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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강원도 외국인 선교사들의 발자취와 영향: 초기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고찰
I. 서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은 근대화의 격동기 속에서 서구 문물과 함께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 외국인 선교사들은 단순히 복음 전파를 넘어 의료, 교육, 사회복지 등 다방면에서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 동부에 위치한 강원도는 험준한 산악 지형과 미비한 교통 인프라로 인해 초기 선교사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에 비해 복음이 늦게 전파되거나, 선교 활동이 독자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하디 선교사가 1900년대 초 강원도를 "신앙의 불모지"였다고 회고한 것은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선교 활동에 큰 도전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여성 선교사들의 활동 또한 강원 지역의 역사적·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타 지역에 비해 제약이 따랐던 것으로 기록된다.
강원도 지역 선교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며, 특히 영동과 영서 지역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가 형성되고 근대 문명(의료, 교육 등)이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본 보고서는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주요 외국인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그들의 사역이 강원도 지역사회에 미친 다각적인 영향을 심층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한국 초기 기독교 선교사의 이해를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이는 단순한 인물 나열을 넘어, 선교사들의 헌신, 전략, 그리고 그들이 마주했던 시대적, 지역적 한계와 성과를 균형 있게 조명하고자 한다.
II. 강원도 주요 외국인 선교사 및 사역
강원도 지역에서는 여러 외국인 선교사들이 각기 다른 시기와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근대화에 기여했다. 이들의 헌신은 강원도 기독교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
A. 로버트 A. 하디 (Robert A. Hardie, 하리영):
영동지역 복음의 씨앗과 부흥운동의 주역
로버트 A.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의사로, 1890년 한국에 내한하여 부산과 서울 제중원에서 의료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1899년 미국 남감리회 소속으로 전환하며 함남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 지역 선교에 집중하게 된다. 그의 활동 무대는 경기도 북부, 황해도 남부, 강원도 북부 일원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1900년부터 원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 선교 사역을 감당했으며 , 1901년 10월에는 강원도 동해안 지역 일대에서 15명을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하디 선교사는 강원도 영동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01년 7월 17일, 함경도 원산에 본부를 둔 미국 남감리교 하디 선교사에 의해 고성 간성감리교회가 영동지역 최초로 세워졌다. 또한, 1901년 5월 양양감리교회와 강릉중앙감리교회(1901년 설립, 1935년 명칭 변경)를 설립하는 등 강원도 주요 거점 교회들을 개척했다. 이 교회들은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디 선교사는 1900년대 초 강원도가 "신앙의 불모지"였다고 회고할 정도로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김화군 지경터(地境垈)는 하디 선교사가 3년간 애써 사역했으나 실패했다고 고백할 만큼 깊은 좌절감을 안겨준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영적으로 "연약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영적 갈급함과 좌절은 1903년 8월 원산에서 열린 연합사경회에서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깊은 성령 체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회개와 성령 체험은 원산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 부흥의 불길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이어져 한국교회 전체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사례는 한 선교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적 고뇌와 회개가 어떻게 광범위한 사회적, 종교적 부흥 운동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선교의 성공이 단순히 외적인 활동이나 성과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 개인의 내면적 성숙과 영적 변화가 더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선교 역사를 분석할 때 개인의 영적 여정이 집단적 현상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지경터는 1899년 미국 북장로회 웰본 선교사가 먼저 복음의 물꼬를 텄던 곳으로, 하디 선교사 사역의 베이스캠프 중 하나였다. 현재 지경터교회는 흔적이 없지만, 지경장로교회와 지경중앙감리교회가 선교 사역을 잇고 있다.
하디 선교사는 1935년 4월, 45년간의 조선 선교 사역을 마치고 떠나는 날 두 딸이 묻혀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아 마지막 고별식을 가졌다. 이는 그의 한국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디는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교육 및 문서 사역에도 기여했다.
B. 조지 헤버 존스 (George Heber Jones) & 헨리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 원주 지역 순행과 초기 선교 시도
조지 헤버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9년 8월 16일 함께 남부 순행을 떠났으며, 8월 19일 월요일 오후에 강원도 원주에 도착했다. 기존에는 이들이 공주를 경유하여 원주에 도착했으며, 강원감영 객사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은 아펜젤러의 공주 여행이 1889년 2월의 별개 일정이었고, 두 선교사가 원주에 도착한 날이 8월 19일 월요일 오후였으므로 강원감영 객사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순행 첫 주일은 원주가 아닌 경기도 지평에서 맞았다. 이러한 사실 관계의 재확인은 초기 선교 역사를 단순히 미화하거나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기록의 교차 검증과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학문적 노력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초기 선교사들의 여정이 얼마나 고되고 제한적이었는지를 현실적으로 조명하며, 당시 선교 활동의 제약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이들은 원주 목사와 강원관찰사를 예방했으나, 당시 조선의 포교금지령 등으로 인해 공개적인 설교 활동은 어려웠다. 존스 선교사는 "오! 버려진 그들의 영혼에 다가가 구원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기록했다.
존스 선교사는 초기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로, 1893년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교육인 신학반을 개설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교육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이들의 원주 순행은 비록 직접적인 교회 설립으로 즉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강원도 내륙 지역에 대한 초기 탐색과 선교적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C. 아서 G. 웰본 (Arthur G. Welbon, 오월본): 강원도 북부 및 원주 지역 개척 선교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아서 G. 웰본 선교사(Arthur G. Welbon, 1866-1928)는 1899년 김화군 지경터에 먼저 복음의 물꼬를 텄다. 이는 하디 선교사의 지경터 사역보다 앞선 시도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1902년부터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방을 독립적인 선교 구역으로 관리하며 서울 북부, 황해도 배천, 강원도 철원, 원주 등 오지를 다니며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선교부에 60여 개 도시와 마을을 두 번 순회하며 평균 1,000리를 걸었고 총 124일이 걸렸다고 보고할 정도로 열정적인 개척 선교사였다. 그는 환등기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이나 그림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전도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웰본 선교사는 1904년 11월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1일 원주에 도착, 복음 전도와 서적 판매 활동을 했다. 1909년 안식년에서 돌아온 후, C. A. 클라크와 함께 원주 읍내 동쪽 구릉지에 2만여 평이 넘는 대규모 선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는 원주를 강원 및 충북 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삼아 교회, 학교, 병원을 설립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한국 선교는 여러 교파가 경쟁적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간 중복이나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09년에 각 교파 선교회들 사이에 선교 지역 분할 협정이 이루어졌고 , 이 협정으로 인해 웰본 선교사가 어렵게 확보하려던 원주 선교 부지는 북감리회로 이양되었고, 웰본은 경북 안동으로 사역지를 옮겨야 했다.
이 사례는 개별 선교사의 비전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더 큰 선교 전략적 결정(교파 간 협정)이 개인의 사역 방향과 지역 선교의 흐름을 크게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협정은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특정 지역에서의 특정 교파의 독점적 영향력을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때로는 개인 선교사의 계획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웰본 선교사는 병원이나 학교를 직접 짓기보다는 복음 전도에 전념한 열성적인 헌신자였다. 그는 1903년 첫 아들 토마스를, 1914년 막내딸 앨리스를 잃고 양화진에 묻는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28년간 조선에서 사역하며 약 70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고문을 미국 현지 신문에 실으며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이는 선교사들이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대 의식을 가졌던 인권 운동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D. 셔우드 홀 (Sherwood Hall) 부부: 화진포의 성과 결핵 퇴치 노력
셔우드 홀 선교사 부부의 요청으로 1938년 독일 망명 건축가 베버가 강원도 고성 화진포에 '화진포의 성'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 훼손되었다가 2006년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김일성 별장으로도 불리며 역사적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셔우드 홀은 한국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결핵이라는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나, 이를 해결할 공공 보건 시스템이나 재원이 부족했다. 셔우드 홀 선교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덴마크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실이라는 혁신적인 모금 방식을 한국에 도입했다. 이는 단순한 의료 활동을 넘어,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교사들의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실은 한국 사회에 공중 보건의 중요성을 알리고, 자선 활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며, 질병 퇴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는 선교가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사회 전반의 근대화와 복지 증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의 부모인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 역시 한국에서 의료 및 선교 활동에 헌신한 선교사로,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로 기록된다.
이는 한국 선교가 단일 세대의 헌신을 넘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이다. 셔우드 홀의 직접적인 강원도 내 의료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제시된 자료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 그의 부모님은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여성과 아이들의 의료 환경 개선에 전념했고,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인 에스더 박을 후원하는 등 한국 여성 의료인 양성에도 기여했다. 셔우드 홀 자신은 해주 구세병원에서 의료 선교를 시작했다. 현재 강원도 고성에는 셔우드 홀을 기리는 문화공간이 조성될 예정이다.
E. 드와이트 말스베리 (Dwight R. Malsbary, 마두원): 홍천 지역 교회 설립과 음악 선교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음악 선교사 드와이트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 1899-1977)는 1929년 한국에 입국하여 평양 숭실대학교에서 음악 교수로 활동하며 음악 교육에 힘썼다. 60대 후반부터는 강원도 두촌 선교지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강원도 사역에 집중했다. 그는 교회가 없는 홍천 지역을 방문하며 원동교회, 희망교회, 결운교회, 장남교회 등을 포함하여 홍천군 일대에 총 26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이는 한 선교사가 특정 지역에 집중하여 이룬 매우 광범위한 교회 개척 사례로, 강원도 내륙 지역의 기독교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말스베리 선교사는 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독특하고 효과적인 선교 방식을 사용했다. 초기 한국 사회는 서구 문물과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갈증이 있었다. 말스베리 선교사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활용하여 음악이라는 문화적 매개를 적극적으로 복음 전파에 활용했다. 그는 숭실대에서 실내 오케스트라단과 야외 브라스 밴드부를 교육하며, 이들을 전도대와 동행시켜 음악 공연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전략은 복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교리 전달을 넘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이는 선교 전략이 현지 문화적 맥락과 특성과 융합될 때 더욱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선교사들이 단순한 종교인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을 설립한 교회에 보내어 교회를 인도하도록 했으며, 건물 건축과 운영 자금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홍천희망교회의 김광섭 목사가 말스베리의 지원으로 신학교육을 받고 목사가 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현지인 지도자 양성을 통한 지속 가능한 선교 모델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말스베리는 한국의 유명 음악가들(가곡 '가고파'와 '목련화'를 작곡한 김동진, '한국 환상곡'을 작곡한 안익태 등)을 길러내는 데도 기여했다.
1977년 강원도 개척교회들을 순회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한국에 대한 마지막 헌신을 다했다.
F. 원주 지역의 주요 선교사들: 노블, 무스, 콜리어, 모리스, 앤더슨, 맥마니스, 머레이
원주 지역은 강원도 영서 지역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여러 선교사들의 활동이 집중되었다. W. A. 노블(W. A. Noble)은 1901년 미감리회 연회에서 북지방 선교 관리자로 임명되었으며, 비록 1911년에야 원주 지방을 방문했지만, 원주 선교를 관리한 첫 선교사로 기록된다. 그는 1909년 원주 지방이 북감리회 선교 구역으로 다시 변경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주 영서지방에 최초로 설립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인 원주제일교회는 1905년 4월 15일 무스 선교사(Jacob Robert Moose, 한국명 무야곱)에 의해 본부면 상동리 풀밭에서 5~6명의 남자 교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다. 무스 선교사와 콜리어 선교사(C. T. Collyer), 그리고 한국인 전도인 장의원이 원주에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주제일교회는 만종교회, 문막제일교회 등 국내 20개 지교회를 개척하며 강원 영서지역을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은 1918년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주택으로, 의료 선교를 담당했던 미국인 C. D. 모리스(C. D. Morris, 1869-1927)를 위해 지어졌다. 이 사택은 현재까지 현존하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원주 기독교 선교의 발상지이자 서구식 의료, 교육, 생활, 건축 등 근대 문명의 유입 통로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C. D. 모리스 선교사는 원주에서 의료 선교 사역을 담당하며 근대 문명 유입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1919년 원주 3.1운동 준비를 일본 관헌에 고발하여 운동을 좌절시킨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전도사 회의를 중단하고 예배 시 일본 헌병을 임석시켜 만세 운동을 사전에 차단하기도 했다. 이 사례는 선교사들이 단순히 긍정적인 역할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개인의 신념에 따라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가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교사들의 활동을 다면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역할이 항상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균형 잡힌 역사적 관점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선교 역사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국 북감리교회는 1910년 한국 선교 25주년을 기념하여 원주에 병원 설립을 추진했고, 1911년 앤더슨 선교사가 책임자로 내한하여 1913년 원주시 일산동에 17개 병상 규모의 '서미감병원'을 건립했다. 이 병원은 스웨덴 감리교회 신자들의 모금으로 세워져 '스웨디시 감리교 병원'으로도 불렸다. 서미감병원은 강원 영서 및 남부 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으로 의료 서비스와 복음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앤더슨이 평양으로 이동 후 일시 폐쇄되었으나, 1925년 맥마니스 선교사가 부임하여 병원을 맡았다.
서미감병원은 1933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 정책과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부 사정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선교사들의 활동이 외부적인 정치적 압력에 의해 심각한 제약을 받았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병원이 완전히 소실된 후에도, 1954년 머레이 선교사가 재건 책임자로 내한하여 1959년 '원주연합기독병원'으로 재개원되었고, 현재의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은 외부적 시련과 단절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의료 선교의 유산이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단기적인 성과를 넘어 장기적인 사회 변화의 토대가 되었으며, 한국 사회의 필요에 따라 그 역할이 계속해서 진화했음을 시사한다.
표 1: 강원도 주요 외국인 선교사 및 활동 요약
| 선교사 이름 | 주요 활동 지역 | 소속 교단 | 주요 사역 분야 | 주요 업적/기관 | 활동 기간 |
|---|---|---|---|---|---|
| 로버트 A. 하디 | 원산(거점), 강원도 동해안(간성, 양양, 강릉), 김화 지경터 | 미국 남감리회 | 복음 전파, 교회 설립, 의료, 교육, 문서 사역 | 간성/양양/강릉중앙감리교회 설립, 원산부흥운동 기폭제, 협성신학교 교장 | 1890-1935 |
| 조지 헤버 존스 | 원주(순행), 제물포 | 미국 북감리회 | 복음 전파, 교육 | 한국 최초 신학교육(신학반) 개설 | 1888-1919 |
| 헨리 아펜젤러 | 원주(순행) | 미국 북감리회 | 복음 전파 | 원주 지역 초기 선교 탐색 | 1885-1902 |
| 아서 G. 웰본 | 김화 지경터, 철원, 원주 | 미국 북장로회 | 복음 전파, 교회 개척 | 강원도 북부 개척 선교, 3.1운동 지지 | 1899-1928 |
| 셔우드 홀 | 고성 화진포 | (부모: 감리교) | 의료, 사회복지 | 화진포의 성 건축, 한국 최초 크리스마스 실 발행 | 1920s-1940s |
| 드와이트 말스베리 | 홍천군 일대, 평양 | 미국 북장로회 | 교회 설립, 음악 선교, 교육 | 홍천 지역 26개 교회 설립, 음악 교육 통한 복음 전파 | 1929-1977 |
| W. A. 노블 | 원주 | 미국 북감리회 | 선교 관리 | 원주 지방 첫 선교 관리자 | 1901-1911 |
| 제이콥 로버트 무스 | 원주 | 미국 남감리회 | 교회 설립 | 원주제일교회 설립 | 1905년 이후 |
| C. T. 콜리어 | 원주 | 미국 남감리회 | 교회 설립 | 원주제일교회 설립 기여 | 1905년 이후 |
| C. D. 모리스 | 원주 | 미국 북감리회 | 의료 |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 건축 | 1918년 이후 |
| 앤더슨 | 원주 | 미국 북감리회 | 의료 | 서미감병원 설립 | 1911-1925 |
| 맥마니스 | 원주 | 미국 북감리회 | 의료 | 서미감병원 운영 | 1925-1933 |
| 머레이 | 원주 | 미국 북감리회 | 의료 | 원주연합기독병원 재개원 | 1954년 이후 |
III. 강원도 선교의 특징 및 영향
강원도에서 이루어진 초기 기독교 선교는 그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 특별한 양상을 띠며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다.
A.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선교에 미친 영향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열악한 교통 환경은 선교사들에게 큰 도전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선교 활동의 시작이 늦고 확산이 더디게 진행되는 요인이 되었다. 하디 선교사가 강원도를 "신앙의 불모지"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지리적 난관은 선교사들이 특정 거점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순회 사역을 펼치거나 (하디, 웰본), 특정 지역에 집중하여 교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말스베리) 등 다양한 선교 전략을 개발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선교의 성공이 단순히 인력이나 자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유연한 전략 수립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교통의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들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강한 의지와 헌신을 더욱 부각시키며, 외부적 제약이 오히려 창의적인 선교 방식을 촉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성 선교사들의 활동 또한 강원 지역의 역사적·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타 지역에 비해 제약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여성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선교를 통해 근대적 의식이 싹트고 사회 참여가 활발해졌음을 보여준다.
1909년 각 교파 선교회들 사이에 이루어진 선교 지역 분할 협정은 강원도 내 특정 교파의 집중적인 선교 활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효율적인 선교 자원 배분에 기여했다.
B. 의료, 교육, 사회복지 분야의 기여
강원도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지역사회의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의료, 교육, 사회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의료 선교:
당시 조선 사회는 근대적인 의료 시스템이 부재하여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컸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러한 필요에 응답하여 병원 설립 및 의료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원주 서미감병원(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은 앤더슨, 맥마니스, 머레이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 및 운영되며 강원 영서 지역의 근대 의료 서비스의 중심 역할을 했다. 셔우드 홀 선교사의 크리스마스 실 발행은 결핵 퇴치 운동의 중요한 재원 마련 방식이었으며, 이는 공중 보건 개선에 기여했다. C. D. 모리스 선교사의 사택은 서구식 의료 문명의 유입 통로였다. 이러한 의료 활동은 단순한 질병 치료를 넘어, 서구 의학의 도입과 확산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의료기관의 설립은 지역 주민들에게 근대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위생 개념과 공중 보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선교가 종교적 목적을 넘어 사회 전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근대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며, 과학적 사고방식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의료 선교는 복음이 사회적 필요와 결합될 때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사례이다.
* 교육 선교:
조선 말기 교육 시스템은 전통적인 유교 교육에 머물러 있었고, 근대적인 학문과 기술 교육은 미비했다.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과 교육 활동을 통해 서구의 근대적인 지식 체계와 가치관을 한국 사회에 전파했다. 조지 헤버 존스 선교사의 신학반 개설 과 벵겔 선교사의 영화여학교 설립 은 초기 기독교 교육의 중요한 사례이다.
춘천의 배영학교(1907년 남감리회 설립)는 강원도 내 초기 기독교 학교의 존재를 보여주며, 근대 교육의 확산에 기여했다. 특히 여성 교육은 당시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 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근대적 시민 의식 함양에 기여했다. 드와이트 말스베리 선교사의 음악 교육을 통한 제자 양성은 한국 문화 예술 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신학교육은 한국인 지도자 양성의 기반을 마련하여 한국교회의 자립을 가능하게 했고, 음악 교육과 같은 예체능 교육은 한국 문화 예술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선교가 단순한 종교 교육을 넘어 전인적인 근대 교육의 중요한 주체였음을 보여주며, 서구 문명의 유입과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 사회복지 및 인권 활동:
선교사들의 활동은 단순히 복음 전파에 그치지 않고, 당시 조선 사회의 불평등과 인권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사회복지 및 인권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에비슨 선교사처럼 신분 철폐와 천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고종에게 탄원하는 등 사회 개혁 운동에도 참여했다. 아서 웰본 선교사가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고문을 미국 현지 신문에 실은 사례는 선교사들이 인권 보호와 독립 운동 지지에도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C. D. 모리스 선교사의 3.1운동 고발 사례 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선교사가 일관된 입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각자의 배경, 교파의 지침,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했다. 이는 선교가 종교적 사명을 넘어 사회적 약자를 돕고, 불의에 저항하며, 근대적인 인권 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선교사들의 사회적 역할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었으며, 획일적인 평가보다는 개별적인 맥락과 동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다각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함을 보여준다.
표 2: 강원도 초기 기독교 기관 설립 현황
| 기관명 | 종류 | 설립 선교사/관련 단체 | 설립 연도 | 주요 특징 | 현재 상태/의미 |
|---|---|---|---|---|---|
| 간성감리교회 | 교회 | 로버트 A. 하디 | 1901 | 영동지역 최초의 교회 | 현재까지 존속, 지역 신앙 공동체 |
| 양양감리교회 | 교회 | 로버트 A. 하디 | 1901 | 하디 선교사에 의해 설립 | 현재까지 존속, 지역 3.1운동 주도 |
| 강릉중앙감리교회 | 교회 | 로버트 A. 하디 | 1901 | 강릉지역 모교회, 3.1운동 주도 | 현재까지 존속 |
| 원주제일교회 | 교회 | 제이콥 로버트 무스, C. T. 콜리어, 장의원 | 1905 | 강원 영서지방 최초의 교회 | 현재까지 존속, 20개 지교회 개척 |
| 화진포의 성 | 문화유산 | 셔우드 홀 부부 (건축가 베버) | 1938 | 독일 망명 건축가 건축, 김일성 별장으로도 불림 | 한국전쟁 후 복원, 관광 명소 |
| 홍천희망교회 | 교회 | 드와이트 말스베리 | (시기 불명) | 말스베리가 설립한 홍천 지역 26개 교회 중 하나 | 현재까지 존속 |
|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 | 사택, 문화유산 | C. D. 모리스 | 1918 | 원주 기독교 선교 발상지, 근대 문명 유입 통로 | 국가등록문화재 제701호, 현존 |
| 서미감병원 | 병원 | 앤더슨 (이후 맥마니스, 머레이) | 1913 | 스웨덴 감리교회 후원, 강원 영서 유일 종합병원 | 현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계승 및 발전 |
| 춘천 배영학교 | 학교 | 미국 남감리회 | 1907 | 춘천 신북면 소재 기독학교 | 1927년 폐교 |
C. 지역사회 근대화 및 기독교 확산에 미친 영향
강원도 내 교회 설립은 지역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근대적 의식과 문화를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변화를 넘어 공동체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의료 및 교육 기관 설립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서구의 근대적인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는 지역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자녀 사망 , 아서 G. 웰본 선교사의 자녀 사망 , 드와이트 말스베리 선교사의 순직 등)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의 증거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IV. 결론
강원도에서 사역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험난한 지리적,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했으며, 이는 강원도 지역의 초기 기독교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단순히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근대 의료 시스템, 교육 기관, 그리고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강원도 지역사회의 근대화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A. 하디의 영적 부흥 운동과 영동지역 교회 개척, 조지 헤버 존스와 헨리 아펜젤러의 원주 순행을 통한 선교적 탐색, 아서 G. 웰본의 강원도 북부 개척 정신과 3.1운동 지지, 셔우드 홀의 혁신적인 크리스마스 실 발행을 통한 결핵 퇴치 운동, 드와이트 말스베리의 음악을 통한 홍천 지역 교회 개척, 그리고 원주 지역 의료선교사들(앤더슨, 맥마니스, 머레이)의 서미감병원 설립 및 운영은 강원도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특히 C. D. 모리스 선교사의 사례는 선교사들의 역할이 항상 일방적인 긍정적 측면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복잡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음을 보여주며, 이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들의 발자취는 오늘날 강원도 곳곳에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교회와 의료기관, 그리고 문화유산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한국 사회에 깊은 영적, 사회적 유산을 남겼다.
향후 연구를 위해서는 강원도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심층적인 지역별(예: 영동, 영서, 북부 접경 지역) 선교사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역 주민들의 삶과 문화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예: 언어, 생활 습관, 사회 구조 변화 등)에 대한 미시적 연구가 필요하다.
C. D. 모리스 선교사의 사례처럼, 선교사들의 복합적이고 때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할에 대한 균형 잡힌 연구가 지속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한국 근대사와 선교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