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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문화탐방 크루즈
일시:2012년 12월 6일 목요일~18일 화요일
탐방국가: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인천공항 출발
* 인천공항 출발
어제 눈이 많이 왔다. 적설량 15Cm, 32년만의 12월 폭설이다. 오늘은 눈은 내리지 않지만 빙판길이다. 하얀 겨울 풍경이 곱다. 인천공항에서 저녁 10시에 미팅하여 밤 12시 35분 QR883 카타르 항공 도하행을 탑승한다. 110번 게이트다. 모노레일을 타고 탑승게이트로 갔다. 11시 45분에 보딩이다. 도하에서 다시 카이로행을 환승할 것이다. 도하 공항까지는 11시간 소요되고, 다시 도하에서 카이로까지는 4시간 소요된다. 길고 긴 장거리 여정이다. 남편 생일 기념으로 가는 여행이다. 20도 정도 되는 봄 날씨의 나라 3개국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을 탐방한다. 2012년 한해 열심히 살았으니 시인과 수필가 문인 부부인 우리는 세계 문학기행을 떠나는 것이다. 참 행복하다. 남은 날도 열심히 살고, 열심히 국내외 문학기행할 것이다. 비행기는 캄캄한 밤하늘을 힘차게 날아가고 있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파키스탄 공항, 카타르 도하공항, 이집트 카이로
* 파키스탄 카라치 공항 비상 착륙
응급 환자가 생겨 파키스탄 카라치 공항에 비상 착륙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카타르 도하공항으로 향해 날아가던 비행기가 방향을 틀어 파키스탄 카라치 공항에 착륙했다. 현지 시각으로 새벽 5시 30분이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전 9시 30분이다. 의료진들이 기내로 들어와 뒤편 비상구로 환자를 이송하여 내렸다. 응급 환자는 아랍계 사람으로 기내에서 출산 기미가 보인 임산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천공항에서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부부 중, 그 아내였다. 배가 부른 것이 보였었다. 생명이 탄생하려는 기쁜 일로 비상 착륙해서 흐뭇했다. 이 일로 인해 파키스탄 땅에 내리는 축복까지 얻었으니 여행객에게는 고마운 일 아닌가. 파키스탄의 새벽 동이 트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보은 일출이 비경이다. 새떼들이 비행기 위를 날다가, 공항 시설물에 앉았다가를 반복하며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해는 점점 떠올라 하늘로 솟는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공항 주변의 나무들도 일어선다. 일을 매듭짓고 비행기는 다시 도항공항으로 출발했다. 이 사건으로 2시간이 더 지연되었다. 하지만 항공법상 운항 중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그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에 착륙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한 소중한 시간이다.
* 카타르 도항공항 환승
카타르는 한국보다 6시간 늦다. 카타르 시각으로 새벽 7시 30분에 도착하여 오전 9시 이집트 카이로행 QR508 항공으로 환승한다. 원래는 새벽 5시 30분에 도착하는데 파키스탄 비상 착륙으로 2시간 지연되어 그렇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덜어준 축복이라고 우리 일행은 웃었다. 도하공항에서 2시간 정도 쉬었다. 도하공항은 세 번째 왔다. 그래서 낯익은 풍경이다. 2층 큰 홀이 승객 대기실이다. 날이 밝아오자 유리창문 밖으로 건조한 사막 풍경이 드러난다. 사막 가운데 지은 도시이며, 공항이다. 이곳 공항의 비행기는 모두 멀리 있고, 버스가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한 동안 버스를 타고 달려가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힘차게 솟구쳐 오른다. 사막 위 건조한 도시, 그리고 푸른 바다와 우람하게 솟은 건물들 도하의 진풍경이 전개된다.
* 상공에서 본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 상공을 날아서 왔다. 오는 동안 내내 지상은 온통 사막이었다. 사막 평원과 사막 암석산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광경이 신비로웠다. 지구의 이면을 보는 체험, 이것 또는 세계여행에서 얻는 값진 소득이다. 홍해를 건너고, 이집트에 접어들자 역시 광활한 사막이다. 나일강 유역에만 거주하는 전형적인 이집트를 보여주고 있다.
* 이집트 카이로공항 도착
이집트는 두 번째 왔고, 카이로 공항도 두 번째 오는 곳이다. 공항은 아프리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내경도 외경도 상당히 세련되고 깨끗하다. 1997년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한인교포 가이드를 만났다. 짐 벨트에서 짐을 찾고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 주차장으로 갔다. 친절한 이집트 운전기사가 짐을 실어준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직접 여행사를 운영하는 사장이다. 첫 인사가 이집트의 데모는 괜찮다는 것이다. 한국 뉴스에서 이집트의 데모 현장을 다룰 때 모두 걱정을 많이 하고 왔기 때문이다. 단 1명도 외국인 관광객은 건드리지 않는단다. 수많은 외국인 차량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인도해준단다. 대통령궁 앞을 지나간다. 오늘은 데모가 없이 잠잠했다. 그러나 저녁이면 시위대가 모여든단다. 이집트가 여행이 쉬운 곳은 아니다. 가는 곳곳마다 관공처에 보고 해야 된다. 사회주의 잔대로 그렇다. 중동지역에 삼성전자 공장이 착공했다. 한국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있다. 이곳은 오후 4시 50분에 일몰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카이로 시가지를 달린다. 내일은 이 버스로 샴엘쉐이크까지 내려가며 시나이 반도를 본다.
* 이집트 카이로 무덤 도시
카이로 시가지는 내게 낯설지 않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많이 지나다닌 길을 만나기 때문이다. 지금 무덤 도시를 지나고 있다. 무심코 보면 여의 도시의 시가지 풍경인데 자세히 보면 주택 사이로 허름한 무덤들이 보인다. 부수어진 건물 잔재 같은 것이 무덤이다. 개인, 또는 가족 무덤을 저렇게 도시 가운데 마련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자기 조상과 산다고 생각하며 무덤을 가까이 두고 산다. 카이로는 연 평균 강수량이 30mm 미만이다. 남부 도시 룩소는 5mm 미만이다. 95%가 사막인 나라다. 지대가 낮아서 비만 조금 오면 물난리가 난다. 그러나 머리는 유럽인 나라다. 아프리카지만 이집트인들은 유럽인들의 생각으로 산다는 것이다. 무덤 도시 아주 광대하게 전개된다. 많은 민가 집들과 무덤 사이로 돔지붕의 사원 건물이 오롯하다. 카이로에서 오늘은 이슬람 사원, 이슬람 지역의 역사가 서린 중세지구, 카이로 최대의 칸 칼릴리 중세시장 등을 볼 것이다.
* 카이로 씨타델성 이슬람 사원
이곳은 카이로 이슬람 지역이다. 이집트에 이슬람이 들어온 지는 1300년 되었다. 국교다. 이곳 술탄 하산 모스크, 이슬람 사원은 터키의 블루모스크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높은 성벽이 보인다. 사원 주변의 성은 1187년에 건설했다. 이곳 이슬람 사원 주변 전체가 모두 씨타델성城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슬람 사원을 보았다. 13세기에 건설된 술탄 하산 모스크는 82m 높이의 첨탑과 5각형의 구조다. 중세 십자군을 격파한 영웅 살라딘이 12세기에 건설한 성채 안에 있는 무하마드 알리 모스크는 비교적 최근인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웅장하다. 외관이 대단히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모스크 첨탑이 오롯하게 솟구쳐 파란 하늘과 함께 비경을 자아낸다. 규모만 약간 작을 뿐, 정말 터키의 블루모스크 앞에 선 느낌이다. 대법원, 감옥, 별장, 화폐 제조창 등 많은 부속 건물이 있다. 밖에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넓은 자락으로 앉아 있다.
* 카이로 이슬람 사원 전망대
사원 안에서 조금 걸어서 카이로 전망대로 갔다. 곁에는 사원 큰 건물이 있다. 그곳에 서니 카이로가 한눈에 담긴다. 칙칙하지만 우람한 도시다.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도 보이고 멀리 사카라 사막의 피라미드도 보인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에서부터 신앙심이 담긴 종교 유적지와 왕족들의 흔적이 녹아 있는 궁전, 문학 작품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골목과 신작로에 이르기까지, 카이로 이슬람 지역은 마치 지구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장소다. 전망대는 상당히 높은 곳이어서 하늘과 카이로의 풍경 곱게 그려져 한눈에 담긴다.
* 카이로 이슬람 사원 내부
사원 안으로 들어오니 뜰 안에 시계탑이 있다. 정원에는 프랑스 콩코드 광장의 오벨레스크를 준 대가로 받은 낡은 시계탑이 서 있다. 나는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그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보았다.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가져가고, 그 대가로 이 시계가 들어있는 탑을 준 것이다. 공사 중으로 시계탑 주변에 철조물을 쳐 놓았다. 사원에 입장할 때는 신발을 벗는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을 경우에는 출입을 금한다. 모포 융단 위에 신발을 놓을 때도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뒤집어 놓아야 한다. 천정에 매달린 유리 전구가 매우 아름답다. 지금은 전깃불이지만 전기가 없던 시절에 촛불을 매달던 것이다. 잠시 이슬람 교인이 되어 자리에 앉아 설명을 들으며 관람했다. 이곳 사람들은 1일 5회 기도한다. 모두 낮은 곳에 평등하게 앉아서 기도한다. 천정에 새긴 문장은 유명 성인 이름이다. 대개 무하마드 알리라는 문장이다. 사원 한쪽에는 무하마드 알리의 무덤도 있다. 금장식으로 아주 크다. 오른 쪽에 왕의 자리로 오르는 계단 민자르도 있다.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사원에서 잠시나마 이슬람의 종교에 접해본 시간이었다.
* 카이로 이슬람 사원 안의 궁전과 성채
사원에서 나와 부속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모스크와 함께 왕들이 살았던 궁전과 성채, 그리고 부속 건축물들이 있다. 왕의 집이 초록색 유리의 돔 지붕이다. 기원 후 20년대에 유리를 생산한 나라다. 지금은 많이 기울었지만 2천 년 전에 유리를 탄생시킨 문명국이다. 놀랍다. 이슬람 사원은 높은 품격으로, 아주 넓은 자락으로 앉아서 찬란했던 문화를 드러내고 있다. 이슬람 문화 중심지 카이로다. 카이로 이슬람 지역에는 오래된 종교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종교 건축물이 주로 지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다양한 건축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원 안의 궁전과 하인들이 살던 집과 감옥 등은 잘 보존되어 있어 모스크와 함께 훌륭한 유적이다.
*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 카이로
중세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 카이로는 969년 시아파 이슬람 왕조인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건설된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도시 중 하나다. 이슬람 카이로의 전성기는 13~14세기로 이 기간 동안 수많은 모스크와 신학교가 건설되었으며, 카이로는 이슬람 세계의 수도였다. 나일 강을 경계로 카이로 동부에 위치한 이슬람 카이로 지역에는 과거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다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수많은 이슬람 사원의 돔과 첨탑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중동을 대표하는 도시다. 파티마 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 1000년 넘게 문명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정치, 종교, 경제는 물론이고 학문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한때 1000개가 넘는 미나레트, 이슬람교 예배당인 모스크의 첨탑이 세워진 거대한 종교 도시이기도 했다. 나일 강을 사이에 두고 카이로의 한쪽은 세련된 빌딩들이 세워져 있으며, 다른 한쪽은 인류의 소중한 흔적의 옛 건축물들이 있다. 옛 건물들이 있는 곳이 바로 카이로 이슬람 지역이다. 지금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역사와 문화와 주민들의 삶이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는 카이로 이슬람 지역은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해 주는 곳이다.
지금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곳이 카이로의 중세지구다. 택시 격인 미니버스가 많다. GNP가 3천불 미만인 가난한 나라다. 조금 높은 건물을 오를 때 엘리베이터를 타면 돈을 내야 하는 나라다. 공무를 볼 때도 급행료를 줘야 해결되는 나라다. 아까 지났던 무덤 도시를 또 지난다. 이곳 장례식은 성격의 구약식으로 치른다. 손님에게는 차만 대접한다. 화장은 절대 금지다. 장례식은 낮에 치르고, 결혼식은 밤에 치르는 풍습이다. 흡연자 천국이다. 거리에 담배 공초를 마음대로 버린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우리 교민 가이드도 자기 직장에 재떨이만 비우는 종업원이 있단다. 이슬람 국가라서 술을 금지하기 때문에 대신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중세지구에는 아주 큰 칸 칼릴리 전통시장이 있다. 그래서 시장 가까이 갈수록 거리가 복잡하다. 한 가족이 트럭 위에 타고 가며 우리 버스를 보고 반가운 미소로 손을 흔든다. 같이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었다. 이슬람 국가라서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데 아주 편안한 인상을 심어주어 기쁘고 고마웠다.
* 카이로 중세지구 칸 칼릴리 전통시장
버스는 점점 복잡한 시장으로 간다. 카이로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칸 칼릴리 바자르는 이집트 최대 규모의 전통 아랍 재래시장이다. 시장 끝에는 나일강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칸 칼릴리 중세시장을 거닐었다. 이슬람 지역에서 역동적인 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4세기 말에 만들어진 칸 킬릴리 바자르는 현재 카이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 재래시장이다. 아주 복잡한 상업 지구다. 차들도 많다. 곳곳에서 긴 총을 지닌 경찰이 검사한다. 외부 관광객의 일정표를 일일이 점검하고서야 관광이 허락된다. 허가증이 없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
재래시장은 주로 저렴한 생활용품을 사고파는 곳으로만 생각하지만 칸 칼릴리는 좀 다르다. 이곳은 풍경이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카페와 맛있는 음식점도 많고, 무엇보다도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서민적인 다양한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종합 문화 공간이다. 신작로와 골목을 따라 늘어선 카페와 음식점에서는 전통 음악을 들으며 다양한 종류의 차와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카페와 음식점에서 파는 차와 음식은 세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고급 브랜드도 있지만 대부분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것들이다. 오랜 세월 이집트 사람들이 즐겼던 차와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우리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망고 주스를 먹었다. 망고를 직접 갈아서 만든 주스로 알갱이가 씹히며 아주 맛있다. 시장을 다 둘러보고 버스를 기다리며 군 옥수수도 사 먹었다. 현지인이 사면 3개 800원인데, 외국인이 사면 1개에 1불이다. 그래서 가이드가 사 주었다. 이집트의 유명한 대학 건물이 눈앞에 있다. 총을 옆구리에 찬 경찰들이 외국인 관광객인 우리들을 지켜준다. 곧 우리의 버스가 들어오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호해주려는 것이다. 내란으로 아무리 혼란해도 이집트를 찾아온 여행객에게는 철저한 보안을 지켜준다. 고마운 일이다. 칸 칼릴리 바자르에서 현지 이집트 주민들을 만나는 것도 독특한 체험이다. 이집트 역사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시장이다.
* 카이로 중세지구 시가지
카이로 구시가지는 바빌론이라 불리던 고대 도시가 있던 곳이다. 카이로는 승리의 도시란 뜻이다. 역사가 오랜 카이로는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도 도시로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지만 역사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파티마 왕조 시대부터다. 카이로 이슬람 지역을 건설한 파티마 왕조는 튀니지에서 시작된 이슬람 왕조다. 아프리카, 지중해, 홍해와 연결되어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에 위치한 카이로는 정치, 문화, 무역, 군사 등 여러 측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파티마 왕조에 이어 아이유브 왕조와 맘루크 왕조를 거치면서 카이로는 더욱 발전했다. 물론 몽골과 오스만투르크,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도 있었지만 카이로는 10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대표하는 도시로 굳건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버스를 타고 석식 식당으로 이동하며 한국의 남대문 격인 포목점도 보았다. 1995년 4월 5일에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 우리나라 대사관, 총영사관이 카이로에 들어왔다. 카이로 인구는 2천3백만 명이다. 알렉산드리아는 1100만 명이다. 이집트 인구 대부분이 카이로에 산다. 왕자를 잃은 슬픔에 아들을 따라 죽은 유명한 왕의 동상이 보인다. 한국 종로 격인 조금 격이 높은 시장도 지난다. 카이로의 중세지구는 정말 고풍스럽고 정겨운 풍경이다.
*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중세지구 시가지를 빙그르 돌아 나오자 이집트 데모 장소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이 보인다. 민주화 혁명을 이끌어낸 명소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광경이 보인다. 광장 한쪽에는 사람들이 벌써 모여 있다. 시위는 주로 밤에만 하기 때문에 어둑해지는 지금 모이는 것이다. 시위 현장은 자칫 위험하기 때문에 빨리 빠져 나왔다. 조금 가니 붉은 건물의 고고학 박물관이 나온다. 이 박물관은 다음 일정에서 관람한다. 이집트 여행은 두 번째라서 전에 관람했던 박물관으로 낯익은 건물이다.
* 카이로 석양의 나일강변
오늘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데 나일강변을 달려서 간다. 석양의 나일강이 참으로 아름답다. 강변에 늘어선 건물들이 넓은 폭의 강물과 함께 비경이다. 몇 년 전, 이집트 여행에서도 수없이 지나던 나일강인데 오늘 보는 나일강은 노을이 서려 더욱 낭만적이다. 한인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식당 티브이에서 아까 지났던 타흐리르 광장의 데모 현장이 방영된다. 저것이 한국에 보도된다면 가족들이 걱정할까 염려되지만, 이곳의 여행은 조금은 불안하지만 관광객에게는 아주 안정적이다. 이제 여기서 50분 정도 달려 호텔로 간다. 지금 시각 오후 5시 30분이다. 한국시각으로는 밤 12시 30분이다. 한국과 이집트의 시차는 -7시간이다. 즉 이곳이 7시간 늦다. 이곳은 지금 아주 캄캄한 밤이다. 사막 도시라서 해가 지면 바로 어두워진다. 도로에는 총을 든 경찰이 간간이 보인다.
* 카이로 호텔 투숙
호텔은 카이로 공항 근처 있다. 특급 매머드급 호텔이다. 로비만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찬란하다. 육로 여행자에게는 제공할 수 없는 최고급 호텔이란다. 크루즈 여행객이어서 가능한 호텔이라고 애써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홍해 크루즈의 첫 번째 여행단이어서 최상의 대접을 베푼다고 했다. 내부의 아름다운 풍경은 내일 새벽에 구경하기로 하고 룸으로 갔다. 우리 부부의 방은 1032호다. 1층 32호실이다. 긴 복도를 따라 찾아 갔다. 내일은 5시 모닝콜, 6시 조식, 7시 출발이다. 이집트에서 맞이하는 여행의 행복한 첫날밤이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수에즈 운하, 시나이 반도, 샴엘쉐이크, 배승선
* 이집트 카이로 호텔 출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산책해도 좋을 만큼 큰 규모의 실내다. 호텔 실내 공간에서 싱싱한 나무들이 줄지어 자라고 물과 생화 꽃과 정말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장관급 손님을 모시는 호텔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지하에는 카지노장도 있다. 아직 새벽어둠이 가시지 않은 아침이라서 실내만 돌고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호텔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야자수 나무가 울창하고, 높은 호텔 건물이 넓은 품으로 앉아 있다. 호텔 앞 도로는 아침 출근 차량들이 분주하다. 날씨는 봄 정도의 기온으로 여행하기 좋다. 한국은 무척 추울 텐데, 먼먼 땅 이곳 아프리카 이집트 카이로는 포근하다. 날씨도 이색 체험이다. 버스가 호텔 앞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로 떠난다.
* 카이로의 아침 풍경
조용히 열리는 카이로의 아침이다. 출근하는 버스와 자가용이 간간이 보인다. 전철 선로도 차도에 놓여 있다. 신시가지의 고층 아파트가 길게 줄 서 있다. 과일을 사 가지고 간다 하여 잠시 멈췄다. 이집트 특산물인 석류와 오렌지를 사 왔다. 수에즈 운하를 보고 시나이 반도를 따라 샴엘쉐이크까지 가려면 아주 긴 여정이라서 그때 먹을 것이다. 이집트는 이슬람권이어서 여성이 생리를 시작하면 검은 옷으로 머리와 신체를 가린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런 여성을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다. 도시에는 별로 없다. 버스는 점점 카이로 시가지를 벗어나 사막으로 접어든다.
* 카이로에서 수에즈 운하 가는 길
카이로 시내 끝부분에서 CAIRO AIRPORT라는 문구와 함께 공항 울타리가 보인다. 카이로 공항을 지나고 있다. 건조한 사막 땅이 보인다. 버스는 수에즈 운하를 향해 계속 달리고 있다. 이집트 본토 카이로에서 수에즈까지는 135Km다. 우리는 수에즈 운하에서 다시 30Km 정도 위로 올라간다. 이집트는 지도에서 보면 땅 모양이 긴 네모 모양이다. 알렉산드리아를 북쪽 끝으로 하여 Y자를 그리며 나일강이 흐른다.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이집트 중앙을 흐르는 이 Y모양의 나일강 1460Km 주변이 녹지다. 한국의 1/2 크기의 농토다. 여기서 2~3모작 농사를 짓고 산다. 7월이 우기다. 검은색 진흙이 기름지다. 1902년도 영국이 아스완 댐을 건설했다. 댐을 건설되기 전에는 물이 일정한 시기에 범람했다. 신이 이 땅에 풍요의 축복을 갖다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피라미드와 신전을 건축했다. 농사를 기다리는 8개월 동안 축제를 열었다. 이집트는 95%가 사막이다. 그 중에서 35%는 모래사막, 65%는 암석사막이다. 시나이 반도는 성경 속에 나오는 광야다. 그 옛날에 참외까지 재배한 농토다. 3천 년 전에도 풍요로운 땅이란 뜻이다. 과일 수출로 연간 60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사막 위 구름이 특이하다. 스모그 현상 같이 긴 검은 색 띠가 사막 위에 걸쳐 있는데 그것이 사막 구름이란다.
한국은 오늘 산간 지방이 영하 20도로 전력 비상이라고 전해준다. 그런데 여기는 지금 영상 14도, 겨울과는 먼 날씨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와 걸친 유일한 땅이 이집트다. 사막에 군 주둔지가 많이 있다. 울타리를 치고 있기도 한다. 수에즈 운하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군 주둔지가 많아진다. 군 주둔지는 수에즈 운하 195Km까지 지킴이다. 이제 카이로에서 수에즈 운하 시작점에 도착한 것이다.
* 이집트 수에즈 시가지
수에즈 시가지에 들어왔다. 수에즈 운하 건설 때 세운 계획도시로 30년 된 신도시다. 이집트의 북동부 수에즈 만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며, 수에즈주의 주도다. 카이로 및 포트사이드와는 철도 및 국도로 이어져 있으며, 대규모의 정유공장과 화학 비료 공장이 있다. PETROJET라는 국영석유회사 간판이 보인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홍해와 나일강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함께 근대 도시로 발전하였다.
수에즈 시내에 이집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신호등이 있다. 횡단보도에는 경찰이 안내하기도 한다. 수에즈는 운하가 있어서 철저한 보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차량 번호에 아리비아 숫자가 없다. 대신 아라비아 특유의 꼬부랑글씨가 많다. 그것이 이곳에서는 숫자 표기란다.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사실은 인도 숫자란다. 고층 아파트도 많다. 한국과 호주가 치른 청소년월드컵 경기장도 있다. 홍해 바다 최북단 끝점이 보인다. 홍해와 수에즈운하가 시작되는 곳을 보는 감격스런 순간이다. 수에즈 부근에 ‘모세의 샘’ 이라는 오아시스가 있다. 운하를 보고 그곳으로 갈 것이다. 홍해크루즈는 우리 팀이 최초다. 수에즈에 한국인 여행단이 온 것도 최초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배웠던 수에즈 땅에 왔고 세계적인 명소 수에즈 운하까지 본다는 것은 큰 의미로 다가오며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 수에즈 최북단 홍해바다 끝점
수에즈 시가지에서 수에즈 운하로 가는 길에 최북단 홍해바다 끝점을 만났다. 이곳이 홍해의 북쪽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오른 편에는 수에즈 시가지가, 왼편에는 홍해바다 있다. 운하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수에즈 시내의 건물들이 아름답다. 군인용사의 동상이 운하로 가는 대로변에 국기와 함께 크게 세워져 있다. 모두 비경이다. 여기서 30분 올라가면 시나이 반도로 넘어가는 터널이 있다. 우리는 수에즈 운하를 보고 그 터널을 이용하여 운하를 건너 갈 것이다. 보람되고 소중한 여정이다.
*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Suez Canal는 지중해와 홍해를 왕래하는 수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인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서쪽에 건설된 세계 최대의 운하로 지중해의 포트사이드 항구와 홍해의 수에즈 항구를 연결하고 있다. 이스마일리아가 두 곳 가운데 지점에 있다. 운하의 서쪽에는 저지대인 나일 강 삼각주가 있고, 동쪽에는 지대가 높고 지형이 험난한 불모지인 시나이 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군함을 포함하여 세계 어떤 나라의 선박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 이러한 운하는 전쟁 동안에도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며, 어떤 경우에도 폐쇄되지 않는다. 또한 운하의 양쪽 출입항으로부터 4.8㎞ 이내의 구역에서는 어떠한 적대 행위도 금지되어 있으며, 시설물 일체는 불가침 구역이다.
지중해보다 홍해의 수위가 7m 높다. 그래서 홍해에서 바닷물이 들어와 지중해로 나간다. 수에즈 운하에는 갑문이 없다. 바닷물이 양쪽 바다에서 운하 가운데의 이스말리아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자유로이 흘러 들어와서 호수를 통과하여 수에즈 만과 지중해를 잇는다. 이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는 연결 지점은 4곳의 나루터와 2개의 교량과 1개의 해저터널이 있다. 해저터널은 진입로를 포함하여 총 연장 4.5 Km다. 지하터널만의 길이는 1.6Km다. 하루에 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수는 106척이다. 운하 길이는 195km, 수면의 너비는 365m, 평균수심 약 20m다. 전 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다. 운하를 통과하는 속도는 시속 15km로 11~16시간 정도 걸린다. 느린 속도로 움직여 운하 양안이 배가 일으키는 파동으로 침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군함 15만 톤의 선박도 지나갈 수 있다. 선박이 바닥에서 물이 잠기는 수면까지 수직 길이가 20m까지 허용된다. 만적상태의 24만 톤 탱크도 통과할 수 있다. 수에즈 운하는 평탄한 지형 때문에 갑문이 없으며, 운하 양 끝 두 바다 사이의 해수면 차이도 미미하다. 운하에 세 척의 호송선이 순찰한다. 두 척은 남행이고 한 척은 북행이다. 첫 번째 남행 호송선은 매일 아침 시간에 운하로 진입해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가는데, 여기서 길을 막지 않도록 통행 항로를 벗어나 정박하며 북행 호송선이 통과하길 기다린다. 북행 호송선은 인근 우회로에 정박한 두 번째 남행 호송선을 지나간다. 통과비용은 1척당 평균 1회에 1억~2억 원이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에서 1년에 60억 달러~40억 달러의 통행료 수입을 얻는다. 적어도 5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이다.
이집트는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12년이 걸렸고, 프랑스의 차관에 의존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됐다. 그래서 영국이 1876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은 1914년에 이집트를 정식으로 식민지로 삼으려 했으나, 이집트인들의 막강한 저항에 밀렸다. 이집트는 1922년 왕국의 이름으로 독립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완전 독립을 한 것이다. 얼마 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완전히 반환되었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이 60%, 이집트가 40% 투자하여 건설했다. 영국 돈까지 빌려다가 건설해서 영국 지분도 많아져 영국 권한이 컸다. 이집트에서 갚지 못하자 그 지불 대용으로 이집트의 유물을 많이 가져갔고,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1952년 이집트 나세르 왕이 수에즈 운하의 권한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해 7월 23일에 공화정을 선포했다. 현재 이집트 정부의 수에즈 운하 당국에서 관할한다.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었다.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하였고 그 후 기원전 500년경 홍해와 대염 호수를 거쳐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백여 년 동안 사용 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쇄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도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중단되었다. 카이로 주재 프랑스 영사에 의해 1859년 공사가 재개 되어 후인 1869년 운하가 개통 되었다. 이집트의 국가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트루크의 식민지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운하의 필요성은 인정하였지만 이것을 이용한 터키 침공의 발판이 될 것 같아 거부했으나, 국제적 여론이 워낙 드세어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기술진에 이 공사를 주게 된 것이다. 개통 후 운하의 역사는 프랑스, 영국, 이집트로 이어지는 지배권의 변화와 함께 제1, 2차 세계대전과 2차, 3차 그리고 4차 중동전쟁 때 오랜 기간 폐쇄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계속적인 운하 폭과 깊이 확장공사를 하였다.
수에즈시에 들어서서 두 군데에서 운하를 보았다. 첫 번째는 해변공원 옆에서 철조망 사이로 보았다. 운하를 지키는 총을 멘 군인이 다가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 건너의 운하를 목마르게 보고 나오니 공원 근처에서 이곳 주민 남자가 고운 꽃 두 묶음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수에즈 운하만큼 넉넉한 시민의식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하여 두 번째는 운하 가까이 바짝 다가가서 보았다. 그곳에서는 바로 눈앞에 운하의 바닷물이 있었다. 시민들이 나와 운하의 둑에 앉아있다. 파란 물이 한가득 처연하다. 어찌 보면 참 아픈 운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역경 속에서 탄생되었기에 인간의 사랑을 받고, 전 세계의 배들이 행복하게 홍해와 지중해를 오가고 있으니 바로 이것이 수에즈 운하의 위대한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었다.
* 이집트 수에즈 시내 카페
수에즈 운하를 보고 시나이 반도로 가는 중에 잠사 들른 카페다. 카페에서 차를 마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화장실 이용만 했다. 만일 아침 시간이어서 그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차를 마시기로 하고 내렸는데 카페 주인은 쾌히 우리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그 대목에서 이집트에 대하여 다시 생각했다. 만일 이런 문제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그 어떤 나라에서도 가능할까. 모두들 이집트이기에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배워가야 할 덕목이다. 카페도 예쁘고, 이집트 주인의 마음도 예쁘고, 수에즈 거리도 예쁘다.
* 이집트 이스말리아 시가지 풍경
이스말리아Ismailia는 이스말리아주의 주도다. 카이로에서 150Km 떨어진 곳이다. 수에즈 운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와 철도가 있어 수도 카이로까지 연결이 편리하다. 수에즈 운하 회사가 1863년 공사하면서 이스말리아에 건설기지 사무소를 두었다. 도시도 프랑스식으로 설계했다. 당시 이집트의 부왕이던 K.이스마일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면서 홍해와 지중해가 만나 생긴 인공후수 팀사호가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 같은 아열대 지방에서 생산되는 대규모 망고 재배지가 있다. 맛도 좋아 이스말리아 망고는 최상급이다. 운하 개통 후에는 운하를 통항하는 선박의 관제지령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중요한 작전본부가 설치되었다. 1975년 식품가공, 트랙터, 엔진 생산공장, 조선업체 등 면세 공업단지를 조성했다. 수에즈 운하와는 철도로 연결된다. 수에즈 도심 거리 복판에 말과 당나귀 달구지가 있다. 차들 속에 섞여 가고 있다. 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 이집트는 이집트다. 미니승합 택시도 있다. 시장에는 과일과 여러 가지 물건이 많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스말리아 외곽에서는 산업철도가 길게 놓여 있다. 채소를 실은 마차가 건널목을 건넌다.
모두 진풍경이다.
* 수에즈 운하 터널 가는 길
이스말리아 시가지를 지나 수에즈 터널로 간다. 그 터널을 지나 시나이 반도로 가기 위해서다. 시내를 벗어나자 사막도 있고 농토도 있고, 멀리 마을도 보인다. 사막 포장도로 길로 차와 사람, 그리고 짐을 실은 마차도 지나간다. 사막이지만 더러는 물이 고인 곳도 있다. 파란 농작물 지대도 지난다. 식물재배지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긴 담장을 쳐 놓는다. 망고나무를 키우며 모래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집트에서 보는 경이로운 풍경들이다.
* 수에즈 운하 터널
수에즈 운하 해저터널을 통행하여 시나이 반도로 간다. 이 터널은 진입로를 포함하여 총 연장 4.5 Km다. 바다 아래의 지하터널 길이는 1.6Km다. 입구 사무실에서 통행료를 받는다. 군인이 주둔하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시나이 반도에서 카이로에 가려는 차들이 줄 서 있다. 1983년 건설된 터널이다. 물이 새는 문제 때문에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옛 터널 안에 새로운 터널을 건설했다. 많은 차들이 터널을 왕래한다. 우리 버스도 수에즈 운하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로 간다. 그러니까 위에는 수에즈 운하인데 그 바다 밑으로 가는 것이다. 신비로운 체험이다.
* 수에즈에서 시나이 반도 가는 사막도로
터널을 지나자 사막은 계속 이어진다. 이제 여기는 시나이 반도다. 양편으로는 군사보호기지도 있다. 남으로, 남으로 주행한다. 샴엘쉐이크까지는 여기서 35Km다. 농사짓는 농토가 보인다. 작은 관으로 수로를 내고 농사짓는다. 망고나무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많다. 시나이 반도는 성경에서 나오는 지역이다. 강물이 들어가는 곳은 없다. 강수량이 적은 곳이다. 그래서 홍해의 물이 맑은 것이다. 홍해의 가시거리는 50m다. 시나이 반도는 천연가스와 원유 생산지이고, 또 성서 의미 등으로 이스라엘과 절충지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막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 이집트 시나이 반도 사막 방풍림
사막은 바람이 불면 모래가 농작물을 뒤덮는다. 그래서 농작지대에는 방풍림 나무를 심는다. 사막을 달리다가 키가 큰 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 안에는 망고나무나 오렌지 나무 또는 올리브 나무가 있다. 모래바람이 과수나무를 죽이지 못하도록 방풍림을 심어 보호하는 것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은 세차서 하얗게 식물을 말려 죽인다. 간간이 방풍림을 심어놓은 농작지대가 나온다. 사막에서의 생존 법칙을 보고 있다.
* 시나이 반도 전쟁기념 박물관
시나이 반도의 전쟁기념 박물관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과의 전쟁기념 박물관이다. 시나이 반도 끝에 이집트 섬이 있다. 시나이 반도를 비롯한 이집트 영토를 이스라엘이 통행을 못하도록 금지하다가 다투었다. 그것이 6일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시나이 반도를 빼앗겼다. 그로 인해 나세르는 심장병이 악화되어 1970년에 사망했다. 중동, 러시아의 힘을 지닌 나세르가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게 패배해서 큰 충격이었다. 그 후 사다트가 정권을 잡았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했던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를 파기하려 했으며, 또한 1973년 10월에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첩보원을 모두 잡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다시 시나이 반도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두 나라가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 모두 네 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렀다. 이집트는 1956년과 1967년에 이스라엘과 두 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다가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하여 1980년에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찾았다. 사다트는 그 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1년 10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밑에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무바라크가 그 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주도 정책을 계속했으며,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무바라크는 금년 2월까지 30년 독재 정치를 했다. 법을 개정하려고 현재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미국과 친교가 두텁다. 미국 원조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가 이집트, 그 다음이 이스라엘이다.
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과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스라엘과 수교를 하였으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에 걸친 본격적인 교류와 협력은 중동평화 협상이 정착될 때까지 활성화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오늘날 이집트 시나이 반도는 A, B, C 구역으로 나누어 이스라엘과 경계를 강화하고 UN군이 주둔한다.
전쟁박물관은 사막 가운데 아주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할 때의 군수시설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1975년 이스라엘 주둔 방어까지의 이스라엘 벙커가 많았다. 다 쓰러지고 무너져 내리는 벙커도 그대로 두어 전쟁의 교훈으로 삼는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휴게소에 올라갔더니 끝없는 사막이 전개 된다. 또 뒤편으로 가니 홍해가 바라보이는 곳에 군사기지가 그대로 있다. 대포 포격 장치도 그대로 있다. 곳곳에서 총을 든 군인이 지키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친절하게 잘 대해 준다. 햇살이 화사하게 내려 사막의 열기는 더욱 뜨겁고, 전쟁의 아픈 흔적들 또한 크게 가슴을 전율시킨다. 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없어야할 전쟁이다.
* 시나이 반도 휴게소 도시락 중식
휴게소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망고도 먹었다. 아침에 카이로에서 출발할 때 주문해온 것이다. 시나이 반도 가는 중에 식당을 만나기 어려워서다. 음식을 한국식으로 맛있게 잘 준비해 주어서 고맙게 잘 먹었다. 휴게소 건물이 아주 깨끗하다. 사막 가운데인데 밖에 지하수 수도시설도 있다. 이곳은 전쟁기념터다. 전쟁기념 동상과 조형물이 있다. 이곳을 출발하여 샴엘쉐이크로 향해 가는데 검은색 사막이 있다. 그것은 홍해의 바닷물을 흡수해서 그렇다. 여기서 샴엘쉐이크까지 320Km다. 소요시간은 5시간이다. 한낮 햇살이 화사하다.
* 모세의 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시 홍해를 통과하여 수르 광야에서 3일을 여행한 후, 이곳에서 물을 발견하였으나 그물을 마실 수가 없어 괴로움, 쓴 맛을 의미하는 ‘마라’라고 불렀다. 물이 나빠 백성이 불평할 때,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한 나무 가지를 물에 던져 물이 달게 되었다는 곳이다. 마라의 샘이라고도 한다. 쓴 물이 달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수르 광야의 마라의 샘이다. 마라 샘은 수에즈 운하에서 남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라는 쓴물을 뜻한다. 마라의 쓴 우물이다. 현지어로는 아윤무사다. 아윤은 샘이고 무사는 모세다. 모세의 샘이란 뜻이다. 성지여서 교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두 군데의 샘이 있다. 하나는 물이 있는 샘이고, 하나는 물이 없는 샘이다. 주변에는 종려나무가 많다. 죽은 종려나무 기둥은 약해서 쓸모가 없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물건을 판다. 그들의 집과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있다. 두 군데의 샘을 보고 서둘러 샴엘쉐이크로 출발했다.
* 시나이 샴엘쉐이크 가는 길 보호구역
시나이 반도 도로는 위험한 구간이 있다. 가끔 마약자들이 탈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태운 차량을 인질로 잡거나, 유조차를 탈취하여 병에 옮겨 담아 파는 수법으로 괴롭히는 일이 있어서다. 차량이라고 다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기름 실은 유조차와 외국 관광객 버스만 보호해준다. 그런 위험 구간 중 여기가 첫번째 구간이다. 유조차, 외국인 관광객 차량을 모아서 경찰차가 앞장서서 안전하게 이동 시켜주는 구간이다. 지금 시각이 낮 12시 50분이다. 1시 20분에 출발한다. 30분을 버스 안에서 대기한다. 유조트럭이 많이 모여든다. 이런 구간이 여기서부터 앞으로도 두 군데가 더 있다. 마약자가 노리는 이런 구간에서는 반드시 경찰이 인도하여 인계인수를 해준다. 다른 차들은 그냥 통과해서 간다. 군경이 모여진 차량행렬을 이끌어 이동시켜 준다. 경찰 선발대가 선두로 하여 주행이 시작되었다. 우리 관광차도 인도해 준다. 앞에는 총을 든 경찰들이 탄 차량이 가고 그 바로 뒤에 우리 버스가 간다. 샴엘쉐이크에는 오후 7시경 도착예정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일이다.
* 시나이 반도 농작지대
사막 가운데 농사를 짓는 농토가 넓은 곳이 있다. 시나이 반도 역시 이집트 영토여서 온통 건조한 사막인데 나무를 심은 농작지대가 있다. 망고나무거나 올리브 나무다. 모래 바람을 보호하는 울타리도 쳐 놓았다. 칼로 자른 듯이 사막과 구분되는 푸른 지대가 풍요롭다.
* 시나이 반도 홍해 비경
시나이 반도를 달리는데 한쪽은 사막이 반대쪽은 홍해 바다가 나타난다. 눈부신 햇살이 홍해 바다에 내리고 있다. 해변에는 야자수가 늘어 서 있기도 하고 마을이 있기도 하다. 그러다가 홍해 바닥 또 끝나고 사막 광야가 이어진다. 모두 눈부신 풍경이다.
* 이집트 함만 파라온
함만 파라은 파라오의 온천이다. 아랍어로 파라오의 목욕탕을 의미 한다.
유황성분을 함유한 27°C의 온천수가 계곡 을 따라 흐르는 노천
유황온천이다. 이곳의 온천수는 류머티즘, 관절염, 피부병 등의 치료에 좋은 것으로 밝혀졌다. 고고학자들이 동굴 내부를 조사한 결과 기원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회암 석실에서 질그룻과 헬레니즘 양식의 벽화가 발굴되었다.
온천은 바위산과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함만 파라온이 있는 석회암산이 비경이다. 그런데 군사 보호로 출입금지 지역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지나며 겉모습만 보았다. 교통 표지판 중에 추월 금지 표지판이 지나간다. 적색 사람과 흑색 사람, 두 사람이 있는데 피와 죽음을 상징하는 무서운 표지판이다. 교통사고의 위험성을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함만 파라온이 있는 사막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잘 닦아 놓은 홍해 해변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 시나이 반도 성경 속의 광야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광야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였던 그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사막지대다. 예수 체험, 광야 체험 사막이다. 여름에는 50도까지 오르는 사막 광야다. 또 밤에는 아주 싸늘하다. 사막이라서 밤낮 온도 차이가 큰 곳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안내해주었다는 성지다. 이 맑은 하늘에 쨍쩽 햇볕이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엔 구름, 밤에 추우니까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다고 하는 이곳이 바로 그 성경 속 광야다. 그 길을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뭉클하다. 이곳은 검은 사막산. 컬러 캐년의 붉은 사막산 등이 있는데 물 뿌리면 천연색이 된다. 하늘에서 보았던 그 바위산들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비가 내린 흔적도 보이고 그 아래 작은 풀들이 있다. 굴러다니는 풀로 덤블링트리인데 유목상징의 풀이다. 시나이 반도 북부 평지에 많다. 중부는 석회암산지다. 남부는 철이 섞인 검붉은 사막지역이다. 중북부가 평지고, 중남부는 날카로운 산지다. 모세의 산인 시나이산은 붉은 화강암 산이다. 검으스레 해도 파 보면 하얀 바위산이다. 진종일 이어지는 사막 광야에서 버스에서나마 성경 속 광야를 체험하며 종교 역사를 배운다.
* 시나이 반도 사막 베두인 마을
시나이 반도를 버스로 달리며 본 것은 거의 사막이다. 가끔 풀이나 나무 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베두인 마을도 어쩌다 보인다. 지금 보이는 베두인 마을은 큰 편이다. 베두인이 모여 사는 곳은 물이 나는 지대다. 그들은 허브재배, 양, 염소 등을 기르며 산다. 시나이 반도에 10만 여명 산다. 12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사막에서 천막에서 살기도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운 관습으로 살아간다.
* 이집트 시나이 반도 휴게소
사막을 달려오다가 휴게소에 잠시 내려 휴식을 취했다. 이곳은 마을 가까이 위치해 있고 광장도 넓다. 그러나 사람이 많진 않아 한가롭다. 나의 여행관은 명소만 보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는 사고다. 차로 움직이면서 지나가는 풍경도, 멈추어 서서 보는 풍경도 모두 여행의 범주다.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보는 것은 이런 경우에 더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석양이 곱다. 사막산도 가까이서 보고, 길도 마을도 자세히 보며 보람된 시간이다.
* 이집트 과일 석류
진종일 달려도 사막 광야다. 그래서 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키이로에서 출발할 때 석류를 사 가지고 왔다. 석류는 이집트 특산물이기도 하다. 칼로 반씩 잘라서 나누어 먹었다. 단단한 껍질이 갈라지면서 붉은 보석을 드러낸다. 나의 시 중에 ‘석류, 그 붉은 진실’이란 시가 있다. 그때도 이런 석류의 고운 속 알갱이를 보고 쓴 것이다. 알알이 박힌 진한 붉은 색 석류를 한알씩 빼어 먹으며 간다. 달고 맛있다. 사막은 여전히 차창을 스치고 석류는 즐겁고 아름다운 시간을 선사한다.
* 시나이 반도 두 번째 보호구역
이런 보호 인도구역은 두 번째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 사막에서 보호 차량은 자국민일 경우에는 기름을 실은 차량이고, 외국인일 경우에는 무조건 해당된다. 경찰차가 동행하여 무사히 위험지역을 인도해 주는 구역이다. 그 위험 지역을 벗어나면 경찰차는 다시 돌아간다. 이곳도 아까 첫 번째 구역에서처럼 기름을 실은 대형차량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 버스도 해당 차량이어서 정차해 있다. 감사한 일이라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지 않다. 이것도 이색체험으로 하나의 큰 여정이다.
* 이집트 시나이 반도 유전지대
시나이 반도 광야를 달리며 여러 가지를 본다. 그중에서 지금은 이집트 시나이 반도 사막에 있는 유전지대를 지나고 있다. 사막 가운데 덩그러니 유전 시설물들이 있다. 쓸모없는 모래땅에서 석유가 나오는 것이다. 삭막하다고 느꼈던 영토가 부러운 영토가 되는 순간이다. 지나간 후에도 그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조국 모래밭 어디쯤 저런 영토 한자락 있었으면, 막연한 꿈을 꾸어본다.
* 이집트 시나이 반도 사막 일몰
이집트 시나이 반도 사막에 해가 진다. 사막의 일몰은 진행이 빠르고, 또 해가 지고 나면 바로 어두워진다. 주변에 가리는 것이 없어서다. 은은한 빛이 모래 광야에 내리면 금빛 풍경이 된다. 낭만의 여정이다. 여행에서 얻는 큰 선물이다.
* 시나이 반도 세 번째 보호구역
날이 저물어 갈 무렵 세 번째 검문소에 다다랐다. 입구에 통과하려는 차량들이 많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통과하는 차량과 정지하는 차량이 구분된다. 위험으로부터 안전 보호를 위해 인도하는 구역이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을 태운 우리 버스는 보호 차량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가지 못 한다. 이곳에서도 오랜 시간 머물며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차에서 내려서 바깥에 서성거리며 주변을 보았다. 사막의 어둠과 불빛이 곱다. 한참 후 승차하여 버스가 출발했다.
오늘 동선 거리는 560Km다. 서울에서 부산보다 긴 거리다. 시나이 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길게 내려가는 거리다. 샴엘쉐이크에는 저녁 7시경 도착예정이다. 시나이 반도 끝점이 가까워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오늘 밤 크루즈배를 탄다. 그때부터는 크루즈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밤 석식 후 크루즈배 12층 뒤편 스타라이트 디스코텍에서 밤 8시부터 친교모임을 갖는다. 배 후미 11층은 부페식당이다. 5~6층은 정찬식당이다. 앞쪽 6~7층은 대극장이다. 배의 균형 때문에 전면은 극장, 후면은 식당으로 설계한 것이다. 정찬식은 저녁 7시 30분부터 한다. 오늘은 승선 시간이 늦어져서 7시 30분부터 부페식당에서 자유로이 저녁식사를 한다. 우리 부부 선실은 1003호다. 남사장은 1002호다. 크루즈 여행이 기대되는 행복한 밤이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항구 크루즈배 승선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줄기차게 달려와서 샴엘쉐이크, 항구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이다. 샴엘쉐이크는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 해변 휴양 도시다. 시나이 반도 삼각형 모양에서 맨끝 꼭지졈 도시다. 배는 벌써 이곳 항구에서 정박하며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부터 배의 불빛이 아름답게 조명된다. 샴엘쉐이크 항구 터미널에서 승선수속을 마치고 크루즈배에 승선했다.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사파가 항구 기항, 룩소 왕가의 계곡, 룩소 신전
* 이집트 사파가 항구 일출 비경
크루즈배에서 첫 아침을 맞는 날이다. 밤새 샴엘쉐이크 항구에서 항해하여 달려온 배가 홍해 바다 건너편 사파가 항구에 도착했다. 오전 7시 하선한다. 일찍 일어나서 크루즈배 뒤편 11층 뷔페식당에서 조식을 마치고 배의 갑판에 올라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사파가 항구와 배의 불빛이 바다에 비추며 장관이다. 다시 방에 들어와 하선 준비를 했다. 준비를 다 마친 후 커튼을 제키고 발코니에 나가보니 홍해 바다에서 해가 떠오른다. 태양은 사파가 항구를 향하여 힘차게 햇살을 뿌리며 바다를 가르고 올라온다. 기막힌 일출 비경이다.
* 이집트 사파가 항구 하선
크루즈 여행에서 첫 번째 기항지 관광을 하는 날이다. 사파가 항구의 아침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홍해 바다와 사막산, 그리고 사파가의 건물들이 비경을 그려낸다. 청명한 아프리카의 아침이다. 크루즈배에서 하선하여 룩소로 간다.
* 룩소 가는 길
오늘은 이집트 동과 서 길이로 왕복 640Km 이동한다. 사파가 항구에서 룩소는 편도 320Km다. 룩소는 이집트 지도 Y형에서 아래 일직선 부분의 절반에 위치하는 도시다. 룩소는 그리스어로 테베다. 성경에서 테베로 나오며 종교 신화의 중심지다. 3600여년 룩소를 전시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이집트에서 안전하고 풍요롭고 고립된 문명이 서린 고대 나일강변 지역이다.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에서 3대 문명은 아시아에 있고 1개만 아프리카에 있다. 룩소는 이집트의 경주 같은 도시다. 나는 룩소에 두 번째 간다. 그런데 전에 갈 때는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왕복하여 지금의 길과는 다르다. 온통 사막 지역을 달린다. 버스 양편으로 사막산이거나 사막 광야다. 더러 마른 풀포기가 보인다. 저렇게 죽은 것 같은 풀들이 비만 오면 반짝 살아난다. 씨들이 활짝 올라온다. 사막의 기막힌 생존 모습이다.
* 이집트 룩소 휴게소
이집트 사막을 달려오다가 룩소 휴게소에서 쉬었다. 휴게소 주변에는 베두인들 당나귀, 낙타, 염소 등 가축을 끌고 와서 모델로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어떤 베두인은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들고 나왔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여인들은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리고 있다. 눈과 발꿈치만 보인다. 베두인의 아이들도 그런 일을 한다. 학교에 가야할 아이가 저렇게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애처롭지만 그건 우리의 시각이다. 저들은 참으로 행복한 표정이다. 기념풍 상가도 있다. 규모가 큰 휴게소다. 관광버스와 동물과 사람이 하나로 뭉쳐 있는 진풍경이다. 이제 룩소까지는 145Km 남았다. 1시간 40분 소요된다. 작은 마을을 지나서 룩소로 갈 것이다.
* 이집트 룩소 사막 철도
이집트 사막은 많이 보아온 풍경이다. 그런데 룩소에 가까이 다다르자 사막에 철도가 있다. 카이로와 연결된 철도다. 룩소는 역사 유적 명소이어서 기차, 비행기, 크루즈 등의 경로로 들어온다. 나는 전에 올 때는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룩소까지 다녀갔다. 지금은 크루즈 여행으로 왔기 때문에 또 다른 경로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풍경을 많이 본다.
* 이집트 룩소 시가지
룩소는 이집트 남부의 오래된 도시다. 이곳에는 신전과 왕의 무덤 유적지가 있어서 관광객이 많이 온다. 한때는 발전이 눈부셨던 도시인데 지금은 아담한 도시 풍경이다. 도심에는 높은 건물도 있고, 외곽은 농토도 있다. 다리 곁으로 큰 관이 놓여 있다. 가스관인 것 같다.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수로의 다리 위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이런 모습은 이집트에서도 시골에서 더 많이 보인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더워서 열기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입는다. 이런 것들도 이집트 여행의 매력 중 한가지다. 우리가 접하지 못하는 이색 풍경이다.
* 룩소 나일갈변 수로
룩소 시가지를 벗어나자 잘 정비된 대수로가 있다. 총 길이가 130Km로 아주 긴 수로다. 수로 연결 지역은 에스나를 시작으로 룩소를 거쳐 케나까지다. 주변은 농토다. 이런 물의 보는 카이로까지 9개 있다. 160년 전 모하메드 알리 때 건설했다. 가도, 가도 수로는 이어지면 진풍경이다. 물가의 농작물이 풍요롭고, 잘 가꾸어 놓은 꽃길이 비경이다. 물이 잔잔한 곳에서는 물속에 비친 수로변 풍경이 또한 아름답다. 쪽배를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모두 정겨운 풍경이다. 케나 쪽에서 룩소 쪽으로 수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 룩소 나일갈변 농토
이집트 나일강변 농토의 검은 흙은 기름지다.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예전에 나일강 물이 범람하면 잠겼다. 그때 개인 땅을 구분 짓기 위해서 기하학이 발전했다. 물이 빠지면 개인 문전옥답을 측량해서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로는 기하학 발전이 세계 최고였다. 옥수수 비슷한 농작물이 밭에 많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탕수수다. 사탕수수는 수술이 없고 옥수수는 수술이 있는 것으로 서로 구분한다. 카이로 남쪽 60Km부터 재배한다. 농부가 당나귀 등에 사탕수수 벤 것을 싣고 타고 간다. 이곳에서 나쁜 말은 ‘당나귀 같은 새끼야’다. 낙타나 말은 없고 당나귀가 많아서 그렇다. 이집트에서 당나귀는 노동의 힘이다 아프리카는 수명이 높다. 음식이 좋아서 그렇다. 토마토, 마늘, 양파 등을 많이 먹는다. 대추야자, 사탕수수도 많이 먹는다. 룩소의 꽃길이 곱다. 버스가 지나는 길목에서 룩소 현지 가이드 2명이 탄다. 이제 수로를 건너서 룩소 서쪽으로 이동한다.
* 이집트 룩소 왕가의 계곡
이집트 룩소는 우리나라 경주와 같은 곳이다. 왕가의 계곡 은 이집트 룩소 서부의 좁고 긴 골짜기다. 투트모세 1세부터 람세스 11세에 이르기까지 제18, 19, 20왕조 BC1539년~1075년까지 거의 모든 파라오가 묻혀 있는 곳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동쪽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나일강의 서쪽은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룩소에서 나일강 동안 신전들이 있는 곳과 반대편 나일강 서안에는 왕들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있다. 이들의 무덤이 무려 수십 개가 몰려있다. 아직도 화려한 채색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람세스 2세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무덤이다.
무덤은 서쪽 사막 초입에 있다. 이곳에 내리면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전에 왔을 때는 내부 촬영만 금지였는데 이번은 외부까지도 금지란다. 왕가의 계곡에 진입하자 사막산에 크고 작은 구멍의 무덤들이 있다. 오늘 우리는 두 군데의 무덤을 관람한다. 입구에서 미니 열차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긴 계단을 따라 110m 내려간다. 파라오 동상, 벽화, 무덤실 등이 있다. 두 번째 무덤은 약간 짧게 들어간다. 천정에 모양의 여신 그림이 있다. 생산을 상징한다. 매우 덥다. 바람 불면 서늘하다. 황색 모래와 바위 언덕만 있는 이곳에 귀족들 무덤과 왕들 무덤이 땅속에 매장되어 있다. 투탕카멘, 람세스 3세, 람세스 6세 등을 비롯한 60여 개의 파라오 무덤들이 있다. 도굴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를 짓지 않고 골짜기에 공동묘역을 만든 만큼 도굴 방지를 위해 수직 갱도를 만들고 관을 숨기는 등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지만 도굴꾼들의 신의 손을 막을 수 없었다. 숨겼지만 도굴당한 왕들의 무덤이다. 도굴 당하지 않은 유일한 무덤이 바로 투탄카멘 무덤이다. 투탄카멘 무덤이 온전했던 이유는 그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소년왕으로 무덤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이 카이로 이집트박물관 2층을 그의 다 차지하고 있을 정도니 강력한 군주였던 세티 1세나 람세스 2세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고 보존되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부장품이 나왔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들의 무덤들을 도굴꾼의 눈을 피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만들기 위해 건설한 곳이다. 여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 귀족들의 무덤군이 있다. 외부세계로 무덤들의 비밀을 일한 장인들은 이곳에서 죽어 이곳에서 건설한 장인들 무덤 계곡군도 있다. 지금도 발굴 중이고, 가이드 말에 의하면 외객이 들어갈 수 있는 무덤은 안내소에서 그때마다 정해 준단다. 나도 전에 왔을 때와 오늘 관람한 무덤이 달랐다. 사람은 가고 흔적도 없는데 덩그런 그들의 사후 지하 궁전이 소슬하게 주인은 지키고 있다. 결국 후손들에 의해 파손되고 빈 무덤들이 세계인의 여행객을 부르는 이집트 룩소의 아주 큰 명소다.
* 합셉슈트 장제전
합셉슈트 장제전은 왕가의 계곡에서 5분 거리다. 유일하게 남은 장제전이다. 왕가의 계곡에서 버스로 와서 장제전 입구에서 내렸다. 기념품 가게를 통해 가는데 무척이나 큰 장터다. 그 만큼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증명이다. 장제전까지는 미니 열차를 타고 간다. 저 멀리 룩소 시가지가 보인다. 사막과 경작지의 경계선이 확연하다. 왕 무덤, 왕비의 무덤, 장인들 무덤이 서로 떨어져 있어 양편으로 무덤군이 보인다. 피라미드 모양의 산봉우리도 보인다. 미니 열차는 우리를 장제전 밑에서 내려준다. 긴 계단을 걸어 올라서 들어갔다. 양편으로 큰 석상들이 서 있다. 많이 망가진 것도 있다. 문에 들어서니 또 한 채의 긴 건물이 나온다. 그러나 안채로 진입은 줄로 막아 금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두 번째 왔다. 예전에 왔을 때는 안까지 허용하여 벽면에 새겨진 그 당시의 장제전 역사를 본 기억이 났다.
합셉슈트는 신왕국 18왕조 때 여왕이다. 합셉슈트는 스스로 파라오가 된 권력욕이 강한 여자였다. 투트모세1세와 정비 사이의 유일한 딸인데 여자이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이 없자 후궁 소생의 이복동생 투트모세2세와 결혼 했다. 합셉슈트는 왕비에 올랐지만 딸을 낳았고, 병약한 남편 투트모세2세는 후궁에게서 난 아들 투트모세3세를 남기고 병사하였다. 남편 사후 첩의 아들인 어린 투투모스3세가 왕위에 오르자 왕위계승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합셉슈트가 여자의 몸으로 섭정하며
투트모세3세와 공동 파라오가 되어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간주되는 이 신전은 멀리서 언뜻 보면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빌딩이 연상될 정도로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합셉슈트는 BC 1503년~1482년 여왕 재위 기간 중 8년에 걸쳐 건축한 신전이다. 이집트에서 가장 크고 정교한 사원 중의 하나로 그녀가 죽으면 아몬신과 함께 묻힐 장례사원이다. 왕들의 계곡 뒤편에 위치해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1896년에 발굴한 유적지다. 여러 차례에 걸쳐 훼손당했다. 그래도 잘 보존된 이집트의 유적지다. 어마어마한 건축물은 여전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와서 다시 미니열차를 타고 나왔다. 잠시 현세를 떠나 고대 이집트의 한 영토에 머문 소중한 여정이다.
* 룩소 사막과 초지의 경계지역
이집트는 사막 풍경이 많은데 나일강 주변은 푸르다. 룩소 역시 나일강변 도시라서 사막과 초지가 동시에 보인다. 칼로 뚝 자른 듯이 사막지역과 초지지역의 경계선이 분명하다. 어찌 이런 영토가 있을까싶다. 비가 오지 않아서 물기가 없는 곳은 그야말로 잔인할 만큼 건조하여 풀 한포기 나지 못한다. 왕가의 계곡이 있는 사막산 아래 생명이 흐르는 초지가 참으로 아름답다.
* 멤논의 거상
나일강 서쪽 왕가의 계곡과 합셉슈트 장제전을 보고 나올 때 들녘에 거대한 석상이 있다. 19.5m 높이의 멤논의 거상이다. 어마어마한 두 파라오의 석상이다. 풍상에 씻겨간 미남의 얼굴, 멤논의 거상은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의자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서 있는 한 쌍의 거인이다. 멤논은 에티오피아왕으로 트로이전쟁의 영웅이다. 기원전 27년 지진으로 구멍이 생긴 거상은 아침 햇살이 뜰 때면 이상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때 이곳을 지나던 그리스 여행객이 아킬레스에게 목숨을 잃은 멤논을 떠올렸다. 그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전설이 됐다. 전성기의 룩소는 기원전 1500년 무렵에도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룩소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벌판 가운데에도 이런 유적이 있다. 두 개의 큰 석상 앞에는 이곳을 찾아온 관광버스와 사람들이 많다. 이집트 상인들도 많다. 주변의 농토에서는 농부와 새들이 보인다. 고대와 현대를 동시에 보는 진풍경이다.
* 룩소 나일강 유람
나일강은 참으로 넓고 길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맞은편으로 간다. 지금 우리는 서편에서 동편으로 건너간다. 몇 전 전 왓을 때는 돛단배를 탔었다. 오늘은 그런 배는 아니고 보통의 아담한 유람선이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서 간다. 젊은 이집트 남자가 배를 운행한다. 파란 나일강물은 장엄하게 넘실거리고, 룩소 시가지와 나일강변의 파란 농토가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집트 나일강을 배를 타는 건너는 소중한 체험이다.
* 이집트 룩소 호텔 식당
나일강 서편에서 강을 건너 동편으로 와서 점심 식사를 했다. 호텔 식당에서 부페로 먹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식사 후 자세히 보니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유숙했던 호텔이다. 우리 부부가 머물렀던 객실이 보인다. 아득한 높는 곳 발코니에 그때의 화분도 무성하게 그대로 있다. 이 호텔의 특징은 발코니에 식물을 길러 늘어뜨리고 있는 것인데, 그 모습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는 지금 다시 그 아름다운 호텔에 온 것이다. 기막힌 재회다. 룩소의 고운 몫으로 가슴 깊이 저장될 것이다.
* 이집트 룩소 신전
입구에 람세스 2세 석상이 있다. 나일강 동쪽 시내 중심 지역에 있는 거대한 신전이다. 현재는 룩소Luxor라 불리는 고대 도시 테베에 있는 고대 이집트의 신전 단지로, 아문 신에게 바치는 중왕국 시대 구조물이 있던 자리 위에 세워졌다. 아메노피스 3세 때부터 람세스 2세 때까지 지어진 카르나크의 부속 신전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신전의 초기 부분들은 기원전 1408년부터 신왕국 제18왕조 때까지 지어진 것이다. 신전으로 통하는 길은 스핑크스의 길인데 숫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다. 스핑크스의 길은 룩소르 신전에서 시작하여 북부의 카르낙 신전까지 3Km 뻗어 있다. 높이가 24m에 달하는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00년, 제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세운 것으로, 신전 입구에 서 있다. 원래는 두 개였으나, 하나는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 그 입구는 역시 람세스 2세가 건축한 열주식 안뜰로 이어진다. 안뜰은 아멘호텝 3세가 지은 100m에 달하는, 파피루스로 기둥머리를 올린 14개의 열주가 늘어서 있는 주랑으로 이어진다. 룩소 신전의 파피루스 기둥들이 장관이다. 신전 내부는 32개의 기둥이 서 있는 정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내부 성소는 이집트의 조각과 로마 치장 벽토로 장식한 전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로마인들 역시 이곳을 제의를 올리는 데 사용했다. 이 신전은 아문 신에게 바치는 성소인 동시에 아멘호텝 3세가 태어난 분만실이기도 하여, 파라오의 탄생을 묘사한 부조가 걸려 있다.
룩소에 오는 것은 왕가의 계곡과 신전을 보기 위해서다. 나는 이곳에 두 번째로 왔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새겨진다. 그 옛날 나일강의 범람을 빌었던 신전이다. 바로 나일강변에 있다. 물이 넘쳐야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생존의 지혜를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룩소 신전에서 나와 나일강변을 따라 조금 가면 카르낙 신전이 있다. 이제 그곳으로 간다.
* 룩소 카르낙 신전
룩소 동편 카르낙Karnak 신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입구의 넓은 마당이다. 높고 큰 벽이 신전을 가리고 통로만 뚫려 있다. 신전을 바라보며 한참을 걸어서 문 앞에 이르렀다. 기원전 1567년부터 최후의 왕조인 프톨레미 왕조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계속 증개축 되었다. 신전 규모는 남북으로 2km, 동서로 500~600m 정도 크기로 그 규모가 아주 크다. 겨우 6%만 드러낸 것이다. 94%는 아직도 발굴 중이라니 대단히 큰 신전이다.
카르나크 신전 제1탑문 정문을 들어서니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스핑크스들이 도열한 스핑크스 대로가 나온다. 원래는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룩소르 신전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룩소 신전 입구에서 보았던 그 스핑크스 대열과 동일하다. 거기까지 이어졌다니 놀랍다. 나무 몇 그루가 스핑크스도 아름다운데 주변에 나무 몇 그루가 파랗게 자라 더욱 멋진 풍경이다. 제1탑문을 지나니 대광장이 나온다. 대광장 북쪽에는 아몬 신, 무트 신, 콘스 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 두었던 신전이 있고, 남쪽에는 람세스 3세의 신전이 있다. 대광장을 지나면 제2탑문 앞에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람세스 2세의 석상이 있다.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겼다는 람세스 2세는 우리의 광개토왕을 닮은 정복왕이다. 카르나크 신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제2 탑문과 제3탑문 사이의 열주식 홀이다. 그 넓이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24m 두 종류의 거대한 원주 14개가 높이 솟구쳐 창문을 통해 빛과 공기가 들어온다. 그 옛날 뛰어난 건축술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새긴 부조도 있다. 채색한 흔적이 기둥 윗부분에 약간 남아 있다. 대열주실을 지나면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 작은 광장이 있고, 투트모스 1세와 합셉수트 오벨리스크Obelisk가 높이 서 있다. 오벨리스크에는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와 파라오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맨 끝에 있는 신전은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이다. 제5탑문과 제6탑문을 지나면 태양신 아몬의 지성소에 도달한다. 2중 구조인 지성소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방되어 일출과 일몰 때 햇살이 아몬 신의 지성소를 비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성소 남쪽에는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하던 성스러운 호수가 있다. 성스러운 호수 입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이 보인다. 그리고 중앙에는 람세스 2세 때 터키 제국과 맺어진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 기록되어 있다. 퇴색되어 희미하지만 성화도 그려져 있다. 초대 교인들은 사막 너머 이곳에 숨어서 예배드렸다.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신전은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높은 기둥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두려울 만큼 우람한 신전이다. 몇 년 전에도 와서 보았다. 그때는 딱정벌레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맴돌았다. 오늘은 크루즈배 승선 시간 관계로 거기까지는 못 했다. 룩소 신전과 함께 이집트의 신전 건축물을 보며 그 당시의 역사를 배우는 소중한 여정이었다.
* 이집트 룩소의 일몰
룩소 관광을 마치고 다시 사파가 항구로 돌아간다. 룩소 들녘은 풍요롭다. 나일강의 물로 농작물도 잘 자라고 있어 온통 푸른 물결이다. 도로 곁에 수로가 있어 물이 많이 흐른다. 수로변의 풍경도 아름답다. 그런데 룩소 들녘의 일몰이 비경을 그려낸다. 이집트에서 풍요로운 들녘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사막이 거의 차지하는 나라여서 그렇다. 초록 식물 가득한 농토를 보는 것만도 기쁜 일인데 그 위로 눈부시게 내리는 석양이 참으로 아름답다.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덴데라 하토르 신전, 케나
* 이집트 사파가항 홍해 일출 비경
아침 일찍 일어나 커튼을 제키고 발코니로 나가 보니 새벽이 열린다. 홍해 바다에서 큰 용트림으로 해가 나오려 한다.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해산의 장엄함으로 하루를 연다. 하늘에 또 하나의 무늬가 있다. 초승달이 하얗게 떠 있다. 해와 달이 동시에 같은 하늘에서 비경을 선사한다.
* 이집트 룩소 사파가 항구 하선
지난 밤 배는 이곳 이집트 사파가 항구에서 함께 잤다. 오늘 룩소에서 하루 더 기항지 관광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룩소 근처에 있는 덴데라 하토르 신전에 간다. 아침 9시에 사파가 항구에 하선했다. 크루즈배가 아주 큰 품으로 홍해 바다에 정박해 있다. 바다와 배, 사파가 항구 풍경이 아름답다. 이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사파가 항구에서 룩소로 간다.
* 이집트 우람한 사막산
이집트 사막 광야는 장엄하다. 사막산이 나오다가, 사막평원이 나오다가 비겨을 선사한다. 이제 그 풍경에 익숙해져서, 봐도 그저 사막이려니 하고 있는데 우람한 사막산이 아주 가까이 앉아서 눈을 놀라게 한다. 아픈 사막이다가, 고운 사막이다가 지금은 놀라운 사막이다. 커다란 암석덩이의 사막산이 바로 눈앞에 있다.
* 룩소 휴게소 낙타
베두인들이 낙타를 몰고 나와 돈벌이를 한다. 가족이 모두 나오기도 한다. 손님에게 낙타와 함께 사진을 찍도록 하고는 돈을 받는 것이다. 낙타는 순한 동물이어서 사람 곁에 얌전히 있다. 어제도 룩소 왕가의 계곡에 갈 때 이곳 휴게소에서 쉬었다. 어제보다는 적게 모여 있다. 저들은 저것이 생업인 것을. 아이도, 어른도 구분 없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애처롭지만 저들은 행복한 일상이다. 휴게소를 떠나 또 사막을 달린다. 사막과 푸른 식물의 경계선이 확연한 지역을 지난다. 진풍경이다.
* 이집트 케나 시장 풍경
케나는 어제도 이곳 룩소에 갈 때도 지났던 도시다. 오늘도 케나를 거쳐 덴데라 하토르 신전에 간다. 작은 케나 시내를 통과한다. 나일강변 도시라서 시내에서도 물줄기가 길게 흐른다. 아담하고 고풍스런 케나 기차역도 지난다. 택시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시장을 지난다. 시장 좌판에는 나일강변에서 재배한 과일들이 풍성하다. 상인들과 가게에 온 사람들도 많다. 이집트는 여자도, 남자도 대부분 긴 통치마를 입는다. 더운 나라여서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을 가리기 위함이다. 그리고는 목이나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다. 특히 이슬람교인은 남자는 머리에 터반을 두르고, 여자는 천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저하게 몸을 가린다. 이런 모습은 도시보다 시골에서 더 많다. 어쩌다 우리와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어느 나라든 시장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소박한 이집트 케나의 시장에서 정겨운 풍경으로 본다.
* 이집트 케나 나일강변 농토
나일강은 이집트의 생명줄이다. 강이 범람하며 주변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까만 흙에 농사를 짓는다. 케나 도시 외곽에는 그런 농토가 많다. 이곳은 나일강변이다. 넓은 농토에 농작물 파랗게 넘실거린다. 이 모습 앞에서는 아무도 사막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탁 트인 농토가 시원하고 싱그럽다. 케나 시내 도로의 나무도 울창하고 꽃도 곱게 피었다. 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며, 나일강에 기대어 사는 이집트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 이집트 덴데라 하토르 신전
덴데라Dendera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으로 600㎞, 룩소에서 북으로 약 65km 거리의 나일강 서안에 있는 마을이다. 덴데라에서 차로 약 1시간 정도 남으로 나일강을 따라가면 룩소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하토르 신전에 도착했다. 한낮의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고 신전 입구의 야자수와 파란 식물들이 고운 풍경이다. 덴데라는 사랑과 기쁨의 여신 하토르 숭배 신앙의 중심지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Hathor 대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의 후반에 착공하여 기원전 1세기 로마시대 초에 완공되었다. 하토르 신전은 이집트 신전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신전이다. 호루스의 집을 뜻하는 하토르는 그리스 신화의 사랑, 아름다움, 풍요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나 로마 신화의 비너스에 해당하는 여신으로 이집트의 비너스라고 불리었다. 여신 하토르는 왕비의 수호신이었고 그의 남편 신 호루스는 파라오의 수호신이었다. 대신전의 입구에 로마황제가 만든 기념문이 서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로마시대 만든 탄생의 집과 콥트교회의 유구가 남아있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으로도 유명한 신전이다. 신전 원기둥들과 내벽들에 각종 의례를 계시해 주는 기록과 장면들이 가득한 것도 큰 특징이다.
하토르는 호루스 왕의 부인이다. 미의 여신이다. 가장 아름다운 미의 여신 신전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오는 것을 기념해서 지은 신전이다. 벽화나 돋새김의 채색 상태가 매우 좋고 아름답다. 신전 높이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기둥이 높다. 태양 문양이 많다. 호루스와 하토르의 만남 장면도 있다. 하토르는 사랑과 기쁨의 여신일 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의 여신이기도 했다. 암소의 뿔 사이에 태양 원반이 있는 왕관을 쓴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대신전의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첫째 기둥 홀에는 수소의 뿔을 가진 하토르 얼굴로 기둥머리를 장식한 24개의 하토르 기둥이 서 있다. 이어서 6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 둘째 기둥 홀이 있고 그 안에 성소가 있다. 성소 주위에 예배실, 태양신의 옥좌, 불의 방, 물의 방, 공물의 방 등 11개의 작은 방들이 있다. 예배실에는 하토르 여신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신전의 지하에는 파라오와 신의 탄생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다. 대신전의 천정에는 인체를 묘사한 그림이나 여성의 자궁 안에 태아가 있는 그림 등의 벽화들이 많다.
신전의 옥상에 있는 오시리스 예배당의 전실의 천장에 황도 십이궁을 상징하는 천체도가 있다. 세계 최초의 천궁도다. 기원전 2세기 클레오파트라 7세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덴데라의 천궁도는 기본적으로 일년 360일을 10일 간격으로 36개의 별자리를 원형으로 배치했다. 이 천궁도는 1799년 나폴레옹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방 2.5m에 두께 1m 크기의 2개의 화강암 석판으로 된 거대한 천궁도는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석고로 만든 복제품이다. 대신전의 남쪽 바깥벽에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호루스 신과 하토르 여신에게 축복을 받고 있는 모습의 거대한 새김이 있다. 이것은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를 받기 직전에 새긴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신전이지만 대단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신전이다. 상형문자로 적어 놓은 문양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고고학 기치가 높다. 덴데라 하토르 신전은 육로여행으로는 오지 않는 곳이다. 우리는 크루즈 여행으로 왔기 때문에 이집트의 보물 같은 명소를 본 것이다. 아주 보람된 여정이다.
* 이집트 케나 근처의 나일강
덴데라 하토르 신전에서 케나 도시로 갈 때 나일강 다리를 건너서 간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여전히 늠름하다. 강폭도 상당히 넓다. 내가 그 동안 보아온 나일강은 어느 곳에서든 장엄했다. 그리고 나일강변은 언제나 풍성한 들녘이었다. 지금도 나일강변에는 푸른 식물들로 가득하다. 어디 이것이 사막의 나라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10분쯤 더 가니 케나 시가지다. 과일가게에 바나나 등 여러 가지 과일이 진열되어 있는데 먹음직스럽다. 케나의 건물들이 깨끗한 편이다. 사람들도 우리의 버스를 반기며 손을 흔든다.
* 이집트 전통음식 타진 요리
덴데라 하토르 신전 관람을 마치고 가까운 도시 케나에 와서 중식으로 이집트 전통음식 타진 요리를 먹었다. 이 음식은 우리말로 하면 뚝배기 요리다. 소고기와 감자를 뚝배기에 넣고 조림을 한다. 빵, 야채, 쌀밥, 만두, 야채 등도 함께 나와 식단이 풍성하다. 이집트 고유의 향이 약간 입맛에 안 맞지만 그래도 맛이 있다. 소금 간이 약간 센 편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귀한 손님에게 소금을 더 많이 넣어서 음식 대접하는 것이 예의다. 2층 식당에서 보이는 케나 도시의 바깥 풍경도 참 아름답다.
* 이집트 케나 도시 풍경
점심식사를 마치고 케나 도시 풍경을 잠시 보았다. 이곳은 도심 번화가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이 왕래한다. 곁에는 높은 탑의 모스크 사원도 보인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도 있고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청소년들은 치구끼리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가 아시아 이방인으로 보였을 때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버스에 올랐는데도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우리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든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포즈를 취하며 손을 내젓는다. 우리가 이집트를 보려고 왔는데 이집트 사람들이 한국을 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모여든다. 우리가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한바탕 웃었다. 어찌 되었건 말을 통하지 않아도 손짓으로 얼굴 표정으로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시간이다. 같이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고 사진기를 버스 창문에 대니 좋아서 활짝 웃으며 더 큰 몸짓으로 환호한다. 젊은 남학생들이 특히나 우리에게 큰 관심을 보인다. 천진한 이집트 사람들이다. 이집트는 유치원 교육 2년 포함해서 초등교육은 5년이다. 의무 교육이다. 이집트 현지 가이드는 한국에서 고시 합격한 수준이란다. 관광버스 운전자도 배경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 제1 원조국이 이스라엘, 2위국이 이집트라고 한다. 이곳 케나 도시는 이집트에서 그리 큰 도시는 아닌데 상당히 활기차다.
* 이집트 사막 광야 베두인 집
케나 시가지를 떠나 룩소 사파가 항구로 달린다. 사막 광야가 이어진다. 그런데 사막 가운데 베두인 집이 있다. 베두인 집은 금방 알 수 있다. 움막이거나 벽돌로 짓는다. 이 집은 벽돌로 지었다. 집이라고 해야 그저 벽돌로 빙 둘러 사각모양으로 쌓고, 지붕만 막아 놓은 것이 전부다. 도시의 다른 집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도 저들만의 행복이 있어 사막을 떠나지 않고 사막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주변에는 제법 큰 풀덩이들이 많이 앉아있다. 고운 풍경이다.
* 이집트 아늑한 휴게소
사막 광야를 달려오다가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아주 깨끗하다. 가게 주인이집트 남자가 직접 타 주는 커피를 마셨다. 향이 좋고 맛도 아주 좋다. 커피라기보다 이집트인의 정성이다. 이국의 이색 커피 타임이었다. 외국 여행 중 만나는 휴게소는 아담하다. 이곳도 아늑하고 정겨운 휴게소다.
* 이집트 사막의 풀
이집트 건조한 사막에 풀들이 목마르게 앉아 있다. 저런 황막한 땅에 어찌 살까싶다. 그런데 사막의 풀들은 아주 영리하다. 와디, 즉 물이 흐르는 계곡에 주로 살고 있다. 사막에 풀이 있는 곳은 물길이 흐르는 곳이다. 아니면 죽은 것처럼 누렇게 있다가 비라도 한줌 내리면 살아 일어선다. 이런 풀이 있는 사막 풍경은 흔하지 않다. 달려도, 달려도 생명이 보이지 않는 사막 광야에서 풀 한포기라도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 이집트 주름진 사막산
이집트 사막 광야의 주름진 사막산이 눈앞에 있다. 주름도 아름답고, 사막도 아름답다. 이런 풍경이 우리에겐 생소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리라. 저 건조한 영토, 풀 한포기 없는 삭막한 산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아까운 산이다. 비행기로 이집트 상공에서 보았던 그 주름진 사막산을 눈앞에서 본다. 차창에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
* 룩소 사파가 항구 크루즈배 승선
오늘은 이집트 덴데라 하토르 신전을 탐방하고 왔다. 크루즈배가 사파가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오후 5시에 출항이다. 오후 4시까지 승선해야 되어서 서둘러 왔다. 햇살 내리는 바다 위 크루즈 배가 장관이다. 배에서 내린 계단을 따라 승선했다.
* 크루즈배 선실 모니터 항로
크루즈배는 그 항로를 선실의 티브이 자막 모니터에 띄워 준다. 배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이집트 룩소 사파가 항구에 있다. 이제 곧 룩소 사파가 항구를 출항한다. 이스라엘로 간다. 홍해 바다 위를 항해하여 간다. 곧 출항할 것이다.
* 이집트 룩소 사파가 항구 출항
이제 이집트 룩소 기항지 관광을 마치고 배는 룩소 사파가 항구를 출항한다. 오후 5시, 어스름 저녁 시간이다. 항구의 불빛은 하나 둘 살아나고 배는 점점 사파가 항구에서 멀어진다. 내일이면 우리는 이스라엘로 간다. 여기는 홍해 바다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바로 그 바다다. 출애굽 당시에 바다가 갈라지던 성경 속 그 기적의 바다다. 뜻 깊은 여정이다.
* 선장 환영 석식만찬
크루즈 여행에서 배에 승선하면 반드시 선장 환영만찬의 날이 있다. 그날 밤은 정찬 식당에서 우아한 식사를 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옷도 정장 스타일로 입어야 한다. 나는 다른 크루즈 여행 때는 한복을 입었는데 이번 크루즈 여행은 큰 며느리가 어머님, 아버님 여행 가실 때 입으라고 세트로 맞춰서 사준 가디건을 남편 것과 함께 준비해 왔다. 남편은 와이셔츠와 네타이 위에, 나는 브라우스 위에 입었다. 아주 잘 어울린다. 큰 며느리에게 고마웠다. 5층 뒤편 정찬식당에서 연어, 새우, 고기, 야채, 과일 등 풍성한 만찬이다. 코스별로 주문하면 직원이 차례대로 음식을 갖다 준다. 테이블은 배에서 여행 온 사람들의 나라별로 지정석을 정해 준다. 우리 일행도 안내 받아 함께 앉아서 정을 나누며 먹는다. 메뉴도 좋고, 분위기고 좋고, 행복한 석식이다. 식사 후에는 대극장 앞으로 이동하여 선장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선장 환영의 밤 파티
선장 환영 파티는 6~7층 대극장에서 있다. 대극장 입구에서 선장과 함께 사진을 찍고 대극장에 입장한다. 우리 부부는 무대 맨 앞좌석에 앉다. 작은 탁자가 앞에 놓여 있고 샴페인과 와인을 준비해 놓았다. 무대에서는 파티가 흥겨운 열렸다. 음악에 맞춰 객석의 사람들이 쌍쌍이 나와 댄스를 즐긴다. 부부가 나오기도 하고 크루즈배 댄스 강사들이 손님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기도 한다. 맨 앞에 앉은 나에게도 손을 내밀어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자고 한다. 나는 춤을 못 춘다하나, 전혀 문제없다고 나의 손을 잡고 무대로 오른다. 춤을 못 추면 어떠할까. 흥겨운 시간 함께 공유하며 추억의 여정을 엮으면 되는 것이지. 이런 생각으로 무대에 올라 리듬을 타며 스텝을 따라 움직였다. 파티가 끝나고 우리의 크루즈배 MSC 아르모니아호의 주요 직원들이 하나씩 무대로 오르고 마지막으로 선장이 등장한다. 선장의 환영인사가 있고 다음으로는 객석과 무대 사람들 모두 샴페인을 들고 건배를 했다. 배 직원들은 퇴장하고 객석의 관객은 남아서 와인과 샴페인을 즐기며 공연 관람시간을 가졌다. 크루즈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밤이다.
* 선장 환영의 밤 대극장 공연
크루즈배에서 선장이 환영하는 날의 행사는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 밤의 마지막 행사로 대극장에서 공연을 본다. 두 남자가 나와서 곤봉 던지기를 하는데 어찌나 우스운지 많이도 웃었다. 서로 곤봉을 상대편에세 던지며 옷을 벗는 것이다. 웃옷에서부터 팬티만 남기고 다 벗다. 그리고는 다시 또 한 겹씩 벗었던 옷을 입는다. 지금까지 크루즈배에서 보지 못 했던 독특한 쇼다. 공연은 언제나 즐겁지만 오늘 밤은 더욱 즐거운 밤이다.
* 크루즈배 선실
우리 부부의 선실은 1003호다. 발코니가 있는 방이다. 육지의 호텔과 같다. 10평 정도 되는 공간인데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옷장과 서랍장, TV, 금고, 화장실, 화장대, 신발장, 침대, 쇼파, 테이블, 발코니 벤치 들 부족함이 없는 바다 위 호텔이다. 크루즈 여행은 참으로 매력이 있다. 매일 가방을 싸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래서 매일 편안한 밤이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이스라엘
*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 기항
어제 오후 5시에 이집트 룩소 사파가항을 출항한 크루즈배가 오늘 새벽 2시에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에 기항했다. 이곳 바다는 홍해 아카바만이다. 요르단과 국경을 이루는 바다다. 항구는 상당히 크다. 배도 많이 떠 있고 여러 가지 부두 시설이 많다. 아카바만 일출이 비경이다. 이스라엘 영토의 사막산이 길게 있고 산위 아파트와 집들이 보인다. 건조한 영토가 시작된다. 아침 식시후 5층 로비에서 모여 하선 준비를 했다. 오늘은 이스라엘 사해와 마사다 요새를 여행한다.
*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 하선
크루즈배에서 하선하기 위해 수속을 밟았다. 항구 터미널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나간다. 여권으로 개인 1명씩 비행기를 타듯 검색 후에 내보낸다. 이스라엘은 원래 입국이 까다롭다. 크루즈배이기 때문에 이 정도다. 항공으로 입국할 때는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이 나라 법이라면 정중하게 따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린다. 절차를 마치고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아침이 이스라엘 땅에 열리고 있다. 건조한 사막이 보인다. 여기는 이스라엘 영토다. 오늘은 사해와 마사다를 여행한다.
*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 도시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에서 하선하여 사해와 마사다 유적지를 보기 위해 버스로 출발했다. 이스라엘 땅을 보는 것이다.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예감은 다르지 않았다. 길과 건물 모두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다. 잘 정비된 길이 다른 사막 국가에서 본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정갈한 건물들, 그리고 푸른 잔디정원의 야자수와 꽃, 차선이 선명한 깔끔한 도로 등은 이스라엘의 속내를 드러내는 도도하고 당당한 표징이다. 아름답고 정겨운 항구 도시다.
* 이스라엘 에일랏에서 본 요르단 산맥
에일랏은 이스라엘 남부 항구 도시다. 나무란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에일랏에서 요르단 땅이 보인다. 홍해 바다 너머로 요르단 거대한 산맥이 줄지어 앉아 있다. 우측 산맥은 요르단이다. 좌측은 이스라엘 에돔 지역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룬다. 반대로 요르단에서도 이스라엘이 보인다. 신기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 이스라엘 사막 광야
이스라엘 남쪽의 사막 평야 지대를 지나고 있다. 이집트를 제외한 이곳은 모두 석회암이 90%다. 그것은 바다 밑에서 있었다는 증거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홍해가 되었다. 못 빠져나가고 남은 바닷물이 사해다. 사해 쪽으로 가면 붉은 암석산이 많다. 성분 차이 때문이다. 물이 담수 70%, 갈리리 호수 3%다. 아라바 계곡을 지난다. 지진이 대로를 변경시켰다. 지금도 지진이 많다. 원래는 산맥도 하나였다. 이스라엘 북쪽은 레바논, 북동은 시리아, 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가까우며 민족적 특성으로는 오히려 아프리카인 이집트에 가깝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중동 국가들과 심각한 마찰이 있는 적대국이며 오히려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우방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대륙 위치로는 관련 없는 유럽에 소속되었다. 바다와 사막 사이의 나라다. 내년에 대선 선거가 1월에 있다. 임기는 4년이다. 이스라엘은 세금을 17% 낸다. 그런데 에일랏은 면제다. 남단 사막 쪽으로 사람들이 오게 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 멀어서 공항이 있다. 항공요금도 저렴하다. 기차 이용하기가 힘 든다. 주로 버스로 이동한다. 요금은 국가가 조절한다. 기름이 안 나는 나라다. 그런데도 아주 튼튼한 국가다. 이스라엘은 건물이나 상가 등 주변 분위기에서도 단단한 인상을 준다. 이스라엘 인사말은 샬롬이다. 평화란 뜻이다. 만나고 헤어질 때 하는 말은 토다, 고맙습니다란 뜻이다. 토다라바는 대단히 감사하단 뜻이다. 한국과 유사한 것들이 많다. 전쟁, 정서 등이다. 성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 사막 광야를 달리며, 역사적 향수에 젖으며 이스라엘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배웠다.
* 이스라엘 요트바타 휴게소
이스라엘 요트바타 휴게소에서 휴식하며 가게에 들렀다. 손자 장난감으로 중장비 자동차 4개 세트짜리 샀다. 미화로 22달러다. 이스라엘 가게는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다. 출구와 입구가 따로 있다. 철저히 그곳으로만 출입해야한다. 출구로 들어가려면 진입 금지다. 바대도 마찬가지다. 다부진 이스라엘이다. 휴게소 주변에 꽃과 나무가 많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젖소 동상들도 많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여기서 사해와 마사다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한다. 생선도 비늘 있는 것만 먹는다. 오징어, 새우, 게는 안 먹는다. 이스라엘 호텔 뷔페에서 햄과 소시지는 없다. 조식만 그렇다. 대신 우유 등 유제품이 많이 나온다. 저녁은 육류가 나온다. 육류와 유제품을 동시에 먹는 것은 금지다. 조식은 유제품, 저녁은 육류음식이다. 유제품은 식사 후 3시간 지나야 육류음식이 가능하다. 육류식사는 5시간 후에야 다른 식사가 가능하다. 섞이면 안 좋아서 그렇다. 그래서 휴게소 가게에 우유 제품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는 나라다. 안식일이 되면 일체 일을 안 한다. TV도 켜는 것도 금지다. 일상생활을 금지한다. 안식일이 되면 사이렌을 두 번 울린다. 전기도 꺼야 한다. 결혼식은 저녁에 한다. 안식일은 해가 지고부터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도 자동 운행된다. 내가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승차 가능하도록 해 놓는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다. 버튼을 안 누르고도 빵 굽는 기계가 있다.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일체 금지다. 이방인에게 요청해서 소등, 점등하기도 한다. 스위치, 버튼 하나 누르는 것도 사람의 일이라 여기고 안식일은 철저히 휴식한다. 성경에서 1주일 열심히 일하고 그 중 하루를 충분히 쉬도록 율법으로 정해서 그렇다. 좋은 음식 습관이며, 좋은 생활지침이다.
* 이스라엘 사막 와디
사막은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막막한 사막이다가, 마른 풀이 앉아 있다가, 사막산이 이어지기도 한다. 모두 진풍경이다. 사막산 아래로 사막 평원에 대추야자나무 재배지가 보인다. 유대인에게는 종려나무다. 동전에도 새겨진 나무다. 한 그루에서 300Kg~500Kg까지 생산한다. 다산 상징의 나무다. 성경에도 유대인의 나무인 종려나무가 나온다. 사막의 식물들은 영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비가 내려 흐르는 계곡, 즉 와디에 모여 산다. 사막 광야에서도 와디에는 나무와 풀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다. 마른 땅에 솟아오른 생명의 숨결, 그 풍경은 아주 진한 감동을 준다. 소중한 목숨의 존재감을 부여한다.
* 이스라엘 아라바 계곡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에서 사해바다 남단까지 170km, 그 가는 동안 아라바 계곡을 지난다. 사막 계곡이다. 우리는 오늘 아라바 계곡을 따라 에일랏 항구에서 사해까지 간다. 아라바는 거친 들이라는 뜻이다. 사해를 경계로 하면 동편의 에돔 산지와 남쪽편의 네게브 사막으로 나누어진다. 버스는 암석사막산 사이의 계곡으로 달린다. 양편에 사막산 줄기가 이어진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다. 차선도 선명하다. 같은 사막인데 이집트와는 좀 다르게 잘 다듬어져 있다. 요르단 지역과 이스라엘 지역의 두 개의 지층이 헐몬산 쪽으로 융기하면서 왼쪽의 이스라엘 지역은 아래쪽으로, 오른쪽의 요르단 지역은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생긴 산악 지역과 낮은 지역이다. 사해 남서쪽 3km 선상에 길게 늘어선 암염으로 이루어진 아라바 계곡을 지난다. 진행방향 외쪽은 아라바 계곡의 사막산이 우람하고, 오른편은 지구상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가 보인다. 양편으로 전개되는 풍경이 비경이다.
* 이스라엘 사해 바다
사해 바다Dead Sea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국경에 걸쳐 있는 염호다. 면적 1,020, 동서 15km, 남북 80km로 모양은 길쭉하다. 지중해 연안에서 약 100km 내륙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남부에 위치한다. 북으로부터 요르단 강이 흘러드나,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없다. 건조기후이기 때문에 유입수량과 거의 동량의 수분이 증발하여 염분농도가 높다. 염분은 표면에서 해수의 5배인 200% 정도로 생물이 살지 못하여 사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염분농도가 높기 때문에 인체가 가라앉지 않는다. 사해는 지구에서 가장 지표면이 낮은 곳이다. 30% 염분이다. 1컵만 먹어도 사망한다. 기압이 높다. 그래서 삼림욕하듯이 휴양한다. 산소 밀도가 높아서다. 스트레스가 해결되는 휴양지다. 구역을 지어서 갖가지 성분을 추출한다. 옛날엔 소금광산이었다. 성경 속의 소금기둥들이 바로 이곳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성경 장소로 추측한다. 최대수심은 399m, 평균수심은 146m이다. 대함몰지구대에 있기 때문에, 호면은 해면보다 395m 낮아 지표상의 최저점을 기록한다. 높은 염분 때문에 사람 몸이 뜨기 쉽다. 해수에는 유용광물이 함유되어 있다. 사해 주변은 고대문명, 특히 초대 그리스도교가 발생, 발전한 곳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사해가 ‘소금의 바다’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 사해는 인근 지역의 가뭄으로 인해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해마다 조금씩 낮아진다.
사해 바다 마사다 유적지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해변도로를 달리는 동안 옥빛 바다를 감상한다. 사해에서 마사다 유적지까지는 약 40분 소요된다.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사해에서 수영 및 머드팩을 체험을 할 것이다. 사해 바다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세계 여행에서 얻는 아주 값진 선물이다.
* 사해 바다 공장지대
해변도로변에는 공장지대가 있다. 바다의 염분에는 여러 유용광물이 내포되어 이스라엘에서는 그 채취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사해 생산물로 약 등을 만드는 공장이다. 미네랄 성분을 추출해서 여러 가지 제품을 만든다. 화장품 등을 생산한다. 주변지역에서는 천연 가스의 개발도 진척되고 있다. 여러 가지 공장들이 지대를 이루며 많이 있다. 저 죽은 바다가 이스라엘의 수입원이라니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삶의 바다다. 에일랏 항구로 돌아갈 때도 이 길을 지났는데 화한 조명으로 공장을 밝히고 있었다.
* 이스라엘 사해 바다 염전
사해 해변을 달려가는데 하얀 염전이 있다. 소금도 생산하는 바다다. 아주 넓은 소금밭이다. 해변도로에서 사해 맞은편은 암석 사막산이다. 사해 바다와 사막산을 보며 달린다. 바닷물 자체가 염도가 높아서 염전은 많은 소금을 생산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해 바다로 인해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물질을 생산하여 인류의 생활에 도움을 많이 주는 바다다.
* 사해 바다 휴양시설
사해 바다에는 몸에 좋은 물질이 들어 있어서 건강을 위해 이곳에 많이 온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변에 휴양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사해 주변에는 국제규모의 호텔과 리조트가 즐비하고 관광기반 시설이 훌륭하게 조성돼있다. 사람 몸이 뜨는 것으로 유명한 사해에서는 직접 체험 외에도 유대광야의 사막투어, 낙타투어, 지프 투어, 베두인 체험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다. 사해 머드 체험, 피부병에 좋다. 우람하고 큰 호텔이 해변을 따라 곳곳에 있다. 얼핏 보면 어느 바닷가 해변 휴양지와 동일하다. 그러나 이곳은 닫힌 마다, 죽은 바다 사해다. Dead Sea라는 영문 글씨가 호텔 벽면에 적혀 있다. 사해 바다에 왔음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사해 바다는 해변도로를 따라 줄기차게 이어진다. 저 드넓은 바다가 닫힌 바다라니 믿기지 않는다. 우리는 마사다 유적지를 먼저 보고 사해 바다 체험을 할 것이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원경
사해 바다가 끝나는 곳에서 마사다 유적지가 보인다. 사막산인데 마사다 유적지가 있는 산은 평평하다. 남아공의 테이블 마운틴 같은 느낌이 든다. 주변 모두가 사막이다. 평평한 땅도, 산도 풀 한 포기 없다. 사계절을 보는 우리의 시각으로는 참 잔인한 땅이다. 길게 뻗은 사막산에서 한 덩이 뚝 끊어진 영토가 마사다 유적지다. 마사다 유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입구
사해 바다를 지나 우람한 사막산을 바라보며 마사다 유적지 입구에 다다랐다. 야자수가 줄서서 반겨준다. 버스에서 내려 유적지에 오르기 위해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둥근 로비에는 여러 가지 사진 자료를 걸어 두었다. 원 안에는 마사다 유적지 모형도 조각품도 진열해 두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로 사람들이 많다. 마사다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 전시관도 있다. 토기들을 유리관에 잘 보존하고 있다. 전시관에서 둘러보며 마사다에 대해 배웠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영상관
마사다 유적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영상관에서 스크린 속의 자료를 보았다. 그 당시의 자료 화면이 영상관 벽면에 뜬다. 마사다의 역사란 타이틀로 마사다의 생생한 역사적 영상이다. 로마군의 진격이 대단한 위력이다. 마사다의 유적 흔적들도 곳곳마다 보여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은 길게 몇 줄로 나란히 서서 영상을 본다. 다 보고 나서 어두운 영상관을 나와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갔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케이블카
마사다 유적지는 높은 산정에 있어서 걸어서 오르는 구불구불한 뱀길이라는 산길도로도 있지만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케이블카가 없었을 때는 여행객들도 걸어서 올랐단다. 보기에는 힘들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걸어보면 두 번은 오르지 못 할 곳이란다. 그래도 그 힘든 길을 택하여 힘들게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2000여 년 전의 구불구불한 뱀길을 따라 높고 거친 돌산을 오르는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는 케이블카로 올랐다. 고원 높이 솟아있어서 오르는 케이블카 안에서도 사막산 절벽과 사해 바다와 유대 사막이 보인다.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에 걸맞게 마사다는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아슬한 비경이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산정
마사다Masada 유적지는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의 최후 항전지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마사다 유적지 산정에 오르니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저 아래 사막광야다. 사해 바다도 아련하게 보인다. 사해 바다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서쪽 해안 높은 고원 해발 434m 고지다. 서울 남산 높이와 비슷한 마사다 정상에 오른 것이다. 마사다는 배 모양의 구릉을 이용한 직사각형으로 된 산정 천연요새다. 둘레는 1300m, 평균 너비 120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608m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꼭 마사다에 와서 옛 선현들이 남긴 교훈을 마음에 아로새긴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다녀가는 성지다. 마사다가 이스라엘인에게 특별한 이유는 옛 영광보다는 피비린내 흥건한 비극 때문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매년 찾는 이도 많다. 이곳에서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유적지를 관람했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 현장이다. 2000년이 지난 후 발견된 요새다. 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 최고의 성지이자 세계의 관광지가 되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꼭대기는 평평한 지형 위에 자리 잡아 천혜의 요새다. 1900년 마사다를 발견하여 성지로 보존하고 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AD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군은 960명을 데리고 이곳 마사다로 들어와 끝까지 항전하였다. 이 마사다 저항군은 로마군에게 대항하는 열심당원이다. 로마 장군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사다 점령을 시도하였지만 특수한 지형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유대인 960명이 처참하게도 자결했던 유적지다.
마사다는 기원전 37년 유대의 헤롯 대왕이 지은 요새화된 궁전이다. 헤롯 대왕이 산꼭대기에 자신의 궁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기원전 100년에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마사다는 호화로운 저택으로, 로마 양식의 목욕탕, 창고, 주택, 방어탑이 있는 성벽이 있었다. 헤롯의 가장 뛰어난 건축 계획은 요새에서 필요한 물을 댈 수 있도록 지은 물 공급 체계였다. 열두 개의 저수지가 바위 속에 파여 있다. 500mℓ 물병 1800만 개 분량을 보관할 수 있었다는 물 저장고다. 마사다 유적지에는 주로 헤롯 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로마 초기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왕궁은 물론 행정청사, 목욕탕, 곡물창고, 성곽과 망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쟁 시 자급자족하면서 적과 싸울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은 것이다. 궁전 가까운 곳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과 벽화로 장식된 벽들이 있는 거대한 로마 스타일의 욕실이 있으며, 이외에도 유대교 세례욕실, 저장실, 전망탑, 그리고 마사다 역사와 관련된 예배당 같은 많은 건축물과 저장실, 채색된 도자기, 동전들과 같은 공예품들이 있다.
그러나 헤롯왕은 단 한 번도 이곳에 오지 않았고 사용한 적도 없었다. 헤롯이 죽은 이후 로마 주둔군이 마사다를 차지했으나, 로마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 열심당원인 시카리의 피난처가 되었다. 로마군은 요새의 능선의 경사로를 흙과 돌, 나무로 쌓아올려 요새와 같은 높이로 했다. AD 73년, 마사다의 꼭대기에서 로마군 8000명에 포위당하자 7년 항쟁 최후의 생존자들 960명은 포로가 되어 또다시 노예로 살 순 없다며 집단 자결을 결심한다. 동이 트기 전에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례로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다시 모여 청장년 10명씩 조를 짜는 제비뽑기를 했다. 한 사람이 9명을 죽였다. 이런 방식으로 밤새 죽음의 의식을 반복했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성에다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유대 율법은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추첨으로 10명을 뽑았던 것이다. 동포가 자살하지 않아도 되도록 살인을 맡아줄 이들이다. 피바다 속에 남은 마지막 한 명만이 자살을 택했다. 그때 추첨 도구로 쓴 토기 조각 10개를 전시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경사로를 통해 쳐들어 온 로마군은 저항 없는 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식량은 3년치나 남았고, 물에는 독도 타지 않았다. 로마군은 타다 남은 재속에 놓여 있는 96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도에 숨어 있던 2명의 여인, 그러니까 7명뿐이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살아남은 노파와 두 여자아이의 입으로 후세에 전해졌다. 실제로 독일의 고고학자가 마사다를 발굴했을 요새 내부에는 그때까지도 목이 잘린 시체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헤롯왕의 궁전은 대단했다. 아직도 그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궁전을 둘러보고 나서 물 저장고를 보았다. 마사다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는데 이들이 수년 동안 살았던 물 탱크가 절벽 아래로 보인다. 유대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사다는 2세기에 유대인들이 잠시 탈환한 일이 있고 5~6세기에는 비잔틴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그 뒤 십자군들이 잠시 차지한 시기를 제외하면 20세기까지 방치되어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앗사바, 즉 저주받은 곳이라고 했다. 1955~56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지 전체를 조사했고, 1963~65년에는 이가엘 야딘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정상 전지역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다. 많은 관심을 끈 발굴물들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 사람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로, 마지막 남은 수비대원들이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비뽑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조각 10개의 사진을 전시해 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마사다 유적지 끝자락에서 콜룸바리움 타워라는 비둘기장을 보았다. 비둘기를 길러 잡아먹던 흔적이다. 비둘기는 아닌 것 같은데 까만 새들 몇 마리가 앉기도 하고 배회한다. 바람이 심히도 분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군인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선조들의 용기와 신념을 담아가는 곳이다. 2천 년 전 전투의 함성, 절망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버틴 곳이다, 인내와 힘, 신앙과 굴복 그리고 야망과 비극적 종말의 순간을 생생히 보는 현장이다. 이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뒤로 1000년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지고, 이후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게 되는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을 비감하게 장식한 사건이다. 마사다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최후의 항전지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성소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자 긍지요, 저항정신의 상징이다. 영화 ‘마사다’로 세계에 알려졌다.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어 이스라엘 국내 항공사가 마사다에서 가까운 사해평원의 작은 공항까지 정기운항을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남부 에일랏 항구에 크루즈배로 와서 버스로 올라와 관람했다. 마사다는 많은 교훈을 주는 유적지다. 애국심과 자존심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결코 잊지 못할 유적지다.
*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하산 길
마사다 유적지 관람을 마치고 언덕진 길을 내려간다. 사해 바다의 소금기 어린 갯바람이 산정을 훑는다. 바람에 온몸이 날려 걸음을 걷기가 힘들 정도다. 마사다 유적지의 높은 고도를 알려주고 있다. 마사다 유적지의 옆구리에 낸 길을 따라 걸어가니 케이블카 승차장이 나온다. 타고 내려가려는 사람들과 올라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곳에서 올라 올 때처럼 차례를 기다렸다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케이블카는 사막광야를 발아래에 두고 절벽을 내려간다. 사해 바다도 보인다. 이슬한 마사다 유적지 산정을 내려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의미 깊은 유적지를 배우고 현장을 탐방한 것은 내 조국에 대한 깊은 애국심도 키워주는 소중한 여정이었다.
* 이스라엘 사해 바다 체험
지구에서 가장 지표면이 낮은 사해 바다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먼저 입장권을 사서 입장했다. 사해 스파 온천장 건물 안에서 중식을 했다. 그리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실내 스파 온천장에서 들어가서 몸을 담갔다. 이곳 하해 바다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걸쳐 있는 염호다. 요르단 강이 흘러드나,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없고 유입량과 같은 량의 증발이 일어난다. 그래서 염분은 표면에서 해수의 5배인 200% 정도로 생물이 살지 못하여 사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물을 실내로 끌어들여 온천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스파 온천장 물도 사해 바다와 같은 염도다. 주의 사항을 잘 지켜야 한다. 절대로 이 사해 바닷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눈이나 귀에 들어가도 안 된다. 세수를 해도 안 된다. 만일 맛을 본다고 입에 물을 넣었을 때는 빨리 뱉아야 한다. 정말 신기할 만큼 몸이 둥둥 뜬다. 물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빠른 속도로 몸을 들어 올린다. 아주 신비로운 체험이다. 가장자리 난간을 잡고 묘한 감동으로 물장구도 치며 사해 바닷물의 유영을 즐겼다.
실내 스파 온천 체험을 하고 다음은 차를 타고 사해 바다로 갔다. 스파 온천장에서 가까이 있지만 바닥이 소금기로 거칠어서 차를 탄다. 해변의 백사장 격인 곳에 하얀 소금기가 서려 있다. 바닷가에 내려 바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해 바다 바닥에 온통 소금기둥이 서려 있어 발을 들여놓기 어렵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염도가 높아서 몸을 가만히 바다에 맡기면 둥둥 떠오른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천연 스파에 둥둥 떠 보는 체험을 한 것이다. 발의 균형을 잃으면 쓰러져 날카로운 소금기둥에 다칠 수 있다. 발바닥이 아파서 오래 있진 못하고 잠시 후 나왔다. 세상에 이런 바다도 있나 싶다. 모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소금이 엉켜 붙어 소금밭을 이루다니, 사해는 참 신비로운 바다다. 다시 차를 타고 사해 바다에서 스파 온천장 건물 쪽으로 왔다. 오면서 물이 빠진 소금 흙 밭에 해마다 점점 사해 바닷물이 줄어든다는 팻말을 보았다. 연도별로 그 당시 여기까지 고였었다는 경계선 표식을 해 두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머잖은 미래에 사해 바다가 지구상에서 없어질 거라고 한다. 그 현장을 목격해 보니 그 말에 동감하게 되었다.
스파 온천장 앞에 내려서 사해 진흙 마사지를 했다. 사해의 진흙을 온몸에 바른다. 등은 서로 발라 주었다. 가능하면 옷에는 닿지 않아야 한다. 염도가 높아서 수영복이라도 구멍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참을 발라 문지른 후 수돗물로 닦고 나왔다. 다시 실내 스파 온천장에 들어가 차가워진 몸을 녹이며 스파 체험을 하고 나왔다. 그 건물 안에는 사해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다. 잠시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아주 개운한 몸이다. 사해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헬스 스파’로도 불리는데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검은 사해 진흙과 미네랄 온천수 그리고 사해 소금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건강을 되찾는다. 사해 진흙과 온천수는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고 혈액순환을 촉진한다. 또한 건조한 사막 기후 덕에 오염되지 않고 꽃가루가 없는 맑은 공기는 산소와 브롬 및 마그네슘이 풍부하여 천식과 폐, 심장질환에 좋고, 일 년 내 비추는 강렬한 태양은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대표적 휴양 요양지역이다. 건물 주변은 열대 식물로 울창하다. 그러나 건너편 사막산은 풀 한 포기 없이 황막하다. 인공으로 기르는 스파 온천장 주변과는 천지 차이다. 사해 바다 주변에는 관광객이 많아서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석양 풍경이 그윽하다.
* 사해 바다 주변 풍경
사해 바다에서 버스를 타고 에일랏 항구로 돌아간다. 아까 올 때 왔던 그 길이다. 창문 밖으로 사해 바다가 전개된다. 끝없는 수평선이 나올 때는 막힌 바다라는 생각이 안 든다. 열린 바다 같다. 염전도 넓게 보인다. 사해 바다는 건강에 좋은 성분이 많이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래서 주변에는 호텔과 기타 여러 가지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여느 바닷가 해변 풍경과 동일하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다. 사해 바다 공장지대가 불을 켠다. 야자수와 함께 비경이다.
*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 크루즈배 승선
어두운 길을 따라 에일랏 항구로 왔다. 버스가 항구 가까이 들어오지 못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다. 항구 직원들이 나와 우리의 버스 주변을 지켜준다. 총을 들고 경계를 선 사람도 있다. 항구 건물 옆의 좁은 땅에 식물을 재배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둠에서도 물관이 식물 사이 사이로 드러난다. 사막지대에서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수관을 놓아 힘겹게 기른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여권 검색을 마치고 크루즈배에 승선했다. 바다 위 아늑한 내 집에 왔다. 육로 여행보다 크루즈 여행에서 선실은 남다르게 정감이 어린다. 그것은 매일 기항지 관광을 하고 다시 그 선실 방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선할 때는 우리 집에 간다고 말하곤 한다. 내일은 7시 50분에 5층 로비에서 모여서 8시에 요르단 페트라로 출발한다. 편안하고 행복한 휴식의 밤이다.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요르단
* 요르단 아카바 항구 기항
아카바는 요르단 남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다. 아카바 주의 주도다. 아카바 만의 머리 부분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에일랏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요르단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이며, 요르단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항만 시설이 들어서 있다. 우리의 크루즈 배는 오늘 아침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 기항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하선하기 전에 갑판에 올라가 주변 풍경을 보았다. 아카바 항구도시 시가지가 크고 아름답다. 높이 솟구친 깃발이 펄럭인다. 암석사막산도 겹겹이 싸여 있다. 여기는 홍해의 아카바 만이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이룬 바다가 잔잔하게, 평화로운 푸른빛을 선사한다.
*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서 바라본 이스라엘
요르단은 아카바 만에 19km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아카바 항구에서 홍해를 사이에 두고 서쪽은 이스라엘을 경계로 한다. 크루즈배는 지금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 기항해 있는데, 두 나라를 동시에 보고 있다. 배가 정박해 있는 쪽은 요르단이고, 바다 건너 저편은 이스라엘이다. 사막산이 줄기차게 이어져 있고 그 아래 이스라엘 시가지가 있다. 푸른 바다 위에서 뜬 비경이다.
*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서 페트라 가는 길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서 하선하여 페트라로 간다. 여기서 140Km 가면 페트라가 있다. 아카바는 홍해 해변 요르단의 항구도시다. 주변 바위가 붉어서 붙여진 이름 홍해다.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 아카바다. 솔로몬이 아카바 항구를 건설했다. 3천년 된 도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 무대가 아카바 바다다. 고고학을 전공한 옥스퍼드대학 교수가 만든 영화다. 당대 최고의 인물이 되었다. 아랍의 현대사 이해에 중요한 영화여서 그렇다. 터키와 싸움인데 터키군과 아랍군의 포로 교환을 요구한다. 베두인이 오스만 투르크군과 대항하는 영화다. 여기서 30Km 더 북쪽으로 가면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 촬영지였던 사막 구릉지대 와디럼이 있다. 아카바 항구에 아랍의 시발점이라는 뜻으로 ‘아랍혁명국기’를 세웠다. 크루즈 배에서 보았던, 높이 펄럭이던 것이 이 나라 국기가 아니고 바로 아랍혁명국기였다.
아카바 시내인데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만 생명이 흐르고, 그대로 둔 산과 땅은 사막이고 사막산이다. 또 요르단은 우리나라와 반대인 것이 많다. 전기나 수도꼭지 스위치를 내려야 켜지고, 올려야 꺼진다. 교통수단은 대부분 버스다. 시리아, 이스라엘에 갈 때 모두 버스로 간다. 이곳 사람들은 해외여행이란 말을 모른다. 우리나라는 바다를 건너야 외국에 나가지만 요르단은 외국 나갈 때 바다를 건너가지 않아서다. 해지기 전에 들어오라는 말도 우리나라에서나 적용되는 말이다. 북극에 가면 백야다. 세상은 이렇게 다르다. 이것이 여행에서 얻는 새로운 지식이다.
* 요르단 사막 구릉지대 와디럼
사막 암삭산 사이로 버스가 빠져 나간다. 붉은 바위 절벽이 창문 가까이 있다. 눈앞에 전개되는 붉은 사막산이 비경이다. 버스가 조금 더 달리자 이제는 그 암석사막산들이 저 멀리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막 위 구릉 사막산들이다. 와디럼Wadi Rum이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320km지점에 위치한 사막지대이며 곳곳에 거대한 바위산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와디Wadi는 아랍어로서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이 되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에는 마른 계곡이나 땅이 되어 버리는 곳을 말한다. 1998년에는 요르단 정부에 의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총 720평방km의 넓은 지역이며 약 3억 년 전 지각 작용으로 이루어진 곳이며 아래층에 화강암층이 있고 그 위에 석회암 그리고 가장 상부에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45m의 럼 마운틴이며 평지로 보이는 곳도 해발 1000m정도이다. 와디럼은 오래전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로 역할을 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오는 카라반 대상들이 시리아와 레바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고 당시에 이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뿐 아니라 선사시대에도 유목민들이 이곳을 통과하면서 남겨 놓은 암벽화 등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와디럼은 1916년부터 아랍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이곳을 통과하여 요르단 최남단의 아카바 항구를 점령하는 장면이 나오는 아라비아 로렌스 영화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와디 럼을 찾는 관광객들도 있다. 처음 정차하는 곳은 로렌스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 산 중턱에 있는 로렌스의 샘이며 현재도 물이 나오고 있다. 그 아래 평지에는 선사시대 유목민들이나 카라반들이 남겨 놓았다는 암벽화가 있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두번째 정차하는 장소는 알가잘리로 알려져 있는 계곡인데 일반인들은 계곡입구에서 100여미터 정도를 들어 갈 수 있다. 들어가는 좌우 바위벽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려 놓은 암벽화가 여기 저기 있으며 계곡안쪽에는 위에서 떨어지는 물에 의해 파여진 바위로 만들어진 웅덩이들이 있어 오랜 세월 동안 흘러내린 물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차하는 곳은 알가잘리 계곡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 곳에 위치한 모래 언덕이다. 이곳은 멀리서 또는 바로 밑에 가서 보더라도 별로 높아 보이지 않지만 모래언덕이기 때문에 오르기는 상당히 힘들다. 특히 봄, 여름, 가을철에는 오전 10시만 되어도 모래가 달구어져 맨발로 올라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뜨겁고 화상을 입을 위험도 있다. 반면에 겨울에는 너무 차가워서 맨발로 올라가는 것이 곤란하다.
버스로 자나가며 잠시 보는 곳인데도 장엄한 비경이다. 베트남 하롱베이의 바다 위에 솟구쳐 오른 바위산 같다. 뚝뚝 끊어진 암석사막산들이 사막 광야 위에 큰 덩이로 우뚝 우뚝 서 있다. 구릉지댄 앞 평지의 사막에는 베두인 집이 간간이 보인다. 와디럼 구릉지대는 자연 보호구역이다. 베두인들이 생활을 하고 있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구름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얀 구름덩이가 곱게 갈라져 비경을 자아낸다. 구름 사이로 뜨는 해가 무지개를 그려낸다. 길게 내리지 않고 해와 마주보며 해처럼 뜬 기묘한 모양의 무지개를 보며 모두 탄성을 질렀다. 모두 요르단에서 보는 사막의 큰 선물이다.
* 요르단 사막 마을
사막 마을을 지난다. 사막에 집을 지어 줬더니 양들을 집에 넣어 기르고 사람들은 바깥에 천막 치고 살더란다. 습관 때문이다. 그만큼 습관이 중요하다. 사막 마을에 잠시 멈추기도 했다. 그래도 벽돌로 잘 지어 놓은 집들이다. 이곳 주민도 지나간다. 요르단은 GNP가 5천불이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는 나라다. 상점 주인이 가게문을 열어놓고 옆의 상당에 가서 기도한다. 그 만큼 넉넉한 인심이다. 치안이 안전한 나라다. 금주로 조용한 나라다. 가정 중심인 나라다. 남편들이 일찍 들어온다. 베두인 살람살이는 간단해서 이삿짐이 당나귀 3마리에 다 실린다. 베두인 가정을 사막에서 본다. 낙타도 있다. 요르단 넓이는 남한과 비슷하다. 여름은 45도다. 지금이 여행 적기다. 전 국토 70%가 볼모지다. 한국은 70%가 산이다. 주목받지 못해서 행복한 나라다. 5대째 왕정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단다. 왕은 국회해산, 장관해산 권한이 있단다. 다 잘라 버리고 왕이 통치하기도 한단다. 요르단은 기름이 안 난다. 그래서 주변에서 무관심하다. 2천만년 전부터 북동쪽으로 이동해서 사막산이 생겼다. 남서쪽으로 이동하면서는 아프리카가 탄생했다. 아카바, 홍해, 요르단, 갈릴리 바다로 나뉘어졌다. 사막 식물이 자라는 곳은 와디다. 비 올 때 물이 흐르는 사막 계곡이다. 요르단 광야 체험은 참으로 보람된 여행이다.
* 요르단 사막 광야
이 나라는 비가 100mm 내리면 지도를 바꿔야 된다. 수리시설이 안되어서 그렇다. 60mm만 와도 홍수가 난다.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사막 날씨가 좋을 때는 60Km까지 육안 가능하다. 사막 길은 가도, 가도 그 자리다. 공기가 맑아서 그렇다. 먼 곳이 가까이 보인다. 아득한 요르단 사막 광야가 눈 아래로 전재되는 비경이다.
* 요르단 사막 왕의 길
여느 사막길처럼 사막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길인데, 이 길은 4천년 된 왕의 길이란다. 그것은 성경 속의 왕이 이 길을 지나갔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멈춘 것은 이 도로 곁에 휴게소가 있어서다. 정식 휴게소는 아니고 기념품 상가인데 잠시 들러서 기념품도 사고, 화장실도 가는 곳이다. 기념품 장신구 소품을 샀다. 여러 사막길 중에서도 그런 직함을 받은 이 길을 지나고, 내려 본 것은 신비로운 체험이다. 우리의 버스 운전기사인 베두인과도 사진을 찍었다. 사방이 모두 사막인데 오직 길만이 아스팔트를 깔아 문명의 향수가 배인 사막 왕의 길이다. 그 길에 내려서 밟아본 것이 더 큰 감동이다. 사막 도로 곁에는 경작지 농토를 일구어 놓았다. 우리는 잘 모르겠는데 가이드는 안다. 농기구로 훑어놓은 흔적이 있는 곳은 이제 곧 식물을 심을 곳이란다. 자세히 보니 넓은 사막 땅을 일구어 놓은 농토가 있다.
* 요르단 암석사막 그랜드캐년
휴게소에서 언덕길로 조금 내려오니 범상치 않은 바위 군락이 저 아래로 보인다. 가이드는 버스를 멈추고 내리라 한다. 미국의 그랜드캐년처럼 암석산맥이 웅장하게 전개된다. 바람은 왜 이리 심하게 불까. 옷은 물론 삶의 몸으로도 막을 수 없다. 몸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 같아 바로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사막의 기막힌 비경이다. 페트라가 거의 가까워진다. 마을의 주택 지붕에는 물통이 올려있다. 우기때 물을 받았다가 그 물을 끓여서 먹는다. 그것이 차 문화로 발달한 것이다. 운전기사 이름이 몬데르, 전형적인 베두인이다. 운전을 안전하게 참 잘 한다. 사막광야로, 암석사막으로 이색 체험을 참 많이 하는 여정이다.
* 요르단 페트라 유적지 입구
요르단의 보물로 불리는 페트라 유적지 입구에 다다랐다. 버스에서 내리자 무척 바람이 세고 춥다. 가게에서 머플러 두 개를 사서 남편 같이 목에 둘렀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함께 황량한 사막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대표적인 유적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3탄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뉴욕 타임지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1순위로 꼽힌 곳이다. 현재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페트라는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도시 전체 중 4분의 1에 해당한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으로 150㎞ 떨어진 곳에 있다. 자연과 인간의 오묘한 조화가 스며있는 신비로운 곳이다. 중국 둔황 동굴처럼 험난한 붉은 바위를 깎아내어 궁전, 보물창고, 무덤 등이 들어선 곳이다. 페트라 일대는 성경 속 이삭의 장남인 에서가 이끌던 에돔족의 땅이었다고 한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중국, 인도, 아라비아,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과 향신료 중개무역을 하며 번영을 누렸다. 유적지 입구에는 마차와 낙타로 여행할 것을 권하는 베두인들이 있다. 많이 걷는 여행지여서 힘든 사람은 타고 들어간다. 이곳 베두인들은 사막에서 초라하게 살던 그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쩜 그들 조상의 왕국이었을 페트라, 늠름한 왕국의 후손으로 바라보고 싶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 요르단 페트라 시크 협곡
도시 자체가 거대 바위, 암벽도시인 페트라는 붉은 바위를 통째로 나무처럼 깎아 만든 도시다.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도시를 건축한 것이다. 이곳에서 나바테아인들은 통행세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페트라의 입구는 잘 보이지 않는 절벽 암석으로 가려져 있었다. 지각 변동으로 찢긴 바위 틈새를 통해 발견된 페트라에는 주거시설, 목욕탕, 극장, 시장, 무덤, 상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좁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시크 협곡의 길이 약 1.2Km다. 지각변동에 의해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만들어진 길이다. 좁은 협곡 사이에 길을 낸 것은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시크 협곡 옆으로는 거대한 붉은 사암이 요새처럼 둘러쳐져 있다. 페트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고 가파른 절벽의 협곡 시크를 통과해야만 한다.
길은 시크 협곡에서 시작된다.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만든 고대 세계로 가는 통로다. 우마차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협곡의 시크를 따라 페트라 내부로 한 걸음씩 다가서면 주변을 둘러싼 오묘한 색깔의 바위들과 만나게 된다. 아득히 높은 수직절벽이 하늘까지 가린다. 빠끔히 뚫린 하늘만 아니면 동굴 속에 들어선 느낌이다. 밖에서 보면 울퉁불퉁 커다란 바위산일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 적이 쳐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이다. 어두컴컴한 협곡 길, 깊숙이 파고드는 진홍의 빛 내림이 장엄하다. 시크의 돌 벽에는 소원을 비는 작은 제단, 교역에 나선 인간과 낙타 등을 묘사한 조각들이 있다. 꽤나 큰 발가락이 그대로 선명하다. 시크의 폭은 5m가 안 되지만, 양쪽 벽면은 높이가 수백 미터라서 올려다보면 현기증이 날만큼 아찔하다. 원래 포장되었던 바닥은 지금은 부드러운 모래로 덮여 있다. 붉은 바위에서 부서진 모래를 손바닥에 담아보니 적색 염료 가루처럼 보드랍고 곱다.
붉은 암벽에 페트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길게 홈을 판 곳도 있고, 파이프 관을 박아놓은 수로도 눈에 띈다. 시크는 급류에 의해 만들어진 협곡으로, 나바테아인은 그곳을 막아 댐이나 수로를 만들어 도시인구 3만 명이 마실 식수를 공급했다. 이 지역은 연중 강수량이 10~15cm에 불과했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를 오목하게 깎아 빗물 저장고를 만들고 25km 이내 모든 샘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저장된 물은 실핏줄 같이 연결된 수로를 거쳐 각 가정에 이어졌다. 그러나 번창하던 이들도 2세기 무렵 로마의 눈에 들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로마는 페트라의 식수를 차단했고 결국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점령됐다. 또 두 차례 지진으로 인해 사람들은 페트라를 떠났다. 시크 협곡 끝에 다다를 무렵, 알카즈네 신전이 바위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높고 붉은 바위 뒤로 우뚝 선 알카즈네 신전은 장엄하다. 어둡고 길었던 시크 협곡 터널을 서서히 빠져나가 페트라의 가장 크고 대표적인 명소 알카즈네 신전을 눈앞에서 만나고 있다.
* 요르단 페트라 알카즈네 신전
알카즈네 신전에 들어가려면 좁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 시크를 통과해야 한다. 시크 끝머리에서 첫 번째 유적인 알카즈네Khasneh가 붉은 빛을 가득품고 고고한 자태를 보여준다. 높이 43m 너비 30m로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수직의 붉은 사암절벽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부조 건물이다. 아래 위 6개의 원형 기둥이 받히는 2층 구조로, 총 12개의 굵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BC 1세기경, 헬레니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매끈한 기둥 위 장식들도 대단하다. 알카즈네는 보물창고란 뜻이다. 파라오의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이다. 나바테아 왕 아테라스 3세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려한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원형극장, 수도원, 집 목욕탕, 무덤 역시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를 평평하게 깎아 설계도를 그린 뒤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현재 발굴된 것 건물만 800여개이지만 페트라 전체의 1/4에 불과하다. 나바테아 왕국의 대단한 면모를 본다. 알카즈네 신전 앞에서 어마어마한 위용에 발을 떼지 못했다. 인간의 노력이 부여된 걸작품이지만 이런 자연환경을 선사한 신의 손길이 부럽기도 했다.
* 페트라 유적지 모래 그림
페트라 유적지는 온통 사막과 암석 모래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수어진 금모래가 이곳에서는 훌륭한 그림으로 탄생한다. 색색의 모래를 병에 담아 그림을 탄생시킨다. 작품을 진열해 놓기도 하고 즉시 주문을 받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 몇 달러만 주면 작은 병 그림을 살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나타비아 왕국이지만, 그 후손 베두인들에게 대물림된 부지런한 삶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 페트라 유적지 낙타와 마차
페트라 유적지는 상당히 어려운 여행지다. 걷는 길도 많고, 거친 모래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한번 바람이 일면 얼굴에 모래를 뿌려 눈을 뜰 수 없다. 그래서 환자나, 노약자는 낙타를 타던가, 당나귀나 말이 끄는 마차를 타야 한다. 요금은 한화로 몇 만원 정도다. 우리 일행은 그냥 걸어서 여행했다. 다만 나올 때 초등학생을 동반한 가족만 마차를 타고 나왔다. 대부분 베두인들이 운행한다. 가끔은 바위 곁에 말이라 당나귀, 낙타를 매어두고 휴식하기도 한다. 걸으면서 유적도 보고 곁을 스쳐 지나가는 낙타와 마차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 페트라 유적도시 오르는 계단
시크 협곡을 지나, 알카즈네 신전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넓은 공간이 나온다. 오른편에는 바위를 뚫어 만든 거대한 무덤들이 있고, 왼편에는 계단이 있다. 길게 여행하려는 사람은 이 계단을 올라간다. 언덕 꼭대기에 가면 더 많은 페트라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계단은 올라가지 않고 낮은 곳에서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에는 원형극장이 보인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린다. 시크 협곡에서는 바위가 그늘을 가려주지만 이곳은 펑 뚫린 하늘이다. 마을을 넘나드는 바위산 계단까지 완벽하게 지어 놓은 페트라다.
* 요르단 페트라 무덤
알카즈네 신전을 지나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왕실의 무덤군이 나타난다. 페트라는 고대 암석도시다. 그래서 무덤도 바위를 파고 만들었다. 특히 원형극장 주변 암벽에 크고 작은 무덤 구멍이 많이 있다. 아직도 왕실의 무덤을 비롯해 수많은 무덤들이 남아 있다. 생전의 지위와 재력에 따라 무덤의 크기와 디자인도 다르다. 무덤의 내부는 공통적으로 모두 텅 비어 있다. 또 벽들은 매끄럽고 내부의 모서리는 빈틈이 없다. 현재 확인되는 유일한 장식은 벽과 천장, 방바닥에 있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사암 소용돌이 문양이다. 바위를 깎아 만든 나바테아의 전통적인 신전과 무덤들은 헬레니즘 건축 양과 융합되어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의 건축 양식이다. 선사시대부터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고학 유적과 건축 기념물들은 지금은 사라진 문명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바위에 크고 작은 구멍이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다. 물어보니 무덤이란다. 얼핏 보면 예술적 조각 같은 형상이다. 잘 다듬어서 매끄럽다. 고운 색상의 무덤 안에도 들어가 보았다. 물 흐르듯 색색의 무늬가 벽면을 타고 흐른다. 이곳 바위를 깎으면 저리 고운 무늬가 나온다는 증명이다. 요르단의 기막힌 영토다.
* 요르단 페트라 원형극장
원형극장은 계곡의 남쪽 끝에 바위를 파내어 만든 서기 1세기의 로마 시대 극장이다. 너비 40m의 원형극장 역시 모두 바위를 다듬어 조각했다. 거대한 바위산을 깎아서 만든 로마 원형극장은 나바테아 사람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그들의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계단은 33층이고, 좌석은 7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페트라의 각종 행사, 회의, 종교 의식 등이 열렸던 곳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선정에서 페트라가 중국의 만리장성 다음으로 많은 표를 받았다고 요르단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알카즈네를 비롯해서 로마 원형극장은 섬세한 고대장인의 손길과 대 자연의 조화가 서려 있다. 페트라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왕국과 나바티아 왕국의 수도였고, 그 후 로마와 비잔틴 문명이 지나간 곳이다. 페트라의 규모가 방대하여 이곳을 다 둘러보려면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외국인 관광객으로서는 짧은 시간으로 다 볼 수 없어서 중요한 유적만 몇 군데 보는 것이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눈앞의 원형극장은 큰 규모와 구조의 아름다움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수백 년 동안 아랍문화와 로마 가톨릭 문화가 어우러져 사막에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워 놓은 곳, 페트라 그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격이다.
* 페트라 고운 색상의 바위
페트라에 있는 바위는 모두 고운 색상이다. 햇살을 받아 붉은 빛을 내기도 한다. 특히 여러 가지 색상무늬의 물결이 흐르는 바위가 있다. 이런 색상은 이곳 페트라의 붉은 암벽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서 진하게 드러난다. 원형극장 맞은편 큰 구멍이 뚫린 바위 무덤 공간으로 가니 더욱 두르러지게 화려하고 뚜렷한 색상무늬의 바위 물결이 흐른다. 천연의 고운 색상 무늬가 놀라운 비경이다. 무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바위벽에 기대어, 또는 바위 구멍에 얼굴만 내밀고 그 옛날 이곳에 살던 페르라 사람들처럼 한껏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페트라 암석산 고양이와 나무
페트라 유적지 내에는 암울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생명이 있다. 야생 고양이가 들어갈 때도 보이더니 지금 나올 때도 보인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산다.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또한 이곳 바위 사이에는 나무가 산다. 아슬한 바위틈에 뿌리내린 나무는 보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달군다. 비가 올 때 물이 많이 흘러내는 곳에는 대나무 군락도 있다. 삭막한 바위 환경에서도 동물과 식물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공간이다.
* 페트라 유적지 기념품 가게
기념품 가게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아마도 요르단의 전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대개는 고풍스런 물품이다.돌과 나무, 철물 등 각종 재료로 만든 기념품은 아주 섬세하고 모양과 색상이 수려하다. 페트라 유적지를 대변하는, 그 옛날의 찬란했던 페트라 고대 도시를 읊조리고 있다.
* 페트라 유적지 나오는 길
페트라 유적지를 모두 관람하고 나올 때는 각자 걸어서 나왔다. 긴 길을 걸어와서 발이 많이 피곤하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들어갈 때 제대로 보지 못했던 풍광을 살펴보며 나왔다. 페트라 시크 협곡을 지난 유적지 끝자락이다. 이곳도 페트라 내부만은 못해도 여전히 신비로운 것들이 많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크고 작은 바위들, 물기를 따라 돋아난 작은 풀들, 나무들 모두 페트라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진풍경이다.
* 요르단 페트라 시가지
페트라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시 페트라 시가지로 나왔다. 외곽은 사막 암석산에 주택이 많이 모여 있지만 도심에는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다. 잘 지어 놓은 건물들이다. 특히 이곳은 페트라 유적지를 보기 위해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도시여서 발달이 잘 된 것 같다. 중심 도로변에 식당과 카페 등 여러 시설도 갖추고 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리다.
* 요르단 작동이 정반대인 수도꼭지
요르단은 모든 것이 반대라는 말, 사실이었다. 스위치를 내려야 켜지고, 올려야 꺼진다는 말 사실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도꼭지가 내려야 물이 나온다. 올리면 정지된다.작동이 정반대다. 페트라 시가지에서 점심식사를 한 식당 화장실에서 겪은 일이다. 신기해서 자꾸 반복해 보았다. 세계 여행을 하다보면 내가 일고 있는 지식의 저 반대편이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게 돌아가며 공존하는 것 아닐까싶다.
* 요르단 암석 사막산 도시
페트라 시가지를 벗어나서 산길을 달릴 때, 주변은 온통 암석 사막산이다. 아주 바위 덩어리 사막산에 층층이 집을 짓고 사는 큰 도시다. 올리브 나무도 많다. 이곳 주민들은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면 물을 받는다. 그 중에 하나, 물통이 지붕 위에 있다. 직사각형 큰 물통을 지붕마다 올려 놓았다. 우람한 암석 사막산 산맥을 지날 때도 도로변에 푸른 나무들이 서 있다. 모양이 우리나라 소나무와 같다. 환경에 순응하는 끈끈한 생명력이다. 버스는 소중한 풍경들을 보여주며 아카바 항구로 향해 달린다.
* 요르단 사막 베두인 마을
아까 갈 때 들렀던 휴게소에 또 들렀다. 바로 눈앞에는 아까 보았던 사막 왕의 길이 있다. 휴게소를 떠나 조금 가니 막막한 사막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풍경이 보인다. 더러는 동떨어진 집들도 있다. 베두인들의 집이다. 가축을 기르며 산다. 저녁 무렵 한 떼의 가축을 몰고 가는 풍경이 정겹다.
건조한 사막에 간간이 풀도 자라는 곳이 있다. 어찌 살까싶은데 생명이 존재하는 땅이다. 같은 지구상에서 이렇게 다른 환경을 만들어 내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기에 여기 사는 것이 아닌가. 다른 세계를 모르고 평생을 여기 살다가는 사람도 있겠지. 어떤 영토든 행복을 쥐고 살면 그곳이 천국일 것이다.
* 요르단 사막을 달리는 버스
아주 많은 시간을 사막에서 보낸다.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사막광야 또는 사막 암석산 사이를 달린다. 요르단 경찰도 있다. 버스 창문에 사막 암석산이 고운 풍경으로 드리운다. 가끔씩 싯딤나무도 보인다. 건조한 사막이 사계절을 보는 한국인의 시야로는 이국의 선물 같은 존재다. 줄기차게 버스를 따라오는 사막이다.
* 요르단에서 보는 이스라엘 사막산맥
요르단 아카바 시가지에서 이스라엘 사막산맥이 병풍처럼 보인다. 사막산맥은 아주 우람하고 높다. 얼핏 보면 요르단의 영토 같지만 아니다. 홍해 바다 건너 해변에 있는 이스라엘 산이다. 두 나라는 홍해를 국경으로 끼고 있어서 그렇다. 요르단에서 공으로 보는 이스라엘의 비경이다. 또한 이스라엘 에일랏 항구에서는 홍해 바다 건너 요르단 영토를 본다. 형제처럼 나란히 바라보는 두 나라가 정겹다.
* 요르단 아카바 항구 도시
아카바 시가지는 야자수와 하얀 색 건물들로 해변의 전형적인 향수를 자아낸다. 시가지를 지나자 아카바 항구가 보인다. 항구 저 건너는 이스라엘이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룬 풍경이 아름답다. 우리 배가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 정박해 있다. 기항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언제나 저렇게 배가 우리를 기다린다. 바다 위에서 기다려주는 고마운 우리들의 집이다.
* 크루즈 배 승선
요르단 아카바 항구에 정박해 있는 크루즈배에 승선했다. 해가 지지 않은 오후의 시간이 여유로워서 배의 갑판에 올라갔다. 아카바 시내가 다 보인다. 사막산 아래 하얀 시가지가 있고 아랍혁명국기가 높이 걸려 있다. 이곳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국경을 이루는 지역이다. 배에서 보면 배가 정박하여 가까운 쪽이 요르단이고, 바다 저 건너편은 이스라엘이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두 나라를 보는 진풍경이다. 갑판 위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수영복 차람으로 수영을 하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 크루즈배 대극장 크레오파트라 관람
정찬 식당에서 석식만찬을 하고 저녁 9시에 12층 디스코텍에서 와인 파티를 했다. 마주 보고 앉아 와인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다. 이것도 배에서 제공해주는 서비스다. 10시 30분에는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크레오파트라를 관람했다. 이집트 역사 무대에 파라오 동상을 세워 놓고 하는 공연이다. 크루즈 여행은 저녁시간에 하는 수준 높은 대극장의 공연이 높은 인기다. 객석은 항상 만원이다. 앞좌석이 가장 잘 보여서 우리 부부는 앞부분에 가서 앉았다. 캄캄한 밤, 바다를 질주하는 배 안에서 멋진 공연을 보는 것은 큰 낭만이다.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이집트 피라미드, 스핑크스
* 크루즈 배 부페식당 조식
홍해 바다의 일출이 비경이다. 푸른 물이 내려다보이는 부페식당 창가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언제나 풍성한 식단 앞에서 행복한 식사 시간이다. 대개 아침은 크루즈 배 부페식당에서 먹고, 점심은 현지식으로 먹고, 저녁은 정찬식당에서 코스별로 선택해서 먹는다. 모두 아름다운 식사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밝은 햇살이 창문에 서려 낭만이 깃든다. 먼 훗날 우리 부부는 이런 날들을 무척이나 그리워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멋진 여행을 꿈꾸며 산다. 더 짙은 노을이 내려도, 그건 가능할 거라고 믿으며 건강, 사랑, 행복을 성실하게 지켜나갈 것이다. 자손들의 평안도 함께 빈다. 부모를 바라보는 우리 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바라보는 우리 손주들이 함께 행복하기를 빈다. 다음 기회에는 자손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도 하자고 다짐한다. 지금은 첫손자가 3살이어서 어렵지만, 몇 년 지나 크면 가능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우리 가족의 행복한 여행을 기대해 본다.
* 이집트 소크나 항구 기항
찬란한 아침 햇살이 내리는 홍해가 비경이다. 오전 9시, 크루즈 배가 서서히 이집트 소크나 항구로 진입한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 샴엘쉐이크 항구에서 어제 출항한 배가 밤새 홍해 바다를 달려 이곳에 온 것이다. 갑판에 올라가 주변 풍경을 보았다. 오붓한 항구의 바닷길로 뱃머리를 돌려 들어간다. 크루즈 여행에서만 볼 수 있는 짜릿한 진풍경이다. 배가 기항하면 우리는 이제 하선한다.
* 소크나 항구 주변 풍경
이집트 소크나 항구에 하선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나가서 관광버스에 승차했다. 소크나는 휴양지다. 그래서일까. 항구 주변이 상당히 크게 열려 있다. 짐을 실은 차량도 보이고, 항구로 들어오는 철로도 있다. 한국의 GS 건설자도 400명이나 들어와 있다. 세라믹 크레오파트라 공장도 있다. 아주 커다란 규모로 사막 위에 앉아 있다. 버스는 카이로를 향해 달리며 항구 주변 풍경을 많이도 보여준다.
* 소크나항에서 카이로 가는 사막의 고속도로
소크나 항구에서 조금 가자 고속도로 톨게이가 나왔다. 고속도로가 아인 소크나항까지 이어졌다. 톨게이트는 높다란 문과 스핑크스 사자동상이 서 있다. 이집트에서 제일 큰 고속도로다. 육중한 문을 통과하여 스핑크스 곁을 지나 사막의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소크나 항구에서 카이로까지는 100Km 거리다. 서에서 동으로 이동한다. 소크나에서 카이로까지 고속도로는 61Km를 달린다. 고속도로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건설했다. 1시간 20분 후 카이로에 도착한다. 오늘은 카이로 기자지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러 간다. 카이로에서 피라미드까지는 23km다. 사카라 피라미드와 멤피스 박물관도 간다. 멤피스는 그리스어이며 5천 년 전 이집트 수도였던 곳이다. 그날의 찬란했던 멤피스는 온전히 사라졌지만 역사적 유적을 보기 위해 간다. 이집트 사막은 끝없이 이어진다. 고속도로변이 온통 사막광야다. 사막 땅과 수평을 이룬 도로에 간간이 차량이 지나간다. 참으로 고적한 영토다.
* 이집트 카이로 시가지
사막의 긴 고속도로를 달려 카이로에 도착했다. 톨게이트를 벗어나자 사막 너머로 카이로가 보인다. 먼저 신도시를 지난다. 큰 아파트 단지가 많다. 곳곳에 건설현장도 보인다. 나이강 동쪽이다. 카이로 외곽 순환도로를 달린다. 여기서 막히면 시내 데모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도로다. 오늘은 데모가 없는지 막히지 않는다. 나일강을 건너 도심을 들어간다. 길가의 저층 아파트 발코니 난간에 집집마다 빨래를 널었다. 붉은 벽돌의 카이로 시가지 건물들이 보인다. 조금 지나자 대추야자나무 군락도 있다. 건물 사이로 피라미드가 보이더니, 건물을 지나자 나무들 사이로 훤히 보인다. 카이로 시가지에서 피라미드를 보는 것은 환상이다.
* 이집트 카이로 피라미드
이집트에 피라미드 92개 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13㎞ 떨어진 기자의 사막고원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대표적인 피라미드다. 스핑크스는 지키는 역할이고 피라미드는 왕과 왕비, 왕족의 무덤이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장제용 건축물이었다. 고왕국 창건 때부터 2,700년 동안 계속 지어졌다. 피라미드 건축의 전성시대는 제3왕조에 시작되어 제6왕조까지다. 가장 크고 오래된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고왕국 제4왕조의 제2대 파라오인 쿠푸왕 피라미드다. 쿠푸왕 재위 기간 BC 2589년경부터 BC 2566년에 자신의 무덤을 세웠다. 쿠프왕 대피라미드는 대략 기원전 2천5백년으로 추정한다.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커서 '대大피라미드'라고 불린다. 대피라미드 옆에는 쿠프왕의 아들 카프레와 손자 멘카우레 파라오의 무덤 두 개의 피라미드가 있고, 왕비의 무덤 작은 피라미드가 있다.
대피라미드의 규모는 엄청나다. 원래는 높이 147m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꼭대기 부분이 10m 가량 파손되어 현재 높이는 137m이다. 밑변 네 변 길이는 모두 230m다. 평균 무게 2.5t의 어른 키만한 돌 230만 개를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들었다. 엄청난 규모와 복잡한 내부로 인해 세계 최대의 건축물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0만 명의 인원이 약 10년에서 20년에 걸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의 내부는 긴 터널을 지나 대회랑과 왕의 방, 왕비의 방, 내려가는 통로, 올라가는 통로, 수평 통로, 환기통 등 복잡한 구조다. 오늘날 내부를 관람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입구로 사용되는 곳은 9세기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 왕이 도굴을 위하여 파헤친 곳이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두 번째 것으로, 쿠푸왕의 피라미드 바로 옆에 있고 전체적으로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다. 쿠푸왕의 아들인 카프레왕은 아버지의 피라미드와 같은 장소에 비슷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높이 143m로 건축됐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피가 벗겨져 현재는 높이 137m, 밑변 216m로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규모다. 높은 지대에 세워져 있어 보는 위치나 각도의 따라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3대 피라미드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카프레왕 피라미드 동쪽에 피라미드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전체 길이 약 70m, 높이 약 20m에 달하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는 것은 쿠푸왕의 손자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다. 쿠푸왕 피라미드와 카프레왕 피라미드의 절반 정도라 할 만큼 규모가 작다. 높이 65m, 밑변 105m의 규모이며 훼손이 가장 심한 편이다. 이에 반해 멘카우레 왕의 석상은 보존이 훌륭해 국보급 유물로 이집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멘카우레 왕 피라미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관람객이 적고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32Km 거리에 사카라 피라미드도 있다. 우리는 사카라 피라미드도 간다.
피라미드는 카이로 곳곳에서 보인다. 몇 년 전 처음 왔을 때 카이로
시가지에서 건물 사이로 보며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람한 삼각 덩이가 도심에서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카이로 시가지보다는 조금 높은 곳에 있다. 버스로 올라가서 입장권 매표소 앞에 다다르자 카이로 시가지가 저 아래로 보인다. 바로 눈앞 도로에서는 마차가 지나가며 역사의 미로로 안내하는 듯하다. 버스는 피라미드 곁을 지난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까지 갔다. 낙타나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전망대에 서니 피라미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모습을 보기 위해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다. 주변에는 상인들이 많다. 파라오와 왕비, 피라미드 모형3개, 행복을 상징하던 고양이, 스핑크스 이렇게 7개의 석상을 세트로 가방에 넣은 것과 춤추는 낙타 인형을 샀다. 역사 교사인 큰 아들과 첫손자에게 줄 선물이다. 세계 여행지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지역이어서 가슴 벅찬 여정이다.
* 이집트 카이로 스핑크스
스핑크스sphinx는 수인면수신상이다. 즉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괴수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끔 동물이 신격화되어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에서, 스핑크스의 원형은 이집트에서 생겼다고 본다. 백수의 왕으로서의 사자가 신격화된 왕 파라오와 합체해서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왕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인데,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신전이나 왕궁, 분묘 등에서 그 훌륭한 조각을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의 이곳 기자에 있는 BC 2650년경의 고왕국 시대 제4왕조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에 딸린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성격이 달라진다. 즉, 매나 숫양의 머리를 한 것, 서 있거나 앞다리만 가진 것, 또는 왕으로서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 신전의 장식에 쓰인 것 등이 있다. 카르나크의 대신전이나 사카라의 세라페이온에는 길 양쪽에 서로 마주보면서 수십 개의 스핑크스가 나란히 서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유적 스핑크스는 파라오 얼굴을 닮은 형상으로 힘의 상징이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을 수천 년이 넘도록 굳건히 지키고 있는 거대한 이 스핑크스는 전체 길이 약 70m, 높이 약 20m, 폭 약 4m다. 이집트에서도 가장 크다. 스핑크스의 앞발은 피라미드처럼 수천 개의 돌덩이로 구성됐다. 반면 상체와 머리는 하나의 거대한 암석을 깎아서 만들었다. 스핑크스 상은 석회암 바위산을 깎아서 만들었다. 피라미드처럼 석재를 쌓아올려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바위산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각을 해나가면서 바깥쪽으로는 돌을 보강하는 형태로 작업을 했다. 아랍어로는 ‘공포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태양신의 아들이라 불린다. 아랍군의 침입 후에는 코가 깎여 나갔고, 영국군에 의해 수염이 무참히 뽑혀 나가, 현재의 모습 흉한 모습으로 공포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뽑혀 나간 수염은 런던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앞다리 사이에 투트모세 4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꿈의 계시로 인해 모래 속에 파묻힌 스핑크스를 발굴하고 그 꿈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곳에 온 것은 두 번째다. 전에도 놀라웠고, 지금도 놀랍다. 피라미드도 어마어마하지만 스핑크스도 대단히 크다. 오늘은 스핑크스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바라다보았다. 피라미드와 함께 장엄하고, 두렵기까지 한 석상이다. 고대 이집트의 대단한 위상과 면모를 접하는 순간이다. 학교에 가야할 아이가 내 앞에 와서 파피루스 종이의 책갈피를 사란다. 필요한 기념품이기도 하고 아이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몇 묵음 샀다. 그런데 능수능란한 상술로 접근하는 아이를 보며 과연 저 아이가 강력했던 선조들의 자존심을 알까 싶었다. 강대국에 의해 다소 파손은 되었지만 수많은 세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남아 소중한 역사의 유적지가 된 진실한 가치를 아이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이집트의 가장 큰 보물, 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기 위해 세계인들이 여기 오는 것을 저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 이집트 시가지 마차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가 보이는 식당에서 이집트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왔을 때 거리에 마차가 지나간다. 자동차와 마차가 함께 통행한다. 이미 많이 보아온 정경이서 낯설진 않지만 눈앞에서 지나가는 마차가 풍경은 정말 신비롭다. 도시 복판에서 차 속에 섞여 짐을 싣고 마부가 몰고 간다. 당나귀가 아니고 말이다. 어릴 적 내 조국에서 보아온, 지금은 사라진 유년의 향수다.
* 이집트 농작지대
이집트는 묘한 풍경을 선사하는 나라다. 사막만 줄기차게 이어지다가 농작지대를 등장 시키곤 한다. 정반대의 풍경이 교차하는 나라다. 지금 그 농작지대를 보고 있다. 언제 사막이 있었느냐는 듯이 푸른 식물로 풍요롭다. 검은 흙의 땅으로 아주 기름지다. 나일강이 범람하며 안겨준 소중한 토양이다.
* 이집트 시가지 가축들
이집트 여행 중에서 많이 보아온 것 중의 하나가 동물이다. 도심에서도, 시내 변두리에서도, 농촌 거리에서도 여러 동물들이 자주 나타난다. 지금 눈앞에도 당나귀와 염소, 양 등 가축을 몰고 간 풍경이 목격된다. 목동은 남자 아이다. 저녁 무렵 한 무리의 동물 떼를 몰고 집으로 가는 중이다. 큰 건물이 들어선 대로를 자동차와 사람과 동물이 활보하고 있다. 진풍경이다.
* 사카라 사막과 대추야자나무 경계지역
카이로를 떠난 버스가 사카라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풍경이 보인다. 한쪽은 푸른 물결 넘실대는 대추야자나무 군락이, 한쪽은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사막지대가 뚜렷한 구분을 짓고 있다. 칼로 경계선을 자르라 해도 저리 선명하게 자를까 싶다. 멤피스에서는 2㎞쯤 떨어진 고대 이집트의 최대 공동묘지 사카라Saqqara다. 사카라라는 지명은 매의 머리를 가진 죽은 자의 신 소카르Socar에서 유래되었다. 지명 자체가 무덤을 가리킨다. 나일 강 서안의 녹지대와 사막지대의 경계에 자리한 사카라는 그 넓이가 남북으로 6㎞, 동서로 1.5㎞나 된다. 왕도 멤피스의 몇 개의 네크로폴리스 중에서 가장 크고 가까이 있는 무덤지대이다. 그곳에 파라오, 왕족, 귀족들의 마스타바 피라미드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 중 대표적 유적이 4천 7백여 년 전에 만든 계단 피라미드Step Pyramid다. 우리는 지금 그 유적을 보기 위해 사카라 사막지대로 가고 있다. 물길이 흐르는 땅과 물길이 흐르지 않는 땅의 근엄한 경계지역을 지나고 있다.
* 사카라 사막지대 야생 개들
버스가 사카라 사막지대에 들어서서 주차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야생 개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다. 현지인보다 외국은 더 좋아한다는 말에 웃었다. 몇 년 전에 여기 왔을 때, 어미개가 새끼 개들을 보듬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의 개들이 큰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도 없고, 풀도 없는 건조한 땅에서 생명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인데 그들이 어찌 이 삭막한 곳에서 생명을 이어가는지 신기하다. 사막지대의 야생 개들은 함께 입장하여 안으로 따라 들어와 끝까지 동행했다.
* 이집트 사카라 계단 피라미드
사카라는 이집트의 고대 수도 멤피스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 사막에는 고대 묘지가 많다. 사카라의 사막 한 가운데 솟아 있는 계단 피라미드는 세계 최초의 석조건축물이며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이다. 계단 피라미드는 장제전과 함께 피라미드 복합체를 이룬다. 이 복합체는 남북으로 545m, 동서로 277m이며, 높이 10m의 붉은 석회석 담 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곽은 사방 측면에 열세 개의 가짜 출입문과 남쪽 끝에 한 개의 진짜 출입문 이 있었으나 폐쇠 되어 있으며 지금은 남동쪽에 입구 하나만이 열려져 있다. 건물의 입구처럼 보이는 신전 입구를 들어서면 높이 6.6m의 기둥 20개가 나란히 서 있는 기둥복도가 나온다. 기둥복도를 나서면 안마당이 나오는데 그 동쪽에 헤브, 세드 신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기둥 3개만 남아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식 피라미드가 보인다.
이 조세르의 계단 피라미드를 만든 것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축가이며 의사이기도 한 재상 임호테프였다. 조세르는 파라오의 왕권과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시나이 반도와 누비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고대 이집트 왕조의 기틀을 닦고 국력을 튼튼하게 한 파라오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멤피스의 창조 신 프타의 아들로서 신격화하여 숭배했다. 임호테프가 만든 조세르 파라오의 계단 피라미드는 높이가 60m도 넘는 여섯 개의 거대한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흔히 피라미드라고 하면 사각뿔 모양을 갖추었던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처음부터 피라미드가 사각뿔 모양이 아니었음을 이것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아마 처음의 파라미드는 그냥 흙벽돌을 쌓아 올린 형태, 즉 마스터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기술이 발달로 인하여 계단식 피라미드가 생기게 되었고 더욱 발달된 것이 기자에서 볼 수 있는 사각뿔 모양의 파리미드이다. 이 계단식 파리미드는 흙벽돌 피라미드에서 석조 피라미드로 넘어가는 시기를 알려주는 피라미드의 나침반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태양광선을 상징하고 있으나 계단 피라미드는 죽은 파라오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을 상징하고 있다. 파라오의 무덤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처음으로 돌로 만들었다.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 남쪽에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가 있다. 우나스 왕은 제 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다. 당시 파라오의 힘이 약화되어 우나스의 파라오는 그 규모가 기자의 피라미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가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안에 그려진 그림과 글자 때문이다. 사막에서의 수렵장면, 사람들이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 고관들의 행렬, 작업 중인 금 세공자들, 기근에 희생된 초췌한 사람들, 멀리 남쪽 아스완에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원기둥들을 배로 운송하는 장면들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피라미드의 비밀들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피라미드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형문자들로 인하여 당시 정신을 어렴풋하게 추측할 수 있다. 즉 부활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나스 파라오 피라미드에 있는 기록들의 중심 테마는 우주의 낙원들을 향해 떠나는 파라오의 여행, 이승 세계에서의 영혼의 변신과 항해, 깨달음의 주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빛의 존재로의 변화들을 볼 수가 있다.
나는 이곳에 두 번째 왔다. 더워서 고생스럽고 아찔한 사막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여전히, 사막은 참으로 광활하고 건조했다. 그래서 묘역이 됐고, 그래서 아직까지도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습기가 있었다면 다 부패됐을 유적이 오히려 건조한 사막 기후로 훌륭한 문화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도 발굴 중이며 위대한 유산은 사막의 땅 속에서 고스란히 남아서 역사의 큰 가치로 기여하고 있다. 이집트의 이런 고대역사의 흔적들이 세계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 사카라 사막지대
풀 한포기 없는 사막지대다. 이런 땅이 어찌 있을까싶다. 차창 밖으로 보던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저 저런 땅이 있거니 했는데 막상 밟아보니 너무도 애처롭다. 공평하지 않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텐데, 이집트 사람들은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산다. 사막 저 멀리 울창한 식물이 사는 도시가 아련하게 보인다. 사막 끝에서 보는 생명의 숨결이다. 사막지대에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사카라에서 멤피스로 갔다.
* 이집트 고대 수도 멤피스
멤피스Memphis는 이집트의 고대 수도였던 도시다. 성경에서는 ‘놉’으로 기재 도시다. 카이로 남쪽 20Km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3100년 전에 세워진 오래된 도시다. 흰 성벽의 도시 멤피스는 상, 하이집트의 경계선에 세운 왕조시대의 첫 왕도로 초기왕조와 고왕국 시대의 정, 경,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4천 1백여 년 전, 고왕국이 끝나고 중왕국이 시작되면서 왕도는 멤피스에서 테베지금의 룩소르로 옮아갔다. 그 후에도 멤피스는 파라오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등 고대 이집트 왕조의 정신적 왕도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다. 멤피스의 옛 이름은 고대 이집트어로 ‘피라미드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라는 뜻으로 사카라의 남부에 있는 고왕국 제6왕조의 페피 1세의 피라미드의 이름인 멘네페르에서 유래되었다. 멤피스는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이며 지금의 이름은 아랍어로 미트 라히나다.
멤피스는 창조신 프타 신앙의 중심지였다. 프타는 고대 이집트어로 ‘우주의 건설 자’라는 뜻이다. 그는 등에 육체적인 안녕을 상징하는 메나트를 메고 손에는 삶과 안정을 상징하는 제드 장식의 지팡이를 들고 머리를 깎은 미라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왕도 멤피스에는 왕궁과 프타 신전이 있었다. 워낙 오래되어서 유명한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대추야자나무 숲 속에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룩소르 동안에 있는 카르나크의 아멘 대신전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신전이 있었다. 람세스 2세의 넷째 왕자가 아버지 람세스 2세를 위해 세운 것이다. 멤피스는 내가 두 번째 온 도시다. 먼저 왔을 때도 그랬고, 오늘도 참 쓸쓸하고 애련한 도시다. 그 찬란했던 왕조의 수도였다는 곳이 한갓 허름한 시골 마을로 주저앉아 있다. 그래도 건물에서 고고한 분위기가 흐르고, 사람들에게서 깊은 뚝심이 흐른다. 정감어린 도시다.
* 이집트 멤피스 박물관
사람들은 람세스 2세의 거상을 보러 여기 온다. 람세스2세 와상이 원래는 입상이었는데 다리 한쪽이 잘려서 부식되어 이곳 박물관에 뉘어 놓은 것이다. 나는 두 번째 왔는데도 큰 감동이다. 몸과 다리만 일부 잘렸을 뿐 얼굴은 그대로다. 3천 4백여 년 전에 람세스 2세가 프타 신전을 확장하면서 만든 것으로 신전 앞에 두 개의 거상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곳에 누워있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의 람세스 중앙역 앞 광장에 서 있었다. 조각 박물관 안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은 왕관의 일부와 무릎 이하의 한쪽 다리와 한쪽 팔꿈치가 떨어져나간 채 늪에 쳐 박혀 있던 것을 1820년에 발굴하여 이곳에 옮겨다 놓았다. 한 개의 큰 석회암을 깎아서 만든 이 석상은 원래 그 길이가 15m였다. 지금은 파손되어 12m만 남아 있으며 그 무게가 80t이나 된다. 단정한 표정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거상의 얼굴은 마치 누워있는 불상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박물관의 2층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아야 어마어마한 이 거상을 다 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나오면 정원의 중앙에 연한 붉은 색의 아름다운 스핑크스가 앉아있다. 사자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가진 이 스핑크스는 길이 8m, 높이 4m의 이 스핑크스는 그 크기가 기자의 대스핑크스 다음이다. 대스핑크스는 얼굴이 망가져 있으나 아멘호테프 2세의 얼굴로 추정되는 이 스핑크스의 얼굴은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단정한 모습이 친근감을 준다. 박물관 야외 조각공원 맨 안쪽에는 야자수 사이에 상이집트의 흰 왕관을 쓴 람세스2세 입상도 있다. 높이 7m로 늠름하게 서 있다. 상 이집트의 상징인 흰 왕관을 쓰고 왼발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밀고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전형적인 입상 양식이다. 멤피스 왕조의 공동무덤이 사카라에 있다. AD 7세기까지 공동묘지무덤을 사용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박물관은 그리 크진 않다. 실내보다도 야외 조각공원이 아주 넓다. 주변에서는 상인들이 기념품을 판매한다. 사진엽서를 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 이집트 멤피스 거리
멤피스 거리는 고대 도시답게 허름하다. 한때는 찬란한 도시였을 텐데, 세월 무상을 느껴지게 한다. 야자수가 가로수로 놓인 길을 마차와 자전거 달려간다. 목재를 늘어놓은 곳도 있다. 도심에 들어와도 거리 풍경은 동일하다. 허술한 집들, 농사지은 채소를 싣고 가는 마차,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 과일가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 소박한 시민들 등 정겨운 모습의 도시다. 학교도 있고, 하교하는 남학생과 머리에 하얀 천을 두른 여학생들이 우리 버스 곁을 스친다. 가게 건물 앞에 당나귀를 매어 둔 곳도 있다. 내 조국 50년~60년 전 유년의 향수로 보는 진풍경이다.
* 이집트 농부의 벗인 새들
농토에 날아온 새들 이집트에는 농부의 벗이라고 부른다. 농부가 땅을 헤적일 때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날아오는 것인데 사람들 바로 곁에서도 날아가지 않고 맴돈다. 농부가 일할 때 그 새들로 인해 외롭지 않아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시가지를 벗어나면 농부와 새들이 함께 정답게 농사짓는 땅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란 들녘에 하얀 새들이 꽃처럼 아름답다.
* 카이로 나일강 다리
이제 카이로 여행을 마치고 크루즈배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카이로 시가지를 지나 나일강 다리를 건넌다. 강을 중심으로 시내 쪽은 우람한 고층 건물이 들어서서 아름답고, 반대쪽은 경작지로 파란 물결의 농작물이 아름답다. 나일강은 강폭도 상당히 넓다. 많이 지나다닌 강다리인데도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으로 다가온다. 나일강은 이집트의 어머니 젖줄이며, 생명의 강이다. 그런 직함을 받기에 충분한 강이다.
* 카이로에서 소크나항 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크루즈배가 정박해 있는 이집트 소크나 항구로 간다. 아까 왔던 그 고속도로로 간다.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아주 웅장하다. 진입 문도 우람하고 특히 스핑크스 부조 장식이 여기는 이집트임을 외치고 있다. 고전적 향기가 물씬 배인 톨게이트다.
* 이집트 사막의 일몰
카이로에서 소크나 항구로 가는 길에 본 사막의 일몰은 비경이었다. 달려도, 달려도 사막광야이거나 사막 암석산인 이번 여행에서 사막의 일몰까지 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막막한 사막광야에서 해넘이를 보는 것이다. 빛이 사막에 눈부시게 내리며 하루를 접는다. 사막에서는 해가 지면 금방 어두워진다. 소크나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 밤 배는 샴엘쉐이크로 항구로 간다.
* 크루즈 배 댄스 강습
크루즈 배에서 우리 한국 여행객에게 제공해주는 특별 댄스 강습 시간이다. 지난 봄에 다녀온 지중해 크루즈에서도 이런 시간이 있었다. 오늘의 댄스 강사는 남자와 여자 두 명이 나왔다. 특히 남자 강사가 어찌나 코믹하게 가르치는지 참 많이도 웃었다. 모두 연령대가 높아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 강사가 우스꽝스럽게 우리들의 모습을 흉내 내어 아이들처럼 까르르 웃었다. 춤을 못 추면 어떠한가. 그저 흥겨운 춤사위로 즐거운 시간이면 족하지 않을까싶어 마음껏 움직였다. 1시간 정도 춤을 추고 나니 땀으로 흠뻑 젖었다. 크루즈 여행에서 맛보는 행복한 시간이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이집트 샴엘쉐이크 국립공원, 나아마 베이
* 이집트 샴엘쉐이크 항구 기항
이집트 소크나 항구에서 밤새 달려온 MSC 아르모니아호 크루즈배가 이집트 샴엘쉐이크 항구에 기항한다. 기항할 때면 아주 서서히 육지에 배의 몸체를 바짝 붙인다. 선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흥미로운 여행의 한 단락이다. 샴엘쉐이크는 이집트 속의 유럽이다. 이제 아프리카지만 아프리카를 닮지 않은 세계적인 샴엘쉐이크 휴양지, 그리고 성경 속 모세의 시내산 등을
여행할 것이다.
* 샴엘쉐이크 라스모하마드 국립공원 스노클링
샴엘쉐이크 라스모하마드 국립공원 해변에 가서 스노클링을 한다. 배에서 큰 타올을 가지고 았다. 바닷가로 가면서 구명조끼와 오리발 스노클링 장비를 가게에서 대여했다. 바다 가까이까지 버스가 들어간다. 이곳 국립공원은 바다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아무런 시설을 해놓지 않았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모든 짐도 버스 안에 두고 나갔다. 이곳 홍해 바다는 알맞은 파도와 알맞은 깊이로 스노클링하며 즐기기에 아주 좋다. 산호초가 많아 다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더 바다 멀리 나가면 열대어도 있다. 남편과 함께 환상적인 홍해 바다에 몸을 담그고 멋진 낭만의 시간을 엮었다. 사진은 우리를 이끌고 간 남사장님이 찍어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 크루즈 배 갑판에서 본 풍경
오전에 홍해 바다에 들어가서 스노클링해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뷔페로 중식을 하고 개운한 몸으로 크루즈 배 갑판에 올라갔다. 갑판 위에는 휴식하는 사람이 많다. 유럽인들은 거의 나신으로 일광욕을 즐긴다.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사람도 있다. 배을 둘러싼 주변은 상당히 아름다운 항구다. 시나이 반도는 묘한 아름다움이 깃든 땅이다. 사막과 바다가 만나 절경을 이룬다. 특히 이곳 샴엘쉐이크 항구 주변은 암석 사막산이 비경이다. 코발트빛 홍해 바다와 하늘 사이에 놓인 우람한 사막산 산맥은 전설 같은 장면이다.
* 샴엘쉐이크 항구 하선
오전에는 홍해 바다에서 수영과 스노클링으로 보내고 크루즈 배에 승선했다가 배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샴엘쉐이크 항구에 다시 하선했다. 샴엘쉐이크 시티 투어와 나아마 베이에 가기 위해서다. 날씨가 청명하여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청아한 정경이다. 바다 건너에는 주름진 사막산 산맥이 병풍처럼 줄지어 이어진다. 모두 고운 풍경으로 명화를 그려낸다.
* 샴엘쉐이크 시티 투어
오늘 일정 중 시티 투어는 사실 여행 계획에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 허락되어 버스를 타고 샴엘쉐이크 시가지를 구경한다. 항구 주변은 식물들로 울창하고 도로도 넓고 아름답다. 관광지라서 거리가 아주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다. 주택이 대부분 하얀색이다. 고운 색상의 꽃이 주택을 더욱 빛낸다. 버스는 점점 도심으로 들어간다. 샴엘쉐이크에는 신호등과 차선이 있다고, 기막힌 땅이란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 비행기가 들어온단다. 가끔 샴엘쉐이크 상공에 비행기가 보였다. 세계인이 찾아오는 휴양도시라는 말이 실감난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정교회
샴엘쉐이크 시티 투어로 정교회에 갔다. 교회 건물이 곡선으로 아름답다. 지붕 위 십자가 모양도 곱다. 정원에는 벤치와 고운 식물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하고 평화롭다. 큰 사자상도 있다. 교회 내부에도 들어갔다. 사진을 찍어도 되는 곳이다.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도 있고 성화가 많다.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벽면에 걸어 두었다. 천정에도 성화가 있다. 매우 성스러운 정교회다. 신도를 위한 의자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교회다. 외국인 여행객에게 출입을 허락해 주어서 고마웠다. 교회에서 나와 버스로 조금 가니 높은 첨탑의 모스크가 있다. 이슬람 사원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서로의 종교에 대해서 존중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 샴엘쉐이크 해변 도로
샴엘쉐이크 시가지는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어느 곳을 가든 해변 도로를 거쳐서 갈 때가 많다. 이 도시를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시내에서 시내로 나갈 때도 해변 도로는 늘 곁에 있었다. 아름다운 도로다. 홍해라는 바다도 큰 낭만이고, 홍해라는 이름이 성경 속에 등장하는 바다라서 더욱 역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여러 면에서 정감이 가는 해변이다. 해변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쪽은 푸른 식물이 울창하고, 다른 한쪽은 사막이다. 식물이 자라는 곳은 인공으로 물을 주어서 기르는 것 같다. 그 어느 이집트의 건조한 사막과 크게 다르지 않은 땅이다. 건조한 해변 도로도 달려보고, 촉촉하게 키워 놓은 싱그러운 야자수 해변 도로도 달려보며 샴엘쉐이크의 추억을 새기는 소중한 여정이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시가지 풍경
버스에서 내려 샴엘쉐이크 시가지 구경을 했다. 한국은 겨울인데, 눈도 오고 무척 춥다는데, 이곳은 알맞은 온도에 파란 식물이 싱싱한 아주 좋은 날씨다. 이런 날씨, 이런 환경 또한 세계 여행에서 얻는 기쁨이다. 이 도시는 관광지라서 신혼여행도 많이 오고,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어서 기념품 상가가 많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상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겨운 일이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도 많다. 거리도 깨끗하고 상가와 식당, 카페 등이 아름답게 장식이다. 해변도시라서 반바지와 반팔, 슬리퍼 차림의 사람도 지나다니고, 어른이 두 바퀴가 달린 장난감 같은 것에 몸을 싣고 운전하며 다닌다. 진풍경이다. 노천 식당도 대단히 크다. 길가에 내어놓은 의자들이 도로 한 구역을 다 메운다. 전형적인 휴양도시의 향수를 자아낸다. 도심을 지나 나아마 베이의 해변으로 갔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나아마 베이
샴엘세이크는 이집트 홍해 연안의 도시 중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남부 삼각점 끝점의 도시다. 연중 눈부신 태양, 멋진 해변은 최고의 휴양지다. 시내를 벗어나서 나아마 베이 해변으로 갔다. 석양이 드리운 해변은 비경이다. 고운 금모래 해변에는 방갈로와 비치의자를 길게 설치해 놓아 아늑한 풍경이다. 휴양시설과 함께 배도 정박해 있고, 야자수가 이국의 향수를 자아낸다. 카페에서 커피와 망고 등 과일 주스를 먹었다. 어둠이 점점 드리우고 해변의 낭만은 더욱 짙어간다. 푸르게 잘 가꾸어 놓은 식물들이 상큼한 향기로 감싼다. 샴엘쉐이크는 이집트에서도 관광 특구로 행정자치구역이다. 주변 환경도 좋지만 해변을 비롯한 시가지, 등 모든 조건에서 시설을 잘 갖추어 놓아 관광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정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또 오고 싶은 도시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야경
나아마 베이를 떠나 샴엘쉐이크의 밤거리를 걸었다. 조명과 함께 아름다운 거리다. 가게와 음식점, 카페 등의 불빛은 은은한 그리움으로 벌써부터 가슴속에 파고든다. 이곳 도시는 이집트 자치구로 관광 특구다. 그래서 여행객에게는 아주 편리한 시설도 많고, 밤이 되어도 여전히 낭만이 서려 있다. 물담배 통을 길가 테이블에 올려둔 카페도 있다. 이색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크루즈 배에 승선했다. 내일은 이 배를 떠난다. 오늘 밤 큰 가방을 챙겨서 밤 12시까지는 선실 밖에 내놓아야 한다. 부지런히 정리하고 크루즈배의 마지막 밤을 행복하고 편안한 휴식으로 맞이했다. 홍해 크루즈, 잊지 못할 고운 여정이다.
2012년 12월 15일 토요일 이집트 시나이 반도, 성캐더린 수도원
* 이집트 샴엘쉐이크 항구의 새벽풍경
지난 밤 크루즈 배는 이곳 샴엘쉐이크 항구에서 정박했다. 하루를 우리와 함께 잔 것이다. 오늘은 배에서 완전히 하선하는 날이어서 순간, 순간이 아쉬운 시간이다. 일찍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보니 새벽이 열리고 있다. 항구의 여명은 촉촉한 불빛과 함께 참으로 아름답다. 발코니 의자에도 앉아보고, 이집트 샴엘쉐이크 항구에서 새벽을 맞으며 배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낭만으로 보듬는다. 5층 로비에서 모여 하선한다. 모임 장소의 원형 유리창이 창밖의 항구 풍경을 동그랗게 그려낸다. 오늘따라 어쩌면 저리도 고울까. 샴엘쉐이크 항구의 고운 풍경은 떠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항구 크루즈배 하선
오늘은 크루즈 배에서 떠나는 날이다. 어제 밤에 무거운 짐은 밖에 내놓았기 때문에 가벼운 차림으로 하선한다. 시나이 반도의 시나이산 성캐더린 수도원까지는 먼 거리이고, 또 오후에는 비행기를 타야해서 일찍 출발한다. 배에서 조식 뷔페 시간이 늦어서 우리는 아침식사를 도시락으로 받았다. 이탈리아 선사 MSC 아르모니아호, 우리의 바다 호텔이었던 정든 배를 떠난다. 오늘은 시나이산 여행이다. 여기서 40Km다. 아침을 여는 항구는 참으로 아름답다.
* 샴엘쉐이크 항구에서 시나이산 가는 길
샴엘쉐이크 항구를 출발하여 시나이산으로 간다. 아침이 열리는 홍해의 샴엘쉐이크 항구가 아름답다. 항구를 벗어나자 여러 갈래의 사막 도로가 나온다. 오늘 우리가 가는 산은 시나이 반도에서 3번째 높은 산이다. 모세의 시내산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성캐더린 수도원을 탐방하는 일정이다.
* 시나이 반도 사막 암석산 산맥
시나이 반도 서쪽은 수에즈 운하와 수에즈만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동쪽은 아카바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시나이 반도는 또한 아라비아 반도(사우디아라비아 및 요르단) 및 이스라엘에 각각 접하며, 북쪽은 지중해에 면한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온 모세가 이곳에 도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사막산 바위가 장관이다. 암석산 산맥을 이루고 있다. 푸른 산들의 산맥과 나무가 없다는 것뿐 다를 게 없다. 아름다운 형상으로 우람하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암석산의 바위색도 적색, 녹색 등 다양하다. 사막 광야의 싯딤나무도 있다. 싯딤나무는 한국어로는 조각목이다. 시나이 반도에서 상자를 만드는 유일한 나무다. 법궤를 만든다. 시나이 반도 사막의 비경을 감상하며 서서히 해발 1500m 고지까지 간다.
* 시나이 반도 사막 검문소
이집트 여행 중 많은 곳에서 검문소를 만난다. 특히 오늘은 성캐더린 수도원에 가는 중이어서 엄격한 검색을 받는다. 유엔보호구역은 철조망이 쳐져 있다. 이집트 군 초소에서 여권 검색을 한다고 여권을 준비하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권까지는 검사하지 않고 현지 가이드와 한국 교민 가이드가 검색에 응하면 잠시 머물다가 출발한다. 검문소에는 항상 장총을 메고 있는 경찰이 몇 명씩 있다. 수도원까지 가면서 이런 검문소를 여러 번 거칠 것이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지켜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 시나이 반도 사막광야
시나이 반도 사막은 줄기차게 이어진다. 암석산이 보이다가 사막 평원이 보이고, 모두 신비롭다. 광야에서의 거리는 가늠하기 어렵다. 가까운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아주 멀다. 평원이서서 그렇다. 사막광야 저 멀리 사막산 군락도 보인다. 그러다가 건물이 보이기도 하고, 나무가 보이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하도 많이 보아 익숙해진 풍경이지만 보아도, 보아도 낯선 비경이다.
* 시나이 반도 사막광야의 베두인
시나이 반도 사막 광야에서 사는 베두인을 만났다. 천막집이 사막 위에 있고, 집 주변에 약간이 나무가 있고, 낙타를 타고 가는 베두인이 보인다. 사막에서 베두인이 사는 곳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물이 나오는 곳이다. 가끔씩 가다보면 물이 고인 사막이 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의 물이다. 그런 곳에서 동물을 기르며 산다. 저들에게 낙타는 자가용 격이며 사막생활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다. 검문소를 지나 점점 수도원 가까이로 가고 있다.
* 시나이산 성캐더린 수도원 매표소
사막산 광야를 달려온 버스가 성캐더린 수도원 매표소 앞에 멈췄다. 이집트 현지 가이드가 나가서 입장권을 사 왔다. 외국 여행객도 있고, 자국 여행객도 있다. 베두인 상인도 있다. 우람한 사막 암석산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깊은 사막산으로 들어 온 것이다. 높은 사막산 위로 청명한 하늘과 하얀 구름이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 시나이산 낙타체험
시나이산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성캐더린 수도원 앞까지 낙타를 타고 가는 체험이다. 걸어서 갈 수도 있는 거리인데 베두인의 낙타를 타 보는 코스다. 정류장 근처에는 베두인들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여기는 고지대이고 사막산 깊은 골이어서 가게가 그리 많진 않다. 여행객 외에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곳이다. 가게에서 조금 앞으로 나가니 베두인들의 낙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 마리의 낙타에 한 사람씩 탔다. 낙타는 코끼리와 달리 등이 가파르고 봉이 있어서 사람이 앉을 면적이 좁고 불편하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낙타의 등에 올랐다. 나의 낙타를 몰고 가는 베두인은 아주 용감했다. 뒤편에서 출발했는데 맨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나중에 성캐더린 수도원에서 나올 때도 낙타를 탔는데, 이 베두인의 낙탁에 나를 태워줬다. 그때도 늦게 출발했는데 빠른 속도로 낙타를 몰아 맨 앞으로 나갔다. 아마도 그 베두인이 이들 낙타의 선두주자로 정해진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낙타의 등에 오를 때와 갈 때, 낙타의 움직임에 맞춰 리듬을 타며 갔다. 나는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전에 낙타를 탔던 기억을 회상하며 멋진 포즈로 잘 탔다. 말의 등에 있는 봉을 잡고 두 발을 말에게 착 붙이고 따스한 말의 체온을 느끼며 뚜벅뚜벅 갔다. 거칠고 힘든 사막산 길을 태워다 주는 낙타와 베두인에게 정말 고마웠다.
* 모세의 시내산
사나이 사막산 광야 지나 이미 버스로 시나이산 1500m까지는 아주 서서히 평지처럼 오른 것이다. 시나이 산Mount Sinai는 해발 2258m 모세의 산이다. 최고의 기독교인 성지다.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받았다. 계명 10개 중 5개는 하나님과 인간관계, 5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2개의 돌판에 새겨졌다. 시나이 반도에는 2천 미터 이상의 산이 3개 있다. 첩첩 산중이다. 모세의 시내산은 여기서 더 멀리 있다. 시나이 반도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이라 하여 많은 기독교도들이 성지순례를 온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 중남부에 있는 화강암 봉우리다.
시내산은 유대인 역사에서 신이 그 모습을 드러낸 중요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 전설에 의하면 시나이 산에서 10계명뿐 아니라 성서내용 및 주해서 전체를 모세에게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산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신성시하는 곳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탈출한 경로에 관한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고 성서에 나오는 지명이 현재의 장소와 꼭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시나이 산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나이산 자체는 오래전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전설적인 장소로 인정되고 있다. 이 지역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수행가 자주 찾던 곳으로, 530년 시나이산의 북쪽 기슭에 카타리나 수도원이 세워졌다. 지금도 자치적인 시나이산 정교회의 몇몇 수도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수도사가 계속 거주하는 그리스도교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 소장된 그리스 성서 사본인 '시나이티쿠스'(지금은 영국 박물관에 보관)를 비롯한 고대성서 사본들은 성서를 재편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해발 2,285m의 시나이 산은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관리하다가 1979년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이곳은 순례지이며 관광지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붉은 암석 바위산인 시나이산에 올라갔다. 산을 타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탄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바로 그 산정은 아니지만 저 산 너머 가까운 곳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있다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훈훈한 전설이다. 산 중턱에 걸터앉아 성캐더린 수도원을 조망했다. 힘들게 올랐지만 수도원이 아주 잘 보인다. 주름진 암벽산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아름답고 절벽이 아슬하다. 모세처럼 시내산에 기대어 하나님과 상면하는 은혜로운 시간이다. 산과 산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나무 한 그루가 중턱에 외로이 서 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우람한 시나이산이 에워싸고 있다.
* 시나이산 성 캐더린 수도원
성 캐더린 수도원은 시나이산 중턱에 있다.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수도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위산 사이로 간다. 이곳은 보호구역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낙타를 타고 간다. 수도원 앞에서 내려 먼저 시나이산 위에서 수도원 외부를 조망했다. 시내산 아래 대단히 넓은 자락으로 앉아 있다. 외부의 모습만으로도 아주 성스럽고 아름답다. 이 막막한 사막에 오직 수도원만이 들어서 있다. 사방에 성벽을 쌓아 성처럼 지었다. 기독교 문화의 초석이 된 곳이다.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성당이다.
시나이산에서 내려가서 성 내부를 관람했다. 정문이 따로 있고, 일반인은 관람객을 맞이하기 위해 성벽을 조그맣게 뚫어 놓은 문으로 들어갔다. 모세의 우물, 떨기나무, 수도원 내부 등을 본다. 가장 오래 된 성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6세기 중엽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재위 기간 중에 건립 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1400년 이상 원래 그 자리에서 시내산을 지켜온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수도원은 다른 문명 도시와는 동떨어진 시나이 반도 남단 시내산 기슭에 위치했다. 그래서 오랜 역사 동안 주변 정치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훼손되는 일 없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라 불린다. 수도사들의 해골 무덤도 있다. 그곳은 외인 출입 금지다. 수도원에 들어서자 입구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우물이 있다. 무사는 이곳 말로 모세다. 성전에도 들어가서 성스러운 구역을 관람했다. 성화가 성경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성전을 나와 전 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없다는 모세의 떨기도 보았다.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 보호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라고 불렀던 곳이다.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하여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바로 그곳이다. 그 자리에 세워진 수도원이다. 떨기나무는 불타는 나무란 뜻이다.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란다. 성경 속의 그 떨기나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른 그 떨기나무 앞에 서니 그날이 그려져 큰 감동이었다. 수도원에서 나와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갈 때도 낙타를 타고 나왔다. 주차장 앞에는 베두인들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이곳은 높은 해발 1500m 고지여서 포근한 겨울용품도 판다. 머플러와 망토 샀다. 사람들이 아주 순진하고 거품이 없는 가격으로 팔고 있다. 베두인 아이들이 우리가 타는 버스 앞으로 달려와 무언가 주길 원한다. 호텔에서 점심 도시락으로 받아온 빵이 남아서 나누어주며 훈훈한 정을 나누었다. 수도원과 함께 그 애련한 정경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시나이 반도 중식식당
이곳은 사막의 별천지다. 인공으로 물을 주어 기른 나무들이 울창하고, 시나이 반도에 여행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놓은 환상의 공간이다. 수영장까지 완벽한 리조트다. 식당도 아주 훌륭한 내부에서, 아주 풍성한 식단으로 외객을 맞이한다. 현지식 부페로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와 아름다운 조경의 정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사막에서도 꽃은 피고, 나무도 자라고, 비록 인공이지만 흐뭇한 정경을 보는 시간이었다.
* 시나이 반도 사막산 비경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암석 사막산이 비경이다. 주름진 것이 그렇고, 겹겹이 산맥처럼 이어진 것이 그렇고, 독특한 색상이 그렇다. 성분 함유 차이로 붉게, 푸르게, 검게 색상을 드러내는데 대단히 아름답다. 사막산만으로도 이색 풍경인데 고운 색상으로 서 있 사막산이 우리들 눈에는 독특한 명화로 뜬다. 사막 광야에 베두인 마을도 있다. 작은 군락으로 모여 있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은 그래도 수맥이 흐르는 사막지대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암석 사막산이 어우러진 진풍경을 본다.
* 시나이 반도 사막의 베두인 카페
점심을 먹었으니 베두인이 사막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차 한잔 하고 가자고 잠시 내렸다. 기념품도 판매한다. 염소를 방목한다. 사람을 따라 다니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외로운 사막 생화을 동물과 함께 하는 것이다. 베두인 자고 생활하는 살림방도 있다. 좌식 소파와 작은 테이블, 바닥에 깔아놓은 융단이 전부다. 집 뒤에는 자가용도 있다. 망고와 레몬주스로 사막의 낭만에 젖었다. 카페 앞에는 사막도로가 있어 간간이 차들이 왕래한다. 카페를 떠나 조금 갔을 때 도로변에 군용트럭이 그대로 놓여있다. 초소인 듯하다. 파란 나무들도 있다. 이집트 군대는 복무연한이 학력에 따라 다르다. 대졸은 1년, 고졸은 2년, 고졸 이하는 3년 복무다. 이집트는 80만 명의 군인이 있다. 대단한 국방력이다. 버스는 샴엘쉐이크를 향해 달리고 있다.
* 샴엘쉐이크 도착
시나이 반도에서 다시 샴엘쉐이크로 돌아왔다. 시가지에 접어드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호스를 들고 도로변의 꽃에게 물을 주는 남자가 있다. 안쪽 넓은 곳에서는 자동으로 물을 분사시켜 인공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건너편은 여전히 사막으로 나뒹구는 삭막한 땅이다. 홍해 해변로를 따라 올드 마켓으로 간다.
* 샴엘쉐이크 올드마켓
올드 마켓에서 자유시간을 갖었다. 시장 곳곳을 둘러보며 기념품도 많이 샀다. 샴엘쉐이크는 휴양도시라서 여행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다양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많다. 값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이집트 문양의 머플러와 홈드레스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모자를 하나씩 샀다. 그리고 3살인 첫손자 티셔츠와 두 며느리와 함께 입을 홈드레스를 몇 벌 샀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과일, 야채,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진열된 큰 시장이다. 이곳에서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현지식 석식을 했다. 양고기, 빵, 밥, 야채, 비트, 소스, 레몬주스, 등 풍성한 식단이다. 석식 후 샴엘쉐이크에서 카이로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샴엘쉐이크 공항으로 이동했다.
* 이집트 샴엘쉐이크 공항 출발
샴엘쉐이크 공항에서 저녁 8시 45분 비행기를 타고 카이로 간다. 여기서 카이로까지 버스로는 12시간 거리인데 비행기로는 1시간 거리다. 스타얼라언스 항공이다. 아시아나와 제휴사라서 아시아나 마일리지가 적립된다. 항공권을 받아 탑승수속을 마치고 2층 탑승 게이트로 올라갔다. 아담한 공항이다. 이집트의 휴양도시, 이곳저곳 참으로 많은 추억을 담아 가지고 아쉬움으로 떠난다. 이곳을 또 언제 올까. 이제 다른 국가로 여행을 떠나겠지, 다시 이곳에 오겠는가. 시나이 반도의 아름다운 도시를 가슴 깊이 품고 간다.
* 이집트 카이로 공항 도착
샴엘쉐이크를 떠난 비행기는 1시간 후에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으러 짐벨트에 가 보니 아직 짐이 나오지 않았다. 빈 벨트만 돌고 있다. 순간 내 조국의 인천공항이 떠올랐다.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하면서 어느 한 번도 짐벨트에 사람보다 짐이 늦게 나온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부지런한 대한의 기상을 다시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캄캄한 밤, 짐이 나오고, 그래도 무사히 날라다준 비행기와 카이로 공항에 감사하며 잘 찾아서 나왔다.
* 이집트 카이로 호텔 투숙
먼저 유숙했던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유숙한다. 오늘 우리 부부의 방은 3015호실로 3층 15호실이다. 내일은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 올드 카이로 간다. 한식으로 중식 후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까지는 버스로 4시간 소요되는 도시다. 고운 호텔에서 편안한 밤을 지냈다.
2012년 12월 16일 일요일 이집트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 카이로 호텔 출발
두 번째로 머문 이 호텔을 이제 떠난다. 실내 풍경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호텔이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버스에 올라온 우리 일행들이 아쉬움에 서로 전화번호를 적었다. 연령대가 비슷하여 정이 많이 들었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한곳만 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호텔을 출발하여 카이로 시내가 가는데 도로 벽면에 이집트 특유의 그림을 그려서 세운 것이 독특한 풍경이다.
* 카이로 시가지
지난 밤 유숙한 호텔은 카이로 공항 근처에 있다. 카이로 시가지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시가지로 들어가자 오밀조밀하게 모인 빌라형태의 주택들이 보인다. 조금 더 들어가자 우람한 카이로 건물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 알레산드리아 기차역을 지나는데 역전에 버스가 많다. 상쾌한 아침이 열리는 아프리카 이집트 카이로의 풍경이 정겹다.
* 이집트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
카이로 신시가지의 중심지인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 있는 이집트 고고학박물관은 1902년 개관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박물관이다. 나는 고고학 박물관에 두 번째 왔다. 붉은 건물이 정겹다. 외부는 사진촬영이 가능하지만 내부는 사진을 촬영 금지다. 그래서 바깥 건물과 정원, 파피루스 나무, 분수, 스핑크스, 파라오 석상 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모두 카메라를 현지 가이드에게 맡겼다. 1층에서 소지품 검색 후 내부로 들어간다. 이어폰을 받아서 귀에 대고 한국어로 설명을 들으며 1층과 2층을 자세히 관람했다. 선사 시대부터 그레코로만 시대 초기에 이르는 유물 13만 점이 전시되고 있다.
1층은 람세스 2세 등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동상이 전시돼 있다. 가이드가 상영문자를 해석해준다. 오리 그림 위에는 반드시 해가 있다. 오리는 태양의 아들로 파라오를 상징한다. 이집트 고대 파라오 왕조 유물은 과거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해외로 반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슬람 시대에는 모스크 건축 등의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석조 유물 등이 다수 파손되었다. 2층은 투탕카멘 왕묘에서 출토된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전시돼 있다. 대부분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건축물의 일부, 부조, 벽화, 공예품들이다.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미라 특별 전시실 내부로 들어서면 이름난 파라오들의 미라가 보이는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람세스 2세의 것이다. 미라가 9겹으로 봉해져 있기도 하다. 기원전 2700년 이전부터 이집트에서 종이로 사용했던 파피루스에는 파라오들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물 중에는 투탕카멘 왕의 황금 마스크, 옥좌, 침대, 목걸이 등이 유명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Pharaoh는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다.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다가, 죽은 후에도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파라오들은 죽음 뒤의 영원한 세상을 믿고 현재보다는 사후의 세계를 더 중요시했다. 자신이 묻힐 무덤을 정성들여 아름답게 만들었다. 부장품도 많이 넣고 당시의 생활상이나 자신의 치적 등을 담은 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 카이로는 이집트 고고학박물관을 비롯해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나일강, 이슬람 사원 등은 찬란했던 5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박물관에서 나올 때는 출구가 다르다. 입구는 중앙에 있고, 출구는 왼편 끝에 있다. 박물관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관람 후 휴식하는 사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 내국인과 외국인 등 가득하다. 잠시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곁에 앉은 젊은 청년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남한이냐고 하여 그렇다고 했더니 아주 반가워한다. 아침 햇살이 곱게 내린다. 담장 밖으로 일반주택도 보인다. 이 도서관을 지을 때 크게 기여한 프랑스 사람의 동상도 있고, 파라오 석상도 있다. 이집트 역사를 공부한 보람된 시간이었다.
* 카이로 나일강변 풍경
카이로의 나일강은 아주 낯익은 강이다. 몇 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도 많이 보았고, 나일강 유람선도 탔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여러 번 나일강변을 지난다. 카이로를 가로지르는 나일강은 상당히 넓다. 나일강 다리 또한 길게 강위에 놓여 있다. 카이로의 어머니 같은 젖줄이며, 생명의 강이다. 강 주변에는 여러 시설이 많다. 유람선 타는 곳도 있고 시민들의 휴식공간도 있다. 강변에는 카이로 타워가 높이 솟아 있고, 높고 낮은 건물들이 많이 줄 서 있다. 남에서 북을 흘러가는 길고 길 강줄기를 카이로에서 보는 것이다.
* 이집트 올드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에서 나일강을 지나서 왔다. 올드 카이로는 예수님 피난 교회가 있는 곳이다. 카이로성 건설 이전 지역이다. 992년 이전 도시다. 카이로가 시작된 곳인 올드 카이로는 이슬람 지역 남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올드 카이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장소답게 흥미롭고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정치는 물론 역사와 종교사에 이르기까지 카이로를 이야기할 때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특히 종교와 언어,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중요한 지역이다. 카이로 이슬람 지역과 가까이에 있는 올드 카이로는 주로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다. 이슬람교가 이집트에 전파되기 전에는 많은 이집트인들이 기독교를 믿었는데, 카이로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바로 올드 카이로였다. 지금도 이곳에는 여러 곳의 교회와 기독교 유적지들이 남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 대신 콥트 교파나 그리스 정교회 등의 기독교를 믿고 있다. 대표적인 기독교 유적지는 아기 예수 피난 교회, 세인트 조지 교회와 콥트 문화를 보존하고 콥트 박물관이다. 콥트 박물관에는 고대 이집트 왕조 시절에 사용했던 생활용품과 아름다운 조각, 콥트 직물, 프레스코 그림 등 독특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아기 예수 피난 교회는 요셉이 아기 예수와 함께 로마군을 피해 살았던 동굴이 있었던 자리에 세웠다. 원래는 천연 동굴로 아기 예수가 13개월 동안 숨어 살던 곳이다. 또한 올드 카이로에는 콥트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운 교회 등이 있다. 각기 조금씩 다른 건축 양식과 종교적인 특징이 남아 있는 교회들을 보면 이집트가 얼마나 종교에 관대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올드 카이로는 옛 카이로가 어떤 곳이었으며, 옛날 이집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다.
올드 카이로에 들어서자 로마 수로 같은 아치형으로 구멍 뚫린 성벽이 곁에 있다. 그 벽에 짐승 가죽을 걸어두기도 했다. 고풍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니, 더욱 높고 낡은 고전적인 건물들이 빼곡하다. 벽 사이 좁은 거리에서 기념품을 파는 할아버지, 벽면에 천 그림을 걸어둔 곳, 고전 책을 파는 곳, 등 옛날 풍경이다. 예수님 피난 교회에 들어갔다. 빵을 주어 나누어 먹고 의자에 앉아 교회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담하고 성스럽다. 고풍스런 거리에서 기념으로 파라오 목걸이도 샀다. 올드 카이로에서 교민이 운영하는 한식 식당에서 한국 음식으로 중식을 했다. 점점 카이로를 떠날 시간이 가까워 옴에 아쉬운 여정이다.
* 카이로 파피루스 갤러리 견학
올드 카이로에서 나일강 다리를 건너 카이로 도심을 지나 파피루스 갤러리에 견학 왔다. 최초의 종이가 파피루스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라는 식물로 종이를 만든 것이 종이의 기원이라고 배웠다. 그 파피루스 종이에 그림을 그려 전시해 놓은 파피루스 갤러리를 견학했다. 은은한 배경의 종이에 그린 그림들이 모두 명화다. 여러 크기의 화폭 담아 넓은 화실을 가득 채웠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름다운 카이로 거리다. 긴 총을 찬 경찰 두 명이 우리의 버스 앞에 있다. 외국인이 자주 오는 곳이라서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 이집트 카이로에 데모 시위가 일어나도 외국인 방문객에게는 곳곳에서 장총을 찬 경찰들이 철저하게 지켜준다. 오히려 한국 뉴스에서 볼 때가 더 무서웠다. 이곳에서는 그런 두려움이 전혀 없도록 안전한 분위기를 마련해둔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길
이제 카이로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피라미드가 보이는 카이로 시가지를 벗어난다. 마지막으로 나일강 다리를 건너서 간다. 여의도 같은 섬이 나일강에도 있다. 첫날 식사했던 그 섬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4시간 소요되는 도시다. 고속도로로 간다. 카이로를 벗어나자 사막이 나온다. 점점 위로 갈수록 사막이 적어진다. 야자수도 보이고 식물재배지가 간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에 가까이 다가온 거라고 풍경이 먼저 알려주는 것이다.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들녘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농사 재배지가 들녘에 가득하다. 이집트 지도 Y자형에서 위쪽으로 V부분이 200Km인데 그것을 이등분하여 북쪽으로 100Km까지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 200mm의 비가 온다. 그 V자의 왼쪽 끝에 알렉산드리아가 있다. Y자형 농사 재배지 부분인 상부에 진입한 것이다. 오렌지, 대추야자, 농토 등 고운 풍경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풍요로운 땅에서 만나는 일몰이 비경이다. 알렉산더는 25세에 왕위에 올랐고, 33세에 사망한 사람이다. 명마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이곳 도시에 왔고 그이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한 이집트 제2의 도시다. 1천년 간 이집트의 수도였다. 그 후 카이로로 수도를 이동했다. 근대화 시초의 도시이기도 하다. 아직도 화려한 유적이 남아있다. 풍요로운 들녘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간다.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호텔 도착
지중해 해변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먼저 저녁식사를 했다. 숭어구이와 빵, 밥, 야채 등 풍성한 식단을 베풀어준다. 사탕수수 엿으로 입가심까지 정겨운 밤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현재 수도 카이로의 뒤를 잇는 이집트 제2의 도시다. 야경이 황홀하다. 밤인데도 날씨가 포근하다. 우리가 유숙할 힐튼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은 역사적인 바다의 항구 도시다. 이곳으로 나폴레옹도, 로마왕도 들어왔다. 그런 유적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에 접한 지중해 바다의 도시를 보기 위해 여기 온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숨결로나마 만난다. 우리 부부의 방은 317호실이다. 방에 들어오니 발코니에서 지중해 밤바다가 우리를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도 파도의 일렁임과 하얀 포말이 눈앞에 다가온다. 환상적인 밤이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꺼내 이집트의 오렌지로 안주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여정이다.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알렉산드리아 폼페이 기둥, 파로스 등대, 도서관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호텔주변 풍경
지중해 바다 바로 곁의 호텔이어서 아침에 바라볼 풍경을 기다리며 어젯밤 잠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소녀처럼 동심으로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열고 밖으로 발코니로 나갔다. 어둠을 깨고 열리는 지중해 바다가 눈앞에서 출렁거린다. 뽀얀 백사장에 하얀 포말이 밀려온다.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낭만의 바다다. 우리 부부는 금년 4월에 내 환갑 기념으로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잠들지 않은 그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오늘 다시 접하는 저 지중해 바다는 큰 선물을 안겨준다. 반대편으로는 높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아침 식사도 지중해가 보이는 창가에서 호텔 뷔페로 먹었다. 바다의 황홀한 비경에 음식을 사이사이 섞어 아름답게 먹었다. 어제 샴엘쉐이크에서 산 모자가 실내에서 써도 아주 고아하다. 식사를 마치고 지중해 바다 가까이 가 보고 싶어서 산책을 나섰다. 힐튼 호텔 간판이 먼저 반긴다. 비가 내려 땅 바닥이 축축하다. 조금씩 내리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비를 보는 것은 큰 감동이다.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 갔더니 해변대로에 횡단보도가 없어 가까이는 못 갔다. 아침 출근시간이라서 차량이 많이 통행하고, 호텔 앞에는 미니승합차 정류장이 있어 사람이 오르내린다. 주변의 글씨들이 모두 꼬부라진 아랍 글자여서 정녕 내가 선 땅이 이국임을 실감나게 한다. 바다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해변 풍경을 가슴에 담은 소중한 여정이다.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호텔 출발
지중해와 마주서서, 우리를 꿈꾸듯 품어주었던 이 호텔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약간의 비가 내린 아침, 아프리카 건조한 사막의 나라 이집트에서 비를 보는 것은 황홀하다고 모두들 아이처럼 들뜬 마음이다. 여기는 아프리카지만 유럽문화다. 거리도, 건물도, 차량들도 세련된 편이다. 햇살이 나오고 비는 다시 그친다. 화사한 아침이 열린다. 오늘 일정은 몬타자 로얄가든, 폼페이 기둥, 도서관, 콰이트베이 요새, 파로스 등대, 중식 그리고 공항으로 간다. 먼저 몬타자 로얄가든에 간다. 로만극장 대신 바꾼 일정이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지중해의 진주로 일컫는다. 이집트 제2의 도시이며 중동에서 여름이 가장 멋진 곳이다. 삼각주 지대 북서쪽의 지중해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의 분위기는 중동보다는 지중해 쪽에 좀 더 가깝다. 카이로에서 22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이곳을 둘러싼 환경과 문화유산은 국내의 다른 지역과 거리가 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은 기원 전 331년 원정 중 라코티스라는 작은 마을에 이 도시의 건설을 명령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즉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다. 후에 이곳은 그리스 로마시대 이집트의 수도이자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건설 이후 이 도시는 수십 세기 동안 전 세계에 방사형으로 퍼져 있던 문화의 집배지로 군림했으며, 문화의 횃불로서 이 도시의 위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전설의 파로스 등대로 형상화되었다. 대왕 사후 이집트는 프톨레미우스 왕조가 다스리게 되는데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BC 4세기, 어떤 한 남자에 의해 세계는 크게 바뀌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3세다.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도 불리는 이 남자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문명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56년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받은 그는 철학과 의학, 과학적 탐구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BC 336년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뒤 그리스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참전하면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BC 334년에는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갔으며, BC 331년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왕도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했다. 그 후 동방 원정군을 재편성해 파르티아, 소그디아나, 인도 북서부 펀자브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원정한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로 인해 각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건설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라는 같은 이름의 도시가 서른 곳 이상 존재했으며, 그 중에 가장 번영을 누렸고,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이집트 나일 강 유역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병에 걸려, BC 323년 33세의 짧은 일기로 찬란한 생을 마감했다.
오늘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족적이 서린 그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여행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나 만났던 위대한 인물의 역사적 유적을 찾아온 것이다. 지난해 가을에 발칸반도 여행에서 그의 고향인 마케도니아에 갔을 때도 알렉산더 대왕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클레오파트라와 마크 안토니의 열렬한 사랑의 무대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 지식의 중심지였으나 결국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이집트 북부 도시 알렉산드리아, 가슴 뭉클해지는, 결코 가벼이 봐서는 안 될 소중한 여행지다.
* 알렉산드리아 몬타자 로얄가든
알렉산드리아는 한국 부산 같은 휴양도시다. 몬타자 로얄가든은 알렉산드리아 시가지 동쪽 끝에 있는 왕의 전용 별장이다. 1952년 왕정 폐지로 지금은 국민들의 센트럴 파크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며 궁전 안의 정원과 바다를 보았다. 이곳에는 야자수 중에서도 가장 비싼 야자수인 로얄팜트리가 있다. 나무 아래가 시멘트 같은 야자나무다. 이곳 정원에 들어섰을 때 곳곳에서 로얄팜트리가 보였다. 지중해 바닷가에 2개의 궁전과 왕의 개인 항구와 등대가 있다. 지금은 본궁을 영빈관으로 사용한다. 일반인은 출입금지다. ‘몬타자’는 ‘소풍가는 곳’, ‘쉬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자 동상이 잠자는 모양인데 그것은 왕들의 휴식을 상징한다. 아주 넓은 자락으로 앉은 왕들의 아름다운 여름 궁전이다.
* 알렉산드리아 지중해 해안도로
지중해변 해안도로는 호텔에서도 보았고, 지금 문타자 로얄가든에서 나와 달리고 있는 도로다. 호텔 룸에서 보니 밤새, 그리고 아침에도 파도 소리가 쏴쏴 들렸다. 겨울에는 파도가 심해서 지중해 크루즈가 운행을 못 한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사랑을 나눈 곳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허리 역할 하는 도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지나간다. 현재로 재현된 건물이라서 세련미가 보인다. 해변대로에 방파제가 있다. 바닷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다. 낚시꾼들도 많다. 서편의 폼페이우스 기둥으로 가는 중이다. 40분 정도 소요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다리도 지난다. 망망대해의 지중해가 비경이다. 지중해 끝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이 아득하다. 아침 햇살이 곱다. 멀리 파로스 등대 자리의 성 건물도 보인다. 그곳이 알렉산드리아 최초의 항구다. 지금은 내륙과 만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에는 암석 섬이었다. 지중해 바다를 오붓하게 막아 놓은 항구가 아름답다. 지중해를 품고 있는 알렉산드리아는 축복 받은 도시다.
* 알렉산드리아 유럽풍 시가지
누가 이곳을 이집트 땅이라 할까. 지중해변 도로변에도, 골목을 들어서도 시가지 풍경은 유럽풍이다. 첫째 외형적인 건물에서 그렇고, 차량행렬에서 그렇고, 통행하는 사람들의 외모에서도 그렇다. 모두 세련되고 질서가 있다. 유럽여행에서 본 육중하고 중후한 건물들이 붙어서 늘어서 있다. 색상에서만 차이가 난다. 유럽은 진한 갈색톤 건물이 많은데 이곳은 해변도시라서 그런지 하얀색 계통의 건물이 많다. 거리도 잘 정비되어 있다. 지중해 바다와 만날 때는 더욱 비경이다.
* 알렉산드리아 시가지 전차
지중해변 도로에서 좌회전하여 시내 쪽으로 진입한다. 세라피스 신전으로 가고 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한국의 명동 지역과 같은 곳이다. 전철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차가 많이 지나간다. 전차가 가는 동안 우리 버스는 기다리고 있다. 전철선설 위로 버스가 통행한다. 건널목의 턱도 없다. 마차도 다닌다. 사람도 다니고, 모두 구분 없이 다니는 길이다. 독특한 풍경이다. 도로 중앙에 무덤 건물도 있다. 복잡한 재래시장을 거쳐 버스는 잘도 간다. 이색 풍경을 보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큰 보람이다.
* 알렉산드리아 폼페이 기둥
폼페이 기둥은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스 신전이 있던 자리에 있다. 세라피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신이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위대한 장군인데 사살 되었다. 시체가 행방불명인데 소금 항아리에서 그의 목이 나왔다. 그 유골함이 세라피스 신전 기둥 밑에서 발견되어서 폼페이 기둥이라 부를 뿐이다. 이곳의 폼페이 기둥에서 폼페이는 이탈리아의 폼페이 도시와는 무관하다. 기둥의 명칭도 실제 기둥의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기둥의 유래가 정확하지 않았을 때 여행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한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를 기리기 위해 붙였던 이름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입장권을 사서 입장했다. 폼페이 기둥은 장대하다. 날씨가 청명하여 유난히도 파란 하늘 위로 기둥은 높다랗게 솟구쳐 있어 소슬하다.
이 기둥은 서기 292년 디오클레시안 황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알렉산드리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식량을 보내준 황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유명한 로마 장군이다. 로마 제국의 삼두정치 시절에 카이사르에게 대항해 싸우다가 그리스 전투에 패한 후 이집트로 도주해 왔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프톨레미우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 때다. 이집트 정부는 카이사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도피해 온 폼페이우스를 사로잡아 목을 벤 후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폼페이우스의 목을 받은 카이사르는 그것을 항아리에 넣어 알렉산드리아 성 밖에 묻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유골 항아리가 바로 이 기둥 꼭대기에 있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이 기둥은 ‘폼페이우스 기둥’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세라피스 신전도 무너지고 남아 있는 높이 약 25m, 둘레 9m, 두께 약 2m의 거대하고 붉은 빛이 도는 이 돌기둥은 900km 남쪽에 위치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화강암이다. 코린트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스핑크스와 함께 있다. 당시에는 같은 크기의 기둥이 400개나 서 있었다고 하는데, 나머지 399개의 돌기둥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 기둥 옆에 포톨레미 왕조가 황소 신 아피스를 숭배하려고 건설한 신전 세라피움과 신전에 부속된 도서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세라피움 신전과 도서관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세 개의 화강암 스핑크스만 남아 있다.
단순히 폼페이 기둥만 보는 곳이 아니었다. 신전이 무너진 터전이 상당히 넓고, 그 잔해가 곳곳에 많다. 그 터전 위에 폼페이 기둥이 오롯하고 스핑크스가 있다. 부수어진 기둥들도 밑에 많이 세워놓았다. 높은 기둥 가까이까지 가 보았다. 높은 곳이어서 담장 밖으로 알렉산드리아 시가지가 훤히 보인다. 바깥 입구에는 ‘Pompey's Pilla’ 라는 간판이 있다. 바로 앞에는 전차선로가 박힌 자동차도로가 있다. 상가와 주택, 아파트 등이 밀집해 있다. 완전 번화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복잡한 곳에 위치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큰 유적지다.
* 알렉산드리아 재래시장
전차와 자동차들이 함께 통행하는 도로를 지난다. 바닥에 전차설로가 있다. 그 위로 전차도 가고 자동차도 가도록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신기한 도로 풍경이다. 조금 가다보니 가게에 앉아서 물담배 피는 남자들이 보인다.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자 재래시장이 시작된다. 가게는 터키에서처럼 바자르라 한다. 옷, 생활용품, 옥수수, 수세미, 감자, 당근, 과일, 오렌지 등 많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농산물이 정겨웠다. 이곳은 농산물이 싸다. 풍부한 농토라서 생산량이 많다. 근대화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리 동상 곁을 지나서 지중해 해변로로 갔다.
* 알렉산드리아 지중해변 야자수와 건물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많이 다닌 곳이 지중해변이다. 긴 해안선을 따라 잘 가꾸어 놓은 도로변에는 야자수가 장관이다. 또한 건물들이 대단히 웅장하다. 대부분이 주상복합 상가로 1층은 상가이고 2층부터는 아파트다. 유럽풍의 건물 양식으로 길게 붙어 있다. 건물도 사람도 모두 세련된 모습이다. 어찌 이곳을 아프리카라 할까.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로 들어오는 유럽의 관문이어서 그렇게 형성된 유럽풍의 도시다. 가도, 가도 이어지는 풍경이 비경이다.
*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폼페이 기둥을 보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가려 했는데 차가 너무 밀려서 이곳을 먼저 보기로 했다. 도서관과 순서 바꾼다. 지중해 해변로를 따라 간다. 곁에 보이는 지중해 바다의 고대 항구가 육지로 많이 밀려 왔다. 그래서 유적이 묻혔는데 꺼내서 보존하고 있다. 파로스 등대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에 세운 요새의 성채가 보인다. 다만 그 근처에 파로스 등대 모양과 가장 근접한 모양으로 지은 건물이 있다. 버스가 지나갈 때 보았다.
파로스의 등대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이다. 모든 등대의 원형이다.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지만 지금은 파괴되어 없다. 파로스 섬은 알렉산드리아에 면한 작은 섬으로 인공적인 1km의 제방으로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집트 해안선은 매우 단조로워서 항구를 찾는 것이 어려웠는데 이 파로스의 등대는 항해를 위해 건설된 것이다. 꼭대기에 횃불과 거울을 설치하여 밤에 불을 밝힌 것은 1세기 경 로마 시기부터다.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높이가 약 130m에 달했으며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맨 아랫부분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성채, 중간 부분은 팔각형, 맨 윗부분은 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맨 윗부분에서 빛이 나와 불을 밝혔다. 맨 꼭대기에는 신의 조각상이 있었다. 불빛이 나오는 부분에는 커다란 거울 같은 반사경이 있어 밤에 빛을 반사했으며 건물자체는 워낙에 커서 군대의 막사 역할도 했다. 이 등대의 불빛은 머나 먼 43Km 밖에서도 보일 만큼 밝았다고 한다. 등대의 반사경에 초점이 맞으면 50km 밖에 있는 배의 돛이 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등대 건물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지만 전쟁과 1303년, 1323년의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480년 이집트의 술탄 콰이트베이가 그 잔해로 콰이트베이 요새를 만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이름을 따서 콰이트베이 요새 또는 콰이트베이 성채라고 이름 지었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로 등대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바다 속의 잔해물들도 발견되었다. 그 당시의 기술로는 짓는 것이 불가능 하였고, 어떻게 매우 크고 밝은 불을 지폈는지, 어떻게 거울을 만들었는지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파로스 등대의 건축 형태는 후대의 건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파로스 등대 자리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가 많다. 사람들도 많다. 지도교사가 데리고 견학 나온 학생들로 붐빈다. 초등학생들로 보이는데 우리들과 사진 찍기를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사진 찍었다. 외국인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아주 밝고 명랑하다. 성채 앞에는 마차도 있고, 마부는 맘춰 서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다. 지중해 바다와 콰이트베이 성채와 함께 모두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알렉산드리아 피쉬마켓 중식
지중해변의 식당이다. 생선시장이라는 간판의 생선 전문 고급식당이다. 도미구이로 중식을 했다. 빵과 밥, 여러 가지 소스, 야채 등 풍성한 식단이다. 먹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바깥 풍경이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지중해 바다가 비경이다. 조금 전에 다녀온 고대 항구의 파로스 등대 유적지가 환히 보인다. 많은 배들과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 끝에는 알렉산드리아 시가지가 큰 품사위로 늘어서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해안 풍경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다른 창문에서 보니 파로스 등대의 가장 가까운 모형으로 지었다는 건물이 보인다. 등대 모양이 솟구쳐 있다. 항구의 성채도 보인다. 고기잡이 배들이 많이 떠 있다. 식당 내부도 소라, 물고기, 배, 등대 등 바다 풍경 장식으로 곱다.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DIVE HOUSE가 있기에 물었더니 이곳 바다는 전문 다이버만 다이빙이 가능하단다. 아직도 유물이 바다 속에 많단다. 거리는 마차가 지나간다. 그 도로에 자동차도 달린다. 곁에는 아파트가 있고 어떤 집에서는 밖으로 빨래를 널어 두었다. 모두 신기한 진풍경이다.
* 알렉산드리아 지중해 해변도로 풍경
건물들이 모두 유럽풍이다. 육중한 건물들이 높고 넓은 폭으로 줄지어 서 있다. 어느 유럽의 거리를 지나는 듯하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머리에 천을 두른 여자들이 많다. 검은 색 천을 두른 여인만 무슬림이다. 나머지는 멋으로 두른 것이다. 아무 것도 안 두른 여자는 기독교인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종교를 가름한다. 이곳 사람들은 워낙 더운 날씨라서 지금은 아주 춥게 느껴지는가 보다. 옷차림이 겨울 모습이다. 우리가 적응하기에는 알맞은 온도인데 말이다. 우리들 옷차림보다 두터운 편이다. 이곳 지중해변 도로는 자동차들이 많다. 버스가 차량 적체로 거의 기어서 간다. 오랜 시간 정차해 있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 공항으로 가는 중인데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긴 지중해 해변로를 지나자 길이 뚫려 큰 우려 없이 공항으로 질주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지중해 해변로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지붕 창문들 눈썹 모양으로 아주 독특하다. 수많은 눈썹들이 지붕에 붙어 있다. 도서관 앞의 둥근 건물은 3D 입체영상관이다. 지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도서관은 아주 넓은 폭으로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한다. 바로 길 건너에는 지중해 바다가 출렁인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들렀다. 알렉산드리아에 존재했던 중요한 건축물인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이후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대도서관의 장서는 그 당시 세계 최대 규모로 무려 50만 권이 넘었다. 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는 목록이 있었으며, 그리스 고전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보관되었다. 대도서관의 장서는 로마의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했을 때 소실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실제로는 391년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내린 이교도 금지령 때문에 기독교도들에 의해 불태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도들은 대도서관을 이교 지식의 보고로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고전 문학을 비롯한 인류의 귀중한 유산은 사라지고 말았다. 비록 불에 다 타버렸지만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념하고 그것에 필적한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2002년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서 개관했다. 지금은 지중해 해변가에 아주 멋진 도서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행기 시간 관계로 더 많이 머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 알렉산드리아 공항 가는 길
알렉산드리아 시가지를 벗어나자 들녘이 전개된다. 어젯밤에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올 때 밤중에 어렴풋이 보았던 호수가 있다. 사막 지천인 아프리카에서 호수를 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집트에서도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도시라서 비가 내려 물이 고인 것이다. 호수는 아주 드넓고 많다. 풀들이 자라고 있다. 유전공장지대도 지난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시가지에서 점점 멀어지고 버스는 공항으로 달려간다.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공항 출발
알렉산드리아 국제공항에서 카타르 도하행 비행기를 탄다. 저녁 6시 45분 카타르 도하행 QR511편 항공이다. 약 3시간 15분 소요된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공항 밖에 핸드카가 있어 가방을 싣고 편하게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1층에서 탑승수속을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로 2층으로 올라왔다. 공항 내부가 아주 깨끗하다. 이제 이집트를 떠난다. 참 많이도 보아온 꼬부라진 아랍 글씨도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쉽다. 먼 훗날 이런 정경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카타르 도하로 힘차게 날아간다. 우리 부부의 좌석은 창가다. 밤하늘을 날아서 간다.
*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인천행 환승
카타르 도하공항에 현지시각으로 밤 10시 30분 도착했다. 이곳은 이집트보다 1시간이 빨라서 밤 9시 30분인 시계를 1시간 앞으로 돌려놨다. 도하공항은 여전히 사람이 많다. 여러 번 왔던 공항이라서 낯익다. 창가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새벽 1시 50분 QR882편 카타르 항공으로 도하 국제공항을 출발했다. 여기서 인천공항까지는 약 8시간 40분 소요된다. 창밖은 캄캄한 밤이다. 앞 의자에 있는 비행기 모니터의 자막을 자동 항공로 탐색으로 설정해 놓고 잠을 청했다. 우리 부부 자리는 3, 3, 3제 좌석에서 중앙의 3좌석 중 통로와 가운데다. 곁에는 우리 여행을 이끌어준 남사장이 앉았다. 시차로 새벽에 주는 아침식사가 먹기에 좀 힘들지만 잘 먹었다. 점심까지 먹고 인천공항으로 간다. 카타르 항공은 좌석과 좌석 사이가 넓은 편이어서 좋다. 내릴 때쯤은 겨울옷으로 덧옷을 입어야 한다. 비행기 안도 아직은 포근하다. 긴 여행으로 피곤한 몸이지만 많은 것을 얻고 돌아가는 길이기에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이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인천공항 도착, 귀가
*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길
비행기는 오후 4시 30분, 정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카타르 항공은 아시아나와 제휴 항공사라서 아시아나 마일리지가 자동으로 적립되는 것이 아니어서 아시아나 창구에 가서 항공표를 보여주고 마일리지를 신청했다. 다른 때와 다른 것은 그것뿐이다. 남편이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두 아들과 두 며느리에게 무사히 인천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사랑스런 첫손자가 ‘할머니, 할머니...’ 한다. 자손들 음성도 듣고 참 행복한 순간이다. 한국은 추워서 두터운 옷을 껴입었다. 리무진 버스가 바로 들어와서 좋았다. 인천대교를 타고 집으로 간다. 내 조국의 풍경은 삭막한 겨울, 그래도 지금까지 보아온 사막보다는 풍요로운 들녘이다. 세계여행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참으로 축복 받은 땅이라는 점이다. 산과 들, 농토 등이 조화로운 화려한 금수강산이 아닌가. 시인의 길에서 열심히 살며 조국을 더욱 빛내리라는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