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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아름답고 경사스럽다고 부른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쯤 전, 만주 벌판과 백두산 자락을 오가던 대종교인들 이야기다.
그들은 죽음을 '조천(朝天)'이라 했다.
하늘을 뵙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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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글자에 그들의 세계관이 통째로 들어 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폐기법(閉氣法)으로 숨을 거둔 홍암 나철의 그날을, 대종교는 지금도 가경절(嘉慶節)이라 부른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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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5백 년 동안 기층민의 무속 속에 겨우 명맥을 잇던 한국선도가, 어떻게 백 년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폭발하듯 되살아났는가. 그리고 그 부활이 왜 '청산리대첩'과 '임시정부' 인적 자원의 80% 이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는지 '수행'의 덕목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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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도(韓國仙道)는 상고시대부터 자생하여 이어진 한민족 고유의 사상이다. 신시배달국과 단군조선을 거치며 한민족 사유체계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 쇠퇴하고 삼국시대 이후 중국에서 유입된 유·불·도에 밀려 빛을 잃기 시작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좌절되면서 국학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었고, 조선왕조의 억불숭유 기조는 그 잔재마저 기층민의 무속 안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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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끊기지는 않았다. 문헌상 최소한 발해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삼법수행이 명맥을 유지했다. 그 근거는 발해 대조영의 어제 글과 문왕의 봉장기, 그리고 대조영의 신하 임아상이 713년 10월 칙명을 받아 작성한 '삼일신고(三一神誥)' 주해다. 임아상의 직책은 '자수대부 선조성 좌평장사 겸 문적원감'. 오늘날로 치면 교육부 장관급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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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300년 전의 주해서가, 훗날 대종교 삼일철학의 골격이 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구한말의 격동 속에서 한국선도는 민족종교의 옷을 입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동학·정역·증산도·원불교·갱정유도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했다. 모두 한국선도의 토양 위에서 나왔다. 다만 핵심 경전 셋(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채택하고,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을 갖추고, 환인·환웅·단군 삼성(三聖)을 선도 스승으로 모신 곳은 단 하나, 대종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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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종교 뒤에 백봉교단이 있다.
백봉신사를 중심으로 한 이 단체는 백두산을 수련 근거지로 삼은 비밀결사다. 백봉에게 직접 지도를 받던 인물이 33인(혹은 13인)이라 전해진다. 불교와 유교에 밀려 거의 사라질 뻔한 한국 고유의 전통선도 정신을, 이들이 끝내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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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나철에게 처음 건넨 문서가 1906년의 '삼일신고'와 '신사기'다. 중국 도교에는 '삼일신고'가 없다. 즉 이 한 권의 책을 건넨 행위 자체가, 백봉교단이 중국 도교의 아류가 아닌 한국 고유의 선도 집단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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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은 1908년 12월 5일이었다.
도쿄 개평관 여관에 머물던 나철에게 백봉신사의 제자 두일백이 찾아왔다. '단군교포명서' · '신가집' · '입교절차'를 전하며 재촉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국민에게 단군정신을 알리라."
나철이 미동도 없자, 두일백은 나흘 뒤인 12월 9일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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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번째 방문에서 나철은 무너졌다. 온몸이 진동했고 마음이 활연히 트였다. 나라가 망한 진짜 이유가 정신을 빼앗긴 데 있다는 자각이었다. 그는 정훈모와 함께 영계(領誡)를 받았다. 한국선도의 언어로 풀면, 스승을 통해 도맥을 전수받은 것이다. 백봉신사는 영적 스승이 되었다. 그 결과가 1909년의 대종교 중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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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2월 5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 자시(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
서울 재동 취운정 8통 10호의 한 초가집 북벽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셨다. 오기호·이기·김윤식·강우·최전·유근·정훈모·김인식·김춘식 등이 함께 자리했다.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단군교가 중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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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단어가 '중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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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최제우, 증산교의 강일순처럼 창교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단군교의 입교자, 단군 신앙의 연결자로 자신을 낮췄다. 자신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가르침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에서 '중광(重光)'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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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5일에 교명을 '대종교'로 바꿨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는 조치였다. 한일 강제 병합 직후, 활동무대를 만주로 넓혔다. 1914년 5월 13일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고, 서울에는 남도본사, 청파호에는 동도본사를 두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도 교구와 외도 교구를 설치한 교구제도가 이때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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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삼일사상의 뼈대는 임아상의 '삼일신고' 주해에서 왔다.
임아상은 '삼·일(三·一)'을 '삼진귀일(三眞歸一)'로, '신(神)'을 '밝음'으로, '고(誥)'를 '글과 말씀'으로 풀었다. '삼진귀일'이란 '진리훈'에 나오는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人物 同受三眞 曰性命精)'과 직결된다. 인간과 만물이 함께 받은 세 가지 참됨이 성(性)·명(命)·정(精)이고, 이것이 다시 근원인 '일(一)'로 돌아간다는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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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신(神)을 광명으로 본 것도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광명사상은 고조선·고구려·신라 건국 사화에 두루 흐른다. 특히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천손의 계보를 보여주는 단군사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환(桓)'이라는 음 자체가 '환하다'와 통한다. 곧 '밝음', '광명'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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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임아상은 성을 원(○), 명을 방(□), 정을 각(△)으로 도상화했다. 한국선도의 일반 도식과는 다르다. 한국선도는 성을 원(○), 명을 각(△), 정을 방(□)으로 본다.
인(人)을 각(△)에 대응시키며 가운데 두는 한국선도와 달리, 임아상은 방(□)과 지(地)를 가운데 두었다. 대종교는 이 임아상의 도식을 거의 그대로 받았다. 한국선도의 원형에 가깝되, 미세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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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신관은 '일신(一神)'을 '체'로, '삼신(三神)'을 '용'으로 한 삼신일체(三神一體)다.
지고지상의 한얼은 환인·환웅·환검(단군)으로 나타나 각각 조화·교화·치화의 역할을 맡는다. 한인은 조화신이자 하늘 아버지(天父), 한웅은 교화신이자 하늘 스승님(天師), 한검은 치화신이자 하늘 임금(天君)이다. 단군사화의 환인·환웅·단군이 대종교의 한인·한웅·한검으로 옮겨지는 과정에 임아상이 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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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 '진리훈'은 삼법수행의 원리를 담고 있다.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
다만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본문에 명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철 이하 초기 대종교 인사들 대부분이 실제로 선도수련을 했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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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신사가 백두산에서 10년간 원도 끝에 성통(性通)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 결과로 석함 속의 '삼일신고'를 얻었다는 기록이 그 한 단면이다. 13인이 태백산 대숭전에서 백봉신사를 배알하고 선도단체의 스승으로 모셨다는 기록도 같다. 백봉교단이 한국 고유의 선도를 집중적으로 수행했다는 추정은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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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도 마찬가지였다. 1901년 고향 보성으로 돌아온 뒤 1904년경까지, 그는 제석산을 오르내리며 입산수도했다. 그의 유족과 벌교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산중에서 반드시 사방에 '天' 자를 붙이고 수도했다. 순천 선암사의 경월당덕민(擎月堂德旻)이 그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승려 신분을 버리고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대종교 중광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행 경지에 이르렀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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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삼법수행을 얼마나 절실하게 여겼는지는 마지막 유언이 증언한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조천 직전 지인 황병옥에게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훈(神訓)에서 "스스로의 본성에서 한얼의 씨알을 구하라. 그리하면 하느님이 이미 너의 머릿속에 내려와 있느니라"는 말은 믿음의 근본이며, 진리훈(眞理訓)의 "지감·조식·금촉하라"는 말은 정성의 근원이니, 소중히 받들어 수행에 정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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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직접 지은 '중광가'에도 같은 메시지가 박혀 있다.
"工夫한 형제자매 삼법(三法) 먼저 세우되 / 한배의 소리·기운 밖곁에 求치 말라 / 네 신부(神府) 공경하라. 네 영대(靈臺) 맑히어라 / 玄玄코 精一하면 하늘사람 한 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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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가 부활시킨 또 하나의 핵심이 천제(天祭)다.
나철은 1910년 대제일인 개극일(開極日)을 '개천절'로 고쳤다. 1914년 6월 9일에는 당시 총전리였던 강우를 백두산에 보내 제천의식을 대행하게 했다. '삼일신고' '천궁훈'과 '진리훈'에 흐르는 경천(敬天) 사상이 가장 농밀하게 응축된 것이 바로 제천의식이다. 천제 자체가 수행의 핵심이라는 점, 이는 한국선도의 본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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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통'은 '공완'으로 가야 한다. 자신 안의 밝음을 깨닫는 것이 성통이라면, 그 밝음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공완이다. 한국선도에서 성통 없는 공완은 공허하고, 공완 없는 성통은 미완성이다. 둘은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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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는 이 공완의 다른 이름이다. 자기 안에서 통한 빛을 사람과 세상으로 확장하는 일. 그러므로 일제 강점기, 양심 있는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善)이 무엇이었겠는가. 항일독립운동 외엔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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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항일독립운동은 세 갈래로 흘렀다.
무장투쟁, 국학운동, 식산자강운동.
청산리대첩은 그 무장투쟁의 정점이었다.
당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을 비롯한 대종교 계열 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이룬 승리였다. 임시정부 발족 당시 임시의정원 의원의 절대다수, 만주 지역 독립운동 인사의 80% 이상이 대종교 교인이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신앙의 논리적 귀결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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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이 일제 치하에서 외형상 정교분리를 선언한 것은 전략이었다. 종교 활동은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에서 자유로웠다. 포교와 독립운동을 분리해 보이게 함으로써 교단을 보호하려 했다. 그 전략은 초기에는 통했지만 결국 통하지 않았다. 1915년 8월,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사실상 불법단체로 낙인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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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였다.
대종교 중광 이후 나철의 사상이 변한 궤적도 흥미롭다. 중광 전의 우국적 분노가, 중광 이후에는 세계주의 이념으로 옮겨갔다. 그는 "다른 교인을 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자신의 순교를 민족이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행위로 내세웠으며, 모든 종교의 근원을 하나로 보았다. 대종교의 교의가 '홍익민족'이 아닌 '홍익인간'을 인류 보편 가치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족종교가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지점, 그 지점에 나철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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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의 봉교과규(奉敎課規)에 이런 조항이 있다.
"봉교인이 견문을 넓히고 슬기를 더하기 위해 타교에 들어가 참여하여도 금하지 말 것. 타교에 이미 가입한 자가 본교에 들어오고자 하면 즉시 허가할 것. 한배검의 너그러우신 큰 뜻을 받들어 다른 종교를 공격하지 아니함."
100년 전, 자기 신도의 타종교 참석을 공식 허용한 종교가 얼마나 됐겠는가. 대종교의 포용성은 이념 선언이 아니라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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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8월, 조선총독부가 종교통제안을 공포하면서 대종교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총독부에 신청서를 거듭 냈으나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1916년 9월 11일(음력 8월 14일), 나철은 상교 김두봉을 비롯한 시봉자 6명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갔다.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문 앞에 써붙였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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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음력 8월 15일) 새벽, 인기척이 없자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갔다. 그는 이미 폐기법으로 숨을 거둔 뒤였다. 향년 54세. 시봉자 6명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수제자이자 한글학자 김두봉이었다.
그가 대종교 교인들에게 남긴 유서는 '이세가(離世歌)'다.
3절 가운데 3절이 조천의 내용이다.
萬德門 들어가서 人間善惡 여짜올 때 奸詐코 不義한 者 懲治하야 다 悔改케 冤痛코 微弱한 者 保全하야 다 強盛케 뎌 殺伐風塵 다 쓸고 一同道德世界 새로 열게 사랑토다 믿브도다 우리 兄弟姊妹들아 兄弟姊妹 묻은 罪惡 오날 이 몸이 다 代身 가니 한 마음에 성통하여 늘히 천궁(天宮)에서 즐깁시다.(현대어 풀이 : 만덕문(萬德門)에 들어가 한배검께 인간의 선악(善惡)을 여쭐 때 간사하고 의롭지 못한 자는 징계하여 모두 뉘우쳐 고치게 하시고 원통하고 미약한 자는 지키고 살피어 모두 강건하게 하시고 저 살벌한 풍진(風塵)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다 함께 도덕의 새 세계를 열게 하소서. 사랑스럽도다 미덥도다, 우리 형제자매들아. 형제자매가 지은 죄악을 오늘 이 몸이 모두 대신하여 짊어지고 가니 한 마음으로 성통(性通)하여, 길이 천궁(天宮)에서 함께 즐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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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문(萬德門)은 '삼일신고' '천궁훈'에 나오는 문구로, 천궁에 존재하는 1만 개의 덕으로 이루어진 문을 가리킨다. 천궁은 신(神)이 거주하는 자리다. 즉 성통·공완한 자가 회귀하는 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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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교헌에게 남긴 유서에서 "대종교 대도가 진실한 가르침이니 우리도 삼일의 도를 닦아 반드시 근원인 신의 자리로 화할 것"이라고 적었다. 또 다른 유서에는 "죽고 삶은 몸덩이에 있지 않고 신의는 오직 신명이 증거한다"고 썼다. 죽고 사는 일의 정의가 육신에 있지 않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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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이 의미하는 바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조천의 실체는 육체가 아니다. 반진일신(返眞一神)된 '삼진' - 인간 안에 내재한 성·명·정 - 이 '삼신(三神)'의 근원인 '일신(一神)'으로 회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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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과 대종교를 연구한 적지 않은 학자들은 그의 자결을 독립운동의 분기점, 즉 신도들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해석한다.
일리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죽음은 대종교 수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보아야 진면목이 드러난다. 자신이 할 일이 이번 생에서 끝났다는 판단, 그 판단 위에서 미련 없이 육체의 옷을 벗는 선택.
가경절이라는 명칭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슬픔이 아니라 경사로 죽음을 기념한다는 것은, 죽음을 끝이 아닌 회귀로 보는 시선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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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은 나철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계승한 인물이다. 그가 저술한 '회삼경(會三經)' 9장 '귀일(歸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哲之化行이 雖有如是種種妙法이나 及其功完하야는 竟歸於通하나니 是之謂返眞一神이니라.
"깨달은 철인이 변화 성장함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공완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마침내 통함으로 돌아가니, 이를 일러 참함으로 돌이켜 하늘(근본)과 하나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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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종착점을 귀일, 곧 조천으로 명확히 못 박은 문장이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인 그는 1881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서기학, 호는 백포(白圃). 1902년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 사업에 매진하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했다. 같은 해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고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중광단을 결성해 단장이 되었고, 이후 대한정의단·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총재를 거쳐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어 대한독립군단 총재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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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무장해제 과정에서 다수의 한인 독립군이 살상되었다. 이를 두고 학계의 해석은 갈리지만, 사건의 핵심은 명료하다. 독립군 전선이 한 차례에 무너졌다. 서일은 밀산에서 둔전을 통한 재기를 도모하며 수행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1921년 음력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이 야습해 마을을 약탈했다. 함께 둔전하던 부하 12명이 분전하다 모두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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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음력 8월 27일, 서일은 조식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1세. 그가 남긴 마지막 글로 알려진 한 구절은 이렇다.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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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신에는 상처 한 곳이 없었고 잡충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폐기 조천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다. 다만 스승 나철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별도의 유서가 없었다. 스승은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고, 그는 한 통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스승이 대종교에 전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전한 마당에, 자신이 따로 남길 유언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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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연구자는 서일의 자결을 자유시 참변과 부하 몰살에 대한 책임감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의 재도약과 독립진영의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고 본다.
한쪽에서는 더 이상의 독립운동에 대한 절망과 비통함을 원인으로 짚는다. 둘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 또한 성통→공완→조천이라는 한국선도의 수행 여정으로 읽어야 비로소 본질이 드러난다. 항일무장 노선이 시대와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현실을 직감하고, 자신의 역할이 이번 생에서 다했다고 판단했기에 미련 없이 떠난 것이다. 조천을 위한 적극적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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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을 제대로 읽으려면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천궁(天宮)'이라는 개념의 성격이다.
세계의 큰 종교는 저마다 사후의 거처를 갖고 있다.
기독교의 천국, 이슬람의 잔나(Jannah), 불교의 극락, 유교의 천.
표현은 달라도 구조는 닮았다.
신앙과 선행에 대한 사후의 보상으로 들어가는 장소.
인간은 본래 그곳의 거주자가 아니었고, 자격을 갖춰야 입장할 수 있다. 그리고 들어간 뒤에도 신과 인간은 끝내 분리된 둘로 남는다. 들어간 자는 신을 경배하며 영생한다. 신이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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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천궁은 다르다.
'삼일신고' '천궁훈'은 천궁을 한배검이 거주하는 본향으로 그린다.
그런데 '진리훈'의 핵심 문장이 따로 있다.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人物 同受三眞 曰性命精)."
사람과 만물이 한배검으로부터 성·명·정 세 가지 참됨을 함께 받았다는 선언이다. 곧 인간은 본래 일신(一神)에서 분화된 존재이고, 그 일신에서 받은 삼진(三眞)을 안에 품고 산다. 수행은 그 삼진이 일신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반진일신(返眞一神), 삼진귀일(三眞歸一).
천국은 가는 곳이고, 천궁은 돌아가는 곳이다.
이 한 줄에 동서 영성의 분기점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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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자에게는 자격이 필요하지만, 돌아가는 자에게는 본래의 자리가 있을 뿐이다. 자격 심사가 있는 종교는 두려움을 가르치고, 회귀의 종교는 자기 안의 신성(神性)을 가르친다. 들어간 자는 신을 경배하지만, 돌아간 자는 신과 합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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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절(嘉慶節)이라는 명명이 비로소 이해되는 자리가 여기다.
다른 종교 전통에서 한 인물의 사망일을 '경사스러운 날'로 기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죽음을 심판의 관문으로 보는 사상에서는 결례에 가깝다. 그러나 죽음을 본향 회귀로 보는 사상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분화되었던 삼진이 일신으로 돌아가는 일에 어떤 두려움이 있겠는가. 두려움 없이 떠난 자의 그날을, 남은 자들이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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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사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은 일원론 구조를 대종교와 공유한다. 불교의 본래성불(本來成佛) 사상도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점에서 결이 비슷하다. 도교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천계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천궁에 가장 가까운 형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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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중 어느 사상도, '일신에서 분화된 삼진을 품은 인간'이라는 명료한 인간학과 '성통→공완→조천'이라는 단계적 수행론과 '한배검이 거주하는 본향'이라는 구체적 공간성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모두 갖추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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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신선설은 개인의 불사(不死)에 무게를 두지만 일신과의 합일 개념이 약하고, 불교의 열반은 상태일 뿐 장소가 아니며, 힌두교의 합일은 구체적 본향의 상(像)을 결여한다.
대종교의 천궁은 우주론과 인간학과 수행론이 한 사상 구조 안에서 맞물려 돌아간다. 이 정합성이 가경절이라는 명명을, 단순한 시적 수사가 아닌 사상의 필연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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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종교는 신을 경배하는 자를 기르고, 천궁의 종교는 자기 안의 신성을 깨닫는 자를 기른다. 1909년부터 1921년 사이 만주 벌판에서 그 깨달음이 어떤 행동으로 폭발했는지, 청산리와 임시정부와 그 수많은 이름이 이미 증언하고 있다. 신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신성을 본 자들만이, 그토록 가볍게 목숨을 던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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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아름답고 경사스럽다고 부른다는 것은 어떤 감각인가.
길고 긴 수련의 과정을 통과하고 치열한 공완의 길을 다 걸은 자만이,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육체의 옷을 벗고 다른 차원으로 옮겨간다는 자각은, 깊은 정신세계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자가 아니면 가닿을 수 없는 경지다.
나철도 서일도 그 경지에 닿았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히 민족운동가의 자결이 아니다. 한국선도 수행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한 풍경이다.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는 시선, 죽음을 회귀로 받아들이는 사상. 그 시선과 사상은 100년 전 만주 벌판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발해 임아상의 주해서로부터, 백두산 백봉교단의 비밀결사로부터, 1300년의 강물을 따라 흘러와 그들의 입과 손과 호흡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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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인 대부분에게 대종교는 낯설다.
교세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광복 후 무차별로 유입된 외래사상에 밀려 위축되었다. 그러나 그 사상의 뼈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의 경전 체계,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 삼신일체의 신관, 환인·환웅·단군 삼성의 스승 전통, 성통→공완→조천의 수행관, 그리고 홍익인간·이화세계의 정신은 한국선도의 원형으로서 지금도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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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가 그 원형을 가장 가까이 계승한 단체였다는 점, 그리고 그 계승이 단순한 사상 전수가 아니라 실제 인물들의 생애와 죽음으로 증명되었다는 점. 그 두 가지가 이 종교를 다른 민족종교들과 구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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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문 안에서, 그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우리가 그들의 사상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단지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다는 그 사상, 100년 전 한국인이 도달했던 그 경지를 다시 응시하는 일은, 죽음의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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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嘉慶).
아름답고 경사스럽다.
이 두 글자를 다시 꺼내드는 것이 사치인지, 절박함인지.
답은 각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