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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지거 쾨더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2010년12월5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이사 11,1-10; 로마 15,4-9;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12)
특별한 은총 /장재봉신부님
대림, 은혜로운 기간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대림시기라는 특별한 기간을 선물해 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림시기는 으레
한 해에 한번,
덩치 큰 보라색깔 초를 장식하여 차례로 불을 밝히는 때라고 생각하거나
둥근 대림환을 만들고
색 전등으로 성당을 꾸미는 때라고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때문에 대림의 참 의미를 잃고
촛불이나 성탄장식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부디 대림의 의미를 잘 새기시어
그분 말씀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절실한 회개의 은총을 얻기 바랍니다.
좋으신 그분께서 마련하신 성탄의 은총을 몽땅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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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교회가 들려주는 복음말씀이 좀 살벌합니다.
물론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는 말씀이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신 주님의 첫 번째 메시지라는 걸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려주는 것까지는 이해됩니다.
그분을 모시기 위해서는
참된 회개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하며
이 땅에서부터 진정한 하늘나라를 누리고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죄에서 자유로워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날 세례자 요한은 황량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 험한 곳에서 살던 그가 천국을 외치고 있습니다.
불편한 환경은
결코 천국을 느끼고 누리는 일을 훼방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에 대비하여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 왕은
호화로운 왕궁에서 지냈지만 마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그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알았기 때문임을 파악할 수 있는데요.
거듭 거듭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며
고쳐 살으라 권고했을 때
무시했음에도 양심의 가책은 느꼈던 표지라 싶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것이 얼마나 묘한지
헤로데는 손수 세례자 요한을 죽여 버린 후에 그 불안이 더 가중된 것에서 드러납니다.
눈에 가시 같던 요한을 없애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해지기는커녕
훨씬 불안하고 초조하게 지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라고
어처구니 없는 결론을 내린 일에서 분명합니다.
헤로데 왕의 삶이야말로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불행한 삶의 모델이라 싶은데요.
죄를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제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
떼어내지도 못하고 떨어져나가지도 않는 바로 그것 때문인데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입니다.
때문에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갑니다.
+++
오늘 복음을 들으며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거절당한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을 잘 알고 잘 믿고 잘 따랐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꽂힙니다.
이를테면 그날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종교인들,
하느님의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준수했던 사람들이
나아와
세례를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주님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은
과연
“독사의 자식”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음성에서 자유로울지 살피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는 그분께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라 싶습니다.
우리는
회개란 단순한 후회나 반성이 아니며
진정한 삶의 변화를 말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때에만
참된 회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은
그분께 보여드릴 열매를 ‘따서 모으는’시기임을 깨닫습니다.
형식적인 겉차림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려 실천하는 때임을 기억합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삶의 열매는
그분처럼 달라지고
그분으로 변화된 삶으로만 확증되는 것임을 새깁니다.
+++
그리스도인은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에만 매달려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당시 사두가이들처럼 주님을 시험하고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에 감격하여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처럼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그분의 말씀의 달고 오묘한 맛에 취해 살아가기 위해서
세레자요한처럼
그분의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틀림없이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분께서 주신 그 특별한 은총을 얻기 위해서
마음과 생각을 단장시킵니다.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아가는 처지에서도
줄곧
하느님을 찾고 기도하고 찬미했던 다윗이
“제가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하였더니
나날이 신음 속에 저의 뼈들이 말라 들었습니다"(시편 32,3)라고
죄를 짓고난 후에
그 사실을 숨기려 했을 때의 괴로움을 토로한 고백을 새겨 듣습니다.
아울러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여 얻은 기쁨과 감사를 함께 불러 봅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편 51편)
성당에 출석만 할 뿐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늘
마음에 꺼리는 죄를 간직하고 있는 상태라면
결코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교회가 회개를 촉구하는 이유입니다.
바쁜 신부님들의 시간을 쪼개서 판공성사를 마련한 이유입니다.
이 귀한 때,
회개함으로 천국을 누리는 축복의 삶을 얻기 바랍니다.
힘을 빼고 독을 빼라! /김찬선신부님
저의 책임 중의 하나가 선교 위원장이기에
선교사 형제들을 방문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방문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얘기를 듣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듣는 얘기가 “여기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뇌물을 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반대로 뇌물을 주지 않으면
무슨 법이 그렇게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한지
보통 사람들은 지레 포기하던지 방법을 몰라 못하게 된답니다.
이것이 권력의 힘과 돈의 힘이 유착하게 되는 관계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힘을 빌려 돈을 모으고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권력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후진 사회일수록 이런 퇴폐가 심하긴 하지만
그렇게 흉보는 우리도 그런 면이 있기는 마찬가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권력이든 금력이든
힘 있는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해먹고
법에 걸려도 쉽게 빠져나오지만
힘없는 사람은 작은 것 하나 걸려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구나 힘을 가지고 싶고 힘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비판적인 강론을 하고 있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가 힘 있는 사람을 비판하지만
어떤 때 힘 있는 사람의 힘을 빌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인데,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돈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저와 같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힘이 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이 있던 사람도 여기서는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이사야서 11장의 말씀처럼
마치 늑대와 표범이 이빨과 발톱을 빼고
새끼 양과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살모사가 독을 빼고 어린이와 어울리듯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모인 곳에 어깨에 힘을 주고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처럼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곳에 힘을 행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제1성으로 하신 말씀과 똑 같은 말을 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위한 회개는 어떤 회개입니까?
하늘나라에 합당한 존재적 회개요, 관계적 회개입니다.
그저 못마땅한 자신을 고치고 못된 습관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란 말씀이 있습니다.
뱀은 물을 먹어 독을 만들고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도 어떤 존재냐에 따라
남을 죽이는 독이 나오고 남을 살리는 젖이 나옵니다.
그러니 존재적으로 바뀌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늘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을 나무라듯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힘을 빼고 독을 빼 관계를 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잘 준비하고 맞이하는 대림절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회개해야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박용식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구세주를 맞이하려면 회개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하고 남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죄를 짓지 않은 우리들은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디모테오ㆍ데보라씨 부부는 매일 등산을 합니다. 나이 60도 안 돼 일찍 퇴직을 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매일 산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산에 오르면서 묵주기도도
하고 건강관리도 하고 부부간에 사랑도 돈독히 해 남들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대림시기를 맞아 무언가 회개할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지금 어떤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등산만 하는 것은 왠지 떳떳치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틀에 한 번씩만 등산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느님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평일미사에 참례하고 성당 청소 등 봉사도 하고
냉담교우나 어려운 이웃을 방문했습니다. 또 성경과 교회서적을 읽고
평화방송을 시청하면서 하느님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베드로씨는 텔레비전을 많이 봅니다.
뉴스는 물론이고 드라마, 건강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 등
거의 매일 3~4시간 이상 텔레비전 앞에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대림절에는 죄 아닌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가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덜 보기로
결심하고 대림 첫날부터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도 있습니다. 대림절 강론을 준비하면서
신자들에게는 회개를 하라고, 무언가 나아지려는 행동을 하라고
권하면서 신부인 나는 무슨 회개를 할까 찾다가
회개할 거리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신자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을 때 우선
말로라도 감사를 하자, 택배나 인편으로 받았을 때는 빼놓지 말고
확인 전화를 걸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신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받고서도 받았다는 표시를 안 한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지난달에 「예수님 따라하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평화방송에서 특강했던 것 일부를 책으로 쓴 것인데, 그동안 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선물로 한두 권씩을 택배나 인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제 선물을 받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소가 틀리거나 해서
배달이 안 됐을까 걱정이 돼서 확인 전화를 기다린 겁니다.
저는 그래도 특별히 생각한 사람들에게만 책을 보냈는데
받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은 전에 어땠는지 돌이켜봤습니다.
그동안 무엇인가를 받고도 확인전화도,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림절부터는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받으면 반드시 잘 받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번 대림절에 이토록 사소한 것을 회개거리로 정했답니다.
회개라는 것이 살인강도나 도둑질 같은 큰 죄만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뉘우쳐 돌아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지금 죄스런 삶이 아니더라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회개의 하나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가
바로 이런 회개였죠. 사실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 대한 열성도 대단했고
거의 흠없이 살았기에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삶을 자랑할 만한 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주님과 특별한 만남 이후 그런 자랑스러운 삶을 모두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일상의 삶이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 나라 건설이나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삶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모시는 데 방해가 됐음을 깨닫습니다.
그 좋아 보이던 권력과 재물 등이 오히려 쓰레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죄에서 돌아오는 회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으로 돌아오는 회개였던 것입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복음말씀에서 요한 세례자는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는 혹시 죄를 짓지 않았어도 더 나은 삶으로
돌아오는 진정한 회개를 합시다. 그래야만 다가오는
성탄 대축일에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사람들 위해 사는게 회개 /손용환신부님
요한의 리더십
리더는 이끄는 사람이고, 대중은 따르는 사람입니다.
리더는 어렵고 힘든 일을 스스로 짊어지는 사람이고, 대중은
쉽고 편한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리더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어렵고 힘든 길을 스스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떤 리더였을까요?
첫째, 요한은 희생의 삶을 산 리더였습니다.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오 3,4)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의 가죽을 옷으로 입었고,
광야의 거친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요한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오 3,7∼8. 10)
그 당시에 도덕적인 리더는 누구입니까?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들입니다.
그 당시에 경제적인 리더는 누구입니까? 정치 지도자인 사두가이들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인기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소명에만 열정을 보였습니다.
셋째, 요한은 겸손한 리더였습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오 3,11)
그의 소명은 주님의 길을 곧게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져야 한다며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오직 뒤에 오시는 분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리더로서 행복했을까요?
광야의 거친 삶이 좋았을까요? 사람들에게 달콤한 말이 아닌
독설로 설교하는 것이 좋았을까요?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들어 올리는 게 좋았을까요?
세속적으로 보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저도 가끔씩 리더로서 행복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저는 참 많은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만 하면서 사는 게 좋았을까요? 사람들에게 행복한 모습이 아닌
힘들고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게 좋았을까요?
내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참아내는 것이 좋았을까요?
저의 입장에서 보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다르겠지요.
그래서 리더는 고독합니다. 그러나 리더는
고독한 만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크든 작든 모두가 리더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리더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이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우리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열매로 맺어야 합니다.
요한이 말했습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오 3,12)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받아들이면 알곡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버리면 쭉정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어떤 리더인지 돌이켜볼 때입니다.
우리가 리더로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리더십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희생과 소명과 겸손으로 산 요한의 리더십을 익혀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회개이고, 이것이 하늘 나라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3,2)
자기보다도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습니다
대림 시기와 회개 /이중섭 신부님
대림 시기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육화사건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세상
종말 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런 이중적 특성 때문에
교회는 이 시기를 ‘간절하고 감미로운 희망의 시기’라 부릅니다. 대림 제2주일
성경 말씀은 구세주의 오심에 앞서 우리 자신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의 삶은 ‘마음의 변화’, 즉 자신이 범한 과오와 죄를 깊이
성찰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신망애’ 삼덕은 하느님을 향한 세 가지 덕입니다. 그 가운데 희망의 덕(망덕)은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약속 실현을 기대하고, 주님을 뵙게 될 희망에 설레는
마음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대림 시기에 주님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대림 시기는 6세기부터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때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 그 의미가 확대되어 세상 끝날에 영광스럽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대림 시기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범으로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모님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 독서에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가장 많이 읽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가까워지면 세례자 요한이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는 주님의 오심을 선포했으며
“그분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특히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으며 회개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의 본모습을 인식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변화하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 /조명연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힘껏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분명한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즉,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향하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이 말을 외치고 있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요? ‘그래, 회개해야지’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칠까요? 아니지요. 아마 사람들은 ‘자기부터 회개할 것이지.
죄 지은 사람이 뭘 잘했다고 그런 말을 해?’라면서 콧방귀만 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는 많은 이가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말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광야에 나가
속죄의 마음을 갖고 고행했기에 그 말에 힘이 있었던 것이지요.
말은 아무리 분명한 진리라 할지라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악으로 변할 소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 구태의연하게 살아온
삶의 태도를 바꾸어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나라 향한 평화의 길 닦아야 /배광하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설교
모든 길이 고르게 되는 날
우리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 인종 차별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며 투신하였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1963년 8월 23일 미국 노예 해방 100주년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 중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 연설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제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장차 도래될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움을 보는 듯 하며,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여 줍니다.
킹 목사의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평화의 꿈을 담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 소년, 소녀와 서로 손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황으로 언젠가 탈바꿈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땅이 평지로 변하고, 꼬부라진 길이 곧은길로 바뀌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생물이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리라는 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꿈이라면, 진정 꿈이라면 이것이 꿈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모두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 편협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이기심과 배타적인 삶을 살지 않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꿈과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증오와 미움, 전쟁의 살육과 인간 존엄의 차별이 없어지는 세상,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오도록 모든 인류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는 이들이 이 평화의 행진에
앞장서야 하며, 그 길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다가올
메시아의 평화로운 시대를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 6~8).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탄생 2000년, 지난 20세기 동안 모든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살인, 증오와 배척의 끔찍한 삶을 살았고, 인종 차별, 종교 차별 등,
인간 존엄을 해치는 악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회개로의 외침은, 그 모든 악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만연되어 있는 모든 이기적인 삶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거짓의 길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의 길에서 돌아와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촉구인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도 실천적 신앙의 삶과는 멀어진 우리 모두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 7~8).
이 같은 호된 욕을 먹었던 이들은 분명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증스러운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던
그들에게 참 신앙의 길로의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책은 세례자 요한 때 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오늘날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는 회개의 질책이요, 경고인 것입니다.
대림 제 2주일을 맞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 번
평화에 투신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
모든 차별이 없어지고 진정한 평등의 삶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고 낮추는 것,
미움과 증오와 살인을 멈추게 하는 것, 주님의 참다운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자신을 희생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요, 그것이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의 삶이며,
그것이 주님의 길을 고르게 닦는 대림의 신앙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우리에게 이같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 7).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소극적인 회개를 넘어,
진정한 평화를 일구지 못하고 이기적인 만족에 살았던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는 행실로 /허영엽 신부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파스칼(1623-1662)은
위대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지만, 그리스도교의 사상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삶과 신앙의 모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사색을 하던 중
1654년 11월23일 밤에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은 신앙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체험이었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총이라 생각했다. 마치 은총의 불같은 것을 체험한
파스칼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신비적 체험 후 매우 어렵게 지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아 주고 신앙에 대한 글을 계속 집필했다.
그가 죽은 후 출판된 ‘팡세’에는 신앙적인 사색을 표현한 소중한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주옥 같은 소중한 글들이 담겨 있다.
“인간의 마음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악과 비참함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마다해야 한다.” 파스칼은 어느 날 갑자기
체험한 신앙의 체험 후 자신보다는 하느님만을 위해 살았다.
파스칼처럼 어떤 강력한 체험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보다 더 분명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춤을 추며
기뻐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유다인들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회개는 그냥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참회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회개를 통해
적극적으로 마음과 정신, 행동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 양식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회개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회개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또한 회개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각에만 머무르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뜻을 세워도 의미가 없다.
이제 용기를 내자. 우리의 손이 항상 어려운 사람의 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발이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 데에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우리의 입이 늘 불만이나 불평보다 칭찬과 평화를 노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소중히 /양승국 신부님
권고사직,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감원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혼났습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장년들이 일찌감치 일손을
놓아야만 하는 분위기가 보편화된 우리 사회 현실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한창 일해야 할 아까운 인재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곳저곳 기약도 없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잠시 화면에 소개된 한 퇴직자 가족의 쇠락 과정은 참담했습니다.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한 가장은 경험부족으로 빚만 잔뜩 지고
행방불명되고 맙니다. 남은 부인과 아이들은 죽을 죄인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마침내 달동네에 둥지를 트지만
금융회사 직원들의 추적은 집요하기만 합니다.
비가 오는 날, 엄마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빚쟁이들로부터
머리채를 붙잡힌 채 길바닥에 내팽개쳐지기가 부지기수였답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되돌아보지만 마치 전생(前生)에
있었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다 못해 엄마는
아이들과 동반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엄마, 말 잘 들을 테니,
제발 죽이지 말아요. 행복하게 같이 살아요"라고
외치는 아이들 절규에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벌써
네번째랍니다(KBS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 참조).
오늘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0.12.5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이사11,1-10 로마15,4-9 마태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수철신부님
허무한 삶입니까? 충만한 삶입니까?
알곡의 삶입니까? 쭉정이의 삶입니까?
열매 좋은 나무 같은 삶입니까?
열매 나쁜, 열매 없는 나무 같은 삶입니까?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세례자 요한의 우레 같은 말씀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주님의 도래에 임박하여
지체 없는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이
참 절박합니다. 대림 2주일,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오늘 강론 제목으로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회개할 때 하늘나라요 하늘나라를 살 때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으로,
쭉정이의 삶은 알곡의 삶으로,
열매 나쁜 삶은 열매 좋은 삶으로 바뀝니다.
회개의 관문을 통해 오시는
하늘나라요 주님이십니다.
광야 같은 날씨, 광야 같은 환경의 초겨울입니다.
하늘 향해 본질로 서있는 겨울 나목들 역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세례자 요한처럼
무언의 침묵 중에 우리 모두를 향해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해, 주님을 향해,
미래를 향해, 죽음을 향해 걸어 나가는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로
육박해 오시는 하늘나라요,
주님이시오, 미래요, 죽음입니다.
바로 대림 시기는 오시는 주님을,
하늘나라를 향해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마음 활짝 열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나목의 가난한 겨울나무처럼,
온갖 탐욕들 말끔히 비우고
하늘 향해 가슴 활짝 여는 게 회개입니다.
믿음과 사랑 역시 회개(메타노니아)로 시작하여
친교(코이노니아)와 봉사(디아코니아)로 완성됩니다.
빛나는 대림초 두 개가 바로 회개하여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 가난한 회개한 이들
안에
임(臨)하는 하늘나라입니다.
한자 오실 ‘임(臨)’자의 뜻이 참 은혜롭습니다.
대림(待臨), 강림(降臨),
재림(再臨), 왕림(枉臨) 모두 주님 오심을 뜻하는
‘임(臨)’자가 들어간 말입니다.
부산떨며 주님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마음 활짝 열고,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의 자세로
깨어 준비하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회개입니다.
예전 프랑스 출신의 신학교 교수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임재(臨在)라는 뜻이 너무 좋습니다.
지금 여기 와서(臨)
우리와 함께 계신(在) 하느님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회개하여 임재하시면서
동시에 오고 계신 주님을 항해
마음 활짝 열고
깨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림시기 일회성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는 회개여야 합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요
매월 정기적으로 보는 고백성사입니다.
비상한 회개 행위가 아니라
본래의 제자리에 돌아와,
오시는 하느님을 향해 사는 게 바로 회개요,
회개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첫째가 단순 소박하고 겸손한 삶의 열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인적 없는 황량한 장소만 광야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 모두가 영적의미로 광야입니다.
도시의 광야라는 말도 있듯이
많은 이들이 외롭고 쓸쓸한 마음의 광야를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 이 마음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고독과 침묵의 광야입니다.
굳이 눈에 보이는 사막을 찾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時深山),
문만 닫으면 어디나 곧
깊은 산중의 광야란 말도 있습니다.
이런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단순 소박한 삶을 살았던
무공해의 사람, 세례자 요한입니다.
바로 그의 꾸밈없는
금욕적 풍모와 단순한 생활양식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이었다.’
진정 자연친화적인 자연과 조화된
자연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은
우리 수도승 삶의 귀감입니다.
정말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낭비하지 않고 쓰레기 내지 않고
단순 소박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입니다.
정 약용 선생님도 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을 강조했는데,
바로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라는 근검(勤儉)의 두 글자입니다.
근검에 이어
세례자 요한의 빛나는 덕목은
겸손입니다.
바로 이 겸손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자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참 아름다운
매력적인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몸이다.”
주님을 체험했기에
세례자 요한의 이런 겸손입니다.
우리 역시 회개할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겸손의 열매입니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둘째가 평화로운 삶의 열매입니다.
오시는 하늘나라를, 주님을,
미래를, 죽음을,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서로 받아들이라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서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서로 간에 평화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이 따르는 받아들임입니까?
이런 평화의 사람들은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무엇을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받아들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존공생하기 위해서는
서로 받아들이는 길뿐이 없습니다.
이웃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한계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이,
인내하게 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언젠가 써놓은 저의 자작 애송시에 대한
어느 분의 평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이 시에 대한 그분의 소감입니다.
“어찌 가도 가도 멀기만 한 게 하늘뿐이겠습니까?
사람도 가도 가도 멀기만 합니다. 알 수 없는 게 사람입니다.
하늘만 아니라 사람도
내 호수 같은 마음에 받아 담는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 담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면 확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말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탐욕으로 한계를 넘어설 때 유린되는 평화입니다.
한계를 받아들여
제자리의 한계에 충실할 때
균형과 조화의 평화로운 삶입니다.
이사야의 평화가 완전히 실현된
하늘나라의 비전이
참 황홀하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무한한 영감의 원천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손을 디밀리라.
나의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패덕하게 행동하지도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입니까?
이런 말씀을 성경이 아니곤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 받아들여 공존할 때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운 장면에 비춰볼 때
우리의 현 상황은 얼마나 평화가 없는
위태한 상황인지요.
누구나 갈망하는 평화인데,
전쟁이 나면 하루 250만이 죽고
남북 똑같이 공멸한다는데
위정자들은, 사이비 언론들은 왜 공공연히
대책 없이 무책임하게
전쟁을 부추기는지 통탄스럽습니다.
평화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전쟁은 악입니다.
전쟁에 대한 어떤 합리화도 배격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바로 겸손과 평화입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한 이들,
회개하여 주님을 만난 이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평화롭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이사이의 그루터기
예수님 위에 내렸던
똑같은 주님의 영이,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 주님을 경외하는 영이
우리 위에 내립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여 오시는 하늘나라를,
주님을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근검과 겸손의 열매, 평화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회개한 우리들을
당신의 겸손과 평화의 사람들로 만들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이 은총의 대림시기, 이 한반도에 정의가 꽃피게 하소서.
큰 평화가 영원히 꽃피게 하소서.” 아멘.
하늘 부끄럽지 않게 /강 영구신부님
아침저녁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성당 뜰 앞의 느티나무도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 맞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가 회개(悔改)해야 할 이유를 설파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운명의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건강을 자랑하고 젊음을 자랑하던 이웃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유명(幽冥)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대구 지하철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이웃과 형제들이 참변을 당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고,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견고해 보이는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도 거기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변을 당한 분들도 그 사실을 몰랐고
살아있는 우리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悔改)하는 것입니다.
하늘 부끄럽지 않게 산다면
지금 당장 내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예”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