 길 분홍빛 연꽃 한 송이 참 곱다.
다시 시내버스 이용해 경포대로 향한다.
달밤이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던 곳, 아름드리 나무아래서 휴식을 취하면서 허난설헌 생가터는 '다음기회가 된다면...'으로 접어두고 강릉역으로 향했다.
동해의 파도를 뒤로 내륙으로 치닫는 열차안에서 바깥풍경에 몰입될 즈음 날이 어두워지고 기차 안에서나마 느끼고 싶었던 영월 청령포의 감성은 어둠에 같이 묻히는 듯 잠속으로 빨려들었다. 다음 내릴 곳 조치원 역이라는 안내방송을 듣고서 잠 떨쳐내고 서둘러 짐 챙겨 내렸다.
이제 마지막 집을 향한 조치원 순천행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 이미 쌓일만큼 쌓인 피로가 메일확인조차 거부하고 겨우 동생에게 집에 가는중이라는 전화 한통화.
8월 16일 00:28분 조치원역에서 순천행 열차에 올랐다. 이번 여행의 다섯 번째이며 마지막기차에서 역시나 청하는 잠, 아니 청하지 않아도 절로 찾아드는 잠에 나를 맡겨버린다.
04:28 순천역 도착
역광장의 새벽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향한다.
버리고자 떠난 여행에 더 많은 걸 채워 온 듯하다.
첫댓글 재미있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정말 기억에 많이 남을만한 여행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박준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