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팔복(八福)〉 그리고 세월호-
박 은 서
크리스마스의 한주 전 일요일 이었다. 그 주와 다음 성탄주일, 로고스 교회에서 ‘기억과 증언’이라는 행사를 했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처럼, 우리 세상속의 약자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자리였다.
그 주(17일)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분들을 모셨다. 한 눈에 보기에도 슬픔이 뼈에 사무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찌 그 고통을 전부 이 글속에 담을 수 있으랴. 그 분들이 해주시는 정부에 대한 이야기, 차가운 배 속에서 져버린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먹이 꽉 쥐어지고 눈물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유가족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 한 번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책, 〈금요일에 돌아오렴〉 이라는 책에서 그 가족의 이야기를 본 것이 기억났다. 글로 읽을 때도 가슴이 먹먹했는데 직접 들으니 정말 한숨만 푹푹 나왔다.
윤동주 시인의 시, ‘팔복’은 마태복음 5장 1절 에서 12절의 팔복 [八福]을 시인만의 감성과 생각으로 해석한 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 8번 반복, 그리고 마지막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행. 어찌 보면 이상 할 수도, 무서울 수도 있는 시.
시인은 무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경의 ‘팔복’을 비꼬기 위해? 그런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시에 틀린 해석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시인이 고작 그런 것을 위해 ‘슬픔’이라는 심오하고 감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인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바는 슬퍼하는 것이 복 자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슬픔을 겪는 사람 곁에서 같이 슬픔을 나누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말. 만약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면 마지막 행을 영원히 슬플 것이라 맺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인지, ‘기억과 증언’중 이 시가 떠올랐다. 유가족 분들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고통. 그것을 치료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함께 슬퍼해 주고, 들어주고, 기억해 줄 순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증언해 줄 수는 있다.
오는 9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다. 그 시간이었다면 해결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정부에 화가 나고 1000일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분들의 고통을 어설프게 이해하려 들지 말자. 그분들의 아픔을 어설프게 치료하려 들지 말자. 그분들의 마음을 어설프게 위로하려 들지 말자. 그냥 함께 슬퍼해주자. 깊이 슬퍼하고, 깊게 애통하자.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복 있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영원히 슬플 것이다.그들의 슬픔이 끝날 때 까지.
윤동주, 팔복 그리고 세월호.hwp
첫댓글 어설프게 하지 말자, 함께 슬퍼해주자. 그렇지요. 그게 우리가 해야할 역할일텐데.. 진정한 복을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서야, 주보에 실어도 되지? ㅎㅎㅎ 조타!!
실어주시면 좋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