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타 있는 순간은 온전히 갇힌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그런데 밀폐된 공간에 몇 시간을 있노라면 몸은 묶여 있지만 머리는 뒹굴뒹굴 잘도 돌아가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비행기를 타면 잡생각이 많아진다.
작년에도 심심치 않게 비행기를 탔드랬다. 그때마다 이런 저런 생각의 단상들을 수첩에 적어놨더니 나름대로 빼꼭하다. 어느 것은 내가 쓴 거지만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고 어느 것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보게 되면 피식 웃음이 나는 메모들이다. 그 중에 그나마 함께 이야기 하고 싶은 두 개를 건져보니...
해외 여행, 이제는 길게 가자
푸켓이나 사무이, 발리와 같은 휴양지에 가게 되면 한국인 여행객과 유럽 여행객 사이에 여행 패턴에 큰 간극이 있음이 발견된다. 물론 그 차이는 과거에도 있었다. 이른 바 깃발 부대 일본을 위시한 동북아 국가의 우루루 몰려다니는스타일과 서양 아해들의 개별 여행 스탈이 가장 큰 차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개별 자유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이런 차이는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최근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여행 기간의 차이다. 우리의 경우 한 나라의 한 도시를 체류하는 기간이 극히 짧다. 여행사 프로그램을 이용한 패키지, 허니문 여행자는 물론 개별배낭자 모두 한 도시에서 일주일 이상을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다. 홍콩/방콕/싱가폴/말레이지아를 4 박 5 일에 후딱 해치워 버리는 패키지 여행이 여전히 스테디셀러가 되고 있고 허니문 역시 3 박 4 일이나 4 박 5 일이 주 패턴이다.
반면 유럽 사람들의 경우 이런 식으로 여행을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얘들은 최소한 1 주일, 길면 한 달 이상을 체류한다. 허름한 숙소에 묵으면서 오토바이 하나 장기렌트하고 거의 현지인처럼 생활한다. 아무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보다 여유가 있다는 점이, 삶의 질을 생각함에 있어 놀고 쉬는 것에 비중을 많이 두는 그네들의 오래된 전통이 이런 환경을 만들었겠지만 어쨌든 보는 넘 입장에서는 시샘섞인 부러움까지 생길 지경이다.
우리야.. 어디 그러한가? 돈이 쫌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으면 돈이 한 개도 없고 두 개가 다 있는 것 같으면 정신적인 여유가 없고 이래저래 여행을 생활화 하기가 요원할뿐이다. 직딩들 결혼하면 나오는 휴가가 달랑 일주일, 그나마 요즘은 주 5 일 바람이 불어 연타석 휴일을 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어찌됐건 저찌됐건 여행은 길게 가야 한다. 연차를 몰아쓰던, 월차를 적립했다 쓰던, 최대한 회사에 짤리지 않는 선에서, 두 번 짧게 갈 거 한 번 길 게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행은 무조건 길게 가야 한다. (시간 널널한 학생제위 혹은 모은 돈 가지고 여행가는 백수님들은 두말할 나위없고)
왜?
주마간산식의 여행이 아닌 한 곳을 뽕빨내는 여행이 훨씬 많은 것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넘 유치원 삘이 나니 그걸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테고.. 여행 경비가 가지고 있는 원가의 문제, 즉 경제 논리에서 긴 여행의 이유는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고가의 리조트에서 묵는 딜럭스 허니문 여행을 제외하고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여행 상품, 혹은 개인이 일정을 짜는 개별여행 모두 여행비 원가의 약 70 ~ 80 프로는 항공료다. 물론 패키지는 항공료가 여행비 구성의 100 프로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여행 원가에 있어 항공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방콕의 경우 하루에 1 만원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호텔에서 잠을 자고 한끼에 1 천 5 백원이면 현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 방콕구간의 항공료만 40 ~ 60 만원에 판매된다. 방콕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발리, 세부, 보라카이, 그리고 좀더 멀리 가서 호주, 유럽 역시 뱅기값이 여행비의 막중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항공료라는 것이 일찍 돌아온다고 싸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있는다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항공 티켓에는 돌아와야 할 기간이라는 것이 명시되어있지만 그것도 1 달이거나 45 일 정도로 넉넉하다.
즉 4 박 5 일을 여행가는 것이나 9 박 10 일을 여행가는 것이나 실제 총 여행경비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힘들게 비행기 타고 외국까지 간 거라고 한다면,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내용이나 비용에서나 본전을 뽑는 것이다.. 라는 말이 그래서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요즘 허니무너들의 경향을 보면 여행사들이 만든 상품에 1 박 혹은 2 박을 추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대중성이라는 이유로 긴 여행 상품을 만들지 못하는 여행사보다 시장이 먼저 움직인다는 징조고 이거 상당히 잘 하는 방법들이다. 언제까지 우리의 여행이 사흘이나 나흘짜리 번갯불 패턴이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도 동남아 여기 저기서 웃통 벗고 유럽넘들과 오토바이 레이싱 한 번 해줘야 뽀다구 좀 나지 않겠나. 그러니... 애를 써서라도 여행은 길게 가자.
우리가 해외 여행을 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
'국내도 모르면서 해외를 간다' 거나 '경상수지 적자가 어쩌니 저쩌니' 말하는 넘들은 지덜이나 열심히 내방을 지키라 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왠만하면 나가주시라. 없는 돈 아껴서라도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나가주시라.
노루 꼬리만한 땅에서 반도 국가라는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태어나, 우덜끼리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에 익숙한 우리의 눈크기는 밖으로 싸돌아 다녀야 쫙 째질 수 있다는 것을 본 청장은 경험상 확신한다. 한 번 쯤은 밖에서 우리를 객관적으로 봐줘야 생각의 나무도 쑥쑥 클 수 있다는 것 역시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신념이다.
그런데 최근에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를 한 개 추가했다. 그것은 바로 여행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민족적 배타성 및 차별성을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부정하든 부정하지 않든 우리는 타민족-특히 우리모다 후졌다고 생각하는 피플들에 대한-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폐쇄성을 가지고 있다. 백인들의 유색인 차별에 대해 우리는 꼬운 눈초리를 보내지만 동두천이나 평택 등에 몇 시간 있어보면 우리가 그걸 욕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쉽게 알게 된다. 동남아인이나 흑인들에게 보이는 차별은 아예 노골적이다. 그리고 의식적이 아닌 무의식적이다. 아프리카 검둥이라는 말은 거의 고유명사였고 크레파스의 누런 색을 살색으로 부르고 있었으니.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순결한 혈통주의가 그 원인이라면 뒤 섞여 살아보는 것도 부끄러운우리의 자화상을 치료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도 내 땅에서가 아니라 남의 땅에서. 내가 다수의 무리가 아니라 소수의 입장으로.
대개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체험은, 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과 이틀 이상을 있게 되면 다름에 대한 이질감이 거의 씻은 듯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지저분해 보이던 인상보다 수정 같은 눈빛이 먼저 보인다. 그을린 검정 피부색보다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 해맑은 미소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변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냥 무덤덤해진다. 내가 쟤들 같고 쟤들이 나같아 버린다. 그런 식으로 여행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오면 전철 안에서 만나는 동남아 노동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된다. 무관심 할 만큼 특별함을 못느낀다는 것이다.
얘들 눈빛 좀 바바라. 안 찔리냐?
해외 여행이 주는 커다란 선물은 이런 것이다. 우리 안에 유전되어 흘러온 닫혀진 민족차별 의식을 여행이라는 씻김굿으로 상당 부분 치유할 수 있다는 것... 동의하시는가? 웬만하면 그렇다고 하시라. 아님 김빠진다. 동의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