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역사 속의 기독교 이야기 -나바테 왕국과 헤롯왕 -예수의 탄생과 세례자 요한
예수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을까.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몇 년 몇 월에 태어났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했다는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예수의 이름이 등장하는 역사적 기록이나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네 복음서에 따르면 ‘유월절’ 행사를 위해 수천에서 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가 수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싶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이런 내용을 기록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과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여부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처럼 예수의 존재도 실증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모세와 관련해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이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이들이 생존한 역사적 배경은 충분히 입증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객관적 정황들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 역사적 연대가 보다 구체적이다. 비록 구전에 근거하지만 예수가 죽은 뒤 불과 50-70년 후로 생각되는 시기에 쓰인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존재는 더욱 현실적인 모습이 되어 우리 앞에 제시됐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네 복음서는 <신약성서>의 순서에 따라 ‘마테오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이다. 그러나 이 책들이 쓰인 역사적 순서는 마르코(70년대)가 가장 면저이고, 마태오(80년대), 루가(80-90년대), 요한(90년대)의 순으로 알려졌다.
이들 복음서가 쓰인 목적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예수전-마르코복음에서>를 인용하려고 한다. 그는 도쿄대학 총장을 역임한 인물로, ‘성서 강의’의 권위자였다. 야나이하라는 그의 저서에서 복음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마르코는 통칭. 본명은 요한(사도행전 12:12). 그는 예수의 직계 제자인 베드로의 형제이며 바울 밑에서도 일했다. 그는 이 두 사람을 만나기 이전까지 통역 겸 서기와 같은 일을 했다. 마르코복음은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말하고, 이를 마르코가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64년 베드로와 바을이 로마에서 순교했다. 66년 로마는 예루살렘을 침략했고, 결국 예루살렘은 70년 함락됐다.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두 지도자를 잃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강한 불안 속에 살았다. 이때 마르코는 한시라도 빨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였다. 마태오와 루가 두 복음서는 예수의 어록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자료, 이른바 Q문서 등을 인용해 마르코의 기록 중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보충했다. 이 때문에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복음’의 2분의 1분량밖에 되지 않고, 네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짧다. ‘루가복음’도 ‘마태오 복음’과 길이가 거의 같다. ‘요한복음’은 앞서 말한 세 가지 복음서(공관복음서라고 한다)와는 달리 보다 독자적인 시점에서 예수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아닌 ‘신의 아들 예수’로서의 존재가 강조되고 있다. 야나이하라의 말을 인용하면 ‘요한복음’은 “지상에 존재하는 역사적 인물에 그치지 않고 그를 초역사적, 우주적 존재로 그리고 있다.”
‘마르코 복음’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충실하고 소박하게 예수의 생애를 전하고 있다. 야나이하라는 네 목음서 중 ‘마르코복음’이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탄생은 물론, 예수의 유소년기에 대한 그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
예수의 탄생을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 뿐이다. ‘마태오 복음’은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고, 이를 안 요셉은 몰래 마리아와의 연을 끊으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된 아기가 성령의 힘이었음을 알렸고, 요셉은 마리아를 받아들였다. 이어 “예수께서 헤로데 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마태오 복음 2:1)라고 쓰여 있고, 동쪽에서 별을 본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분을 뵈러 왔다”고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불안해진 헤롯 왕은 몰래 박사들을 불러 베들레헴에서 그 아이를 찾으면 바로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박사들은 예루살렘에서 갓 태어난 예수를 뵙고 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안 헤롯은 분노해 베들레헴 주변의 2세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요셉은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마태오 복음서 2:13)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이른바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이다.
한편 ‘루가 복음’에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이야기가 똑같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에게 나타나 6개월 후 예수 탄생을 예고한다. 이어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영토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민등록을 명령했고, 시리아 주 총독인 구레뇨가 이를 실행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출신 마을로 여행을 떠났고, 요셉도 다윗가의 혈통이었으므로 “갈릴리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루카 복음 2:4). 그런데 마리아는 거기서 “달이 차서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 복음 2:6-7).
그 후 루가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대신해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오늘 다윗의 동네에 당신들을 위해 메시아가 나셨다. 이분이야말로 메시아시다”라고 크게 기뻐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찬송했다고 적혀 있다.
성서와 역사의 교차점에서
야나이하라가 가장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는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탄생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마태오 복음’이나 ‘루가 복음’의 기록을 어느정도 믿어야 할까.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도저히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산달을 앞둔 마리아가 남편 요셉과 함께 나사렛에서 170-180킬로미터나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일주일 이상 걸리는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이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또 갓난아기를 안고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구시가지에는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생활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4세기 말 낡은 콥트교의 교회가 세워졌다. 콥트교 신자들은 오늘날까지 성가저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를 믿고 있다. 베들레헴에서 카이로까지, 가령 지중해 연안의 바닷길을 통하더라도 네게브 사막과 이집트의 내륙 사막지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갓난아기가 견딜 수 있는 여행이 아니다.
게다가 2명의 복음서 작성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동박박사들이 빛나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했다는 것, 요셉이 베들레헴 출신이고 인구 조사를 위해 그곳에 돌아온 점, 또 목자들이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한 점 등 한결같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들이 베들레헴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베들레헴이 통일 유대 왕국 다윗의 출생지이며, 다윗의 뒤를 잇는 자야말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마태오 복음 2:6), 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미가 5:1)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태오나 루가는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라는 대목을 만들어 요셉이 다윗의 자손임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계도는 이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대목에서 무의미해졌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잉태한 아기 예수는 요셉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탄생의 이야기는 신비적인 전승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가 목수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난 곳이 나사렛이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시기는 헤롯 왕(기원전 37-4) 때로 보인다. 또한 로마의 시리아 총독인 구레뇨에 의해 처음으로 호구 조사가 새행된 해이며, 동쪽 하늘에 빛나는 별이 보인 해일 가능성이 있다. 이 점에 대해 부언하면 핼리혜성이 출현한 해이거나 물고기좌에 목성과 토성이 겹쳐진 해일 가능성이 있다. 전자의 경우 기원전 12년, 후자는 기원전 7년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구레뇨의 호구 조사가 시행된 것은 헤롯 왕의 아들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아르켈라우스(성서명 아켈라오)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폐위되고, 유대는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로 전략한 기원후 6년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요세프스라는 역사가가 “아르켈라우스의 여지는 시리아에 편입되어 집정관 대행인 구레뇨가 시리아인들의 재산을 조사하고 아르켈라우스의 저택 매각을 위해 파견됐다”(<유대고대지> 17:355)는 기록을 남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헤롯 왕 시절인 기원전 12-7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결국 예수의 탄생을 두고 기원을 나누는 서구력은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