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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옮기며.
이 글은 우리 친구 海岩 曺秉魯 (海岩은 조개나 해초가 많이 붙게 마련이므로 女難이 심할 텐데 잉꼬부부로 소문난 이 친구를 보니 명당자리처럼 쓰는 사람에 따라 운세가 달라지는가보다.ㅎㅎㅎ)의 글로써 사진과 글을 어렵게 구하여 얽어보니 아름다운 우정의 군단이 천하를 주유하는 대 서사시를 보는 것 같아 이미 지난 글이지만 혼자 보기가 아까워 본인의 승낙을 얻어 여기에 올려 다 함께 보기로 한다. --옮긴 이 최영진--
땅 끝에서 휴전선까지 우리의 산하
(경고 산모임 삼토회 전국 산행투어기)
2003. 5. 22. ~ 6. 1
글쓴 이 : 조병로
설마 했던 전국 일주산행 꿈이 이루어 졌다.
2003년 5월 22일부터 6월 1일까지 10박 11일의 긴 산행투어는 내 인생여정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것이다.
퇴직 후 심난한 마음 달래기로 시작한 산행이 어느새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전국 순례 투어산행을 꿈꿔왔으나 쉽게 이루어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퇴직한 동창생 산모임 회원들의 의기투합과 걸출하고 추진력이 뛰어난 이태규(편집자 주 : 한상훈 부인) 산 대장의 끈질긴 집념을 1년여 계획 끝에 드디어 실행에 들어갔다.
우리들 산모임은 三土會라 부른다. 대단한 의미 있는 모임도 전문가도 아니다. 6명의 고교동창들 부부가 매월 셋째 토요일을 택해 산행하는 모임이다. 경북고 40회 졸업생들로 나이는 모두 환갑 진갑이 지난 60대 초반이다.
이제 겨우 3년 정도 됐지만 그 동안 열성적이었다. 따라서 3토 뿐 아니라 때로는 2토 4토 그리고 종종 평일까지 산행을 하다 보니 웬만한 산은 끝까지 주파하는 끈기는 갖춰진 팀이다.
10박 전국 산행투어 계획이 실행에 들어 간 것은 작년 12월 3토 때부터다.
부인들이 남자의 경비일부를 경감시키고 확실한 동반결의를 다짐하는 뜻으로 매월 5만원씩 30만원의 회비를 거둔 것이다.
한 부부 당 100만원의 경비 중 30%를 여성이 담당한다는 의미다.
어쨌든 D데이 인 5월 22일은 전원 참석되었다.
날씨는 쾌청, 초여름의 햇살이 오히려 따가울 정도, 시작은 짐 보따리 전쟁부터 시작됐다.
개인별 등산 빽 만해도 한 집 당 최소 3개 이상인데 먹을 쌀과 반찬 그리고 버나 밥그롯 등등 15인승 승합차에 12명이 탄 여백을 채우려니 도저히 불가능 한 일 같았다. 그러나 곽기사는 전문인다웠다. 이리저리 끼워 넣고 재이고 구석구석 쑤셔 넣으니 비좁긴 해도 그런대로 수습이 되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땅 끝 마을 해남을 향한 대장정은 시작됐다.
60살에 2박 3일 지리산 종주산행 모험을 한지 3년만의 또 하나의 도전?
두려운 것은 체력 뿐 아니라 인화가 깨트려 질까 가장 두렵다. 나 자신도 스스로의 성격을 잘 아는 탓이라 은근히 걱정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탈락하면 계획은 중도 무산된다.
제1일
달마대사를 닮은 달마산
1. 달마산
오전 9시경 출발,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마산에서 다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섬진강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 남해를 거쳐 해남의 고찰 미황사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3시 50분 긴 여름해도 기울기 시작, 우리는 산행을 서둘러야 했다. 미황사의 배후 산 달마산이 우리들이 선정한 첫 봉우리다. 도착과 동시에 산행이 가능하도록 우리일행은 오는 도중 기러기 휴게소에서 미리 점심을 챙겼다.
신라 경덕왕8년에 창건됐다는 미황사는 대웅전이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신라 고찰중의 하나였다.
달마산. 중국 소림사에서 9년간 面壁參禪하여 깨우쳤다는 그 유명한 달마대사의 이름을 딴 유래를 알 수 없다. 낮은 산이지만 가파르다. 약 한시간을 가뿐 숨을 몰아쉬며 치고 오르니 정상이다. 대게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산은 등산하기에 좋은 명산에 속하지만 달마산은 암陵美가 빼어난 명산이라 할 수 있겠다.
그제사 달마산이란 이름의 연유가 알듯하다. 우락부락 하면서도 위엄과 덕망을 갖춘 달마가 이산의 기암괴석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나름 데로 해석해본다.
하산 길 문바위재로 넘어오니 서해로 기울어진 밝은 햇살 사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기암 괴석의 산악미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연출한다.
다시 미황사에 도착하니 오후 6시경, 대구서 5시간을 달려와 산 하나를 타고도 여름시간은 아직도 여유가 있다.
피곤을 이끌고 대웅전 부처님을 뵙는다. 이름 있는 산 그곳엔 분명히 유명한 절이 있다. 선조들의 탁월한 혜안과 풍수지리학을 느끼게 한다.
신라시대 그때 미황사는 등산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심산유곡이었을 텐대 이렇게 웅장한 절을 지었다니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일행의 무사한 여정을 위해 기도했다.
곽기사는 관광에 관한 한 마당 발이다. 우리가 기사라 부르지만 실은 그도 “자연 속으로”라는 관광가이드 업을 하는 기업인이다. 우린 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그가 소개한 해남시장 안 허름한 식당(해남매일시장 내 시장식육식당061-536-3812)은 외관과는 다르다. 실속 있는 식당이다. 밥상을 그득 채운 찬이 호화롭다. 각종 젓갈류를 비롯한 나물반찬이 무려26가지다. 5천 원짜리 정식백반이 우리들의 첫 외식을 만족시켜준다.
예약 없이 달려온 여정이라 첫 숙박업소는 나그네답게 식당 아줌마가 천거한 시장 안의 꽤 오래된 여관 대흥장. 아침식사를 해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비교적 대실료가 싸다는 것이 우리들의 찾는 조건과 일치한다.
제2일
1. 둘째 날 관광으로 시작하다.
2. 해남 공룡 화석지
해남 우황리 공룡 화석지는 세계최대규모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곳이라 한다. 9000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 사발크기의 공룡 발자국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대규모 시설을 건설 중 이었다. 9000만 년 전 우리는 상상이 안 되는 고생대에 이곳에 수많은 공룡과 익룡이 때지어 살았다니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학습 관광코스로 적당한데 해남은 관광수입제고를 위한 억지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편견이 앞선다.
우리는 다음코스를 진도로 정하고 길을 재촉했다. 오늘의 최종 목표를 목포 유달산으로 정했기에 일정이 빡빡한 편이다.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는 아름다웠다. 금문교를 닮았다. 그 중간 해협이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고 울돌목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곳이라 한다.
유속이 최고 22.3km라 한다. 이것을 이용해서 이순신이 왜선을 궤멸시켰다한다. 그 당시의 전황이 상상되는 역사의 현장을 우린 기념사진 한 장으로 넘겼다. 전망대 8각정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섬들은 도시인의 가슴을 확 뚫어 주는 듯하다.
2. 진도의 맛 간재미 무침 회.
3. 진도대교 팔각정
다음 일정은 맛 기행. 간도의 특별음식이라는 간재미 무침회를 맛보기 위해 유명하다는 제진과(061-542-5777)을 찾았다. 20년 전통의 간재미 회 최고의 맛으로 이름난 집이다.
가오리를 닮았다는 간재미의 본래 모양은 알길 업지만 물컹한 살과 오독 뼈 같은 연골이 새콤하면서도 상쾌감을 준다. 4인용 한 접시에 2만원에 된장국은 별도계산 5천 원이다. 우리 일행의 반응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 속에 불만은 없는 듯했다.
진도기행의 빠트릴 수 없는 한 곳은 소치 허련 선생의 雲林山房이다.
조선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선생이 말년에 이곳 고향에 내려와 그림에 몰두했던 화실의 당호가 운림산방이다.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의 봉우리가 어우러지고 아침저녁으로 깊은 산골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화의 대표적 인물인 남농 허건이 소치의 손자이며 호남대표 화가인 의제 허백련도 소치의 일족으로 대를 이어온 한국 남화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소치의 복제 작품이 전시되고 있고 주변이 고급주택의 정원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나 옛 모습인 운림산방과는 거리가 먼 소란한 관광지로 탈바꿈하기에 바뿐 공사가 한창이다.
진도군 고군면 신비의 바닷길을 스쳐보면서 진도의 관광기행을 마감한다.
3. 목포의 눈물 유달산
4. 유달산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따가운 햇살을 바로 받으며 우리의 15인 승 봉고는 서해안의 대표도시 이자 DJ의 고향인 목포를 향해 다시 힘찬 전진을 한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이제 목포의 기쁨으로 바뀐 듯 해안도시 목포는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대구보다 “더 살기 좋겠다”는 것이 목포의 첫 인상이다.
목포 8경 중 제1경을 꼽히는 유달산에 도착한 것은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저녁 무렵이다.
목포시가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해발 228m의 아름다운 산이다.
기암절벽이 첩첩한 정상인 일등바위까지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등행하기엔 쉽게 지칠 수도 있겠다. 우린 이산을 둘째 날의 등산으로 꼽는다. 다소 산 높이가 부족감을 주지만 더운 날씨에 관광하고 장시간 차량승차로 지친 몸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유달산은 오늘도 이난영의 구성진 목포의 눈물 노래가 산을 감돌고 있었다.
우린 지친 몸과 휴식을 위해 목욕이 간절했다. 숙박처도 정해야 할 판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무안을 거쳐 함평이란 낮선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에 깨끗한 건물의 보은 모텔(061-322-6568, 322-6234)을 발견했다. 산대장의 특유의 흥정솜씨로 방4개를 저렴하게 구해다.
함평은 매년 나비축제 때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호황을 누린다는 인심 좋게 보이는 모텔주인 아줌마의 푸념이다.
제3일
1. 축복받은 國士峯 등산과 玉井湖水
5. 국사봉
함평을 떠난 우리는 국도를 따라 장성을 거쳐 시원히 뚫린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북진했다.
고속도로를 타면 한 가지 여유와 즐거움이 있다. 다름 아닌 휴게소에서의 자판기 커피 한잔에 낭만과 여유를 즐긴다.
백양사 휴게소에서 우린 3백 원짜리 자판기커피 한잔과 꿀 빵 하나에 순간의 행복을 느낀다.
오늘의 목표는 전북임실군의 국사봉 등산이다.
모두에겐 매우 낮선 곳으로 호기심 속에서 기대도 컸다. 아니 난생 처음 밟아보는 국토이다.
호남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정읍을 지나 태인 톨게이트에서 내려 다시 국도를 타고 내륙으로 두 시간 가량 달렸다. 일행을 태운 차가 가쁜 숨을 몰아쉴 즈음 우리는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수다. 섬진강 최북단이며 댐 건설로 생긴 차고 맑은 물이 있어 옥정리 마을이라 불려왔는데 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옥정호수라 불리고 있다.
호수를 에워싼 구불구불한 산자락과 호수 가운데 불가사리 모양의 외안날 섬은 한 폭의 서정시이자 동양화에 다름없다. 넓은 호수에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뒤늦게 일주도로가 개설되면서 아직도 세인에 덜 알려진 덕분이라 한다.
외안날 섬은 유명한 서진 롬 싸롱 살인사건의 주범 김태촌이 사건 후 한동안 숨어살았을 만큼 궁벽한 오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단 3가구가 살고 있단다. 2가구는 주변 경칭에 반해 들어온 외지인이고 한가구는 칠순이 넘은 토박이 노인이 낚시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단다.
우리는 옛 선비들이 자주 국사봉이라 부른다는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를 올랐다. 산을 오르면서 군데군데에 마치 전망대처럼 옥정호를 한눈에 조망 할 수 있는 바위에 더운 땀을 식히면서 이곳에 올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드리며 축복 받은 등산이라고 자찬했다.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산을 탔다. 해발 475m의 국사봉에 인접한 다섯 봉우리의 오봉산을 연거푸 타기 시작한 것이다. 산을 넘고 다시 또 산을 넘기를 수차례 반복 끝에 우리는 정상(513m)을 정복했다. 일행 12명 중 단 한명도 낙오하거나 불평은 없었다.
못 말리는 초노의 동기생과 열혈 부인들에게 감복한다.
2. 가는 곳마다 흔한 모텔 공화국
지친 몸들은 차에 오르자 약속이나 한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댄다.
늘 그랬듯이 한숨 자고 나면 몸은 한결 가벼워진다. 차속의 순간졸음이 보약이더라.
몸 누일 곳을 찾아 또 달리기 시작한다. 비수기 대천해수욕장의 민박집을 타깃트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비오는 주말의 해수욕장은 호화찬란한 라스베가스였다. 주로 서울에서 흘러 들어온 아베크족과 가족단위 놀이객으로 거리가 혼잡스러울 지경이고 방 값도 엄청 비쌌다. 하는 수없이 다음날 목표인 수덕사 부근으로 달리면서 모텔을 찾기로 했다. 빗속을 한참을 달려 수덕사를 지나쳐 발견한 도로변 마야 모텔, 주차장 입구에 두터운 비닐 커튼을 한 것으로 보아 러브호텔인 듯싶었다. 우리는 큰방과 조금 적은방 4개를 얻어 휴식을 취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모텔 없는 곳은 없는 듯 했다. 덕분에 편리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좋게 말해 사랑을 많이 하는 나라인가보다.
제4일
1. 빗속의 수덕사와 德崇山의 입불
6. 덕숭산 수덕사 대웅선
새벽 창문을 여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전날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남부지방엔 폭우와 태풍까지 분다고 했다. 모텔에서 아침식사를 때우고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렷다.
그러나 마냥 그러고만 있을 수 없는 일, 우선 맛 기행을 하기로 했다. 예산의 특미 곱창 구이, 예산군 삽교의 원조라는 시장 안 신창 집(041-338-2357)을 찾았다. 곱창 맛은 대구와 비슷했다.
어쩐지 수덕사라 하면 아릿따운 여승과 슬픈 사연이 노랫말 속에 오버랩 된다.
충남 예산 덕숭산의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창건한 절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비구니 선원인 見性庵이 있다.
일행 중 다수는 수덕사 뒷산인 덕숭산을 올랐다. 등산 목적은 아니었지만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입상석불을 보려하니 자연 등산이 된 샘이다.
우린 이를 이날의 덕숭산 등산이라고 꼽았다.
2.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
이날은 어쩌다 백제문화 유적지 답사가 되었다.
국보 제84호인 서산 마애삼존불은 빠뜨릴 수 없는 관광코스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삼존불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관광객으로 도로가 넘쳤다. 대형관광버스로 몰려온 나이든 관광객이 주였다. 관광대국이 되려나? 외국관광객은 왜 없노?
본존불은 여래상이 가운데 있고 좌우에 익살스런 표정을 한 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이 서있다. 여래입상의 두 볼에 가득한 미소가 신비할 정도로 자애스러운 데다 태양이 비추는 각동 따라 모습과 미소가 달라진다하여 인기를 모으고 있다. 백제의 미소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도 역사유적을 빌미로 한 얕은 상흔이 심사를 뒤틀리게 한다.
다시 태안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태안 마애삼존불을 둘러보고 부슬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다시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우리들의 희망의 섬 안면도로 향했다.
안면도는 태안반도의 남쪽 끝에 붙은 작은 섬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소나무 섬이다.
그러나 세계 꽃 박람회 이후 인기 있는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3. 낭만의 섬 안면도의 낙조
7. 석모도 가는 선상 갈매기의 유흑
안면대교를 지나 진입하자 맑은 공기냄새를 느끼는 듯했다. 깨끗하고 시원하게 뚫린 도로변 야산엔 소나무들이 빽빽히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도로변을 키 작은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하여 꽃 박람회 섬임을 강조하는 듯 했다.
10박 11일 여정 중 유일하게 숙박예약을 한 곳이 안면도다.
당초는 자연휴양림에서 일박하면서 멋진 소나무들과 교감을 나누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안면도 자연휴양림은 한 달 전 예약만이 약발이 있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하는 수 없이 콘도형 민박을 예약했는데 만족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바다풍경이란 이름의 민박집은 방포해수욕장에 인접한 아담하면서도 아주 깨끗한 집이었다(바다풍경콘도 041-673-3050).
저녁밥을 직접 지어먹었다.
밥 짓기는 물론 여성들이 전적으로 맡았다. 피곤한 몸으로 직접 밥 짓기와 점심 싸기는 매우 힘든 일인데도 우리여성들은 기꺼이, 즐거이 실행했다. 덕분에 적잖은 돈을 세이브 했지만,
비는 그치고 수평선 멀리 구름덩이가 몰려 있어도 해변의 아름다움과 낭만은 조금도 손색이 없다.
저녁노을 딱딱한 모래갯벌을 거닐면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난다. 그리운 사람, 사랑했던 여인, 또 한 번 보고 싶은 사람, 나이 듦이 서러운 세대,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해가 구름사이로 바다로 빠진다. 어둠이 깔려오는 해변의 모든 바위 소나무 잔파도가 한껏 예술성을 발휘한다. 도시 사람이 좀처럼 보기 힘든 해변의 낙조, 우린 행복했다. 보람을 느꼈다.
아직도 맑고 아름다운 안면도여! 넌 언제까지 그 자태를 간직할 수 있겠느냐. 하루 더 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우린 다음 행선지로 떠난다.
제5일
1. 바다 위 암자 看月庵
8. 간월암
4박 5일 째다.
여행의 피로와 지루함이 일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모두들 겉으로는 멀쩡했다. 그러나 잠자리 불편과 단체생활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이 어찌 없을 수 있겠나.
안면도를 빠져 나오면서 우린 유명한 서산 간월도와 간월암을 들렀다.
서산이라 하면 정주영과 서산 간척사업을 연상한다. 바다를 메꿔 3천 3백 여 만평의 농지와 2천 4백여 만평의 담수호를 만들어 냈으니 지도가 바뀌는 대 역사다. 그 현장에 온 것이다. 역사의 변화를 확인하는 순간이 랄까. 간월도는 서산 방조제가 조성되기 전에는 창리 포구에서 통통배로 30여분이나 걸리는 신비의 섬으로 알려져 왔는데 지금은 방조제 끝에 붙은 초라한 어촌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가 찾은 것은 간월암이지만 실제로 간월도는 어리굴젓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간월암을 창건했다는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바쳤다는 어리굴젓이 하도 맛이 좋아 그 후부터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 됐다는 것이다.
간원암이 유명한 것은 주먹만 한 섬 전체가 암자로 되어있다.
아마 바다에 떠있는 유일한 절인 듯싶다. 육지와는 불과 7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데 조수간만에 따라 길이 열리고 닫힌다. 간월암은 대웅전과 요사체 종각 등 서너개의 건물이 바다 절벽에 선 아담한 절이었다.
2. 전국 제일의 生氣處 강화도 마니산
9. 마니산 전등사
강화도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7310m의 우리나라 최장의 다리인 서해대교를 지나 충남 당진, 경기도 평택, 김포톨게이트를 지나 서울 외곽을 통과하는 지루한 주행을 참아야 했다.
강화도에 들어서니 상쾌하다. 공기가 틀리고 경관도 아름답다.
뙤약 빛이 내려 쬐는 오후 마니산 등행은 불가피하다.
입구에서 밀짚모자를 사 쓰고 산을 올랐다. 정면 계단 길을 피해 우측으로 꺾이는 단군로로 우회하는 등산길을 선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주 잘 한 선택이었다.
정면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마니산은 굉장히 오르기 힘든 산으로 평가하고 우리처럼 우회한 사람들은 쉽지는 않지만 등산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엇갈린 평을 하게 된다.
반드시 이 길을 선택해야 할 산이다.
하도 많은 사람을 받아들인 탓으로 마니산 등산로는 곳곳에 패인 자국이 많았다.
그러나 정상능선에 이르니 시원히 트인 서해바다와 갯벌 그리고 그림 같은 농촌풍경이 더위와 피로를 씻어준다.
해발 468m의 참성단.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 지금은 선녀를 가장한 현대 미인들이 각종 중요 체육대회의 성화를 채화하는 곳임은 다 아는 사실. 마니산은 전국에서 기가 가장 많이 발산하는 산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기를 측정하여 기록하여 고시한 곳이 두 군데 있었다.
이날 우리가 받은 마니산 생기는 얼마나 될까? 아마 남은 등산 여정을 이 생기로 버텨 나갈 수 있겠지.
하산 후 유명한 마니산 전등사 관광을 마치고 우리가 5일째 숙박을 정한 곳은 강화도 화도면 동막 해수욕장이다.
넓은 갯벌에 띄엄띄엄 고깃배들이 올라 서있고, 갈매기들이 노니는 한가한 어촌 풍경인데 여름에는 사람들이 꾀 많이 찾아드는 해수욕장이란다. 모텔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물론 평일이라 요금은 할인 받았다.(그린파워 모텔 032-937-8876)
제6일
석모도 보문사와 눈섭바위
10. 석모도 보문사
석모도는 강화도에서 배로 20분 정도 떨어진 섬이다. 이곳은 보문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 절 뒷산 낙가산의 눈썹 바위 암벽에 새겨져있는 마애불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마애불상 머리 위를 바위가 눈썹처럼 튀어나와 비바람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는 듯 했다.
마애불상까지는 가파른 1200개의 계단을 밟아 올라야 하니 팔공산의 갓바위를 연상케 한다. 불상 앞에 이르면 땀이 흠뻑 젖는다.
오늘의 등산은 이렇게 때우기로 했다.
점심은 배창묵 회원의 추천으로 강화도 별미, 꽃게탕으로 정했다. 좀 비싸기는 해도 담백한 맛이 괜찮았다.
이후 일정은 북으로 향한 관광일정 뿐이다. 강화도를 빠져나와 경기도 연천 통일전망대를 거쳐 임진각을 둘러본다. 현대 한국사에 한으로 기록된 현장들이다.
전망대에서 북쪽 땅을 바라보고 임진각에서 중단된 철마를 보면서 6. 25의 아픔을 새삼 느껴본다. 휴전선 철조망을 따라 북행하는 여행은 색다른 감정을 준다.
최북단이라 할 수 있는 경기도 연천 한탄강 유원지에 숙박을 정해 두개의 산을 등산 할 계획이다. 하나는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부르는 逍遙山 이고 다른 하나는 등산코스로는 최북단에 위치한 高臺山 . 우리는 인강파크라는 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여기서 이틀 밤을 지낼 계획이다.
제7일
전국 산행 투어의 하이라이트
11. 소요산 칼바위 능선
모텔 옥상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내일 아침밥도 이곳이 식당이다. 산행 때 먹을 점심까지 아침에 장만해야한다.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태규 산 대장의 억척스런 추진력으로 실행에 옮겨진다.
아침식사 후 가벼운 등산 빽 하나만 갖고 출발한다. 아주 낮선 길인지라 차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한 3,40분 쯤 북쪽으로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김시습이 자주 소요했다는 전설에 의해 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산세가 수려한 수목과 폭포가 많으며 산봉우리도 많아 경기의 소금강산이라고 불린단다.
12. 소요산 자재암
산허리부분 깊숙한 곳에 원효대사가 도를 깨쳤다는 자재암이 있다.
신라 선덕여와 1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산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있는 공주봉을 비롯해 대사와 관련된 야사가 꾀 많은 듯하다.
그리하여 산봉우리 이름도 불교에서유래된 것이 많은가 보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정상도 의상대고 거쳐 가는 봉우리는 나한대 다.
우리는 산 속 시멘트 포장길을 한참 걸어서 올라가서야 자재암을 만날 수 있었다.
절마다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산을 넓게 잘라 시멘트 포장까지 해놓으니 산행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길이 바로 이런 길이다.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삼보일배 고행시위를 마다 않고, 천성산 훼손을 막으려 단식투쟁을 하는 스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산에 자주 오르다 보면 산중에 있는 절이 파괴하는 자연훼손도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3. 소요산 정상 의상대
우리는 가파른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속도는 느리지만 끈기는 대단했다.
함께 간 30대 젊은 기사도 대단하다고 혀를 내 둘렀으니 말이다.
첫 봉우리는 하백운대 440m다. 다음 봉우리가 중백운대 그리고 상백운대를 넘어 칼바위 정상길을 거쳐 또 하나의 봉우리 571m의 나한대를 지나서야 소요산의 정상인 의상대(578m)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사진 한 장을 찍고 얼른 내려왔다.
뜨거운 햇빛을 피하고 주린 배를 빨리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산행할 때마다 아쉬운 것은 애써 올라간 정상을 서둘러 내려와야 한다는 점이다.
인생에서 정상은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내려오지만 자연의 정상은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점심식사 할 자리를 물색했다. 산행에서 식사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좋은 장소를 골라야 편하고, 맛있는 점심을, 그리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매우 힘든 산행이었다. 동두천 시내 매울 허름한 목욕탕에서 피로를 씻고 내일 산행을 위한 휴식이 필요했다.
제8일
1. 최북단 高臺山을 가다
14. 오두산 전망대
고대산은 경원선의 철도중단 지점인 경기도 연천군 신탄리역 인근에 위치해있다.
철원과는 경계지저이다. 해발 832m의 휴전선에 최 접근한 등산코스다.
산정에서 북한 땅을 바라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이기도 하다.
철도중단 점 신탄리역 남동쪽에 병풍처럼 두른 산이다. 골이 깊고 산이 높아 고대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남북통일을 고대하는 산이라고도 한다.
정말 산골이 깊었다. 나무들의 성장도 건강하다. 가파름과 완만함이 섞여 그런 데로 등산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산은 온통 요새화되어 곳곳에 참호와 기관총 토치카가 설치되어 있다. 유사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시설물들이다
15. 통일전망대
2시간 이상을 올라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엔 부대와 군인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소총을 든 보초병이 정상에서 북녁을 향해 입초중이고 바로 옆에 등산객들이 모여 정상정복을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옛날엔 얼씬도 못했던 군사기지인 산이 민주화와 더불어 일반인의 등산을 허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초병의 설명을 들으며 6. 25의 격전지 백마고지와 북녘 땅을 바라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하산 길은 바빴다. 철원일대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기 위해선 하산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16. 통일전망대 망배단
6. 25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노동당당사를 한눈으로 살피고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관광도 군인에게 신분을 확인시켜야 했다. 6. 25 때 중공군과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려 피아 간 수천 명의 장병이 전사한 현장이다.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고 포탄에 의해 산봉우리가 날아가 버렸다하니 당시의 참상이 상상되는 듯하다. 우리는 전 적비에 새겨진 기록을 읽고 위령탑에 묵념으로 명복을 빌었다.
2. 화천 破虜湖의 추억
17. 자유의 다리
철원에서 일정을 마치고 다시 숙소를 찾아야 했다. 화천댐이 있는 파로호 부근을 적지로 보고 화천으로 남하했다. 화천으로 향하는 국도는 한산했다. 주변 산에는 군부대가 즐비한 군사도로나 다름없다. 민간인과 민간차량이 드문 곳이다. 오후 8시 이후엔 들어갈 수 없는 산실을 한 참을 달려 화천읍에 당도했다.
24세의 젊은 내가 ROTC장교로 임관되어 첫 부임한 곳이 화천군 풍산리 민간 통제구역 내 이름 없는 산골이었다. 파로호를 지나 구불구불한 산실을 몇 차례 돌아 부임한 기억이 새롭다 155mm 포병대위 관측장교로 무서울 게 없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40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땅이다. 감회로운 밤이었다.
파로호가 있는 북한강 줄기에 숙소를 정했다. 녹원파크 식당을 겸한 모텔인데 부근에는 민박 외 다른 숙소가 없었다. 숙소 길 건너에 화천댐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에 하얀 물안개가 서려 운치가 있었다. 파로호 역시 격전지였다. 중공군 군단과 아군이 휴전을 앞둔 피나는 전투를 벌려 쟁취한 화천 수력발전소다. 당시 시체가 하도 많아 불도저로 호수에 밀어 넣었는데 그 바람에 파로호의 잉어들이 엄청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파로호 이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승을 기념하여 지어준 이름이며 친필 휘호도 내려준 것이다. 원래 이름은 화천저수지였다. 백마고지나 화천댐 등 우리가 둘러본 이 땅들이 6. 25 전에는 모두 북한 땅 이었는데, 이렇게 밟을 수 있는 것은 목숨을 바친 선배 그들 덕분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선배를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우리세대가 바로 그 선배들이다. 선배 덕 보지 않은 후배가 있는가. 인간사회가 정글화 하는 서글픈 현상이다. 8일째 밤을 여기서 묵었다.
제9일
아름다운 오지 강원도 정선
18. 성선 몰운대 고사목
파로호 호수길을 따라 국도와 지방도를 번갈아 타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댐 소양댐을 향해 춘천으로 간다. 지방도 국도 할 것 없이 도로만큼은 멋지게 뚫려있다. 산이 많은 덕분에 어디를 달려도 주변경관이 빼어난 우리나라다.
소양댐 이것 역시 서산 방조제처럼 고 정주영씨의 작품이다. 박정희 시절 현대건설에 공사가 주어져 특혜시비로 정치적으로 시끄러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주영씨는 눈길을 해외로 돌려 유명한 사우디의 쥬베르항 항만공사를 성공시켜 일거에 “현다이 넘버원”이란 유행어를 남기면서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소양댐을 둘러보고 이름난 춘천 막국수로 점심을 대운 뒤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춘천에서 56번 국도를 타고 홍천에 이르면 다시 31번 국도를 갈아타고 한참을 달리면 운두령재가 나오고 이승복 반공기념관을 거쳐 속사에 도착한다. 속사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진부터널을 지나자마자 곧 진부톨게이트로 빠져나와 33번 지방도를 따라 기나긴 여정을 거쳐야 정선입구 나전에 도착한다. 이 도로는 오대천과 함ㄲ 해 아름답다. 우리는 중간 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며 오대천에서 고디(다슬기) 잡기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정선은 카지노로 유명하지만 실은 강과 산과 바위가 멋지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오지였다.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텔은 있지만 요금이 비싸고 만만치 않았다. 숙소를 찾아 가다보니 나타난 곳이 화암동굴이 있는 동면 관광지였다. 화암파크 모텔의 주인은 경북사람으로 인심이 좋았다. 아들내외와 함께 가족이 모두 나서 운영하는 관계로 아주 친절했다. 이곳을 마지막 여정을 보내는 숙박지로 결정했다. 주말이 되면서 적절한 숙박지 구하기도 함들뿐 아니라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함께 이곳에서 마지막 등산을 하기 위해 2박하기로 한 것이다. 모처럼 저녁은 모텔식당에서 돼지고기 삼겹살로 맛있게 먹었다.
제10일
1. 억새풀의 민둥산
19. 강원도 정선 민둥산
9박 10일째 우리는 마지막 등산을 위해 숙소를 나섰다. 물론 아침식사를 지어먹고 점심을 준비했다. 목적지는 가을 억새풀로 유명한 1119m의 민둥산. 산 정상은 나무가 거의 없이 억새풀과 초지로 되어 민둥산이라 부른다. 가을 억새풀이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릴 때가 정말 절정을 이루는 가을 산이다. 창녕의 화왕산을 연상케 한다. 정상에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쓴 억새풀 詩가 눈길을 끈다.
억새는 맑은 가을날 희게 흔들리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립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이 땅의 산과 들에 가을빛을 뿌려온 억새 우리는 억새 한 포기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자연 그 속의 인간은 풀 한 포기와 같다. 미워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 욕심내고 다툴 일도 아니다. 즐겁게 살다 고통 없이 간다면 그게 풀 한 포기의 삶이 아니겠나.
등산을 마친 후 우리는 화암동굴을 관광했다. 깊고 규모가 큰 광산 동굴이었다. 저녁 먹기 전 우리는 인근 어천에서 고디(다슬기)잡기놀이로 자연을 즐겼다. 밤에는 어천에서 잡은 고디이와 술과 수박으로 간식한 후 다가오는 마지막 여정이 아쉬운 듯, 노래방에서 밤늦게 까지 노래도 불렀다.
2. 귀향길 관광
20. 영월 청령포
마지막 날은 햇볕이 따가운 여름 날시. 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고리산성을 찾았다. 도로 가운데를 막고 입장료를 받는 기막힌 관광장사에 기가 질려 버렸다. 싫으면 돌아가라는 식의 배짱장사다. 동강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치단체가관광객을 상대로 한강물 팔아먹기와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더위와 겹쳐 짜증이 난다.
정선 화암동굴에서 영월까지 약 58km 다. 우리는 제천을 지나 풍기에서 온천욕으로 쌓인 피로를 씻기로 하고 영월로 향했다. 오는 길에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를 둘러보고 풍기에서 목욕 후 곧장 중앙고속도로로 진입, 대구로 가속하여 달렸다. 들안길 서민 돼지 숯불갈비 식당에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며 결산을 했다. 부인들의 알들 살림 덕분에 상당한 돈을 절감했다. 결산 후 한 집당 10만원씩 되돌려 받는 기쁨도 괜찮았다. 우리는 부라보를 외치며 무사한 11일간의 등산여정을 자축했다.
21. 청령포 관음송
동반자는 김헌일 부부, 한상훈 부부, 배창묵 부부, 정재운 부부, 이무남 부부, 조병로 부부. --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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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곳을 다니기도 어려운데.... 열박 열하루라.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셨군요.날 대구에서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장단지나 한번 만져 보고 싶구려. 산을 타니 더 젊어 보이는 것 같구. 꼭 10년 쯤은 후배 같아 보이니. 히 히 히
놀라운 젊은 체력, 알뜰한 명소관광, 무사한 안전산행, 화목한 부부쌍쌍, 재미있는 여행일기,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