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준 축복의 땅 우즈베키스탄
오래전부터 리히터 지진계로 규모 7.5를 기록한 타시켄트의 지진 피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방문은 나에게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었다. 지진의 피해를 입은 타시켄트의 모습은 어떨까? 그리고 구 소련지역에 새마을운동 전수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2015년 6월 7일 타시켄트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시간 오후 7시 20분(한국시간 밤 11시 20분)인데도 기온이 35C°도여서 후덥지근하게 더웠다.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지진 진원지로 갔다. 그 곳에는 지진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기념탑 중심에는 인물상이 서있는데 한 남자가 닥쳐오는 재난을 자기 몸으로 막아 뒤의 여자를 보호하고 여자는 아기를 보호하는 형상이었다. 이들의 발아래는 이 참혹한 지진이 발생한 시기를 표시하는 육면체의 깨진 돌이 있었다. 오른쪽 면에는 1966년 4월 26일을, 그 옆면에는 새벽 5시 23분에 멈추어선 시계가 있었다. 이 기념상의 제목은 “용기”라고 하고 재난을 용감하게 대처하는 타시켄트 시민의 용기를 표상하는 의미라고 한다. 용기란 제목의 인물상 뒤에는 여러 인물들의 군상이 새겨진 동판이 조각되어 있었다. 지진이 발생했던 시기에는 우즈베키스탄이 아직 소련연방의 일원이었기에 여러 공화국이 복구에 참여하였음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 당시 지진으로 6,300여명이 사망했고, 78,000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30만 명의 타시켄트 시민들이 집을 잃어서 재산 피해액도 1,400억 달러라고 했다. 기념탑을 보면서 시민들이 곤히 잠자는 새벽에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아비규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일본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지진피해를 가끔 봐왔기에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폐허가 된 타시켄트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지 만 오래된 유적의 건물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구소련 19개 공화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계획도시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 때 복구에 참여했던 소련국민들이 기념으로 1982년에 “인민친선궁전”을 완공했다. 그 궁전은 원형극장 으로 대강당은 4천여 명을 수용하고 8개 언어로 동시통역이 가능 하다는 말을 듣고 그 규모에 놀랐다. 나는 이 인민친선궁전이 주는 의미는 ‘음악이나 연극 등의 공연이 여러 사람의 협동과 화합으로 이루어져 감동을 주는 것을 상징해서 19개 연방 지원국은 타시켄트 복구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즈베키스탄은 1924년에 소련에 병합되었다가 1991년 12월 8일 다시 분리 독립되었다. 지금은 125개의 다민족이 살고 있으며, 인구는 31,00만 명, 종교는 88%가 무슬림, 주 작물은 면화이고, 국민 소득은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1,300불 정도라고 했다. 국민들은 구소련의 강대국의 국민이었다는 것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고, 시와 노래를 좋아하며, 이웃이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손님 접대도 극진히 하고 손님 술잔에 첨잔 하는 것은 예의이며 원 샷을 하는 것은 상대방과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의미로 결례가 된다고 한다. 이들은 노인을 정성껏 공경하며 가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타시켄트 시내는 공원이 여리 곳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시내 중심부에 있는 공원은 구소련 때는 ‘레닌광장’ 이었지만 분리 독립한 후에는 ‘독립광장’으로,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었단다. 공원주위에는 상‧하 양원 의사당과 정부 부처의 청사가 있었다. 공원 중심부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한 우즈베키스탄인의 ‘전사자 추모 광장’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은 회랑에 금속 책자로 새겨 각 주별로 분류해 둔 것을 보면서 자국민의 값진 죽음을 소중하게 예우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추모광장에 있는 “비애 하는 어머니동상” 앞에는 항상 꺼지지 않은 불꽃을 밝히고 있었다. 어머니상을 둘러싼 벽면에는 “자식은 죽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영원히 가슴에 남는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우즈베키스탄은 타시켄트시의 인구과밀을 막기 위해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다. 구소련시대 4대도시였던 타시켄트시민이 될 수 있는 조건은 타시켄트남성과 결혼한 여성은 지역에 관계없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일행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3일 이상 머물면 거주지 등록을 하고 출국 시 거주지 등록증을 제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 했는데 실상을 알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한번 통제했던 타시켄트시의 거주이전을 해제했다가 집값 폭등 등 부작용이 거세져 다시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으로 1990년 대 중반 230만이던 인구가 현재 250만 정도라니, 우리나라의 수도권 과밀현상과는 대조적이었다.
타시켄트 시내에 있는 바자르Bazaar(우리나라 재래시장)에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주민들의 삶의 현장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타시켄트에는 11개의 바자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이드에게 부탁해서 그 중 한곳을 찾아 갔다. 재래시장은 지붕만 있는 노천시장으로 시멘트로 점포를 만들었고, 각 점포마다 일련번호가 있었는데 모두 1,132개의 점포가 있었다. 각 점포에는 저마다 좌판을 벌여 장사를 하는데 우리나라 재래시장 보다는 상품의 다양성과 포장 기술이 많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끔 물건을 사라는 상인들의 외침을 들으면서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았다. 특히 청정지역에다 일조량이 많아 과일 맛이 좋다고 해서 살구, 복숭아를 먹어보니 당도가 높아 우리나라 과일 보다는 맛이 훨씬 좋았다. 함께 간 지인이 이곳 건포도는 세계 최고라며 1kg을 선물로 사주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몇 개를 먹어보니 우리나라 건포도 보다는 맛이 월등히 좋은 것 같았다.
우즈베키스탄은 1,000여 년 전부터 주민공동체인 마할라Mahalla라는 마을 조직이 있어 이 조직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고 의사소통을 해서 유대를 강화하는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마할라의 장은 마을에서 존경받는 인물을 추대해서 마할라의 통솔 및 결속력을 강화하고 마할라 마다 반드시 여성위원장이 있었다. 마할라 조직의 성격이나 추진하는 사업이 새마을운동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을 지난해 한국에서 열렸던 마할라 와 새마을운동간 긴밀한 협력관계 구축을 위한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해서 알 수 있었다.
마할라 와 새마을 운동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한국이 새마을운동 시범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도스틀릭 마을로 갔다. 가는 길 곳곳에 펼쳐지는 푸른 숲, 맑은 물과, 시골로 가는 길에는 양떼와 말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과 가끔은 당나귀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어 우즈베키스탄은 살기 좋은 평화로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주민들과 한국에서 파견 온 새마을리더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곳 주민들과 긴 대화를 나누면서 새마을운동을 전수하는 것을 원조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한국이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수하는 것은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원조의 성격이 아니라 한국이 가난을 극복한 ‘성공경험’을 가르쳐 주어 공유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자립정신을 길러 주는데 목적이 있다’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양국가의 고유한 국민운동인 마할라와 새마을운동을 이곳 풍토에 맞게 잘 접목 시켜 주민들이 원하는 사업을 개발하여 ‘주민이,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운동으로 정착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4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울창한 숲의 도시 타시켄트 시와 시골마을을 방문하는 동안 푸른 숲, 맑은 물, 쾌청한 날씨, 넓은 평원, 탐스런 과일 밭, 눈 덮인 천산산맥 등을 보면서 우즈베키스탄은 '자연이 준 축복의 땅'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좋은 환경을 가진 곳에서 마할라 와 새마을 운동이 서로의 역할과 특성을 잘 살려서 지역사회 발전을 견인하는 새로운 모델이 탄생 되어 ‘도스틀릭’마을이 우즈베키스탄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되기를 염원하면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갔다.
첫댓글 이제 한반도에 더이상 지진이 없기를 기원드립니다.
세번의 지진 진동을 겪으면서 자연의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습니다
타시켄트 지진피해를 보면서 한국은
지진피해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 했는데
이제 한국도 지진피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제발 지진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합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
반갑습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