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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2 - 그리스와 동방을 정복하고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다!
한니발은 2차 포에니전쟁때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연전연승하면서 로마와
관게를 끊어내서 많은 도시들을 이탈시켰으니 카푸와 타렌툼에 시라쿠사 등
인데 한니발은 그 외에도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하고자 했습니다.
마케도니아가 자리한 그리스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장군들이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및 이집트를
차지해 전쟁했으니 그리스의 인구는 대부분 동부, 즉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및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리아 남부와 이집트 등지로 빠져나갔으니 당시 쇠퇴하던 중이었습니다.
1,2차 포에니전쟁 40여년동안 로마와 카르타고가 치열한 싸움을 벌일 때 헬레니즘 국가들이 이용할
마음만 있었다면 신흥국 로마를 주저않힐수도 있었지만 이들 헬레니즘 세 나라는 지중해
동부에서 자기들끼리 싸움에 열중할 뿐 지중해 서부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니 중립을 지켜
달라는 로마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었으니..... 잇몸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다는걸 몰랐던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의도는 한니발이 시간을 끄는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그리스 남부의 도시들을 공격
하고 일리리아를 손에 넣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제2차 포에니 전쟁 직후 마케도니아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해 일리리아에서 우위를 인정받았지만 국력 차는 너무 커서, 마케도니아는 피해를
회복한 로마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니 한니발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남부에 시칠리아 섬에서는 수백년간 가장 큰 도시었던 시라쿠사의 경우 칸나이
전투 이후 생전 끝까지 로마를 지지하던 히에론 2세가 죽자 친 한니발
파벌이 반란을 일으켜 한니발에게 붙어버렸으니.... 한니발의 이도는 일단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파병된 마르켈루스가 곧바로 시라쿠사를 겹겹이 에워쌌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에서 상륙한 카르타고군이 전염병으로 몰살당하는 불운을 겪고,
그리고 연이어 마르켈루스에게 격파당함으로써 결국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에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한니발에게는 실망이었습니다.
모루와 망치 전술로 이탈리아 전투 특히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둔 한니발이 흑인이 아니냐는 말도 잇지만.....
카르타고가 중동 레바논의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이 이주해 세웠고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은 베르베르인
이고 현대 아랍인들은 아랍화된 베르베르인이니 결과적으론 페니키아나 베르베르인 모두 백인에 속합니다.
로마는 기원전 202년 자마전투 승리로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고 카르타고의 해외식민지를 빼앗고 카르타고
해군을 해산시켰으며 다른나라와 전쟁도 금지시켰는데....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
으며 로마는 다음 목표로 풍요로운 동방에 위치한 헬레니즘 국가를 노리고 그리스인들의 분쟁에 개입합니다.
헬레니즘 세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120년 세월을 보내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등뒤에
로마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데... 기원전 202년 자마회전에서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로마는 5년후인 기원전 197년에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자 셀레우코스왕조에서 독립한 터키 서부에
자리한 페르가몬 왕국은 옛 종주국 시리아와 긴장관계라 로마편을 들었으며 시리아는 중립을 지킵니다.
기원전 191년 로마가 안티오키아(성경의 안디옥)에 도읍한 셀레우코스왕조 시리아를 침공하자 로마에 참전
한 나라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왕국, 페르가몬과 로도스였으며.... 로마와 동맹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간 서로 싸웠던 시리아가 패배하는 것을 고소한 기분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역시나 잇몸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다는걸 몰랐던 것인데.....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그리스 민족은
절대로 그들끼리 싸움을 해서는 안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지중해 서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전쟁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할 권리는 그리스
민족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사전에 “단결” 이란 단어가 없는데야 어쩌랴?
기원전 197에 로마와 싸워 패한 40세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는 신중한 사람이라 그 6년후 로마
가 시리아와 전쟁할 때도 군대를 내어 협력하는등 18년동안 단 한번도 로마에 배신해
반기를 드는 일이 없었으니 엄청 신중한 사람이라 하겠는데.... 장남은 첩의 소생인
페르세오스 이고 차남은 정실 소생인 데메트리오스이니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줄지 고심합니다.
그래도 정실 차남 데메트리오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아들은 로마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국하는데, 로마는 인질이 아니라 손님으로 대접해 로마인 유력자에게 맡겨 좋은
교육을 시켰으니 친로마파가 된지라.... 마치 인조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끌려갔던 장남
소현세자가 새 질서와 신문명에 눈을 뜨고는 친청파가 된걸 보고 분노해서 죽인 것과 유사합니다.
이 틈을 파고든게 첩의 소생인 장남 페르세오스는 아버지에게 동생 데메트리오스가 로마와 밀략을 맺고는
우리 마케도니아를 로마에 팔아넘기려 한다 말하니 필리포스는 의심을 품으면서도 아들을 반역자로
몰아 죽이는데... 인간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 것만 듣는 존재였기 때문인가 하니, 조선의
중종이 조광조에게 마음이 돌아선걸 눈치챈 홍경주, 남곤, 김전이 조광조를 죽이라 주청한 것과 유사합니다.
그후 장남 데메트리오스에게 씌워진 혐의는 날조된 것으로 밝혀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필리포스
5세는 아끼는 아들을 죽인데 대해 회한에 몸과 마음이 상해 58세로 죽으니 왕위는 첩의 소생인
차남 페르세오스가 오르지만 아버지에게서 긍지는 물려받았지만 통찰력은 물려받지
못했으니 시리아왕 안티오코스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누이를 비타니아왕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마케도니아왕은 군비를 증강하며 의심을 가진 로마에는 북방 켈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 둘러대는데
5년후 재군비를 실현한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인 페르가몬에 창끝을 돌리니 로마는 외교
로 해결하려 했으나 페르세오스가 분명한 답을 주지않자 전쟁을 결심하고 여러나라에 사절을 파견합니다.
그리스 서부의 일리리아, 중부 아이톨리아동맹, 아테네등 아카이아동맹이 로마편에 참전을 통보해 오고
페르가몬왕국과 로도스에 왕비의 친정 시리아 셀레우코스오아조도 로마편에 참전을 결정했고 매제인
비타니아왕은 중립인데.... 마케도니아는 중무장 보병에 오리엔트에서 용병을 모아 5만대군을 편성합니다.
로마는 여러나라 군대를 다 합쳐도 3만명에 불과했는데, 마케도니아가 한니발처럼 직접 로마 영토를
공격한 것도 아니어서 적극적으로 파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니 그러니까 기원전 197년 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마케도니아가 한니발과 공동 전선을 펴서 로마 배후를 공격하려고 했기
때문에 침공해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지만..... 기원전 171년에는 전쟁할만한 동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리스에 상륙한 소규모의 로마군은 마케도니아가 어찌 나오는지 보자는 정도로 매우 소극적으로
임하자 로마의 전쟁 의지가 없다고 판단해 기세가 오른 마케도니아군은 대군으로 로마군을 공격해
4천명의 병사를 잃는 참패를 당하자,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챔피언에게 결코 이길수 없다고 생각한
도전자가 예상을 깨고 승리하자 관중은 태도를 바꾸어 응원하고 로마에 욕설을 퍼부었다” 고 적었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168년에 칸나에전투때 사망한 집정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들을 집정관으로 선출
했으니 그의 누나는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부인인데 아이밀리우스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쌍벽을 이루는 로마의 명문 귀족으로 그리스 문화를 애호하는 것도 스키피오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귀족이기는 하지만 가난했는지 장남은 파비우스가문에 양자로, 막내는 스키피오가문에 양자로 보냈는데 이
두 아들과 사위인 카토의 아들에 명장 스키피오의 사위 스키피오 나시카를 부관으로 쓰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민회는 관레에 어긋났지만 청을 들어주니, 그는 자기 의사대로 부하들을 부릴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페르세오스를 제2의 알렉산드로스대제로 여긴다는 것을 듣고는
기원전 168년 6월 브린디시항을 떠나 코르푸섬을 지나 서해안에 상륙후 진군했으니 마케도니아군
이 산악지대로 도망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인데 로마군 상륙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페르세오스왕의 숙영지인 피드나평원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가히 전광석화같은 움직임입니다.
마케도니아군 4만 4천에 로마군은 3만이었으니 페르세오스왕은 병력이 우세한걸 믿고 회전에
응하는데 전날 밤에 월식이 있었으니 젊은 시절 점을 치는 관리를 지낸 적도 있는
아이밀리우스는 저녁 6시경 부터 밤 9시까지 달이 이지러지겠지만 걱정말라고 병사들
에게 미리 말해둔 반면에 마케도니아군은 저 급작스러운 일식을 흉조로 여기고는 불안해 합니다.
다음날 전투가 벌어졌고 7만이 넘는 대군이 격돌한 것 치고는 어이없게도 1시간만에 승패가 결정되었으니
마케도니아군이 겁에질려 있었다기 보다는 부대를 유기적으로 활용하고 부관들이 그 뜻을 알아
손발처럼 운직여준게 더 컸다고 여겨지는데 로마군은 마케도니아군을 포위해 한방에 궤멸시켜버렸습니다.
이 전술은 기원전 197년에 플라미니누스가 필리포스를 상대로 쓴 전술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전법이었습으니 마케도니아군 전사자는 2만 5천에 포로가
6천인데 비해 로마군 전사자는 달랑 100명도 되지 않았다니..... 폴리비오스가 말했듯
한니발 전쟁 이후 로마군은 지휘만 제대로 된다면 효율적이고 정교한 전쟁 기계로 변해 있었습니다.
패장인 페르세오스왕은 수도인 펠라로 도망쳤으나 주민들은 성문을 닫아걸어 버렸으니 사모트라케섬
으로 달아났으나 배신당해 추격해온 로마군에 사로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헬레니즘의
세 국가 중에 마케도니아는 멸망했으며 마케도니아편에 섰던 70개 도시는 약탕당했고
훗날 역사가 폴리비오스를 비롯해 1천명의 고관들은 로마로 압송되었고 일부 주민들은 노예로 팔립니다.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4개로 분리해 각각의 왕국이 자치하도록 허용했는데 다만 마케도니아 왕에게 바치던
조세중에 절반은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 나라를 운영하도록 했으니.... 비용 때문에라도 군대를
많이 육성하기는 힘드니, 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270개 번주들에게 도쿄에 집을 짓고 2년중
1년씩 에도에서 살도록 함으로써 반란을 일으킬 경제력을 왕래하는 길거리에서 소모시킨 것과 비슷합니다.
카르타고를 제압한 로마는 기원전 197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그후 아이톨리아 동맹의 요청으로, 그리스에 개입한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왕
안티오코스 3세를 기원전 188년 테르모필레전투에서 격퇴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에서 패권을 확립합니다.
로마군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 까지 건너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지역의 패권
을 확립했으며 필리포스 5세의 뒤를 이은 페르세우스 왕이 로마에게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로마는 기원전 168년에 피드나 전투에서 승리하고는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킵니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왕국을 4개로 나누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처럼 자치를 허용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군소국가들을 상대로 온건주의 외교를 추진하게 되는데... 로마 원로원내에는 스키피오가문을
위시한 온건파가 많았고 또한 온건주의 외교는 이탈리아 내의 동맹시를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온건주의 외교 노선은 로마 문화의 전통인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 관계를 국가간에 적용한 것으로 로마
가 파트로누스 역할을 하고 동맹시들이 클리엔테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니 이 관계에서
로마는 동맹시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동맹시들은 로마에게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에서 전제되는 것은 동맹시들이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이었으니
상당히 느슨한 관계였는데, 이탈리아 내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와 수백년간 전쟁을 했으므로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므로 이 관계를 훌륭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때문에 로마는 그들의 온건한 외교 노선을 신뢰하고 있었고 따라서 동방의 새로 패권하에 들어
온 그리스 국가들에게도 같은 노선을 적용시켰지만 그리스는 이탈리아 도시들과는
달랐으니 이들은 로마와 전쟁을 해본 경험도 별로 없는데다가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멀리 떨어져있었으므로 로마를 그다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 관계라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으니 그리스인
들은 개인주의적 사상이 매우 강했고 이것은 그리스 철학의 발달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많은 도시들에서 귀족은 몰락했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다.
때문에 강력한 가문이 뒤를 봐주고 그의 서포트가 된다는 식의 로마식 전통을 이해할 리 없었으니 때문에
그리스의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또 로마의 온건한 외교를 로마인
들이 그리스인들의 우수한 문화에 열등의식을 느껴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에 대해 상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군사적으로
반발하려고 하였으니.... 새로 손에 넣은 도시들이 당연히 클리엔테스의 책임을 다할 줄 알았던
로마에겐 뜻밖이었고, 당혹스러운 것이었으니 온건주의 외교노선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고 특히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인들이 반발할 때마다 전쟁터에 끌려가야했기 때문에 매우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발레리우스 가문은 명 웅변가 대 카토를 내세워 이러한 여론에 편승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자 온건주의 노선이었던 스키피오 일족이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
되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탄핵당해 실각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원로원내
카토의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시민들의 호응을 얻자 로마는 점점 강경노선 외교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카토는 두가지로 유명했는데, 첫째 그리스 문화를 매우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고,
둘째로 카르타고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카르타고와 별 관련 없는 연설에서도 연설
말미를 장식한 "Carthago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합니다) 라는 명대사가 그의 뜻을 보여줍니다.
로마의 정세 변화를 지켜보던 누미디아왕 마시니사는 왕국을 넓히기 위해 카르타고를 침략하기 시작하자
카르타고는 침략과 약탈로 피해를 입었지만 로마의 허락없이 전쟁을 할수 없었으므로 로마에 군사적
행동의 허가를 요청했으나 로마는 2차 포에니전쟁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에 우호적이었고 카르타고
에게 적대적이었던지라 로마 허락을 받을수 없었으니 카르타고 내에서 반로마 감정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서 25,000의 병력으로 누미디아에 맞서싸웠지만, 카르타고가 이미 예전 카르타고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오히려 누미디아군에게 패배해 50년간 배상금을 주기로 하였고 누미디아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즉시 무단으로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를 결의합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역사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 것에
격분했다는데 이는 카르타고의 영역을 장기적으로 갉아먹어 종국에는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확립하려던 야망이 로마 개입으로 인해 좌절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니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단 한명의 병사도 파견하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다가 기원전 148년 사망합니다.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사과하며 앞으로는 강화를 준수하겠다고 하니 로마는 카르타고의
무기 몰수와 새로운 배상금 부과등 다양한 압박을 가했고 카르타고는 로마가 내세우는 여러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는데 로마는 카르타고가 모든 조건을 받아들여 배상금과 무기들을 넘겨받자 선전
포고의 철회의 대가로 수도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들을 해안에서 15km 밖으로 이주하라라고 협박합니다.
15km 의 이주 조건에 대해 카르타고 사절들은 카르타고를 죽이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나 로마
원로원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이라며 돌려보냈으니 카르타고 사절 절반은 카르타고
로 돌아가는 중에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렸고 이들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분노한 시민들을 마주하기 전에 목숨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카르타고 시민들은 이 조건을 듣자마자 분노하며 귀국한 사절들을 모두 처형해버렸으니
이 사절들이 카르타고 내에서 로마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뒤
시민들을 설득해 사절로 간 평화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렇게 사절들을 다
처형한 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와 전쟁을 결의하기로 결정하니 3차 포에니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게 카르타고와 로마는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지만 그러나 이미 승패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해
굴욕감과 비참함을 맛보느니 끝까지 로마인들과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로마가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내놓으라고 했을때, 이를 따른 건 카르타고의 실수
라고 평하니 1, 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로마군과 더 이상 싸우기 싫었던 카르타고인
들은 로마의 말을 따랐지만, 로마는 애초부터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에 로마에게 큰 이득이 되었을 뿐이었으니 이 일화는 훗날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줬습니다.
포에니 전쟁에서 연패하면서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자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해군을 해체하고,
모든 해외 영토의 소유권을 로마에게 완전히 넘겼으며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수 없게
되었으니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인데 로마인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으며 그나마 스키피오, 나시카 등의 온건파는 카르타고의 존속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카르타고는 패배 이후에도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뛰어난 상업력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나
군사적으로는 몰락한 상태였으니 1차, 2차 전쟁때와는 달리 이 시점의 카르타고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그리스를 사실상 손아귀에 넣고 중동의 헬레니즘 왕조들까지
정복하며 군사력을 전 지중해에 과시하고 있던 로마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졌습니다.
카르타고의 멸망을 불러온 결정적인 문제는 카르타고가 여전히 부유했다는 점이었으니 카르타고가 빈곤
하고 가난한 나라가 돼서 로마의 자비에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면 목숨은 부지할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페니키아의 농업 생산력과 해상무역 덕분에 카르타고는 여전히 부유하고 잘 사는 나라
였지만 문제는 카르타고인들이 자신들의 '부' 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 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카르타고의 부를 로마가 탐냈던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으며 근본적으로는 그
부(富)를 통해 다시 카르타고가 다시 강성해지는 것이 두려웠다고 보는게 옳을 것인데,
카르타고는 기원전 150년에 인구 25만의 엄청난 대도시였으며 웅장한 건물도 많이 있었습니다.
기계가 없이 손으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 시절에 25만의 인구를 수용할수 있는 대도시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니 사막화가 진행되어 척박한 땅인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카르타고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갖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한 가운데라 유리한 교역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제정 로마시절 카르타고가 재건된 도시임에도 인구가 50만까지 늘어나 아프리카 속주
의 주도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의 입지 조건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수 있으니.... 상식적으로 이런 도시를 점령했으면 거주민은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죽이더라도, 도시 자체는 이주민을 보내서 살리는게 당연히 유리합니다.
기원전 149년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로마군에 의해 카르타고시가 포위되어 공방전이 되었으니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임수에 넘어가 모든 무기를 로마에 넘겨주었지만, 자신들에게 익숙지 않는 대규모
징병까지 감행해 3만 병력을 채웠고, 도시 안의 모든 무기공장을 가동하여 다시 무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카르타고의 힘줄을 끊어놓은 아프리카누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 역시 결코 작지 않은
명예가 될 것이었으니 제2의 아프리카누스를 노린 로마의 집정관들이 8만이나 되는 병력으로 맹공을
퍼부었지만, 카르타고인들은 아예 살아남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처절하게 항전하며 3년이나 버텨냅니다.
카르타고인들이 육상으로도, 해상으로도 완전히 고립된 도시에서 군대의 양과 질, 전략과 보급 등 어떤면
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던 로마군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버틴 것은 물론 대단했으나,
이것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파멸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이 보았을때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완전히 고립시킨 적을 상대로
3년씩이나 결판을 내지 못한 것은 전혀 즐거운 상황이 아니었으니 이렇게 장기전이
되면서 엄청난 시간과 인력, 물자가 소모되었고, 로마 시민들의 전쟁피로도 계속해서 심화되었습니다.
전쟁에 넌더리가 나버린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전쟁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연령에 미달했지만 카르타고
포위전의 첫 2년간 다른 지휘관보다 확연히 나은 활약을 보여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집정관
으로 선출하여 지휘를 맡겼으니.... 원칙을 어겨가며 뽑아준 만큼 반드시 끝장을 보라는 의사표시 였습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총지휘를 맡은 로마군이 집요하게 공격을 하였고, 결국 전쟁 3년차에
성벽이 뚫렸는데 성벽을 넘어선 로마군을 기다리는건 도시 전체에서 동귀어진(同歸於盡)
으로 목숨을 버리고 달려드는 시민들이었으니 수많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싸우다 죽는 길을 택했고, 학살과 자결이 더해지면서 희생자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납니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패한 카르타고인들의
용맹을 기려 생존자들을 살려주고 이주를 허락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니
성을 함락한 로마군은 카르타고인이 처절하게 저항하자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기에
마지막 저항 까지 스러져 갈 무렵에는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불과 5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건 노예의 낙인이었으니 지중해 세게로 팔려나갔고 텅 빈 카르타고는 껍데기마저 깨끗이
태워졌으며 바닷물을 끌어들여 도시는 완전한 불모지가 되어버렸는데, 도시는 훗날 아우구스투스
가 다시 재건하기 전 까지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으니.... 이렇게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맙니다.
포에니 전쟁의 맞수였던 카르타고와 3차 포에니전쟁을 벌려 카르타고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많은 시민
들을 노예로 팔아버려 민족 자체를 말살시킴으로써 주변국에 본보기를 보였으며 그후
로마의 패권이 공고해져 도시 국가에서 지중해 세계의 전체를 소유하는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곡창지대의 풍요로운 도시이자 그 위치로 인해 해상 무역의 거점이었던 부유한 도시 카르타고를
로마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17일 동안이나 철저히 태우고 뭉개버렸으니, 어찌나 철저히 때려부쉈던지
오늘날 제정 로마 시절의 유적은 곧잘 발굴돼도 도시국가 카르타고의 유적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 입니다.
로마가 점령한 도시는 숱하게 많지만 이런 운명을 맞은 도시는 카르타고 외에는 거의 없으니, 로마가 단지
카르타고의 부를 탐냈다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도시를 부숴버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로마인들에게 카르타고는 저주스런 이름이었고, 제2의 한니발이 나올까 보아 두려웠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당나라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말시켰을 때 일단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지난 70년간
수나라때 부터 전쟁을 하는동안 중국 백성들은 전쟁을 위한 중과세에 식량을
공출 당하고 무기와 배를 제작하느라 바닷속에서 다리가 썩어니가고.....
설사 군대에 끌려가서 죽지 않더라도 요동까지 군 장비와 식량을 운반하느라 무진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요동으로 갔다하면 살아 돌아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니 “꺼우리(고구려인)” 라고 하면
중국인들에게는 공포이자 저주스러운 이름이었으니, 훗날 중국이 안사의 난등 혼란해지면
고구려인들이 다시 나라를 세울 것이니 그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당나라는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을
중국으로 잡아가 장안까지 조리돌림을 한 후에 노비나 농노로 만들었으니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멸망하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하는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면서, 언젠가는 로마 역시 카르타고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예언은 서로마에는 서고트족과 반달족 그리고 동고트족에 의한
로마 약탈, 동로마에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보듯 비슷하게 들어맞게 됩니다.
수백년간 지중해를 호령했던 해양민족 카르타고 본거지는 백년이나 방치되었다가 카르타고가 재건되는건
로마인이 카르타고에 대한 강박관념을 떨쳐낸 100년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이었으니 북아프리카
의 풍요롭고 비옥한 농지는 라티푼디움 위주로 비로소 재건을 시작해 로마 귀족들의 주머니를 불려줍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가 재건을 끝마친 뒤에는 다시 좋은 항구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으니.... 불과 5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절임에도 이미 인구 50만을 찍을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으며 600여년후 이슬람 침공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의 주요 도시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신화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카르타고를 떠날때 예언되었던 디도의 저주도 멸망함으로서 끝나게 되었으며,
그리스에서 세번째 큰 대도시 코린토스도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리고 기원전 133년에는 스페인 켈티베리아 지방의 도시 누만티아도 두 도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로마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이네이아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의
전신격인 라비니움을 건설한 신화를 들어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습니다.
또 너희 튀리아여! 영원히 그의 핏줄 모두에
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체 없으리라!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불과 칼을 들어 달다냐[46]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
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디도의 저주.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4권 622-629행
한편 1985년 1월에는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 우고 베테레와 튀니지의 튀니스(현재의 카르타고)
시장 체드리 쿠리빈이 만나 공식적으로 전쟁 종결에 서명하기도 했으니 이로써
공식적으로 보면 3차 포에니 전쟁은 2,131년 만에 끝난 셈인데 이렇듯 2천여년이
지난 이후에 전쟁 종결에 서명하게 된 것은, 공식적인 종전 선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고대에는 종전 협정이 있어야 전쟁이 끝난다는 개념이 없었고, 더군다나 이 전쟁은 카르타고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서, 종전협정 자체가 있을수가 없으니 어차피
현대 이탈리아나 현대 튀니지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포에니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지만이건 이탈리아와 튀니지의 관계개선을 위한 퍼포먼스이자 상징적인 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