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7월 29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저녁때 춘천역을 출발한 특별열차가 부산항 제3부두에 도착했을 때다. 무엇이든 그냥 삼켜버릴 것 같은 미군의 거대한 병력수송선이 산처럼 버티고 있다. 베트남 전선으로 출정하는 제14제대, 맹호부대와 십자성부대 장병들 승선이 완료되고 장엄하면서도 애잔하게 진행되던 환송식이 끝났다. 나는 행사요원으로 식을 마치고 맨 나중에 배에 올랐다. 이내 황소울음소리 같은 뱃고동이 두어 번 울리면서 매어둔 닻줄이 걷히고 두 척의 강력한 예인선이 찰싹 달라붙어 매몰차게 선체를 밀어낸다. 환송객들 모습이 멀어져 가물거리고 오륙도마저 희미하게 사라진다. 부디 몸성히 귀국하기만을 기원하던 아내와 첫아이를 두고 온 대연동 뒷산이 풍경화처럼 아스라해지자 외로움이 엄습했다.
해는 아직 중천인데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영해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드디어 미지의 전선으로 실려 가는 항해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1945년 겨울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귀국선을 타려고 하던 밤의 춥고 어수선하면서 절박했던 정황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부산을 떠난 지 한 나절이 지난 저녁쯤에 항해전투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전용 달러를 지급받았다. 국내 봉급은 일 년치가 이미 아내에게 지급 된 후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선내 PX로 달려가 작전용 손목시계를 골랐다. 물건을 건네던 중년의 남자점원이 좋은 것을 선택했다며 베트남전에서 용맹스럽게 잘 싸우고 귀국할거라며 격려해주었다.
장교들의 선실은 선체중앙에 아파트 형식으로 매 칸이 2인용 이라 괜찮았다. 첫날의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숙소가 있는 맨 아래층 물속에 위치한 장교식당으로 향했다. 필리핀 웨이터들이 반갑게 맞아주며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는 데로 날라다주었다. 국내의 미8군 시절 테이블 매너에 익숙해 있는 터라 이것저것을 주문하는데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동료들이 내가 시킨 메뉴로 통일하게 되었다. 이튼 날 점심에는 튀김 닭고기가 메인 메뉴였다. 나는 웨이터에게 날개부분을 달라고 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전통이지만 장교들은 주로 날개부분을 먹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일행들도 모두 나와 함께 날개부분만을 먹겠다고 했다. 항해 중 어떤 상황 하에서도 늘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다지만, 웨이터들이 으아 해하는 표정이어서 이번항해에는 닭고기의 날개가 부족하지 않겠는가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아무튼 전쟁에 임할 장교들에게 최선의 예우를 하겠다는 뜻을 내게 전해왔다. 하지만 사실이 함장에게까지 보고가 된 터라 내가 조절해야 할 입장이 되어 다음 날부터는 날개와 다리를 적당히 섞어서 주문해 먹기로 조율했다. 날씨가 더없이 맑고 물결이 잔잔해 영화에서나 보았던 크루즈여행을 하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조식은 토스트에 달걀은 삶은 거나 반숙과 부침개였다. 우유에 옥수수나 쌀가루 볶음을 넣어 입가심을 하고 토스트에 버터나 잼을 발라 먹으며 여러 종류의 주스를 골라 마시고, 커피를 든 후 사과나 오렌지를 챙겨 조깅을 하듯이 갑판을 돌았다.
3일째 되는 날 필리핀 근해를 통과하고 있을 때 잠수함의 잠망경이 눈에 띠었다. 우리를 호위하고 있구나싶어 든든했다. 고베에서 태어나 교토에 있는 외갓집으로 나들이를 하며,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도쿄 근교에 있는 군수공장의 식당을 경영하는 부모님 덕분에 자유 분망하게 살았던 시절이 떠올려진다. 해방 후 귀국선에 실려 부산항에 내린 후, 영도에서 살던 중학시절 여름이면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물개처럼 지냈던 시절도 회상된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장교휴게실로 향했다. 때마침 1965년 작 '닥터 지바고‘가 상영되고 있어 개봉 시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전선으로 가는 선상이라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이집트 출신 오마샤리프의 팬이었던 나는 영화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시베리아 늑대들의 음산한 울음소리에 마음이 움츠려지면서 빨치산들의 포로가 된 지바고의 신세로 전락되는 기분이었다.
조용하던 선체가 흔들리는 바람에 밖으로 나와 선실로 들어갔다. 점차 파도의 격랑이 심해지면서 선체 앞부분이 반쯤 들리는가 싶더니 쿵하고 떨어지면서 배가 전후좌우로 후들거린다. 갑판의 해치가 닫쳐지고 산더미처럼 밀러 닥치는 파도에 묻혀가는 잠수함 꼴이다. 뱃머리가 수없이 치켜 들렸다가 떨어지는 순간 옆에서 몰아치는 파도에 바르르 떨며 요동을 친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베트남전선에 발을 딛기 전에 바다에서 죽게 되는 게 아닌가라는 탄식들이다. 나는 아내가 미리준비해 준 인삼을 깨물면서 한쪽 발이라도 맨땅에 대봤으면 했다. 4일째 되는 날이 밝아오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면이 잔잔하다. 배 멀미와 여인들의 입덧 그리고 단기금식으로는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서너 끼 식사를 재대로 못하고 즐비하게 누워버렸던 장병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항해는 순탄하게 계속 되고 식사도 처음처럼 인데 파도와 멀미 때문에 닭고기 날개 걱정은 안 하게 되었다. 6일째의 항해가 끝나고 잔잔하게 찰싹대는 파도를 가르는 선체 주위에 돌고래들이 나타났다. 길을 안내하려는 것 같이 가는 방향으로 유영을 하고, 날치들도 떼를 지어 물속에서 날아오르고 있어 우리를 환영하는 군무처럼 보였다. 7일째 되는 날 저녁 때 멀리 육지가 보이고 더 가까이로 파란 잔디밭 같은 게 보였다. 저기가 베트남 땅이라고 하면서 모두들 웅성거린다. 2020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