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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개괄은 마무리 하자
조지 5세 시대에 1차 세계대전, 조지 6세 때 2차 세계대전, 우리가 아는 전부다.
또 시간이 될 때 역사의 지나온 자국 중에서 중간 중간을 푹 찌르고 그 편린들을 들어내서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했는지 유추해보는 것을 즐기자.
녹지가 많기로 유명한 런던의 대표적 공원 중 하나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
버킹엄 궁에서 이어지는 더 몰(the mall) 거리 옆에 있으며 13세기 이 자리에 설립된 한센병 환자들의 병원 이름에서 공원 이름을 따왔고 왕의 사냥터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차례 변동을 거쳐 찰스 2세 때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대중에게 공개
그냥 부럽기만 할 뿐이다
요크 공작 기념비,
조지 3세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 프레데릭 왕자를 기리는 기념비인데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큰아버지.
군 총사령관으로( 귀족이니 입대와 동시 대령으로 임명돼서 초고속으로 승진) 군의 훈련,내부체계, 병참, 모병 등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 워털루 전투의 숨은 공신이라는 평
오늘 오후 일정에서 중요한 네셔널 갤러리로 가는 도중에 수리중인 시설
겔러리 앞에 제임스 쿡 동상,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장사와 날품팔이로 성장, 그런 가운데 등산 등으로 모험심을 키웠으며 세 차레의 태평양 항해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흔히 켑틴 쿡이라는 이름 중 켑틴이 붙은 사람은 역사상 두 명 뿐인데 한 명은 프랑스 해양학자
걷고 또 걸어서 트라팔가 스퀘어(광장)에 도착했는데 호레이죠 넬슨 제독 동상이 있다.
1805년 스페인 트라팔가에서 붙은 해전.
나폴레옹과 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
1805년 10월 21일 영국해군과 프랑스, 스페인 연합합대가 벌인 전투로, 나폴레옹의 제3차 동맹 전쟁의 일부이다.
빅토리아호에 탑승한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27척의 영국 전열함은 피에르 빌레브가 이끄는 33척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멸,
전투는 트라팔가곳 바로 서쪽인 스페인 남서해안의 대서양에서 맞붙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22척의 전함을 잃었고, 영국 함대는 1척도 잃지 않았다.
이 승리를 통해 영국의 제해권이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이는 넬슨의 해상 전략이 유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해전 방식은 적 함대가 평행선을 이룬 상태에서 교전하는 것이었지만, 넬슨은 2줄로 함대를 배치한 후 적 함대를 향해 가파르게 돌진했다.
이 전투에서 넬슨은 프랑스 소총수에 저격되었고, 전투가 끝나기 직전 사망한다.
프랑스 빌뇌브 제독은 함선 부센트레와 함께 포로로 붙잡히는데,
스페인 함대의 고위 장교였던 페데리코 카를로스 그라비나는 연합함대의 잔여세력과 함께 도주했지만,
이 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5달 후 사망했다. 이 트라팔가르 해전은 살라미스 해전( 기원 전 48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도시국가 해전), 칼레해전( 1588년 영국을 길들이기 위한 스페인 침략전쟁), 한산도 해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과 더불어 세계 4대해전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넬슨 이 사람은 12살 때 해군에 입대, 평범한 선원, 키잡이로 시작하는데 그의 외삼촌이 그 배를 지휘,
나중에 해군사관생도로 장교가 되지만 평생을 배멀미에 시달렸다고 한다.
여기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도로를 건너서 도착하는 곳이 예약한 가이트 투어와 약속한 장소.
시각은 14시.
네셔널 겔러리,
영국 최초의 국립미술관으로 1824년 처음 전시를 시작했고 1838년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최초 전시물은 은행가 존 앵거스타인의 수집품. 물론 초창기에는 영국 화가들 작품이 많았지만 그래갖고는 프랑스 루부르와는 비교가 안된다
유럽 여러나라의 작품을 고루 갖추고 특히 영국 대표 화가 윌리엄 터너가 남긴 1,000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
현대 미술은 주로 데이트 겔러리에서 만날 수 있고
이 곳은 13세기 중세 작품 부터 르레상스를 넘어 20세기 초반 까지의 작품.
고흐, 마네, 모네,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이 많다
소장 작품을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특별행사로 인해 위치가 더러 바뀌기도 하지만 누가 홈페이지 들어가 일일이 확인 하나
그냥 보면 운좋고 아니면 그것으로 만족.
겔러리 앞쪽으로 건너와서 또 찍어보고
버스킹 하는 청년들은 언제나 상그럽다
이제 작품 소개를 작품 아래에서 하자
마사초(1401-1428), 성모와 아기예수, 1426년
virgin과 child는 고전적 기둥이 있는 돌 왕좌에 앉아 있고, 두 천사가 양쪽에 무릎을 끓고 있네요
다른 두 천사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아이는 포도를 먹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림자와 선형 원근법은 자연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드러낸다
사물들의 형태의 견고함에 대한 영향은 강력하다 .
이 마사초라는 사람, 미술사에 중요한 사람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1401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늙은 약방 주인과 재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의 마사초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문서상의 기록으로 1422년 마사초는 당시 피렌체 화풍을 이끄는 메디치 화가조합(Medici e speziali)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술에 대한 정열이 지나쳐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저분한 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무튼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초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마사초의 프레스코, 특히 산타마리아 델카르티네 성당의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마사초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조토의 작품을 모사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를 사귀게 되어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된다.
1423년에는 그들의 격려로 로마로 시간여행을 가서 고대 로마, 그리스 작품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화려한 장식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게 된다.
한스 홀바인( 1497-1543년) 신성로마제국의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 최고의 화가가 그린 대사들이다.
화가였든 아버지로 부터 좋은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나중에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특히 초상화에 능해서 신정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동등하게 그려진 종교적 기품의 그림
이 그림에 숨은 많은 이야기.
그 시절, 영국 런던에서 한스 홀바인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는 없었습니다.
1533년, 홀바인은 당시 런던에 있던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의 주문을 받는데,
댕트빌은 그의 친구인 라보르(Lavaur)의 주교 조르주 드 셀브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요. 그렇게 해 나온 그림이 홀바인의 가장 유명한 작품, '대사들'입니다.
홀바인이 이 그림을 그릴 때 영국에서 로마가톨릭의 권위는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영국마저 왜 그런 분위기인지를 알아보시오. 영국이 '믿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면 이를 막아야 할 것이오." 댕트빌은 독실한 로마가톨릭 신자였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로 부터 이러한 명을 받고 온 상태였습니다. 셀브 또한 같은 임무를 맡고 있었다.
홀바인은 29살의 댕트빌(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에 29라고 적혀 있다), 25살(팔굼치 아래의 책에 25의 숫자를 보여준다)의 셀브를 야심에 가득찬 청년 지성인으로 그려준다
값비싼 모피코트를 걸친 댕트빌에게선 자신감이 뚝뚝 흐릅니다. 오른쪽에 선 셀브도 왕의 명령에 대한 계획이 다 있다는 양 차분한 모습으로 서 있긴 한데,
현실은 헨리8세의 고집은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영국 교회를 교황으로 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이 그 지배자임을 선언해 버리는 수장령이 1534년이니까
성공회가 그 수장령의 모습으로 나온다
그런데, 홀바인은 여기에서 붓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홀바인은 그의 마법이 이제 시작이라는 양 계속 그리고 칠한다.
그 결과,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은 2단 탁자에는 온갖 소품이 깔려 있다.
당시 어수선한 영국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던 홀바인이 이를 여러 사물로 표현한 것.
이 그림은 언뜻 보면 그저 돈 많은 두 청년의 초상화 같아보이는데,
알고 보면 그때의 영국, 나아가 그 시절 유럽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까지 담은 사회의 초상화였다.
지식과 실력을 모두 갖춘 홀바인만이 할 수 있는 '큰 그림'이었다.
가령 천구의와 해시계는 과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연상,
당시 천동설의 시대를 흔든 새로운 발견이었고,
당장의 영국에선 신교(新敎)가 힘을 얻고 있는 상황.
신교 또한 그간 이어졌던 구교의 시대를 뿌리째 흔드는 새로운 발견과 같은 역할.
지동설이 처음 나왔던 과거의 그 순간만큼 지금의 세상 또한 혼란스럽다는 걸 보여준 것이었고,
탁자 밑 부분에는 줄이 끊어진 류트가 있는데, 이는 구교와 신교의 불화를 암시하는 장치로 본다.
류트 옆에 놓인 찬송가 책은 양측의 조화와 화해를 바란다는 의미.
화면 한가운데에는 뒤틀린 해골이 그려져 있기도 하는데 이 또한 홀바인이 담은 '숨은' 알레고리.
특정 각도로만 볼 수 있는 이 해골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는 말을 전한다. 그림을 먼저 받아볼 두 청년에게는 겸손의 중요성을, 이어 그림을 볼 수도 있을 구교와 신교 사람들에게는 그런 갈등들 따위는 아무 의미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단도의 칼집 부분에 29살을 의미하는 숫자가 보인다
얀 반 에이크( 15세기 북유럽 화가 중 가장 중요한 화가. 폴랑드르 지방 출신)
유화 기법을 창시한 이 그림은 이탈리아 상인이자 거부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을 그린 전신 초상화로 15세기 유럽인들의 결혼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ㅣ곳곳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신부는 이탈리아 유명 은행가의 손녀로 60대의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정략결혼 중이다.
비싼 옷을 입고 서약을 하고 있지만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당시는 중요한 서약을 할 때 맨발로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벗어 놓은 신발도 가지런하지 않다.
충성심을 상징하는 개, 천장의 혼례의 촛불, 비싼 과일이었든 오랜지, 스테인드글라스 창 밖으로는 체리 나무도 보인다.
뒤쪽 벽에는 순수와 순결을 상징하는 묵주가 걸려 있다.
바로 옆 예수의 고난 장면의 틀이 있는 볼록 거울을 보면 두 사람 말고도 사람들이 더 있다 그들 중 하나가 얀 반 에이크다.
암굴의 성모(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암굴의 성모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도 있는데, 두 그림은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조금 다르기 때문에 비교해 보면 더 흥미롭다.
루브르 것은 두 아기 중 누가 요한이고 예수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천사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반면 이 그림은 두 아기 모두 머리에 빛의 원반이 있고 그중 왼편이 요한임이 드러나 있다.
낡은 거적을 입고 다녔든 요한을 상징하듯 가슴께에 거적을 두르고 갈대 십자가를 진것이 보인다.
천사의 손가락도 사라졌다.
오른쪽 아기예수는 무엇인가 전달하려는 듯 손가락을 펴 아기 요한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동굴은 어머니의 품으로 비유되곤 하는데 어두운 동굴을 배경으로 네 인물이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으로 부드럽고 신비로운 표현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 미완성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이라는 주제는 많은 화가들이 다루었다.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스리스도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뒤 바위굴에 무덤을 파 안장한다는 내용.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으로 오른쪽 하단이 비어 있는 그림으로 성모 마리아를 그릴 자리하고 하는데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
이유는 울트라 마린이라는 안료를 구하지 못해서이다고 한다.
이 군청색 안료는 값이 비싸다 .
비록 완성은 못했지만 자신의 조각 작품에 근육을 잘 표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이 그림에서도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 있고 그리스도의 시신을 똑바로 세워 그렸다는 점이 다른 작품과 다르다
미켈란젤로 브뤼허 성모
1504년경 대리석 브뤼허 노트르담 성당
아기 예수가 왼쪽 다리로 몸무게를 지탱하면서 성모의 옷자락을 발로 누르는 바람에 주름져 흘러내린 옷자락이 팽팽해졌다.
성모는 책을 읽다가 아기가 와서 몸을 의지하는 바람에 잠시 독서를 중단하고 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책을 누르고 있다
여섯살에 어머니를 여윈 미켈란젤로가 어렴풋이 더듬은 어머니의 모습과 그 살냄새를 연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근대 화가의 아버지 티치아노( titian) 베네치오
이탈리아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그녀의 연인 테세우스에 의해 낙소스 섬에 버려졌고, 테세우스의 배는 지평선 너머로 출발해버린다
그녀는 술의 신 바쿠스가 향연자들의 선두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가 무의식적으로ㅓ 그녀를 향해 도약하는 동안 눈이 마주친다
자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떠거운 여름 오후를 연상시키는 시키면서 윤기나는 치타 부터 전경의 꽃까지 모든 것을 정확히 묘사한 작품