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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전선은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최소한의물리적군사력으로 최고의승리를거둔희대의명승부이자
세계해전에서 사상유레없을정도로 조선수군 최악의 단두대매치 뛰어난지휘관(이순신)과 군율을통해
기술적 우수성이어떻게 전황을뒤집는지 보여주는 전투
그리고 누란지세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 이본군의 칼날에 내던져진 조선의백성들을구해낸 기적적인전투
짧게요약하면 어떻게 졌는지 이해가 안되는 패배(칠천량해전)를 어떻게 이겼는지 이해가안되는승리(명량해전)로갚아준전투이다
칠천량때 존나게 개썅깨지고나서(이순신이힘들게모은 330척의배를 원균이 다 털어버림ㅎ;)
이순신은 명량해전때 남은13척의배로 전력을다해싸우는데..
게다가 수군들도 거의 전멸 이건모두 원균이초래했는데부들부들...
어쨋든 너무나도 기적과 같은 전투였기에 대중들에게 많은 왜곡된 사실로 알려진 전투이기도함.
일본군은 이전투에서 패배하여 정유재란 내내 삼남에서 발이 묶인채한양까지 올라오지못하는 결정타를 맞게되었다.
명량해전은 배를 한척도 희생시키지않고 적군을막아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의 흐름 자체를 뒤집었다는점에서 이전투와는 비교조차할수없다.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칠천량해전)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이 신명나게털렸고 이참담한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수없이
권율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지만 정작돌아온이순신에게는아무것도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님은 절망하거나 좌절하지않고 그는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고있던 초계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압수했다.
다행히 칠천량해전이후곧바로 밀려들것만같았던 일본수군이 남해안 약탈등에신경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했기때문에 시간도 어느정도 생긴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도운셈이었으니 이때 이순신의행적은 난중일기를통해알수있다.
7월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19일 단성에서숙박7월20일 진주동굴에서 이희만의집에숙박
7월21일 곤양을지나 노량에도착 거제현령안위등패잔병을수습 거제현 소속 배위에서 숙박
7월22일 경상수사배설이합류 곤양에서숙박
7월23일 진주굴동으로돌아와 이희만의집에숙박 배흥립이합류
7월24일 이홍훈의집에숙박 배경남이합류
7월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로도 한동안 진주동굴에 머무르고있던 이순신은 8월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알리는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받든다.
조정에서 22일에야 칠천량 패전의소식을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것이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겸 경상전라충청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삼았다는짤막한기록이남아있을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려있는 삼도통제사 복직교서의내용은이러하다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일본)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 ……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이충무공전서』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저정도표현을쓰는것자체가파격적이다
그만큼 국가차원에서 나라의 존망이 목적에 달린 급박한상황으로 인식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선조는 저번보다 훨씬낮음품계를주고 뒷통수잼
어쨋든 복직교서를 받고 이순신장군님은다시움직이기시작하는데
8월 3일
새벽에 복직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러나 여기에서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아니다
선조실록에 이때의 군함수가나오는데근래 또 배신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실록』 권94, 30년 11월 정유(10일) 5번째 기사
모두합쳐도 전선이 13척에 초탐선이 32척이전부였고
이는 명량해전당시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대단히 눈물나는 숫자였다
이순신이거느린수군이나 조정내에서는 당장이라도 수백척의배가 들이닥칠거라는 공포가 만연해있었다
누가보기에도 당시의조선수군은 상황이 애잔함을 넘어서 처절한수준이었다.
이런 가운데 조정일각에서는 배도없는데 수군없애고 육군이랑합치져?
말이야쉽지 라는 의견이나왔고 선조또한 이런 의견에 동의하여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까지했다
이일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에는 나오지않고 행록에만 등장하지만
이토록 전력비가 기울어져 있으니 조정에서 이런말이 나오는것도 무리는아니였다 ㅇㅇ;
수만보면 금방이라도털릴것같지만 우리장군님이다하셧자나ㅠ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사실상 조선의길을버리는엄청나게멍청한짓이다
조선은 일부러 도로를 정비하지않고 강을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도로 행주대첩에서 적절한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금이 들어와서 위기를넘길수있었다
(자세한건임진왜란행주대첩편참고)
게다가 이수군 폐지령은13척의배를 보존하고 수군의전력을 육군에 편입시켜
육군의전력이라도 향상시키고자 의도한것도 아니었다
병력이란 적절한집중과 지휘체제가있어야 의미를 가지는법인데
선조의 대변인노릇을 열심히한 윤두수는 칠천량해전직후에있던 어전회의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말고
각지의수사들이 고을단위로 방어하게하자는 정신나간주장을했는데;ㅎㅎ;;;;
이건 까놓고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싫으니
단일한 지휘간을 임관시키기를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군의 병력에 각개격파당하자는소리나다름없다.
존나한마디로 미친짓이다.
병력을 이리저리흐트러놓자닣;;;;;ㅎㅎ;;;;세상에마상에;;말이야방구야 그러다한번에털리면 끝나는데(애잔)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그러나 이순신은 위와같이 아직 열두척 전선이있다는 패기가 흘러넘치는명언으로
장계를 올리며 동요하는여론을잠재웠다
이순신장군님은 힘들더라도 제해권을 되찾아야만 반격의실마리를찾을수있다는 생각이었던것같은데
이순신장군님의이러한 뚝심은 정유재란의흐름을바꾸게되었다.
사흘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장군님은
8월20일에 그보다 조금더 큰 이진포로 진을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수군의상태는 말이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패배로 장졸들의 사기는 바닥을치고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임박했다는사실에 오는 공포가 모두를 무겁게 짓누르고있었다
이순신이보기에 경상우수사 배설은 교서에 절하길 거부하는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대한 반감을드러내고있었으며
전라우수사 김억추는사람됨이미덥지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자신도 21일부터 토사곽란(갑자기 토하고 설사가 나며 심한 고통이 따르는 위장병)으로사흘내내몸져누워있었다.
ㅠㅠㅠ아프지마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미령하면앙대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런와중에도 다음날이되자 다시 어란진으로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왓다는 헛소문을퍼트린이들을 처형해서 군율이 건재함을보여주고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8일.
이순신장군님은 위에서봤듯이 왜적의 배가와도 호각을불고 깃발을휘두르며 몰아내도록명하는등 침착한모습을 보여줘
이에 이순장군님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진을치고 결전 준비에들어가셨어
근데 9월2일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사태까지벌어졌고
이순신장군은 이일을단지 배설이달아났다고만 담담하게적고있다
이렇게 이순신장군님이 조선수군을 재건해가며
싸울준비를하는동안 일본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된다 피융신들일본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궤멸 시킨 자신감으로
이번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에서이기자는생각이었다 이건존나망상이다
일본군의 장수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당한 원한을 갚고싶다는마음도있었을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봐도 12척으로 300여척이상을갖춘 함대를 막아낸다는것은
항우가살아돌아와도불가능한일이라고생각할수밖에없었고 당사자인 조선수군과 조정에서도 그렇게생각했다
일본수군은 승리를자신하였다그리하여 일본수군은 9월이되자 다시 움직이기시작했고
9월7일에 어란진으로들어와 벽파진의이순신과 대치하는구도를만들었다
난중일기에따르면 일본군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없다는사실도알고이었고
이를조롱하듯 처음 13척의배만을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수군에게 시비를걸기도했다
시벌탱칠천량해전이전까지 조선수군의판옥선이 한번도 격침된적이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유리한상황에서전투를시작한것이거의최초임을감안하면
일본군은한척의대장선을상대로는이정도면 충분할것이라 낙관한것으로보인다.
참고로 배설이도주한이후의난중일기기록을보면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준형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이런상황으로
맑은날엔 계속해서 일본수군이 시비를걸고있었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보고가들어왔는데 일본군200여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입향했고
일본군에게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함대를 격멸시킨다음
서해를따라 한강을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계획까지세우고있었다고함ㅎ;;
다음날인9월15일 전투가임박했음을안이순신은전투준비를서둘렀고
오익창의 시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백여채를걷어다가
물에담가 적신뒤 12척의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탄환이이것을뚫지못햇다고한다
오오오오오옹오오!!1! 시발ㅋㅋㅋㅋ존나좋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내가다신나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싣고 군사들이 목마를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해소되었다는이야기도있다
이렇게 조선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화력을견디며 싸울준비를했고
적은수의함선으로 울돌목을등지고싸울수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의 우수영으로옮긴뒤 장수들을 불러모아 다음과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
이날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나타나 이기는방법과 지는길을가르쳐주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