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8.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행 21:13~14
*제목; 사도행전강해(40)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 21:13~14)
1.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는 바울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행 21:1~3)
“밀레도”에서 에베소장로들과 작별한 후, 바울은 배를 타고 ‘고스, 로도, 바다라, 베니게, 구브로, 수리아’를 거처 ‘두로’에 도착합니다.
7개의 도시를 거치는 숨 가쁜 여정을 한 번에 달려온 것입니다. 그 만큼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기 위해서 진심이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많은 환란과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을 드러나고 완성된다면 바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진정 그리스도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앞에 섰던 백성들이 “머뭇거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성도들이 “차지도 더웁지도 않는”(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모습과는 확연이 달랐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명과 뜻이라면, “머뭇거리는” 불신앙이 다 사라지고, 힘차게 기쁨으로 달려는 믿음의 백성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의 길에 대한 “성령의 감동”이 여기 저기서 나타납니다. ‘4절’입니다.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행 21:4)
그곳에서도 제자들(바울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함)을 찾았습니다. 함께 동역하고 위로하고 또 힘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도 그를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의 이 여정의 끝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알았습니다. 당연히 인간적으로는 이를 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두로에서 육로를 거쳐서 간 “가이사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납니다. ‘7~8절’입니다.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행 21:7~8)
바로 ‘빌립 집사’를 만난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행 8장)의 증인이 될 때에,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시작할 때에, 이 소동으로 인해서 도망간 사람이 바로 “빌립”입니다.
물론 이를 통해서 “위대한 흩어짐”(Great Scatter)이 일어나고, 복음의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 지역으로 펼치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집사 빌립’이 ‘전도자 빌립’으로 바뀌어 지는 은혜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립은 그 당시에는 완전한 적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한 동지가 됩니다. 이는 당시의 바울과 빌립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되고, 완전해집니다. 그것이 진정 복음이라면,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복음이 바로 선포되지 않고, 바로 믿어지지 않기에 갈등과 나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무리가 모두 바울의 행선을 반대합니다. ‘10~12절’입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0~12)
지난 주에 이야기한 것처럼 “사건”은 정확하게 한 사건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당하고 환란을 겪은 후 로마로 압송되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도 다릅니다. ‘13절’입니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3)
이를 기쁨으로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무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명의 인식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만을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것만 생각하면 바울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뜻(환란과 죽음)을 감사함으로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여러분 신앙에 이것이 기준이 되어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를 조금 분리하여 분석한다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의 동기와 근거가 무엇인가?
둘째는 인간관계로 출발한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출발한 것인가?
여러분 모두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참된 믿음의 자녀가 되어봅시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이루시는 은혜를 함께 경험하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첫댓글 성령은 한 분이시니, 그분의 메시지도 하나입니다. 다른 메시지가 있다면, 성경에 그러한 지를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성령의 메시지를 받아도 그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해석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이라도 급하게 달려간 것입니다. 주의 영광의 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