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고장 군위 현장실습
장전역에서 출발하여 2시간 여만에 군위삼존석굴암에 도착했다. 국보 제 109호로 팔공산 절벽의 자연동굴을 다듬어 조성한 석굴로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이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보다 100여년 앞서 조성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5년(493) 극달화상이 창건했다. 가운데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냐 아미타불이냐 하는 논쟁이 있다. 오른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왼쪽 손가락이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전 마왕을 물리치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마촉지인은 다른 불상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좌우의 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다. 두분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을 쓰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비례로 목-허리-다리를 아름답게 비틀고 있다. 이런 자세를 3곡자세라고 하고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시대에 더욱 유행한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현재 삼존불이 모셔진 석굴은 신라시대 처음으로 불교를 가지고 들어왔던 아도화상이 수도 정진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명 아도굴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아도 이후에 원효대사가 굴속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성해 봉안하고 미타정토 신앙을 일으킨 곳이다.
현재 석굴은 막아놓아서 들어갈 수 없다. 절벽 중간에 있는 석굴 앞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어 어떻게 굴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또한 어떻게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가야의 전정각산 유영굴에서 6년간 정진하였다고 하는데 굴이 수행자가 정진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로 보인다.
삼존석굴 앞쪽에는 삼존 석굴사가 있다. 석굴사 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비로자나불상과 모전석탑이 있다. 모전석탑은 원래 3층으로 조성되었던 것이 무너져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석탑이다. 삼국시대 불교의 도입 초기 목탑에 이어 지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 분황사모전석탑으로 634년에 건립되었다. 분황사 모전 석탑도 현재는 3층이나 원래 9층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다리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 물소리도 사진 속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골밥상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기름을 덤북 넣은 비빔밥을 먹고 막걸리도 두어 잔 하니 마치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한밤막걸리>이란 이름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밤>이 <낮과 밤>의 밤인지 아니면 <과실>의 밤인지 질문을 받고 전자라고 대답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답이 나왔다.
다음에 간 곳이 바로 한밤마을이었다. 한자어로는 대율리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큰 밤이 생산되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마을 입구에 풍치가 좋은 오래된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을은 온통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팔공산 바위가 흘러내려 마을을 조성할 때 나온 돌로 담을 쌓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륙의 제주도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했다. 담벼락에 이끼와 담쟁이가 붙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담 너머 집집마다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풍요로운 느낌을 안겨주었고 마을 전체가 밝고 환해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민박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이 있었다. 능인전이란는 편액 아래 당당한 모습의 부처가 마치 세상을 교화하는 듯이 보였다.
삼국유사테마파크에 갔다. 입장료는 9,000원인데 우리 일행은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온 중요 내용들을 조각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단군신화와 연오낭과 세오녀, 만파식적 같은 조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덥고 시간이 많지 않아 빠르게 둘러보았다. 넓은 부지에 관람객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았다. 가온누리 건물을 둘러보았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만들어 몽고군의 침략을 막은 내용을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일연의 생애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군위 인각사를 갔다. 인각사지는 화산의 북쪽 기슭 위천강가 퇴적지에 있던 절터이다. 인각사라는 이름은 바위 벼랑이 우뚝한데 옛말에 기린이 이 벼랑에 뿔을 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기린의 뿔이란 아주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일연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따라서 인각사는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국사로 존경받던 일연스님과 관련된 사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넓은 절터에 일연스님의 비와 탑이 일연스님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는 세월의 흐름에 깎기어 흔적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절터 한쪽에 모아둔 석재 부재들이 이곳이 옛날의 대가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각사에서 일연 스님은 95세인 어머니를 일 년간 봉양했다. 수도인 개경에서 국사라는 높은 직책도 버리고 이곳 변두리에서 어머님을 모신 높은 효심을 생각한다. 또한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일연은 여기에서 84세로 입적한다. 충렬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를 정조라고 하였다. 스님이 입적한 뒤 6년만인 1295년에 보각국사비가 인각사에 세워졌다.
절터 입구에 세워진 고은시인의 시비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일연찬가
오라 화산 기슭 인각사로 오라
하늘 아래 두 갈래 세 갈래 찢어진 겨레 아니라 오직 한 겨레임을
옛 조선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한 나라였음을
우리 자손 만대에 소식 전한 그이 보각국사 일연 선사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 밝혀 한 자 한 자 새겨간 그 찬란한 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오라 귀천 냇물 인각사로 오라
통곡의 때 이 나라 온통 짓밟혀 어디나 죽음이었을 때
다시 삶의 길을 열어 푸르른 내일로 가는 길 열어
정든 땅 방방곡곡에 한 송이 연꽃 들어 올린
그이 보각 국존 일연 선사를 가슴에 품고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 밝혀 한 자 한 자 새겨간 그 찬란한 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