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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채식강연과 채식부페 좋은 행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먼 길 해외여행은 쿠바가 처음이었고, 쿠바라는 나라에 대해 평소 오랫동안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쿠바가 그냥 제게로 먼저 온 것인지, 그저 우연히 다가온 기회였지요. 그래도 보통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대한 조금의 호기심과 살사와 음악의 나라라는 기대와 환상 같은 것들을 안고 떠났습니다. 여행의 형식이 자유여행이 아니고 단체였고 일정은 쿠바 정부와 일정정도 협약된 기관들을 방문한 것이어서 장점도 있었지만 정말 살아있는 쿠바라는 생생한 텍스트를 만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즈음 쿠바는 유기농 녹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위기와 식량위기를 극복한 나라로 21세기의 대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짧은 10일간의 여정에서 본 쿠바는 일상이라는 아주 미시적인 시각이어서인지 우리가 너무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쿠바가 대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례라는 생각으로. 며칠 전 사임한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에 대한 많은 기대와 우려 등이 있는 가운데 이번 달 초록영화제에 쿠바의 공동체의 힘 다큐를 상영한다고 하지요 제가 사람들 앞에서 여행이야기를 하기에는 많이 쑥스럽기도 하구요 부족한 여행기를 첨부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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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서 함께 살아남기, 쿠바의 빛과 그림자
1. 쿠바에 가게 된 경로....
2007년 말 귀농통문 소식지가 왔다. 자발적 삶의 공간에서 진정 자기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보람과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책장을 넘기다가 생명평화 비움 잔치 2008년 신년 단식이라는 광고를 보았다. 주최는 처음 듣게 된 전북생명평화설레임이었다. ‘생명평화설레임’이라는 말은 분명 더는 버릴게 없는 삶의 핵심어들이다. 그러나 내게 설레임이라는 말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고 설레임을 잃지 않기 위한 내 안의 생명과 평화는 많이 지쳐 있었다. 다시 그 설레임을 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비움 단식에 참가했다. 3박 4일의 일정에서 몸 속은 비웠지만 배고픔을 몰랐던 것은 비움의 자리에 또 다른 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우고 함께함으로써 일상에서 소진된 생명력은 내 안의 평화와 설레임을 다시 회복시키고 있었다. 거기다가 또 하나의 보너스까지 있었다.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행사를 주관하신 바우 님(황대권 선생님)께서 쿠바여행에 관한 광고를 하셨다. 여행 일정 중 구정 연휴가 끼여서 아직 신청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쿠바였기에 주저 없이 참가 신청을 하였다. 그동안 아껴 둔 해외여행이라는 카드를 결정적으로 사용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2. 제8회 2008 세계생태공동체 순례
인류 미래의 희망, 녹색혁명의 나라 쿠바! 열정의 라틴 문화 체험이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1/28-2/8의 12일간의 일정을 가졌다. 이 행사는 대전 대동복지사회관 평화의 마을에서 8회째 이어온 생태공동체 순례의 하나이며 특히 이번 쿠바기행은 한ㆍ쿠바 문화복지기금(준)1)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쿠바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떤 울림과 끌림을 가지는 말인지도 모른다.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로 그것도 자본주의의 초강대국 미국의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섬나라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열정의 라틴문화를 가진 나라. 아직 우리나라와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쿠바로 가는 길은 멀 수밖에 없다. 인천에서 캐나다 벤쿠버까지 약 9시간의 비행, 그리고 다시 토론토까지 4시간 30분의 비행 후 하룻밤을 캐나다에서 머물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공항으로 이동하여 약 4시간의 비행 후에 모든 쿠바 인민들의 수도라는 아바나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국제공항이라기엔 아주 소박한 규모이고 물자부족을 겪고 있는 나라답게 화장실에는 화장지를 한번씩 사용할 만큼 세면대 위에 조금씩 놓아두었다. 쿠바의 관문 아바나 공항에 붙여진 이름 호세 마르티(1853~1895)는 쿠바 인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자 스페인 식민지 시절인 1895년 쿠바 혁명당을 결성해 2차 독립전쟁을 주도한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며 쿠바 곳곳에서 그의 사진과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먼저 쿠바에 와 있던 한ㆍ쿠바 문화복지협(추) 녹색기금 사무처장 이희찬 님은 40여 차례 쿠바를 방문하며 인간중심의 시스템이 있는 쿠바를 좋아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인간중심의 시스템, 그것이 쿠바에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나도 이 곳 먼 땅 쿠바에까지 왔을 것이다.
쿠바에 있는 동안 머물 신(新) 아바나에 위치한 옥시덴탈 미라마르 호텔에 짐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시내구경에 나섰다. 먼저 미국 국회의사당을 본 따 만들었다는 아주 웅장한 규모의 카피톨리오(Capitolio Nacional)는 1929년 개관하여 1959년까지 쿠바 국회의사당이었다. 현재는 쿠바 과학원과 국립과학기술 도서관으로 탈바꿈하여 일반인에게도 견학을 허락하고 있다. 올드 아바나 시내 전체가 스페인과 미국이 지배하던 시기에 건축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석조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마치 오래된 중세 유럽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재정비할 예산이 부족하여 그대로 낡아가고 있는 건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바나의 거리는 나이, 국적, 그 무엇도 구분하지 않은 채 함께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익숙한 자본주의의 개인적인 밀실 문화가 아닌 시내 중심가에 이어져 있는 열린 광장 속에서 넝마의 노파와 외국인 관광객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함께 섞이고 녹아 있는 쿠바인들에게서 특별히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의식과 경계는 없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고 말을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려함이나 풍성함이 아닌 빛바랜 흑백 사진과도 같은 이 도시 올드 아바나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자유롭게 하고 불러들이게 하는 것인지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 올드 아바나의 거리 ]
3. 쿠바에서 외국인 관광자라는 것....
아바나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여행 일정이 다소 변경되어 여행의 후반기에 계획되어 있던 바라데로 해변으로 먼저 떠났다. 이번 여행에서 욕심을 낸 것은 학습과 휴양이라는 두 가지를 함께 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바라데로는 진흙같이 부드러운 해변의 백토와 카리브해의 청잣빛 바다를 가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휴양지이지만 쿠바에서는 외국인들에게만 개방되고 있는 곳이다. 사회주의 속의 자본주의라고도 불리는 바라데로는 쿠바 국가나 외국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고급 호텔들이 가득하다. 이곳 뿐만이 아니라 쿠바에 있는 모든 호텔은 자국민이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현재 쿠바의 재정수입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관광산업은 국가가 계획적으로 주도하고 있는데 쿠바 민간인들이 외국 관광객들과 자유로이 접촉할 수 없도록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왠지 나의 촌스러움 때문인지 쿠바에까지 와서 별천지와도 같은 럭셔리한 환경에서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과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섞이기는 시차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고립된 위기상황에서 쿠바 정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관광산업은 이중화폐 경제를 만들었고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전환페소(CUC)는 쿠바인들이 사용하는 현지인 페소보다 24배의 교환가치를 가지며 달러로 교환할 수 있는 화폐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쿠바인들 중에는 의도적으로 외국인들에게 접촉하거나 가끔은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들도 거리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자연스럽고 개방적으로 외국인을 대하면서도 대부분이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의 풍요로운 소비를 보면서 쿠바인들이 느끼는 위화감과 적대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서도 체감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온 쿠바에도 여전히 관광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바이러스처럼 자본의 물결은 스며들고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달러로 바라보는 쿠바인들의 눈빛이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내가 그들에게 변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이기심이자 또 다른 기우인지도 모른다. 쿠바에 머무는 10일 동안 우리 일행은 모두 호텔에서 묵으며 냉방이 잘 되어 있는 고급 리무진버스로 이동하며 정부기관과 협약된 기관들을 방문하기에 쿠바라는 살아있는 생생한 텍스트를 체험하기에는 한계를 가지는 기행이 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4. 위기에서 함께 살아남기
바라데로에서 이틀을 보내고 완전히 시차를 극복하고 다시 아바나 숙소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쿠바의 생태와 농업에 대한 견학 일정이 시작되었다.
쿠바 아바나를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만든 유기농업에 대한 견학을 위해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일명 상하이 농장이라 불리는 도시채소농장(CPA)2)과 알라마르 협동농장(UBPC)3) 그리고 농림부 산하기관 액타프(ACTAF)4)와 컨설팅 숍(CTA)5)이라는 곳이다.
[ 도시 채소 농장 ]
쿠바가 유기농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쿠바 경제가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1990년 이전 쿠바인들의 삶의 질은 미국인들보다 나았다고 하는 좋은 시절이 막을 내리고 1990년 이후 쿠바의 상황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수출입 시장의 80%를 잃었고 석유의 수입량이 반 이상으로 떨어졌으며 버스는 멈춰 섰고, 공장은 문을 닫았고, 정전은 다반사였으며, 식량은 부족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주렸다. 외부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은 내부로부터 찾아야했고 결국 제한된 조건에서 시행하는 실험을 해야 했다. 쿠바는 이 어려운 시기에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지 않으면서 과감하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을 찾으려했다.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은 우리 문명이 기초하고 있는 석유 위기는 우리 생활에 큰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곧 그것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문제이다.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축적해왔던 화석연료를 1세기 안에 맹목적으로 태워버리고 있는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결국 소련 붕괴로 인해 인위적인 석유 위기를 겪게 된 쿠바는 앞으로 전세계에서 발생하게 될 위기의 사례가 되는 것이다.
경제 위기라는 특별한 기간의 첫 5년 동안은 정부가 배급한 식량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식량 배급은 미국과 경제 외교가 끊겼을 때 실시된 것으로 돈 많은 사람들이 매점매석하는 것을 막고 모든 쿠바 국민에게 최소의 식량을 보급하여 사람들이 굶는 것을 예방했다. 한편 도시의 모든 빈터를 과수원이나 텃밭으로 만드는 도시농업운동을 통해 기근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처음에 도시농원은 위기에 대한 지역사회의 생존을 위한 임시대응이었다. 생존이라는 필연성에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채소 재배를 시작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상태가 3-6개월 정도만 지속될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이러한 조건으로 쿠바 경제가 적응해가는 아주 어려운 단계였다. 연료 부족은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이어졌고 엔지니어나 의사처럼 농사를 모르는 사람들도 도시의 공간을 점유해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먹거리가 필요했고 그들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시행착오를 겪으며 농사를 지은 것이다. 도시 주변 노는 땅을 조사 확인하는 작업을 하여 쓰레기를 없애고 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쿠바의 모든 생활은 경제 위기라는 이 특별한 기간의 영향을 받았는데 농업의 변화만큼 큰 변화는 없었다. 과거 쿠바는 녹색혁명과 같은 관행농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쿠바 농업은 라틴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보다 산업화되어 있었고 미국 농업의 비료 사용량을 넘어서고 있었다. 생산량은 컸으나 수출작물 재배농장에 집중되어 있어 국민들에게 자급자족의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다. 감귤류와 담배와 사탕수수를 수출하고 쌀 소비의 50% 이상 등 기본적인 식품은 수입했다. 소련의 붕괴로 살아남기 위해 쿠바는 농사를 짓게 되었지만 더 이상 화학비료를 구할 수 없었고 경작에 적합한 모든 땅을 유기농으로 전환하려는 과감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연구소들은 지속가능한 농업에 대한 연구를 위기 이전부터 시작했었다. 그런 준비 때문에 석유에 의존하지 않은 농업으로의 이전이 몇 년 안에 이뤄질 수 있었다. 유기농업을 개발하면서 천연가스나 석유를 원료로 하는 비료와 살충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화석연료가 없으면 더욱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되고 더 작은 농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쿠바인들은 농업에 대한 생각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전엔 한 달 수입 2달러 정도에 살고 있었던 쿠바인들이 수입을 보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제 농부는 제일 수익이 좋은 직종의 하나이고 여러 업종 사람들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농부는 먹거리를 살 필요가 없고 오히려 팔기 때문에 잘 살 수 있고 이것이 식량을 생산하는 민중의 자존심을 세우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고려된다는 점이 중요한 자랑이다. 아주 적은 경비로 식량을 생산하고 도시에 배치되어 있는 1000개의 상점에서 동네에서 재배한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공급한다. 아바나의 인구 220만이 필요로 하는 야채의 50% 이상은 도시 농업으로 공급되고 있다. 쿠바에는 169개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있는데 각각 지자체에서 5킬로 이내 농업은 도시 농업으로 간주된다. 도시 농업은 작은 도시에서는 더욱 생산적이고, 지역 수요량의 80-90%를 공급한다. 식량을 인근지역에 공급하는 도시 농업은 원거리를 운송할 필요가 많이 줄어들었고 14만 명 이상을 고용하는 자연적인 체계로 일자리를 만들어내어 국가 경제 성장의 자랑스러운 분야로 자리 잡았다.
식량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쿠바 정부는 농민들과 일하면서 각 지역에 맞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 결과 상당히 사유화되고 자율적인 소규모 농장과 생활협동조합이 생겼다. 대규모 국영농장의 40%가 사유화된 협동농장으로 분할되었다. 이들 소규모 농장과 협동조합은 유기적으로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새로운 경작 방법을 더 잘 사용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짓기 위한 토지 분배의 경우 몇 천만평의 땅이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임대되었다. 총 경지의 50% 가까이가 사유재산이며 개인 농부가 그것을 소유한다. 땅에 대한 사유권을 인정하고, 개인소유라는 느낌 때문에 생산량이 늘고 민간 농산물 직판장들과 새로운 수출 시장이 더 높은 생산성을 이끌었다. 많은 결정이 국가 통제를 벗어나 각 지역에서 내려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요구된 것은 첫째, ‘아무 것도 경작하지 않는 경우 그 땅은 몰수되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다.’ 둘째, ‘땅은 세금이나 임대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작권만 주어지는데 만약에 그 땅이 다른 목적을 위해 필요해지면 정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석유정점(Peak Oil)6)에 대응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흙을 살려 땅을 되찾는 것이다. 합성화학물질은 흙의 생명인 미생물 생태계를 없애고 영양분을 파괴하여 땅은 거의 모래처럼 된다. 흙을 재생시키는 흥미로운 도전에서 쿠바는 땅이 다시 비옥하고 생산적으로 되는데 3-5년 정도 걸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쿠바의 유기 농업은 흙을 되살리고 보존하기 위해 흙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방법을 취한다. 윤작, 유기비료, 녹비와 같은 방법들이다. 음식물 쓰레기, 쌀겨와 또 다른 유기물로 유기비료를 수 톤 만든다. 긴 구유 안에서 지렁이에 소똥이나 유기물 쓰레기를 먹이고 지렁이 부식토(분변토)를 만드는 방식으로 일반 퇴비보다 질을 높인다. 지렁이 부식토 1톤은 일반 유기퇴비 6톤 정도와 맞먹는다. 요즈음 쿠바 농산물의 80%가 유기농산품이다. 연료 부족 때문에 기계를 덜 쓰고, 농장이 작아지고, 작은 땅에 혼합경작을 해서 그 결과 해충이 확산되지 않게 되었다. 여러 작물을 혼작해서 살충제의 필요성을 줄이고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쿠바는 80년대에 21,000톤의 화학 살충제를 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21배나 작은 1,000톤만 쓰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인구의 2% 정도인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 전체 과학자의 11%를 보유하고 있고 유기농약과 유기비료 여러 종류를 개발하여 또 다른 중남미 라틴 아메리카들에 수출한다. 위기로부터 나타난 좋은 점 중 하나는 소 같은 동물을 다시 농사에 활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이 많은 농부들 중 소를 어떻게 키우고 훈련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훈련학교에서 가르치게 했다. 소는 트랙터처럼 땅을 딱딱하게 만들지 않고 연료, 부품, 트랙터에 들어가는 돈을 상당히 절약해 주었다.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어서 한 일이었지만 더 장기적인 시각에서는 많은 이득이 있었다. 쿠바의 유기 농업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으나 국가적인 기획과 관리로 인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협력과 나눔과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업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외로운 결단과 부단한 고뇌와 개척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분명 쿠바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석유가 없는 상황에서 쿠바의 교육체제 또한 붕괴 위기에 놓였지만 위기 동안에도 쿠바 정부는 국민에게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장애인 교육도 포함)을 지속적으로 제공했다.7) 전 세계 어디든지 위기가 생길 때 정부가 하는 첫 번째 일이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지만 쿠바는 그렇지 않았다. 의사, 간호사 및 사회봉사자들이 지역 이웃에 살며 일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된다. 쿠바의 무상의료는 위기에 도움이 되었다. 쿠바인의 평균 에너지 소비는 미국인에 비해 1/8 이하지만 결핍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비슷한 수명과 유아 사망률을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위기가 쿠바인들의 건강을 증진했는데 걷기와 자전거 타기가 늘어나면서 당뇨병과 심장발작, 뇌졸증이 줄었다. 결과적으로 쿠바의 상식이 변했다. 지방섭취가 줄어들고, 더 많고 다양한 야채들을 먹게 되었다. 쿠바는 필요한 의사 수보다 더 많이 양성하고 그들을 전세계 개발도상국으로 보낸다, 그리고 석유 값 대신 베네수엘라와 의사와 과학기술, 지식을 교환한다.
쿠바의 사회주의는 의료와 교육과 같은 복지차원의 탁월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통과 주택 문제에 있어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위기가 가장 심화된 기간 동안 도구와 재료의 부족으로 집은 짓기가 어려웠고 자동차 연료의 부족으로 쿠바는 대중수송체계를 발달시켜야 했다. 자원이 적은 상황에는 창조력이 있어야 했다. 비에 젖지 않도록 지붕을 덮고 발판을 용접해서 헌 화물차를 승합차로 만들었다. 300명까지 탈 수 있는 카멜(일명 낙타버스)은 견인차가 끄는 트레일러를 개조한 또 다른 대안교통수단이다. 수도 아바나와 지방에 히치하이킹(자동차 얻어 타기)과 자가용 공동이용(카풀)이 일반적이다. 의무적으로 관용차는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태워줘야 한다. 한 지체장애인 학교에서 우리 일행과 만난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 게바라 마치 여사는 쿠바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동차 한 대씩을 가지게 할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수단을 완벽하게 만들어 자동차가 필요 없게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만약 쿠바 민중에게 이용하지 않는 모든 불은 끄자고 하면 그들은 전기료를 내는 데 왜 꺼야하는가라고 묻는 자본주의 시민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모두가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고 한다. 인류가 당면한 석유정점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든 상황은 변할 것이고 우리 역시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섬나라 쿠바 사람들은 제한된 자원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국제적이고 전지구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맥시코만에서 질 높은 심해 유전에 대한 기대가 있지만 쿠바는 이 석유를 찾게 된다면 사용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그냥 팔 것이다. 왜냐하면 위기에서 살아남으면서 삶을 위해 석유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태양은 지구의 생명을 지속하기에 충분했다. 쿠바의 경우에서 보듯이 위기나 변화, 문제가 오히려 수많은 지속가능하고 대안적인 것들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1959년 혁명 이후 쿠바의 사회주의는 분명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성장기의 사회이다. 자유로운 언론이 없고 쿠바인들이 느끼는 각종 규제들이나 관광 산업이 가지고 온 폐해 등의 문제 속에서도 한 가지 목적은 사회주의의 장점을 지키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평등하게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다. 쿠바에는 현재 휴면 농지가 50% 정도라고 하는데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개발되지 않고 하릴없이 펼쳐져 있는 땅과 그대로의 자연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쿠바는 아직도 많은 여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 여백과 가능성이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새로운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
1) 녹색기금 산하의 (준)한․쿠바문화복지기금은 현재 한․쿠바 문화 교류의 현장을 올드 아바나에 세우고자 한국문화원 설립을 준비 중이며 차후 중남미 한인 애니깽의 구심점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2) 600평 규모의 이 농장은 아바나 도시농업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1990년까지 쓰레기장이었던 곳을 개발하여 지렁이 분변토와 퇴비로 비옥한 토양을 만들고 시멘트로 두둑을 만들어 채소를 재배하고 관리한다. 농장에서 일하는 10여명은 농사 3명, 판매원 3명 그리고 생물제품을 연구하는 기술자와 책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방문한 아침 시간에 인근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농장 앞 직판장에서 야채를 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3) 1998년 국가의 가장 어려운 비상시기에 창립하여 쿠바경제의 어려움을 개척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 협동농장은 농산물의 자체 생산과 판매를 바탕으로 하는 농업생산기초단위이다. 조합 형태로 운영되며 회원(농장 종사자)이 100여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화되어 있다. 이 농장에서 일하는 조합원은 아바나 도시 노동자 급여보다 3배가 많은 1000페소의 급여와 주 40시간 노동이 보장되어 있다. 조합원이 되는 과정도 까다로워서 3개월 동안 임금노동자로 일한 후 조합원 100%의 동의를 거쳐야만 한다. 이곳에는 퇴비장과 지렁이 분변토를 만드는 곳은 물론이며 모종을 키우는 곳까지 갖출 정도로 규모화되어 있고 일 또한 분업화되어 있다.
4) 사무실 벽면에 ‘자연과 사회에 맞는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하여’라고 쓰여져 있는 아바나 주의 엑타프는 1987년 창립되어 현재 약 2만 여명의 개인 농민과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는 생태계 보전과 지속가능한 농업과 산림기술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봉쇄 조치 후 도시를 떠났던 노동자들이 농업에 귀환하도록 하는데 엑타프의 역할이 컸다. 지속가능 농업의 이상은 유기농업 확대와 자연 순환과 재활용으로 자연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열어가는 순환농업을 전지구에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5) 아바나 시에는 52개의 컨설팅 숍이 있는데 여기서는 생산자들에 대한 농업 상담과 연수 및 논문연구 등을 지원하고 도시농업 생산자 기술교육과 물자공급, 씨앗 판매와 묘목과 모종 제공, 유기질 퇴비와 지렁이 분변토 공급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원예 물품도 판매해서 수익을 창출한다.
6) 석유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다가 특정 시점을 정점으로 급격히 줄어든다는 이론으로 일부학자들은 이미 원유 생산량이 고점에 다다라 세계경제가 곧 피크오일에 봉착할 것으로 보고 있다.
7) 쿠바에서 방문한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한 곳과 다운증후군 학교와 지체장애인 학교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등이다.
첫댓글 전번에 쿠바에 갈거라고 하셨는데 좋았겠습니다. 쓰신글 잘 읽었구요 다음 번에 막걸리를 앞에두고 더욱 생생한 육성으로 체험담을 듣고 싶군요.
잘 봤습니다. 긴 글 애쓰셨고, 쿠바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짐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