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래동고인돌
위치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419~420번지일대, 산12-6번지일대
지정 : 대전광역시기념물 제33호(97.11.7)
토지소유자 : 한국도로공사
□ 문제점
- 대전시 소유의 토지가 아니기에 관리가 엉망이다. 마을 주민들이 밭을 개간하거나 주변에 소각장, 음식물 처리장, 개 사육, 농기계 방치 등 주변 경관이 지정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량하다. 시가 매입해서 철저한 관리가 요망된다.
- 인근 주민들에게 들어보면 처음에는 10기 이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일반 시민들이 쉽게 볼 수 있는 2기의 고인돌만이라도 잘 관리되어 비래동 비래골의 유구한 역사를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접근도 불편하고 계족산 등산로 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문화재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 12월 20일 현재모습
1.5m 거리의 소각장 2호 고인돌 위에 박힌 못과 페인트칠
비래동(比來洞)고인돌유적은 신대동취락유적과 함께 1997년 4월 충남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를 담당했는데, 역시 경부고속도로 확장구간에 위치한 것이었다. 유적의 위치는 정확히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419~420번지일대와 산12-6번지일대의 야산 정상부(해발128m)이다. 비래동고인돌유적 발굴조사는 비래골마을회관 앞 419~420번지일대의 계단식논에 고인돌 2기, 또한 경부고속도로 맞은 편의 구릉 정상부에 1기를 대상으로 했다. 물론 발굴조사된 고인돌 3기외에 몇 기 더 분포하고 있는 사실도 지표 조사때 이미 밝혀진 바 있다.
1호고인돌은 비래골마을회관 전면에 1963년 4H활동으로 세운 입석근처의 것이다. 이것은 산록의 능선부에 780㎝×440㎝정도의 범위에 걸쳐 잡석 및 황갈색 점토층울 약 0.5~1m가량의 높이로 성토한 다음, 매장주체부인 석곽을 축조했다. 동서장축 방향의 석곽의 크기는 230×140㎝가량되고, 양쪽 끝은 후대교란으로 결실되었다. 석곽 바닥에는 10~20㎝크기의 얇은 판석을 깔았고, 뚜껑돌 크기는 180㎝×250㎝×50㎝가량이다. 뚜껑돌에는 성혈 24개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요녕식동검 1점, 삼각만입형석촉(石鏃) 3점, 붉은간토기 1점이 있다. 요녕식동검은 등대에 돌기가 사라진 중기형이다. 슴베부분은 한반도 남부지방출토 요녕식동검의 특징인 홈이 있다.
2호고인돌은 1호고인돌에서 동쪽으로 약5m정도 떨어져 있다. 뚜껑돌 규모는 약 290㎝×260㎝×45㎝가량되며, 성혈 16개가 불규칙적으로 나있다. 1호고인돌에 비하면 교란이 심한 편으로 매장주체부의 거의 바닥면에서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석곽은 동서방향 1단정도 남아있는데, 규모는 220㎝×120㎝정도로 추정된다. 1호와 마찬가지로 묘역을 황갈색점토로 조성한 후, 그위에 매장주체부를 축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황갈색점토 묘역의 범위는 대략 600㎝×440㎝의 원형이다. 출토유물은 붉은간토기편 3점뿐이다.
3호고인돌은 1 · 2호고인돌에서 경부고속도로 건너편 서쪽으로 약300m가량 떨어진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 고인돌은 도굴의 피해를 입어, 뚜껑돌이 매장주체부로부터 얼마간 이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석곽구조도 교란되었다. 3호고인돌은 1 · 2호와 달리 구지표를 파낸후, 할석으로 석곽을 축조하였다. 매장주체부의 크기는 180㎝×40㎝되며, 바닥에는 얇은 판석을 깔았다. 출토유물은 민무늬토기편 및 관옥 1점만이 수습되었다.
비래동고인돌유적은 요녕식동검이 부장된 고인돌로서는 금강유역 최초례이다. 돌살촉과 같은 공반유물의 형식으로 미루어 인접 신대동취락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보이며, 비래동고인돌의 축조시기는 대략 B.C. 7~6세기경으로 추정한다. 고인돌형식은 개석식(蓋石式)고인돌에 속하는데, 한국 최초로 봉분형(封墳形) 원형성토부(圓形盛土部)가 확인되었다. 이 구조는 고인돌의 뚜껑돌을 매장주체부위로 쉽게 이동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것같다. 비래동고인돌유적도 신대동취락유적과 함께 초기농경 정착단계에 접어든 고인돌사회의 취락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大田廣域市鄕土史料館, 《大田地方의 發掘遺蹟》,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